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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22:20:06

K-1 Global Holdings Ltd.

K-1(킥복싱)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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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로고

1. 개요2. 역사
2.1. 초창기2.2. 전성기2.3. 위기2.4. 쇠락2.5. 그 이후
3. K-1 룰4. K-1 체급5. 역대 챔피언6. 한국에서의 인기7. 단체 운영 및 문제점8. 기타

1. 개요

공식 홈페이지

일본 입식격투기 단체. 초창기에는 아래 K-1이라는 이름의 기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킥복싱, 가라테 등을 모두 포함하는 이종격투기스러운 이미지였고, 한때는 'K-1 히어로즈'라는 브랜드로 종합격투기 대회도 열었지만 기본적으로 K-1은 입식격투기 단체로 정의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K-1의 K는 Karate, Kickboxing, Kungfu, Kempo, Kakutougi, Tae Kwon do King을 정한다는 의미다.

한때는 일본 최대이자 세계 최대의 입식격투기 단체였지만, 지금은 위상이 많이 추락한 상태다.

2012년에 모회사가 바뀌었는데, 전 게임하이 대표 김건일[1]이 K-1 브랜드 상표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본사는 홍콩에 두고 있다. 그 후 2014년에 발족한 K-1 실행위원회가 K-1 Global로부터 일본 내 독점 라이선스를 취득해서 일본 국내 K-1 대회를 주최하기 시작했고, 2023년에는 K-1 운영 회사인 M-1 스포츠 미디어가 K-1 전세계 라이선스도 취득했다.

2. 역사

2.1. 초창기

K-1의 시초는 1993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라테 단체 정도회관(正道会館)의 관장인 이시이 카즈요시(石井和義)가 글러브를 착용하고 안면가격을 포함하는, 극진공수도와는 차별화된 가라테 대련 규칙을 도입하여, 수련생들을 격투기 시합에 내보낸 아이디어에서 시작한다. 킥복싱이나 무에타이 시합 등에 나간 정도회관 선수들은 '가라테 VS 기타 무술'혹은 '일본 VS 외국'의 이미지를 가지고 일본 팬들의 큰 관심을 받게 되는데, 이 시합들이 그럭저럭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선수가 바로 가라테 월드컵에서 극진회관의 윌리 윌리엄스[2]를 꺾고 우승했던 정도회관의 에이스 사타케 마사아키이다. 사실 이 당시 사타케는 가라데 룰에서는 적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사타케가 이긴 윌리 윌리암스는 극진회관 최강에 가까웠고, 앤디 훅과의 대결에서도 무승부를 거쳐서 격파로 승리하는 등 잡을 선수는 거의 다 잡았다. 이후 프로레슬링 Rings에도 참가해서 괜찮은 경기를 했고[3], K-1 초기에 알려진 스탠더맨이나 패트릭 스미스와의 경기에서도 승리한 적이 있을 정도이고, K-1 직전에 열린 대회에서는 피터 아츠와도 무승부였다.[4]

이시이 관장은 1992년 10월 4일 가라테 월드컵 대회에서 "내년에 10만 달러 쟁탈 세계 최강 결정 토너먼트를 열겠다."고 발표했고 실제로 1993년 4월 30일에 제1회 월드 그랑프리 대회를 개최했다. 제1회 월드 그랑프리에는 피터 아츠, 어네스트 후스트, 브랑코 시카틱, 사타케 마사아키 등 8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우승 상금은 1992년 발표대로 10만 달러.[5] 대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후 K-1은 매년 월드 그랑프리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2.2. 전성기

