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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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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999년 지지 대지진
九二一大地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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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blog.ssis.edu.vn/3.jpg|width=100%]]
<colbgcolor=#bc002d><colcolor=#ffffff> 발생일시
(NST; UTC+8)
1999년 9월 21일 새벽 1시 47분
진앙 대만 난터우현, 지지진
진원의 깊이 8 km
최대
지반 가속도
1.92 g[1]
989.5 gal[2]
최대 지반 속도 318.1 cm/sec[3]
최대진도 7급(대만 중앙기상국)
(USGS)[4]
6강(JMA)[5]
규모 Mw 7.7 / ML 7.3
여진 횟수 12,911회 이상
- 규모 M6.0 이상: 8회
피해현황 <colbgcolor=#bc002d> 사망/실종 2,443 명
부상 11,305 명
재산피해 NT$ 3647억 (US$ 100억)[6]
일본에서 관측된 최대진도 목록
2 오키나와

1. 개요2. 피해3. 여파4. 둘러보기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999년 9월 21일에 일어난 대만 난터우현 지지 진을 진앙지로 한 규모 7.7의 대지진. 타이완 대지진(臺灣大地震)이나 지지 대지진(集集大地震)이라고도 하지만 통상적으로 921 대지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2. 피해

지진은 진앙지인 난터우현과 인근의 대도시인 타이중시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지진 규모가 1995년 일본에서 발생한 효고현 남부 지진을 능가했는데[7] 이것 때문에 진앙지에서 꽤 떨어진 타이베이시 대만 북부 지역까지 심한 진동이 감지될 정도였다. 1935년 타이중시 대지진 이후 대만에서 발생한 최악의 지진이다.

2,415명 사망, 29명 실종, 11,305명 부상이라는 인명 피해와 당시 3647억 대만 달러(미화 100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 효고현 남부 지진보다 피해 규모는 적지만 이는 지진 발생 지역이 일본의 한신 지역보다 작고 진앙지가 인구 밀집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효고현 남부 지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을 뿐 대만 제3의 도시[8] 타이중시에 큰 피해를 안긴 대재앙이다.

당시 세계 반도체 공급량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지역도 큰 피해를 입어 정보통신 업계에 그림자를 드리운 재해였다. 난터우를 지나는 지지선은 921 대지진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어 3년 동안 운행이 중단되었고 아리산 삼림철도는 아직도 이 지진의 후폭풍으로 전 구간 복구가 완료되지 않았다.

이 지진이 얼마나 셌냐면 당시 타이중시 펑위안구에 시공했던 지름 2m, 두께 1.8cm짜리의 수도관이 직각으로 꺾일 정도였다. 사진 보기

3. 여파

바로 한 달 전에 일어난 튀르키예 1999년 이즈미트 대지진으로 4만 명 이상이 사망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921 대지진이 발생해 커다란 피해가 발생하면서 국제 사회는 다시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 당시 리덩후이 대만 총통양국론 발언에 격노해 침공을 거론하던 중국의 장쩌민 국가주석도[9] 지진 피해 소식에 "양안은 하나의 중국이기 때문에 대만 동포들이 겪은 지진 피해는 중국 인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어떠한 도움이든 적극 나설 것이다."라는 위로를 공식적으로 전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만 정부는 정치적인 목적이라며 도움받는 것을 거부했다. 그 와중에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것 같다면 기분 탓

국교단절 이후였지만 한국에서도 119 구호대를 파견해 921 대지진 피해자 구조와 피해 복구에 나섰다. 구조 활동에서 87시간 만에 어린이를 구출하면서 대만 국민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고 대만 언론도 대한민국의 119 구호대의 활약상에 큰 관심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 언론은 중국의 눈치만 보며 대만 돕기에 소극적인 한국 정부의 태도를 문제삼았고 주한 대만 대표부에는 한국인들의 위로전화가 빗발쳤다. 국교단절 이후 대만의 한국에 대한 악감정이 완화되는 큰 계기가 된 재해이기도 하다.

타이중시에는 921 대지진을 추모하는 박물관이 당시 지진 폐허 위에 건설되어 있다.

영화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서도 묘사된다. 이 지진은 남녀 주인공이 오랜만에 연락을 하는 계기가 되는데 이 장면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복선이 깔린 중요한 장면이다.[10]

이 대지진의 여파로 대만의 PC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많이 타격을 받아서 2000년 1월까지 PC 부품 값이 그래픽 카드 채굴 대란의 여파가 불어닥친 2020년대마냥 크게 오르기도 하였다. 소매가격 7만원 선이었던 128메가 D램이 20만원 선까지 치솟았다.

