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스타 라인의 올림픽급 여객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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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올림픽 | RMS 타이타닉 | HMHS 브리타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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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OLYMPIC |
1. 개요
RMS[1] 혹은 SS[2] Olympic화이트스타 사의 올림픽급 여객선의 첫째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최후의 여객선이기도 하다. 건조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고[3] 당시의 강력한 경쟁사였던 큐나드 라인의 RMS 루시타니아와 RMS 모리타니아, RMS 아키타니아와 경쟁했던 여객선이며 RMS 타이타닉의 자매선으로도 유명하다.
해체되어 고철로 돌아간 지 87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U보트를 침몰시킨 여객선이라는 전무후무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선박이다.
2. 제원
선적:
영국 모항: 리버풀(Liverpool) 선급: 올림픽급 여객선(Olympic class) 소유주: 화이트 스타 해운(White Star Line) |
선박 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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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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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중인 올림픽(우)과 타이타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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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항해를 마치고 뉴욕에 도착한 직후 촬영된 사진[10] |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블루리본[12]으로 불렸던 북대서양 여객선들의 속도 경쟁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느긋하고 쾌적한 여행에 중점을 두는 회사였다. 하지만 올림픽 호는 속도부터 설비의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에 중점을 두어 설계되고 있었다. 안전에도 신경을 써 설계에 방수구획을 도입하였다. 선체는 방수 격벽에 의해 16개의 구획으로 구분되었고 그 중의 2구획(선수의 경우 4구획)이 침수해도 침몰에 이르지 않는 구조였다. 게다가 격벽은 제어실의 원격 조작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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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 이후의 올림픽(좌)과 타이타닉(우) |
올림픽 호와 그 자매선들이 최초로 배 안에 수영장을 설치해 놓은 여객선들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최초로 배 안에 수영장을 설치해 놓은 여객선은 1906년에 건조된 아드리아틱호이다.
3.1. 구조 변경
타이타닉 침몰로부터 약 6개월 후 화이트 스타 사는 타이타닉에서의 교훈을 받아들여 올림픽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개장을 진행했다. 먼저 부족했던 구명정을 증설시키기 위해 크레인을 보트 데크에 추가로 설치하여 기존의 20척밖에 안 되던 구명정을 68척으로 3배 이상 증설해 구명정 자리가 승선원을 다 태우고도 남도록 여유있게 탑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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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 침몰 사고가 일어나기 전인 1911년에 찍힌 올림픽 |
타이타닉 침몰 이후의 올림픽[13] |
B데크에 케빈과 카페를 추가해서 수용할 수 있는 승객수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부분들은 결과적으로 올림픽 호가 타이타닉의 톤수보다 31톤 더 큰 톤수를 가지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3.2. 층별 구조
총 1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RMS 타이타닉의 해당항목 참조 바람. 다만 일부구간은 다르다. 대표적으로 올림픽 호의 A데크에는 긴 산책로가 있지만 타이타닉은 일부 구간에 1등석을 추가하고 산책로의 창을 달았다.[14]4. 출항과 항해
올림픽 호는 다른 두 자매선과 달리 침몰하지 않고 제수명을 살다 간 배이다. 실제로 3번의 침몰 위험이 있었음에도 침몰하지 않고 항해한 것을 보면 진정한 불침선.올림픽의 첫 항해는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당시 순직한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이 맡았다.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징발된 올림픽은 기존 여객선 시절의 내부 부속품을 철거하고 12파운더 함포과 4.7인치 덱 건을 장비하며 약 6천명의 장병을 수송 가능한 병력 수송선으로 탈바꿈하였다.
이 개장 이후 HMT(Hired Military Transport, 징발된 군용 수송선) 번호 2810으로 재분류되어 갈리폴리 전투를 위해 리버풀 항에서 그리스 무드로스까지 6천명의 장병을 수송해냈다. 올림픽은 본래 대서양 횡단을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많은 석탄 저장량을 갖추고 있었고, 속도 또한 중시했다. 덕분에 긴 항속 거리와 유보트의 공격을 피해낼 만한 속도를 갖췄고, 이는 병력 수송선 시절 올림픽의 주요한 장점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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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수송선으로 개조된 HMS 올림픽함 |
화이트스타 라인이 큐나드라인에 합병된 후에 큐나드라인 소속으로 항해를 이어갔다.[16] 그러나 대공황 이후 해운사업이 악화되었고 당습 기준으로 올림픽 호에 장착된 왕복엔진도 구식의 엔진이 되어갔다.
마지막 항해 이후 올림픽 호는 평생의 경쟁자였던 RMS 모리타니아와 함께 스크랩된다. 유튜브 또는 관련 SNS 그룹에서 몇몇 유저들은 관련 영상들에서 저 2척이 스크랩되지 말았어야 했다고 댓글을 달기도 한다.