1996년부터는 후지 테레비에서 K-1 대회를 방영하기 시작했고, 1997년부터는 일본 그랑프리,[6] 2000년부터는 미국, 유럽 등에서 지역 그랑프리를 열기 시작했다. 2002년부터는 경량급 대회인 K-1 MAX도 열기 시작했다. K-1 MAX의 경우 매우 빠르고 스피디한 시합 양상으로 인해 월드 그랑프리로 대표되는 기존의 K-1 대회와는 또 다른 재미를 줬다. 또한, 태국 낙무아이들도 불러들여 질적으로 발전한 시합을 보여주었다.[7] 대략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는 실력과 파워를 겸비한 훌륭한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고,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시합을 열면서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이시이 관장이 탈세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다가, 결국 사실로 드러나 감옥에 가게 되었으며, 그 후로 정도회관은 뒤로 물러나고 타니가와 사다하루 프로듀서가 시합을 주최하게 되면서 일이 조금씩 틀어졌다.

2.3. 위기

이시이 관장 시절에는 실력 위주로 선수를 데려오던 반면, 타니가와 프로듀서 체제에서는 엔터테인먼트성을 우선시했기 때문에[8] 스모 선수 출신인 아케보노 등 정통 킥복서가 아닌 선수들이 대거 출전하기 시작했다. 최홍만 역시 이 시기에 K-1에 진출했다.[9]

그러나 이런 엔터테인먼트성을 우선시한 운영은 일시적인 시청률 상승으로 이어졌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하락하기 시작했다. 운영 방식에 불만을 품은 기존의 K-1 매니아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이 즈음부터 K-1의 절대 강자로 자리매김한 세미 슐트가 기량은 압도적이었지만 경기 스타일은 재미가 없었던 것도 주죄측으로서는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일본 내 K-1 시청률이 점점 하락했던건 사실이지만 그 이유가 엔터테인먼트성을 우선한 운영 방식이나 세미 슐트같은 특정 선수 때문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후지 테레비가 철수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시청률 하락 문제보다는 프라이드와 마찬가지로 당시 K-1 역시 야쿠자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10] #

한편 타니가와 사다하루는 2012년에 平謝り: K-1凋落、本当の理由라는 책을 통해 FEG가 도산한 이유에 대해 밝혔는데, K-1 자체는 자신이 프로듀서였던 시절에도 흥행 수익과 시청률이 나쁘지 않았지만 이시이 관장이 저질렀던 탈세 때문에 추징 세금을 내느라 재정난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또한 흑자였던 K-1과 달리 당시 FEG가 개최했었던 종합격투기 대회 DREAM은 적자였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이것도 재정난의 원인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2.4. 쇠락

2008년부터는 재정 악화로 선수들에게 파이트머니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해서 일부 선수들이 출전을 거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2011년 10월 후지 테레비와의 방영권 계약이 끝나면서 이제는 인터넷 유료 중계로 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11] 이 후지 테레비의 지난 K-1 경기 방영분 영상에 대한 권리는 2013년 Glory가 인수했다. # 그래서 K-1은 현재 개최하는 대회 프로모션 과정에서 과거의 후지 테레비 영상 자료는 전혀 쓰지 못하고, 중국이나 한국에서 중계한 화면을 따와 사용하고 있다.

2011년 WGP는 일본이 아닌 중국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결국 최소되었다.

2012년 K-1은 김건일 전 게임하이 대표의 K-1 Global이라는 회사에 매각되었다. # 또한 입식격투기로 복귀한 미르코 크로캅을 다시 영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터 아츠, 제롬 르 밴너, 세미 슐트 등의 베테랑 파이터들이 K-1과 다시 계약을 하지 않고 Glory 등의 다른 단체로 떠나버렸고[12], 바다 하리는 살인 미수 범죄자 가 되어 앞으로의 활동 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라[13] 흥행 파이터가 대거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불안한 출발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바다 하리가 2013년 2월 경에 다시 출소하여 현역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으나 잦은 수감생활로 경기력이 막장이 되어버렸다.

2012년 5월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대회가 있었고 후에 2010년 이후로 열리지 않았던 WGP도 다시 열리는 등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프로듀서로 취임한 마사토가 프로듀서 직을 사퇴하고, Spike TV에서 중계를 취소하는 등 다시 위기에 빠진 상황.

