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 라틴어: Gaius Iulius Caesar Strabo Vopisc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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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7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조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버지) 포필리아(어머니)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형제)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이부 형제) 율리아(딸) |
직업 | 로마 공화정 조영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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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조영관. 기원전 8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한 뒤 피살당한 로마 정치인 중 한 명이다.2. 생애
그의 이름에는 스트라보(Strabo)와 보피스쿠스(Vopiscus)라는 두 개의 별명이 포함되었다. 스트라보는 ' 사시'를 의미한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보피스쿠스는 쌍둥이 중 하나가 죽은 채로 태어날 경우 다른 아이에게 부여되는 별명이라고 한다. 그가 속한 율리우스 가문은 고대 로마의 모체인 알바 롱가에서 시작된 파트리키 씨족이다. 이 가문의 일원들은 자신들을 비너스의 후예로 자처했으며, 로마 공화국 초기 집정관 등 고위 행정직을 잇따라 역임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부터 다른 가문들과의 경쟁에서 밀렸고, 나중에는 역사에 거의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쇠락했다. 그의 삼촌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123년에 법무관을 역임한 것이 율리우스 가문이 기원전 2세기에 거둔 유일한 성과였다.조부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57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한때 동전을 주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루키우스는 포필리아라는 여인과 결혼해 두 아들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를 낳았다. 포필리아는 그 전에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결혼하여 기원전 102년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함께 킴브리 전쟁을 승리로 이끈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를 낳았다.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육촌으로, 율리우스 씨족의 다른 지파에 속했다.
기원전 2세기 말 율리우스 가문과 연을 맺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크게 성공한 뒤 지원해준 덕분에, 가이우스는 정치 경력을 순탄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기원전 103년, 그는 사르데냐 총독 티투스 알부티우스를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해 유죄 판결을 얻어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미래의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때 가이우스가 재판에서 밝힌 연설문을 기원전 81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규탄하는 연설에 고스란히 써먹었다고 한다.
기원전 103년 또는 기원전 100년 사촌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농지법에 따라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이후 마리우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 최종권고를 선고받은 사투르니누스와의 동맹을 끊고 그를 토벌하고자 무리를 모았을 때, 그는 마리우스 편에 서서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공격했다. 이후 수년간 마리우스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그와 루키우스를 포함한 율리우스 씨족은 마리우스와의 동맹을 끊었다.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가이우스가 대대장으로서 두 번 복무했으며 사제단의 일원이었다고 밝혔지만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이 되지 않아서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후 기원전 96년 재무관에 선출되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이 기간 동안 로마에서 가장 많이 찾는 변호사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키케로는 그가 "쾌활하고 미묘한 재치에 있어 모든 이전 시대 웅변가와 동시대 웅변가들을 능가했다"며, 그의 웅변의 힘은 약했지만 유머 감각이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밝혔다. 그는 상대 외모의 단점이나 어리석은 행동을 지목해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키케로의 저서 <웅변가에 대하여>에서는 다음 사례가 전해진다.
그는 헬비우스 만티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겠소!" 그는 킴브리인의 방패에 그려진 쓸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직후 (군중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거기에 새겨진 쓸개와 만티우스와의 유사성은 전례가 없었다. 또한 그는 말할 때 턱을 비트는 버릇이 있던 티투스 피나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하기로 결정했다면, 먼저 호두를 깨시오!"
또한 키케로는 그가 웅변 도중 좌우로 팔을 휘젓는 버릇이 있던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에게 "어떤 노 젓는 사람이 거기서 말하고 있소?"라고 공개적으로 물어봐서 쿠리오를 난처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한편, 키케로는 가이우스가 "부드럽지만 무력한 스타일"을 갖춘 여러 편의 비극을 집필했다고 설명했다. 고대 사료에서는 그가 "테브란트(Tevtrant)", "아드라스토스(Ἄδραστος)", "테크메사(έκμησσα)" 등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이들을 다룬 연극을 집필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으며, 오직 3개의 짧은 발췌문만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전해진다.
