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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20:52:28

고구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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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우용곡 재현 고구려무.jpg
역사만화가 우용곡이 재현한 고구려무 출처
2009년 조선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공연 속 고구려무

1. 개요

조선시대 후기 순조 때 효명세자의 명으로 제작한 향악정재 무용들 중 하나로, 고구려와 관련한 시를 무용과 창사로 표현한 것이다. 해당 무용이 단절되어 전해지지 않았으나 2009년 조선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재현공연에서 다시 선보이게 되었다.

2. 상세

고구려라는 이름 때문에 오해할 수 있지만 '고구려무'는 고구려 당시의 춤이 아니라 고구려와 관련한 옛 시[1]를 조선 후기에 창사로 부르면서 옛날을 회상하는 무용이다. 현재 이 무용을 누가 어떻게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는 불명이지만, 조선 후기 순조 때 효명세자로 인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해당 무용의 배경이 되는 창사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ruby(金花折風帽, ruby=금 화 절 풍 모)] 금화 절풍모 쓰고
[ruby(白馬小遲回, ruby=백 마 소 지 회)] 백마로 더디 도네
[ruby(翩翩舞廣袖, ruby=편 편 무 광 수)] 번득이는 넓은 소매
[ruby(似鳥海東來, ruby=사 조 해 동 래)] 해동에 새가 온 듯하네
이 시는 순조 진작의궤(進爵儀軌)에 의하면 수나라 양제가 지은 것, 또는 당나라 시인 이백이 고구려 사람들의 춤을 보고 지은 작품이라고도 전해지는데, 고구려와 관련한 시인 것은 틀림없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넓은 소매와 절풍모를 언급하였기 때문에 그 가치 또한 매우 높게 볼 수 있다.

'고구려무'는 6명이 한 구성원이 되어서 추었던 무용이다. 조선 고종 연간에 작성된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라는 예술서에 적힌 '고구려무' 부분에서 보자면, 이 무용에서 춤추며 상대하는 절차는 조선시대 또다른 무용이었던 '엽무'와 동일하다고 적혀 있었다. 여기에 적힌 곡들 중 하나인 '엽무'의 경우 과거에 기록된 '첨수무(尖袖舞)'의 속칭이라고 한다. 이는 조선후기 문화적 르네상스를 열었던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쳐져 부르게 지시한 것이다.

또한 효명세자가 만들었다고 추정되던 곡 치고는 무용이 상당히 신기한데, 그 이유는 무동과 여기가 칼을 들지 않고 오로지 맨손으로 추는 춤이기 때문이다. 이 무용의 주 반주로 쓰이는 음악은 '향당교주'로, 이 곡은 다른 무용에서도 자주 쓰이던 곡이다. 순조무자진작의궤에 의하면, 고구려무를 출때 무동의 복식은 아래와 같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외에도 이 무용이 실려 있는 무보로는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궁중정재무도홀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동은 금화첨립을 쓰고서 회색괘자와 남천익에 홍광대를 띠고, 오혜를 신는다. 여기는 화관을 쓰고, 초록단의와 황초단삼을 입고, 속에는 남색상, 겉에는 홍초상에 홍단금루수대를 띠고, 오채한삼을 매고, 초록혜를 신는다.
순조무자진작의궤

[1] 이 시를 언제, 누가 지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