2013년 그나마 흥행카드였던 크로캅마저 Glory로 이적했다. 사실 2011년 FEG의 손을 떠난 이후 중소단체만도 못한 규모가 되어버린지라 이제 흥행은 뒷전이고 대회 개최만 해도 다행일 정도인 상황이다.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해 보았을 때 2011년 이후의 K-1은 사실상 산소 호흡기만 붙이고 있는 상황이라고 봐도 될 듯 싶다.

프라이드가 망하고 K-1마저 규모가 줄어들면서 일본 내 체육관 사업도 장기 불황에 빠졌다. 문을 닫은 체육관만 수십 곳이고 유명 선수들의 체육관들조차 문을 닫거나 규모를 줄여서 운영하고 있다. 관련 기사

2.5. 그 이후

미르코 크로캅의 이적 이후 사실상 중량급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고 70kg World MAX 토너먼트만 개최하다가, 2014년 5월 29일에 K-1 World League의 발족이 발표되었다. K-1 Global로부터 일본 내 독점 라이선스를 획득한 K-1 실행위원회라는 곳에서 주최하며, 마에다 켄사쿠, 코히루이마키 타카유키, 카지와라 류지 등 일본 킥복싱계의 전성기를 대표하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며 11월 3일에 정식으로 출범했다.[14] 출범 직전에 K-1 World League에서 K-1 World GP로 명칭을 개정하였으며, K-1 Global과의 협의를 통해 일본 내에서 개최되는 대회명에는 K-1 World GP in Japan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2016년 하반기부터는 중량급이 중심이 된 K-1 World GP Euro가 유럽에서 시작된다.

참고로 원래 운영은 주식회사 굿루저,[15] 제작은 M-1 스포츠 미디어에서 맡았는데, 2020년에 굿루저의 대표 이사가 K-1 프로듀서직에서 물러나면서 현재는 M-1 스포츠 미디어에서 운영도 맡고 있다. #

과거의 서커스화 된 대회의 이미지를 불식하고 싶었는지, 신생 K-1을 표방하며 2014년 11월의 대회가 제1회 K-1 World GP[16]로써 개최되며, 홍보 차원에서 지상파 채널인 TV도쿄 '신 K-1 전설'이라는 프로그램도 방송하고 있다.

2020년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흥행을 강행한 K-1 K'Festa 3가 AbemaTV 시청자 70만이 넘게 나오면서 어느정도 흥행궤도에 오르는데 성공한 듯하다.

2023년 3월에 K-1 운영 회사 M-1 스포츠 미디어가 전세계 K-1 라이선스를 취득했다고 당시 K-1 프로듀서였던 나카무라 타쿠미가 발표했다. #

2023년 7월 17일 나카무라 타쿠미가 K-1 프로듀서직에서 퇴임하고 다음 날 Glory의 일본 지부 대표였던 카를로스 키쿠타가 K-1 프로듀서로 취임했다.

2024년 1월 K-1 창시자 이시이 카즈요시가 K-1 GROUP의 어드바이저로 취임했다. #

3. K-1 룰

K-1룰은 원래 킥복싱 시합 룰에 가라데 시합의 토너먼트제를 섞고, 타 격투기 수련자들이 페널티를 보지 않게 팔꿈치와 빰 클린치를 줄인 것이다. 그러나 이후 세미 슐트, 쁘아까오 같은 특정 선수들의 독주를 막거나 지루한 경기를 막기 위해 룰을 여러 차례 바꿨다.

그러나 특정 선수들의 독주를 막기 위해 여러 차례 변경한 K-1 특유의 룰이 이후 Glory 등의 유수 단체에도 영향을 미쳐 무에타이 등 여타 입식격투기와 차별화되는 킥복싱만의 고유한 특성이 되어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킥복싱 단체들은 K-1처럼 클린치 니킥, 킥캐치, 빰 등을 엄격히 제한하여 스피디한 공방을 지향하는 룰을 따르고 있다. 혹은 ONE Championship처럼 킥복싱 경기와 무에타이 경기를 구분하여 대회를 치르기도 한다.

