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ützenpanzer Lang HS.30 |
1. 개요
1956년에서 1958년까지 개발되어 1960년대에 도입된 독일 연방군의 병력수송장갑차이자 세계 최초의 보병전투차. #다른 명칭으로 Schützenpanzer, lang, Typ 12-3가 있으며, 이는 유형 12-3, "확장형(긴)" 병력수송장갑차를 뜻한다. #
2. 설명
1950년대까지 서독군( 독일 연방군)은 미군으로부터 공여받은 M39 AUV 장갑차들을 운용해왔는데, HS.30은 이 M39 AUV 장갑차들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되었다.설계는 이스파노-수이자 사에서 진행했으며 엔진은 롤스로이스의 B81 가솔린 엔진을 채택하였다.
차체는 전고가 1.85m 수준으로 매우 낮았고 내부 공간도 좁고 협소했지만 군장을 메고 무장한 보병 5명이 탑승하기에는 충분했다. 차체 상부에는 20mm HS-820 기관포가 장착된 기관포탑이 장착되었고 7.62 mm MG3 기관총 1문이 동축 기관총으로 장비되었다. 차체 모든 부위가 45도 경사를 둔 30mm 두께의 장갑으로 보호받아 20mm 기관포를 막아낼 수 있었다. 단 NBC 방호 능력은 없었고, 소련의 BMP 시리즈 장갑차같이 수륙양용이 아니었다.
3. 제원
유형: 병력수송장갑차운용시기: 1960~1980년
개발 및 설계: 이스파노-수이자, 1956~1958년
제조사: 이스파노-수이자, 하노마크, 헨셸
단가: DM 238,000
생산시기: 1958~1962년
생산대수: 2,176대
무게: 14.6톤
길이: 5,56m(18피트 3인치)
너비: 2.54m(8피트 4인치)
전고: 1.85m(6피트 1인치)
장갑두께: 45도에서 30mm
주포: 20mm HS-820 기관포 2,000발
보조무장: 7.62 mm MG3 기관총 1문, 106mm M40A1 무반동포 1문( SPz lg 12-3, LGs M40A1 , Panzerabwehr 형)
엔진: 롤스로이스 B81 Mk.80F 8기통 가솔린 220hp
(164kW) 엔진
마력: 15.3마력/톤
현가장치: 토션 바 현가장치(보기 3개, 로드휠 5개)
작동 범위: 270km(170마일)
최대 속도: 58km/h(36 Mph)
4. 파생형
- Schützenpanzer, lang, Typ 12-3 , ( SPz lg 12-3 , Gruppe ) : 표준형 병력수송장갑차.
- Schützenpanzer, lang, Typ 12-3, mit 106 mm Leichtgeschütz M40A1 , ( SPz lg 12-3, LGs M40A1 , Panzerabwehr ) : 106 mm M40A1 무반동포가 병력 탑승칸에 장착된 대전차보병전투차량 버전. 1965년부터 양산되었다.
- Schützenpanzer, lang, Typ 21-3 , ( SPz lg 21-3 , FüFu ) [b] : 무전기 탑재 지휘장갑차형.
- Schützenpanzer, lang, Typ 51-3 , ( SPz lg 51-3 , Panzermörser ) : 81mm 박격포가 장착된 자주 박격포 버전 . 1966년 Type 52-3으로 개조.
- Schützenpanzer, lang, Typ 52-3 , ( SPz lg 52-3 , Panzermörser ) : 120mm 박격포가 장착된 자주 박격포 버전 . 1966년 Type 51-3의 개조.
- Schützenpanzer, lang, Typ 81-3 , ( SPz lg 81-3 , FLtPzArt ) [c] : 포병 관측장갑차 버전.
- Jagdpanzer, Typ 1-3 , ( JPz 1-3 , Kanonenjagdpanzer ) – HS.30 섀시를 기반으로 한 구축전차. 90mm DEFA 기관포로 무장하였다.
- Raketenjagdpanzer, Typ 3-3 , ( RakJPz 3-3 , Raketenjagdpanzer ) – HS.30 섀시를 기반으로 하는 미사일 구축 전차. 유선 유도 Nord SS.11 미사일을 탑재했다.
- SPz HS.30/90 – HS.30 섀시를 기반으로 한 90mm DEFA 전차포를 장착한 시제 경전차. 참조
5. 문제점
장갑차 개발 경력이 적었던 이스파노-수이자가 개발한 결과 차량에서 각종 결함이 발견되었다. 변속기와 조향장치, 냉각계통과 브레이크, 현가장치 등에서 각종 문제가 일어났고 실내 환기장치에서도 문제가 발견되었으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금액의 돈이 필요했다. 덤으로 엔진도 야지 주행에서 좋지 않은 성능을 보여주고 연료 소모량도 많아 항속거리를 감소시켰다.엔진 역시 당초 계획되었던 9톤을 상정하고 장착한 물건이라 최종적으로 14.5톤의 무게를 기록한 차량을 이끌기에는 성능이 부족했다. 터빈 인테이크도 굉음을 냈고, 엔진이 잔고장을 자주 일으키는 문제도 발생했다. 더구나 차체 하부를 통해서만 엔진에 접근할 수 있게 설계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작업장이 아닌 야전에서의 수리도 매우 어려웠다.
5.1. 스캔들
참조, ,해당 차량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대량 발주된 배경에는 대규모 방산비리가 있었다. 이는 독일 역사상 최악의 방산비리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다.
