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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
<colbgcolor=#bf1400> 경희궁 경선당 慶熙宮 慶善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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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2길 | |
건축시기 | 1620년 추정 (창건) / 1865년 ~ 1868년 (철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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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에서 묘사한 경선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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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희궁의 건물로, 왕세자가 머무는 처소이다. 쉽게 말해 왕세자의 집.위치는 경희궁 영역의 동북쪽이었다. 지금의 경희궁 2길 주변 언저리이다. 《서궐도안》에 따르면 집희당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나 《궁궐지》에서는 집희당 남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2. 역사
첫 건립시기는 정확히 모르나, 1620년( 광해군 12년)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 같이 지은 듯 하다. 1698년( 숙종 24년) 원래 경희궁 동궁의 처소였던 승휘전이 불 타 사라진 후부터 집희당과 함께 세자의 정식 거소가 되었다.동궁의 건물이지만 임금이 다른 용도로 활용한 경우도 많았다. 숙종은 즉위 직후 이 곳에서 3년 상을 치르면서 공부하고 신하들을 만나 나랏일을 보았다. # 그리고 특이하게 어린 영조가 연잉군 시절, 그러니까 세자가 아닌 일반 왕자였음에도 1712년(숙종 38년)에 출궁하기 전까지 머물렀다. 1717년(숙종 43년)에 사망한 세자빈 심씨(단의왕후)의 혼궁[1]을 여기에 설치했다.
영조는 여러 대신들과 약방 제조들을 여기서 만나면서 만 1세의 사도세자를 데려와 보였고, 세자가 만 6세가 되었을 때는 내의원 에 명해서 세자를 진료하게 했다. #. 순조는 기우제를 지낸 후 이 곳에서 하루 묵었었다. #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경희궁 내전 일곽에 화재가 일어났으나 경선당은 거리가 있어 무사했다.
헌종 연간에는 온돌을 수리했다. 보수 공사 도중에 온돌을 깔고 바닥을 말리다가 불 기운이 연통을 통해 올라가 처마 끝 단과 풍판에까지 미쳤다. 다행히 즉각 불을 꺼서 큰 피해는 없었다. #
이후의 경선당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2]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들의 90%를 헐어다 경복궁 중건의 자재로 쓸 때, 철거되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 중건일기》
《경복궁 중건일기》
3. 구조
- 〈서궐도안〉에 따르면, 동향을 하고 있다. 정면 6칸, 측면 1칸의 총 6칸으로,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좌, 우에 온돌방을 놓았다. 가장자리 칸은 규모가 작은데 쪽방인지 툇간인지 확실하지 않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로 쌓았으며 치미를 올렸다. 그리고 건물 양 쪽과 앞, 뒤로 행각이 붙어있으며 서로 연결되어있다. 전체적으로 집희당과 구조가 비슷하다.
4. 여담
- 어린 시절, 이 곳에 살면서 부 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영조는 경선당에 대한 마음이 애틋했던 듯 하다. 그래서 경선당에 대한 시를 몇 편 지어 부모를 추억했고, ‘추모당(追慕堂)’이란 직접 쓴 현판을 걸었다. 그래서 영조 시기, 또는 그 이후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서궐도안〉에서는 ‘추모당’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