토너먼트 대회의 경우 원데이 토너먼트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데,[19][20] 소수의 선수로 여러 경기, 다양한 매치업을 하루에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선수들에게는 굉장한 부담이다. 그 전 경기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유불리가 심하게 갈리며 경기 순서에 따라서 쉬는 시간도 다르다.[21] 3분 3라운드로 짧긴 하지만 판정이 동률일 경우 연장 라운드까지 하기 때문에 이기고 나서 부상 등으로 기권하는 경우도 있는 편. 이 토너먼트 방식 덕분에 제롬 르 밴너, 레이 세포 등 화끈하게 치고박는 스타일보다는 어네스트 후스트, 세미 슐트 등 지능적으로 체력을 아껴가며 싸우는 아웃복서 스타일이 결국 최종 우승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4. K-1 체급

2024년 현재 총 15개의 체급(남자 12체급, 여자 3체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

남자: 밴텀급(-53kg), 슈퍼 밴텀급(-55kg), 페더급(-57.5kg), 슈퍼 페더급(-60kg), 라이트급(-62.5kg), 슈퍼 라이트급(-65kg), 웰터급(-67.5kg), 슈퍼 웰터급(-70kg), 미들급(-75kg), 크루저급(-90kg), 헤비급(-100kg), 슈퍼헤비급(100kg 이상)

여자: 여자 아톰급(-45kg), 여자 미니엄급(-48kg), 여자 플라이급(-52kg)

5. 역대 챔피언

6. 한국에서의 인기

최홍만이 K-1에서 활약했던 2000년대 중후반에는 한국에서 K-1의 인기가 상당했지만, # # 최홍만이 하락세에 빠지면서 한국 내 K-1인기도 하락했다.

한국에선 룰이나 체급 구분 등 운영상의 허점을 까면서 개그원, 게이원, 개그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7. 단체 운영 및 문제점

현재는 체급이 세분화되었지만 과거 전성기 시절에는 체급이 2개 뿐이었다. 그나마 나누는 기준도 -70kg급, 무제한급인데 이 기준에도 논란이 많았다. 저 기준대로라면 복싱으로 치자면 7-8 체급의 선수들이 한 체급에서 뛰게 되는 셈인데다가 거인 선수들의 득세를 피할 수가 없다.[22] 2008년경부터는 체급별 타이틀도 신설하는 등 체급 분화[23]를 시도했지만 K-1은 원매치가 중심이 아닌 토너먼트 매치가 중심이었던 단체였기에 사실상 체급 구분 및 원매치 타이틀의 의미가 없었다.

늦은 오퍼와 갑작스런 상대 변경도 대표적인 문제점이다. 선수가 부상당해 아웃되어도 이게 언론에 알려지고 대체 선수를 찾는게 빨라야 5일전에 이루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심하면 하루 전이나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경기를 준비시키는 경우도 있다.[24] 또한 원래 오퍼 당시 알려진 상대가 갑작스레 바뀌는 경우도 있으며[25], 메인 이벤트 같은 중요한 경기 조차 5일 전에 오퍼를 보내는 경우도 허다하다.[26] 언론에선 약 1~2달 전부터 정상적으로 경기를 잡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대부분의 경기를 선 발표→후 오퍼로 경기를 잡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수들 부상이 많이 터지면 대회 자체가 아작나는 경우가 잦다. 이런 식으로 대회를 운영하려다가 말아먹었던게 다이너마이트 미국 대회. 자세한 것은 최홍만 항목 참조.