동년도 홍콩 TVB에서 주최하는 경가금곡 3분기 시상식에서는 이 사건의 여파로 뽑힌 가수 모두가 시상과 함께 인사만 나누고 마무리되었다.

지진 대응 과정에서 제기된 중국국민당 정부의 책임론은 2000년 3월에 열린 제10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정권이 민주진보당으로 넘어가는 데 간접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4. 둘러보기

문서가 존재하는 20세기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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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틀:지진/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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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word-break: keep-all"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50%;"
{{{#!folding [ ~ 1950년대 ]
{{{#!wiki style="margin:-5px 0 -15px"
<colcolor=#fff><rowcolor=#fff> 발생일 규모 지진명
<colbgcolor=#868e96>
1906. 4. 6.
M 6.1 1906년 인천 해역 지진
1906. 4. 18.
M 8.3 샌프란시스코 지진
1909. 6. 11.
M 6.2 1909년 프로방스 지진
1920. 12. 16.
M 8.7 1920년 간쑤성 대지진
1921. 3. 20.
M 4.2 1921년 경주 지진
1923. 9. 1.
M 8.3 1923년 관동대지진
1925. 12. 9.
M 4.4 1925년 홍성 지진
1926. 10. 5.
M 5.0 1926년 경상북도 서부 지진
1928. 1. 12.
M 4.3 1928년 지리산 지진
1935. 12. 7.
M 5.0 1935년 의성 지진
1936. 7. 4.
M 6.0 지리산 쌍계사 지진
1936. 10. 19.
M 5.4 1936년 삼척 해역 지진
1938. 8. 22.
M 4.8 1938년 지리산 지진
1939. 1. 10.
M 5.0 1939년 대전 지진
1939. 1. 24.
M 8.3 1939년 치얀 지진
1939. 8. 31.
M 5.3 1939년 청주 지진
1939. 12. 26.
M 7.8 에르진잔 대지진
1944. 12. 7.
M 7.9 1944년 도난카이 대지진
1944. 12. 19.
M 6.8 조선-중국 국경 지진
1946. 4. 1.
M 8.6 1946년 알류샨 열도 지진
1946. 12. 21.
M 8.0 1946년 난카이 대지진
1948. 6. 28.
M 7.1 1948년 후쿠이 지진
1950. 8. 15.
M 8.7 1950년 아삼 지진
1952. 3. 19.
M 6.4 1952년 강서 지진
1952. 4. 24.
M 5.6 1952년 은천 지진
1952. 11. 5.
M 9.0 세베로쿠릴스크 지진
1956. 2. 13.
- 1956년 대한민국 지진
1959. 5. 4.
M 8.3 1959년 캄차카 지진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50%; min-height:2em"
{{{#!folding [ 1960년대 ~ ]
{{{#!wiki style="margin:-5px 0 -10px"
<colcolor=#fff><rowcolor=#fff> 발생일 규모 지진명
<colbgcolor=#868e96>
1960. 2. 29.
M 5.8 1960년 아가디르 지진
1960. 5. 2.
M 9.5 칠레 대지진
1960. 10. 8.
M 6.8 1960년 길주 해역 지진
1963. 9. 6.
M 6.3 1963년 영덕-포항 해역 지진
1963. 9. 7.
M 6.6
1964. 3. 27.
M 9.2 알래스카 지진
1964. 6. 16.
M 7.5 1964년 니가타 지진
1965. 8. 3.
~1970. 6. 5.
M 6.4 마츠시로 군발지진
1973. 9. 29.
M 7.8 1973년 나진 해역 지진
1975. 2. 4.
M 7.0 1975년 하이청 지진
1975. 6. 29.
M 7.3 1975년 속초 해역 지진
1976. 7. 27.
M 7.8 1976년 탕산 대지진
1976. 7. 28.
M 7.4
1976. 8. 16.
M 8.0 1976년 필리핀 모로 만 지진
1976. 10. 6.
M 5.4 1976년 홍도 해역 지진
1976. 11. 24.
M 7.3 1976년 살디란 지진
1978. 9. 16.
M 5.2 1978년 속리산 지진
1978. 10. 7.
M 5.0 1978년 홍성 지진
1980. 1. 8.
M 5.3 1980년 의주 지진
1981. 4. 15.
M 5.2 1981년 포항 해역 지진
1982. 2. 14.
M 5.6 1982년 사리원 지진
1982. 3. 1.
M 5.0 1982년 울진 해역 지진
1983. 5. 26.
M 8.1 1983년 아키타 지진
1985. 9. 19.
M 8.0 멕시코시티 대지진
1988. 12. 7.
M 6.8 아르메니아 대지진
1989. 10. 17.
M 7.2 샌프란시스코 지진
1990. 6. 21.
M 7.4 1990년 이란 지진
1990. 7. 16.
M 7.8 1990년 필리핀 루손 지진
1992. 4. 13.
M 5.8 1992년 루르몬트 지진
1993. 7. 12.
M 7.8 1993년 홋카이도 해역 지진
1994. 4. 22.
M 5.3 1994년 울산 해역 지진
1994. 7. 26.
M 5.9 1994년 홍도 해역 지진
1994. 10. 4.
M 8.2 1994년 홋카이도 동방 해역 지진
1995. 1. 17.
M 7.3 효고현 남부 지진
1995. 7. 24.
M 5.3 1995년 백령도 해역 지진
1996. 12. 13.
M 5.6 1996년 영월 지진
1997. 3. 27.
M 6.6 1997년 가고시마현 사쓰마 지방 지진
1997. 5. 13.
M 6.4
1997. 6. 26.
M 5.0 1997년 경주 지진
1999. 1. 25.
M 6.2 1999년 콜롬비아 지진
1999. 8. 17.
M 7.6 1999년 이즈미트 대지진
1999. 9. 21.
M 7.3 921 대지진
2000. 6. 17.
~21.
M 6.5 아이슬란드 지진
2000. 6. 6.
~9. 28.
~ M 6.5 이즈 제도 군발지진(2000년 7월)A
2000. 10. 6.
M 7.3 2000년 돗토리 지진
A : 해당 군발지진의 시작일은 위의 아이슬란드 지진보다 먼저이지만, 가장 큰 지진인 이 문서에 집중적으로 서술된 규모 6.5의 지진은 2000년 7월 1일에 발생함을 고려하여 2000년 7월 1일 지진을 본진으로 분류하여 위의 문서인 아이슬란드 지진 뒤에 기록했다.
}}}}}}}}}}}} ||