기원전 91년, 호민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사법부에서 원로원 계급이 에퀴테스를 대체하여 판결을 주도하는 사법 개혁, 원로원의 통제하에 농지를 대규모로 분할하는 농지 개혁,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드루수스를 지지했지만, 개혁은 당해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법무관 카이피오,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이 자기들과 같은 시민권을 누리는 걸 원하지 않은 로마 시민들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쳤고, 드루수스는 개혁을 밀어붙이던 중 암살당했다. 이로 인해 개혁이 중단되자, 격분한 이탈리아인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면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호민관 퀸투스 바리우스 세베루스 히브리다가 동맹시들이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꾀하도록 부추긴 혐의로 드루수스의 지지자들을 고발하면서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지만, 그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기원전 90년 수석 조영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조영관으로서 거의 매일 공개 토론회에 참석해 연설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기원전 89년,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비티니아 왕국과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순식간에 소아시아 전역을 석권하고 발칸 반도로 진출해 고대 아테네 등 여러 도시 국가의 호응을 얻었으며,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8만 명을 학살했다. 이에 원로원은 미트리다테스 6세를 응징할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했고, 야심가들은 동방으로 출진해 막대한 군공과 전리품을 획득할 기회가 주어질 집정관이 되고 싶어했다.
이때 가이우스는 집정관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관직으로 인식되는 법무관을 맡지 못했지만 집정관 선거 출마를 강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형제이자 기원전 90년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동맹시 전쟁 진압에 한 몫 했던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부 형제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 손꼽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가 그를 지원했다. 그러나 두 호민관 푸블리우스 안티스티우스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반대했다. 그들은 법무관 직을 거치지 않고 집정관에 오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가이우스와 를 따르는 무리와 술피키우스와 안티스투스를 따르는 무리간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 후 가이우스는 선거에서 패배했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기원전 88년,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호민관 술피키우스의 지원에 힘입어 술라로부터 동방으로 원정갈 군대의 지휘권을 빼앗았다. 술라는 전령으로부터 지휘권이 마리우스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그는 병사들을 선동하여 자기 편으로 삼은 뒤, 마리우스가 인수인계를 하려고 보낸 장교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급히 검투사와 해방노예를 동원해 에스퀼린 포룸에서 맞섰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다. 술라는 로마에 입성한 뒤 마리우스, 술피키우스를 비롯한 12명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숨겨주는 자들 역시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령을 반포했다. 그와 루키우스 형제는 술라 편을 들었고, 술라에게 축출된 마리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기원전 87년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6세를 상대하러 동방에 출진한 뒤 마리우스가 돌아와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등 반 술라 세력을 규합해 로마로 진격했다. 현직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등 술라파가 이에 맞서 항전했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고, 마리우스는 그 해 12월 로마에 입성한 뒤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원로원 의원들에 대한 대숙청을 단행했다. 이때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형제 역시 숙청 대상에 지명되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가이우스는 이전에 자신이 변호해 준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았던 섹스틸리우스라는 인물과 함께 에트루리아의 타르퀴니아 시로 피신했다. 그러나 섹스틸리우스는 나중에 마음을 바꿔 마리우스에게 가이우스의 위치를 전했다. 가이우스는 곧 체포되된 뒤 그에게 고발당해 망명하던 중 사망한 전직 호민관 퀸투스 바리우스 세베루스 히브리다의 무덤으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그의 수급은 포로 로마노 연단에 전시되어 있던 형제 루키우스와 웅변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의 머리 옆에 놓였다.
그의 딸 율리아는 기원전 54년 법무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또는 기원전 47년 법무관이자 기원전 42년 감찰관인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결혼해 딸 술피키아를 낳았다.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대숙청을 단행했다. 이때 사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켈리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지배하던 시칠리아에 망명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율리아는 딸 술피키아를 노예로 변장시킨 뒤 경비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시칠리아로 가서 남편과 합류하게 했다. 그 후 추격자들로부터 사위와 딸이 어디 도망갔는지 밝히라는 압박에 시달렸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