2000년대 중후반대, 그러니까 밥 샙과 최홍만의 성공 이후에는 엔터테인먼트적 성향이 짙어지면서 씨름, 스모, 야구, 검도, 발레, 투포환 선수같은 격투기와는 거리가 먼 베이스의 선수들을 영입했으며 심지어는 개그맨[27]을 출전시키기도 했다.[28]

약물 스캔들도 있었다. 2007년 라스베가스 대회 당시 두 파이터가 약물을 복용했다가 적발된 전력이 있었고, 자빗 사메도프가 많은 네덜란드 파이터들이 약물을 한다고 폭로하여 논란이 되었다. 특히나 네덜란드는 약물 규제 법률이 없는 만큼 의혹의 눈초리는 더욱 컸다. 거기다가 의혹을 받던 파이터 중 한명인 바다 하리가 살인 미수혐의로 수색을 받을 당시 집에서 약물이 발견되며 논란에 쐐기를 박았다.

2011년 이후로는 아예 파이트 머니를 무기한 외상으로 지급한다는 것이 밝혀져 해외 선수들이 등을 돌리고 있다. 2011년 7월까지 체불된 파이트머니는 약 8억엔.

참고로 방영권 계약이 상당히 복잡했다고 한다. 각 시리즈별로 방영권이 따로 있어서 WGP 시리즈 방영권 따로, MAX 시리즈 방영권 따로, 연말대회 방영권 따로의 방식으로 같은 K-1이라도 방영권이 전부 따로따로였다고 한다. 때문에 MBC ESPN에서 방영하던 시절에는 WGP와 MAX는 ESPN에서 방영하고 다이너마이트와 Hero's는 CJ미디어에서 방영했다. 이후 WGP와 MAX 방영권 계약이 끝난 후 CJ미디어에서 전 시리즈를 한꺼번에 계약하는데 150억원이 들었고, 거기에 더해 국내 대회 흥행권 보장 60억원, FEG의 한국 법인인 ’FEG코리아’ 설립에 100억원 출자 등까지 합쳐서 총 310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

8. 기타

킥복싱 무에타이가 인기있는 유럽 동남아시아와는 달리, 권투 종합격투기가 주류인 북미에선 인지도가 매우 낮다. 한 예로, K-1의 베테랑 제롬 르 밴너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 이 때문에 팀 실비아와의 대전이 UFC측에서 여러번 무시당했다.[29] 한국에선 K-1과 계약했던 모 방송국의 언론 플레이로 메이저 격투기 단체로 인식됐었다. 전세계에서 복싱보다 K-1이 인기있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었다.[30] 현역 복싱 세계 챔피언에게 K-1 진출 계획이 있냐고 물어보는 나라도 한국뿐이었다. 실제로 현역 복싱 세계 챔피언이 타이틀을 반납하고 K-1으로 가기도 했다. 물론 이것을 K-1이나 한국 케이블 방송국, 시청자의 탓으로 돌릴 이유는 없다. 한국 복싱의 몰락은 한국 복싱계가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이다. 실제로 K-1이 한국에서 몰락한 이후에도 한국 복싱은 종합격투기에 밀려 여전히 인기가 없는 상황이다.

K-1을 포함한 일본 격투기 단체들은 기본적으로 선수들에게 지급하는 파이트머니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전성기 시절 K-1 정상급 파이터들이 받았던 파이트머니는 대략 1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31]