5. 관련 문서



[1] 미국 지질조사국 [2] 대만 중앙기상국 [3] 역대 관측된 지진 중 가장 높은 최대 지반 속도다. [4] 계측진도 10.0 # [5] # [6] # [7] 당시 중국의 침공으로 오인한 시민들도 많았는데 대만 리덩후이 총통이 지진이 일어나기 한 달 전 ' 대만 중국은 각각 대등한 국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중국이 노발대발하여 대만을 침공하겠다는 엄포를 놨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덩후이 총통이 중국에서 대만을 침공할 경우 홍콩, 상하이시, 난징시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응수해 양안관계가 험악일로를 걷고 있었다. [8] 2010년 행정구역 개편 후 신베이-타이중 순으로 인구 기준 2위 지만, 정치적 목적을 가진 광역 행정구역 통합이었기에 신베이를 제1의 도시로 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제2의 도시 또한 대부분 가오슝을 지목한다. [9] 정확히는 "양안관계는 특수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다."라는 리덩후이의 발언이 있었는데 이는 얼핏 보면 중화민국이라는 독립된 민주주의 중국을 강조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훗날 리덩후이가 대만 독립주의자인 게 드러난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중국과 관련된 모든 정체성을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발언이었다. 이에 장쩌민 주석이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대만 침공을 거론할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이를 전해들은 리덩후이는 "만약 대륙이 대만을 침공해오면 상하이시, 난징시, 홍콩(!) 또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로 응수했다. 즉 어차피 죽을거 고추가루 수준이 아니라 캡사이신을 거하게 뿌리고 죽겠다는거다 [10] 말싸움한 뒤 떨어져서 지내던 남녀 주인공이 지진이 나자 바로 서로에게 통화를 시도하여 아주 오랜만에 통화를 하게 되지만 수화기 넘어 여자 주인공은 이미 약혼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11] 1999년 921 대지진 이후 23년만에 발생한 규모 7급(1차 M 6.5, 2차 M 7.3)의 대지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