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2-01-26 15:46:36

경희궁 경현당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
무덕문
계상당 춘화각 영취정
서암 덕유당 상휘당 광명전 어조당 용비루 장락전 봉상루
영렬천 자정전 집경당 회상전 융복전 융무당 집희당 경선당
위선당 태령전 자정문 영선당 사현합
태령문 향실 숭정전 정시합 흥정당 청한정 지효합 상의원
내삼청 숭양문
숭정문 승휘전 흥원문
직조청 내각( 규장각) 예문관 서방색 궁방 사옹원 사은원 양덕당
일영대 금루 호위청 선부관청 경현당
기상청
국립기상박물관
무겸청 연화문 광달문 화경문 경헌문 승화문
숭의문 서울특별시교육청 금상문 서울역사박물관 건명문 금천교 흥화문
남소 옥당( 홍문관) 약방( 내의원) 약원 도감군사대직청 빈청 전설사
오위도총부 정원( 승정원) 덕응방 내구 마구
개양문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북궐
(경복궁)
경복궁 계조당
景福宮 繼照堂
경복궁 자선당
景福宮 資善堂
경복궁 비현각
景福宮 丕顯閣

동궐
(창덕궁 · 창경궁)
창덕궁 중희당
昌德宮 重凞堂
창덕궁 성정각
昌德宮 誠正閣
창덕궁 관물헌
昌德宮 觀物軒
창경궁 저승전
昌慶宮 儲承殿
창경궁 낙선당
昌慶宮 樂善堂
창경궁 시민당
昌慶宮 時敏堂

서궐
(경희궁)
경희궁 승휘전
慶熙宮 承輝殿
경희궁 경현당
慶熙宮 景賢堂
경희궁 양덕당
慶熙宮 養德堂
경희궁 집희당
慶熙宮 緝熙堂
경희궁 경선당
慶熙宮 慶善堂
정문 · 중문 · 금천교 · 정전 정문 · 정전 · 편전 정문 · 편전 · 내정전 · 동궁 · 선원전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colbgcolor=#bf1400> 경희궁 경현당
慶熙宮 景賢堂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 신문로2가)
건축시기 1620년 (창건) / 1865년 ~ 1868년 (철훼)
파일:경희궁 경현당 CG.png
<colbgcolor=#bf1400> CG로 재현한 경현당
1. 개요2. 역사3. 구조

[clearfix]

1. 개요

경희궁 동궁으로, 왕세자가 공식 의례를 행하고 공부하던 정당(正堂)이었다.

위치 경희궁 중문 건명문의 바로 서북쪽에 있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으며 그 자리에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있다.

2. 역사

1620년( 광해군 12년)에 경희궁 창건 때 건립했다. 경희궁을 지은 광해군의 세자 이지는 정작 사용해보지도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쫓겨났고, 인조 큰 아들 소현세자가 1625년(인조 3년) 이 곳에서 처음 관례 # 회강례[1]를 행하면서 # 처음 사용했다.

전반적으로는 왕세자 신하들을 만나고 공부하는 장소로 쓰였으나 이 외에도 다양하게 활용했다. 숙종 시기에 세자였던 경종이, 영조 세손이었던 정조 대리청정할 때, 공식적인 정치 공간으로 사용했고, 숙종과 영조가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는 축하연도 두 번 다 이 곳에서 행했다.[2]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가 죽은 뒤 그 신주를 모시기도 했으며 # 한학 문신들의 시험 장소로도 활용했다. #

이후 헌종 때까지 활발하게 활용하다가 철종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할 때, 경희궁 건물들 헐어다 자재로 쓰면서 헐렸고 이 일대는 경작지가 되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 중건일기》

3. 구조

파일:서궐도 경현당.png }}} ||
<colbgcolor=#bf1400>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에서 묘사한 경현당 일대. 가운데 건물이 경현당이고
그 윗 쪽의 건물이 양덕당이며 오른쪽 맨 아래 팔작지붕 건물이 건명문이다.
〈서궐도안(西闕圖案)〉에 따르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총 9칸짜리 남향을 한 건물이다. 처마는 겹처마에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한 뒤 그 위에 취두와 용두, 그리고 잡상 5개를 얹었다. 기둥은 네모나게 깎아 세웠다. 정면 기준 가운데 칸은 양 옆의 칸보다 조금 더 넓으며 가운데 칸의 툇마루를 밖으로 나오게 하여 출입할 수 있게 했다. 건물 전면에 계단을 3개 놓았으며, 남쪽 마당엔 사각형 모양의 연못을 팠다.
파일:기사경회첩 경현당.jpg }}} ||<width=580>
파일:경현당어제어필화재첩.png
||
<colbgcolor=#bf1400> 《기사경회첩》에 실린 〈경현당선온도〉 <colbgcolor=#bf1400> 《경현당어제어필화재첩》
숙종 기록한 《경현당조굴소기(景賢堂竈窟小記)》에 따르면, 위의 〈경현당선온도〉처럼 초기에는 서쪽에만 온돌이 있고 나머지 칸은 전부 마루였으나 숙종 대에 고쳐서 가운데만 마루로 두고 동쪽 방을 서쪽 방처럼 온돌로 바꿔서 좌, 우 대칭을 이루게 했다. #

[1] 일종의 논술 시험이다. [2] 기로소는 나이가 든 대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로, 왕도 나이가 들면 들어갔는데 대신들은 70세 이상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었지만 왕은 나이 제한이 없었다. 태조(60세), 숙종(59세), 영조(51세), 고종(51세)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