5. 사건 사고
5.1. HMS 호크와의 충돌
HMS 호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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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 손상된 모습 |
이때 올림픽 호에서 구조된 사람 중 한 명이 그 유명한 바이올렛 제솝[17]이다. 사고 당시 선장은 타이타닉과 함께 순직한 에드워드 스미스였으나 조사 결과 사고의 원인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으로 결론나서 그의 이력에 아무 타격도 주지 않았다.
HMS 호크는 운없게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 해군의 U보트 U-9에게 뇌격당해 격침당한다.
5.2.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당시
1912년 4월 15일 새벽, 미국에서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던 중 당시 첫 항해 중이었던 자매선인 타이타닉으로부터 구조 요청을 받게 된다. 올림픽은 당시 812km나 떨어져 있었지만 전속력으로 타이타닉을 향해 항해하기 시작했다.오전 4시경 올림픽은 RMS 카르파티아로부터 타이타닉은 오전 2시 20분경에 침몰하였으며 모든 생존자를 구조했고 현재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받게된다. 올림픽은 그래도 침몰한 지점에 가 보겠다고 했지만 타이타닉에서 생존한 후 카르파티아에 탑승한 화이트 스타의 회장 브루스 이스메이가 예정된 항해를 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올림픽 호 측에서 타이타닉의 생존자를 인계 받겠다고 제안했으나 카르파티아의 선장은 이미 모든 생존자를 구조했으므로 이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무엇보다 올림픽 호는 타이타닉과 동급의 함선이어서 자칫 생존자들에게 또다시 정신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여겨 이스메이 회장의 동의 하에 거절했다.
당시 올림픽은 많은 파티가 예정돼 있었지만 애도와 존경의 의미로 모두 취소하였다. 이후 4월 21일 영국에 도착하였다.
5.3. U보트 격침
1918년 5월 12일 새벽 미합중국 육군 장병들을 프랑스로 수송하던 올림픽[18]은 500m 앞에 위치한 독일 제국 해군의 잠수함, U-103을 발견했다. 올림픽에 증설된 함포와 동승한 해군 운용 인원들은 유보트를 향해 일제 사격을 실시했고, 그와 거의 동시에 선교에선 배의 진행 방향을 바꿔 그대로 유보트에 들이박았다. 이 충각 공격으로 인해 그 U-103은 수심 30m 밑으로 급격하게 가라앉았고, 그 직후에 올림픽이 후미로 U-103의 사령탑을 박았으며 거기 위치한 올림픽의 프로펠러가 U-103의 압력선체를 말 그대로 썰어버렸다. 참고로 여객선이 잠수함을 침몰시킨 사건은 이 사건이 유일무이하다.결국 U-103의 승조원들은 긴급 부상 후 탈출했다. 수송선들에겐 정선해 있는 동안 공격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생존자들에 대한 구조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격침 직후 올림픽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항해했다. U-103의 승조원 39명 중 생존자 30명은 올림픽을 호위하던 미합중국 해군 구축함 USS 데이비스(Davis) 함에 구조되어 포로로 수용되었다.
5.4. LV-117과의 충돌
함생의 끝을 향해 달려가던 1934년 5월 15일, 올림픽 호는 또다시 충돌 사고를 낸다. 올림픽 호의 선수가 당시 미합중국 등대위원회 소속 등선 LV-117을 쳤는데 어마어마한 체급차이[19]때문에 등선은 그대로 침몰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 사고로부터 4개월 전인 1934년 1월에도 올림픽과 LV-117이 충돌할 뻔했던 사건이 있었다. LV-117에 있던 11명 중 7명은 충돌과 함께 바다에 빠져 사망했고, 4명은 올림픽이 구조했다. 이후 올림픽은 구조된 4명과 함께 뉴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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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117과 충돌사고 직후 목적지 뉴욕항에 입항하는 모습. 휘슬[20]소리와 더불어 선수부의 피해 모습, 부상자 등이 녹화되어 있다. 그 중 한명은 낸터킷의 선장이라고 한다. |
5.5. 마지막 항해
1935년 초 최후의 원양 항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올림픽은 폭풍을 뚫고 항해했으며 이 항해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알려진 게 없지만 이름 모를 누군가가 찍은 산책로 사진 한 장[22]만은 아직까지도 전해지고 있다.6.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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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스로의 마지막 항해 직전, 사우샘프턴에 정박하고 있는 올림픽과 RMS 모리타니아[23] |
7. 기타
- 사실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때 가라앉은 것이 타이타닉호가 아닌 올림픽호라는 음모론이 존재한다. # 대강 요약하자면 회사에서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새로 건조한 타이타닉호 대신 올림픽호를 희생시켰다는 음모론이다. 디바제시카 역시 소재로 다룬 적 있으며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잠깐 다뤘다. 요약글
[1]
Royal Mail Steamer(왕립 우편 기선). 당시에는 여객선의 우편 배송이 상당히 흔했고 여객선이나 화물선이라도 우편선 업무를 겸한다면 RMS로 분류되는 것이 가능했다. 올림픽 호와 그 자매선들은 이로 인해 우편 담당 직원들이 수십명 존재했다.