K-1 창시자인 이시이 카즈요시가 역사를 조작한 민족은 한국이라는 혐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라이벌 단체격이었던 Pride의 팬들과 K-1의 팬들은 관계가 별로 좋지 못했는데, 2007년 후반 경 부터 PRIDE의 선수층 중 일부가 K-1에 흡수되자 이런 기류가 확실하게 보였다. 2008년 다이너마이트는 Dream vs K-1 형식으로 PRIDE의 성지인 사이타마에서 개최되었고[32], 결과는 MMA파이터가 K-1 파이터를 입식에서 압도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에이스급 파이터인 무사시가 클린치를 할때마다 야유가 터지는[33] 약간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WGP 결승에서 대형 사고를 쳤던 바다 하리는 말할 것도 없었고... 또한 PRIDE에서 K-1으로 넘어갔던 사쿠라바 카즈시와 타무라 키요시는 이 날 메인 매치를 치렀는데 관중들 반응이 아예 무반응이었다. 반대로 카와지리가 K-1 MAX 무대에서 마사토를 상대했을때에는 카와지리가 폭풍같은 야유를 먹었다. 다만 마사토의 경우에는 프라이드와 K-1을 불문하고 거의 레전드 취급을 받는지라 사이타마에서도 환호를 받았다. 물론 K-1마저 쇠락하고 UFC 천하통일 체재가 된 2011년 이후 이런 단체 팬덤끼리의 대립 구도는 거의 사라지고 사실상 위 아 더 월드가 되었다. 어느정도냐면 추성훈마저 환호를 받을 정도.

K-1이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던 2000년대에는 국회폭력을 국K-1으로 변형해서 부르기도 했다. 국회의원들끼리 싸우는 모습이 마치 격투기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