원래 독일 연방군은 신형 장갑차로 AMX-13 기반의 AMX-13 VTP를 고려하고 있었으나 해당 차량은 한 대당 가격이 너무 비쌌다는 문제가 있었다. 한편 미국의 M59 APC는 독일 연방군의 요구사항보다 지나치게 무겁고 거대했다. 결국 이미 개발되었던 APC들은 독일 연방군의 요구 사항을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APC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던 1955년에 이스파노-수이자사가 독일 국방부에 접근하여 신형 장갑차 개발 산업을 제안했다. 이스파노-수이자의 장갑차는 당초 도입을 계획했던 AMX-13 VTP보다 30%가량 저렴했고 1960년까지 12개의 육군 사단을 구성하라는 NATO의 요구에 압박을 받던 서독의 입장에서는 이를 신속하게 도입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어 10680대의 차량이 주문되었다.
그러나 장갑차의 개발을 주도한 이스파노-수이자사는 정작 APC 개발 경험이 전무한 업체였다. 원래 이스파노-수이자는 승용차의 개발과 생산을 담당하는게 주 산업이었고, 방산 관련해서도 오래 전에 기관포를 만든 게 전부였다. 결국 장갑차를 개발해야 했던 이스파노-수이자는 20mm 기관포의 특허를 낸 다음에 유럽 곳곳에 위치한 다른 산업체들과 기술자들과 접촉을 하면서 HS.30 장갑차의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1]
설계를 담당할 엔지니어를 모색하던 이스파노-수이자사는 폴란드 출신의 앙드레 퓌르스트 포니아토스프키 전 프랑스군 장교를 만나서 장갑차 개발을 의뢰했다. 하지만 앙드레 퓌르스트 포니아토프스키(André Fürst Poniatowski) 전 프랑스군 장교도 사실 공대 커리큘럼을 완전히 인수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데다 그가 이전에 설계한 작품도 1930년대에 설계한 병력수송차 1대가 전부였고 이조차도 채택되지 못한 페이퍼플랜이었다.
동시에 이스파노-수이자는 독일의 하노마크와 헨셸사, 그리고 영국의 BMARC(British Manufacture and Research Company)와 접촉하여 장갑차 개발을 의뢰했다. 그러나 여기서 BMARC도 사실 영국에 세워진 이스파노-수이자의 자회사였으며, 차량 개발과 생산을 위한 설비가 아예 없었던 회사였다. BMARC는 독일 정부의 동의 없이 영국의 레이랜드 사에 장갑차 개발 명령을 전달했다.
결국 이런 과정 끝에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고, 1956년 3월에 이스파노-수이자사는 독일 국방부에 HS.30 장갑차의 축소 모형을 제출했다. 1956년 7월 3일에는 볼프강 홀츠 장관이 국방부 회의에서 HS.30 장갑차의 생산이 거의 다 준비되었다고 발표했는데, 헬무트 슈미트를 포함한 도입 반대파에서는 최종 양산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몇대의 프로토타입을 주문하여 확인할 것을 요구했다. 2일 후인 7월 5일에 독일 국방 위원회와 예산 위원회가 합동 회의를 통해 HS.30 차량 10,680대의 양산과 도입을 허가했으며 이는 당시 기준으로 27억 8천만 독일 마르크에 달하는 규모였다.[2]
1957년 말부터 1958년 초 사이에는 HS.30의 첫 시험주행이 실시되었는데 첫 주행부터 차량에 심각한 결함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생산과 납품에도 차질이 생기게 되었고, 독일 국방부에서도 장갑차에 문제가 드러나는 것을 직감하자 당초 주문되었던 10,680대의 차량 중에서 2,176대의 차량만 도입하기로 결정하였고(당시 기준으로 5억 1700만 마르크 규모) 이 분량은 1959년 9월과 1962년 2월 사이에 도입되었다.
여전히 10000대가 넘는 분량의 차량이 주문되었다는 사실에도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생겼다. 결국 1967년에 자유민주당의 요청으로 독일 연방의회는 조사 위원회를 꾸려서 HS.30 사업에 대한 전격적인 조사를 나섰고 1969년에 보고서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HS.30 도입 사업에서 대규모 방산비리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HS.30 스캔들에서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받은 인물 중에는 당시 독일 국방장관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그의 비서였던 베르너 레페닝도 포함되어 있었고, 슈트라우스 장관은 230만 마르크의 뇌물을 수수했다고 한다. 또한 HS.30 사건에는 수 많은 서독 국방부 출신 로비스트들이 개입하여 이스파노-수이자를 적극적으로 독일 APC 사업에 모집했다고 하며, 이 로비스트들 중에는 독일 국방군(대전기 나치 독일 시절) 장교 출신의 인물들도 많았다고 한다.
사실 이런 사건이 터진 데는 국산 무기 개발에 대한 서독 정부의 무관심이 큰 원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20년도 되지 않았던 당시 서독은 여전히 무기 수출이 금지되었던 만큼 기갑차량 개발 사업이나 여기 필요한 인력이나 장비에 투자하는 것에 실익이 없다고 서독 정부에서 판단하고 있었다. 대신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도움을 준다는 명분으로 동맹국가들의 AFV를 수입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득이라고 판단되었다.
끝내 독일 연방군이 도입한 2,176대의 Spz HS.30 차량들은 1970년대에 대부분 SPz 마르더로 대체되었으며, 1980년대 초반에는 완전히 퇴역했다. 일부 차량은 라케텐야크트판처로 개조되었다.
6. 미디어
6.1. 워 썬더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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