[2]
SteamShip의 약자. 올림픽호의 구명보트에는 S.S. Olympic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간혹 TrSS라고 서술하는 경우도 있는데 Tr은 Triple-screw Steamship의 약자이다.
[3]
물론 1년만에 동급의 자매선인 타이타닉이 그 타이틀을 가져갔지만 침몰 후 다시 가져오게 된다.
1910년대 초반에 최대 크기를 자랑하던
타이타닉과
브리타닉의 연이은 사고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약 25 년의 세월을 버틴 장수한 편인 여객선이다.
[4]
선박의 등록톤수. 1GRT = 100ft³ = 2.83168466m³
[5]
선체 보강 및 인테리어 공사로 총 배수량이 증가했다. 이는 타이타닉의 톤수보다 31톤 만큼 큰 톤수이다.
[6]
길이와 폭, 속도의 미터 단위 표기는 피트 단위 및 마일 단위의 환산이기 때문에 인용 매체에 따라 소수점 단위의 차이가 존재함.
[7]
사실상 장식용이다. 그래서 영화나 일러스트에서는 마지막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증기선 시절에는 굴뚝이 많으면 더 힘 세고 있어보인다는 이유로 이런 디자인을 주로 사용했었다. 요즘도 이렇게 디자인된 선박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디즈니 크루즈의 앞 굴뚝은 가짜다.
[8]
현대의 비슷한 배수량의 선박들이 보통 메인엔진 1기, 보조엔진 1기로도 타이타닉과 비슷한 속도를 낸다는 점을 떠올리며 20세기 내연기관의 발달에 감탄하도록 하자. 사실 타이타닉호가 처녀항해를 떠난 지 26년 후(1936년)에 경쟁회사인 큐라드 라인에서 발주해서 처녀항해를 한
RMS 퀸 메리(RMS Queen Mary)호만 해도 160,000shp 마력이다.
[9]
후진을 할 때는 중앙의 터빈과 연종된 프로펠러는 사용하지 못했다.
[10]
문서 최상단의 사진과 비슷한 시간에 촬영된 사진이다.
[11]
타이타닉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며 타이타닉의 첫 항해에 탑승했다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가 일어나자 죄책감에 흡연실에 들어가 배와 함께하기로 한 다른 1등실 승객들과 최후를 맞이했다.
[12]
Blue Riband. 대서양 정기 여객선들의 속도경쟁 정점으로 최단시간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객선에게 부여하는 상이었다.
[13]
차이점을 분간하기 어렵다면 상부 갑판에 죽 늘어선 구명정의 개수를 보자. 기존에 비해 압도적이다.
[14]
이는 올림픽 호와 타이타닉 호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15]
배의 속도와 진행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2차대전기의 전함은 물론 현대의 연안전투용 군함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위장이다.
[16]
화이트스타 라인과 큐나드 라인이 합병되면서 평생의 경쟁자였던 올림픽과
RMS 모리타니아는 사실상 친구사이가 되어버렸다.
[17]
올림픽의 자매선인
타이타닉이 침몰할 때도,
HMHS 브리타닉이 침몰할 때도 살아남았다.
[18]
선술했듯 이때는
제1차 세계 대전에 병력 수송선으로 징발 되어 RMS 올림픽이 아닌
HMT 올림픽으로 불렸다.
[19]
올림픽은 사고 당시에도 영국에서 가장 큰 여객선 타이틀을 달고 있었던 만큼 길이 269M에 무게 46439톤의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LV-117은 길이 41M에 무게 630톤으로 정말 툭 쳐도 날아갈 만큼의 체급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20]
선박의 발성신호장치, 즉 기적에는 휘슬과 혼, 사이렌, 종, 징(gong) 5가지가 있다. 사이렌과 휘슬은 증기선만 쓰는 것으로 현대에 건조된 배는 거의 혼과 종, 징만 사용한다.
[21]
길이 45M, 무게 1050톤으로 LV-117보다 좀 더 커졌다.
[22]
파도를 맞았는지 왼쪽으로 위험할 만큼 많이 기울어 있다.
[23]
가장 크게 보이는 회색 배가 올림픽호의 경쟁자였던
RMS 모리타니아이고 그 앞 검은 선박이 올림픽이다. 참고로 모리타니아호도 올림픽과 함께 로지스로의 마지막 항해를 할 예정이었다.
[24]
우연치 않게도 4월 12일은 자매선
타이타닉이 1912년 아일랜드에서 뉴욕으로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대서양 항해를 시작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