[1] 해외에서는 K-1 Global Holdings Ltd. 대표 이름을 Mike Kim이라고 보도하고 있는데 이게 김건일이 미국에 귀화해서 본명이 바뀌었기 때문인 건지는 불명이다. # [2] 과 스파링을 한 것으로 유명했던 무술가.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이종격투기 경기로도 알려져 있다. [3] 10전 6승 3무(시간경과) 1패였다. 1패는 오른쪽 갈비뼈 골절에 의한 부전패로 이 이후 링스 출장이 끝난다. [4] 사실 K-1은 사타케 마사아키의 활약에 기대를 걸고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타케는 1회 대회에서 4강 브랑코 시카틱과의 대결에서 패배, 2회 대회에서 결승전에서 피터 아츠와의 대결에서 판정패 하는 등 기대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고, 결국 무사시에게 밀려나고, 이시이 관장과 대립하면서 정도회관을 떠났다. [5] 이후 K-1 월드 그랑프리 우승 상금은 꾸준히 증가했다. 예를 들어 2004년 월드 그랑프리 우승자인 레미 본야스키가 받은 우승 상금은 40만 달러다. # [6] 일본 그랑프리는 닛폰 테레비에서 방영했다. [7] 쁘아까오 등. [8] 사실 여기에는 이시이 관장 시절에 나온 밥 샙의 성공이 컸다. [9] 그래도 최홍만은 아케보노나 몬타냐 실바 같은 다른 이벤트형 거인 파이터들 중에서는 탑클래스 선수들을 상대로도 꽤 선전한 편이었다. [10]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어둠의 세력과의 연관성 문제로 후지 테레비가 일본 경찰로부터 지도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11] 참고로 한국에서는 2010년을 마지막으로 XTM과의 방영권 계약이 끝나면서 국내 중계가 불투명한 상황이 되었으나, 2013년 ETN이라는 채널에서 2012년에 열렸던 대회만 방영했다. [12] 당시 마지막 WGP 챔피언이었던 알리스타 오브레임은 UFC로 이적했고, 피터 아츠와 세미 슐트 외 다수의 파이터들은 It's Showtime을 흡수한 Glory(골든 글로리에서 주최하던 그 대회 맞다.)로 이적했으며,(여기에 아츠는 6경기후 은퇴하겠다고 한 상태이며 세미 슐트는 2013년 6월 은퇴했다.) 제롬 르 밴너는 마이너단체와 프로레슬링을 전전하다가 Glory와 계약했다. 일본 에이스였던 후지모토 교타로는 복싱으로 전향했고, 레이 세포는 MMA 전향 후 에이전트로 활동하며 사실상 현역에서 물러난 상황. 2012년 은퇴 번복을 한 레미 본야스키도 Glory와 계약했다가 2014년 재차 은퇴했다. [13] 첨언하자면 바다 하리는 과거에 '30세에 은퇴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2013년 기준으로 바다 하리는 28세이다. 길어야 2년 이내에 은퇴하게 된다. 결국 2015년 은퇴 선언을 했다. 그러나 Glory에서 선수생활한것 보면 은퇴를 번복한 듯하다. [14] 정식 출범 전인 2014년 7월 21일에 아마추어 대회인 K-1 Challenge를 개최하기도 했다. [15] 입식격투기 대회 Krush의 운영 회사. [16] 기존의 WGP와 달리 중량급 경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 체급을 통칭하는 이름. [17] 대표적으로 무사시. [18] 원래 상대를 붙잡은 상태에서의 공방과 니킥은 무에타이에서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인데, 이것이 또한 복싱과는 다른 중요한 기술중의 하나로, 응용도 다양하게 가능하고 무에타이 시합에선 오히려 펀치보다도 이 기술이 점수가 높다. [19] 체급을 세분화한 이후에도 토너먼트 대회는 원데이 토너먼트로 열리고 있다. # [20] 초기의 격투기 대회는 레슬링, 태권도 등의 방식을 따라서 토너먼트제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UFC도 1999년까지는 토너먼트 방식을 많이 사용했다. [21] 물론 경기를 바로바로 이어서 하는 것은 아니고 사이사이 슈퍼파이트가 있긴 하다. [22] 일반적으로 운동선수가 근육으로 100kg 이상의 체중을 만드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23] -100 kg급이 신설되었다. [24] 대표적인 경우가 대회 개최 18시간 전에 투입된 김민수가 있다. UFC에서는 보통 이런 경우에는 경기를 아예 취소시킨다. [25] 2007년에 있던 데니스 강 vs 추성훈의 경기가 이랬다. 언론에 알려진것과는 달리 데니스 강과 원래 붙게 되었던 선수는 오야마 슌고였는데 얼마 후 상대 변경 통보를 받고 놀랐다고 한다. [26] 효도르 vs 최홍만의 경기가 이러했는데, 당시 최홍만 측에서 5일전에 오퍼를 받고 어떻게 시합을 준비하냐!고 거절했다가 K-1측에서 흥행이 중요하니까 당신 의견은 상관 없다.이라고 나와서 최홍만 측에서 뻐기다가 결국 3일 전에 오퍼를 수락하고 이틀 훈련해서 경기에 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27] 최홍만의 MMA 데뷔전 상대였던 바비 올로건. 원래는 예능프로에서 1회성 기획으로 출연시켰더니 당시 나름 네임드였던 시릴 아비디를 이겨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데뷔시켜버린 케이스. [28] FEG에서 주최했던 연말 격투기 대회인 다이나마이트 대회에는 레슬링 선수 출신인 다나카 아키히토가 만화 캐릭터인 근육 만타로 복장을 하고 출전해서 밥 샙과 대결하기도 했다. [29] 결국 이 대결은 프로레슬링으로나마 나중에 치러졌다(...). [30] 허나 한국에서 역시 중계 계약이 끝났고 이후 국내에서 킥복싱 시장이 하락세를 겪고 있다. [31] 일본 단체들이 미국에서 열었던 대회에서는 파이트머니를 공개한 바 있지만 그 대회들의 경우 일본 대회보다 관중 수가 훨씬 적었기 때문에 지급된 파이트머니도 일본 대회 때보다는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2] Dream은 PRIDE의 후신 격 단체이며, 이 날 출전한 Dream 소속 파이터는 대부분 PRIDE 출신이었다. [33] 물론 일본에서도 판정 논란때문에 인기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K-1 무대에서 최소 야유는 받지 않았는데, 이 날은 그냥 클린치가 나올때마다 야유가 폭발했고, 오히려 상대 선수였던 게가드 무사시가 환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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