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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 알렉스 새먼드, 니콜라 스터전 | |
관련 사건 | 자코바이트, 스코틀랜드 자치운동, 웨스트 로디언 질의, 1979년 자치권 이양 투표, 1997년 자치권 이양 투표,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독립 투표, 여론조사), 영국의 자치권 이양 |
1979 Scottish devolution referendum
1. 개요
1979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뤄진 첫번째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이다. 당시에는 Scottish Parliament가 아닌 Scottish Assembly의 설치를 묻는 투표였다.[1] 유권자 투표율이 아닌 총 유권자 찬성률 40% 이상이라는 어이없는 조건 때문에 지금도 비민주적 투표로 언급된다.[2]2. 배경
스코틀랜드 자치권 관련법은 1913년에 이미 준비중이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모든 과정이 정지되었다. 전후에는 자치권 이양 절차 없이 그냥 흘러가다가 1960년대 경기불황을 계기로 1967년 해밀턴 보궐선거에서 SNP가 승리하고 1974년 10월 영국 총선에서 SNP가 11석, 플라이드 컴리가 3석을 획득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여당은 노동당이었는데 스코틀랜드의 표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자치권 이양에 재시동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74년 킬브랜던 위원회가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 권한 이양을 하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1976년 11월에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통합법을 제출했는데 격한 토론 끝에 1977년 2월에 철회되고 같은해 11월에 스코틀랜드법( 1978년 스코틀랜드법)과 웨일스법을 따로 제출했고 이후 통과되었다.[3]
그런데 자치권 이양에 반대하는 의원들 중 한명인 노동당의 조지 커닝엄이 총 유권자 40% 찬성 조건을 요구해서 법안이 개정 통과되었다.
3. 여론 조사
MORI(현 IPSOS/MORI)가 선거 전까지 4번 여론조사를 했다.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찬성여론이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날짜 | 조사기관 | 찬성 | 반대 | 무응답 |
1979년 2월 27일~28일 | MORI/스코티시 데일리 익스프레스 | 42% | 42% | 16% |
1979년 2월 20일~22일 | MORI/스코티시 데일리 익스프레스 | 54% | 33% | 12% |
1979년 2월 12일~14일 | MORI/LWT Weekend World | 55% | 28% | 16% |
1978년 4월 5일 | MORI/LWT Weekend World | 63% | 27% | 10% |
4. 결과
찬성 | 반대 | 유권자 투표율 |
51.6% | 48.4% | 63.6% |
유권자 비율 | |||
찬성 | 반대 | 불참 | 조건 |
32.9% | 30.8% | 36.3% | 찬성이 40% 이상 |
It’s worth noting that if the same model had applied to the EU referendum two years ago, Brexit would not be happening.
2년전의 브렉시트 투표에 같은 모델을 적용한다면 잔류할 것이라는 것에 주목할만하다.
Sorry Scottish Labour, this is the truth about who ushered in Thatcher ..., The National(2018)[4]
전체 유권자중 찬성표가 40%가 돼야 가결된다는 조건에
미달되어 부결되었다. 이에 1978년 스코틀랜드법도 폐지되었다.2년전의 브렉시트 투표에 같은 모델을 적용한다면 잔류할 것이라는 것에 주목할만하다.
Sorry Scottish Labour, this is the truth about who ushered in Thatcher ..., The National(2018)[4]
노동당의 40% 조항과 같은 비협조적인 태도에 화가난 원내 SNP 정치인들은 이후 1979년 3월 28일에 제임스 캘러헌 내각에 불신임 투표를 해버린다.[5] 투표 이전에 제임스 캘러헌은 "이게 가결된다면 역사상 처음으로 이른 크리스마스에 찬성하는 칠면조들로 기록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하고 자치권 이양에 강하게 반대하는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 정권이 들어선 것. 더군다나 SNP는 11석에서 2석으로 쪼그라들어버린다. 이후 토니 블레어 내각이 나오기 전까지 보수당 내각 시기에는 자치권 이양 투표를 재개하지 못했다.
5. 정당간 입장
- 노동당: 여당이었던 노동당은 스코틀랜드의 표를 끌어와야 하지만 최종적으로 독립을 목표로하는 SNP와 그 지지자들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는 자치권 이양과 독립 여론에 불을 지른다는 이유로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반대 의견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결과 총유권자 중 40% 찬성 조건을 달았고 결국 조건미달로 부결되었다. 이후 SNP의 보복으로 제임스 캘러헌 내각이 실각되었다.
- 보수당: 반대파(강성 연합주의자)가 다수였다. 이후 마거릿 대처 내각이 들어오면서 영국-스코틀랜드 관계는 더 악화된다.
- 자유민주당: 자유주의 진영은 과거 스코틀랜드 자치권 논의 당시 스코틀랜드를 지지했던 진영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반대 쪽에 있었다.
- 스코틀랜드 국민당: 자치권 이양에 대한 SNP의 입장이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최종적인 목표가 독립인 것은 같았지만, 자치권 이양으로 인해 독립여론이 꺾일까봐 반대했던 급진 세력도 존재했다. 1979년 투표가 부결된 이후 내각 불신임 투표에서 전원 찬성투표하여 제임스 캘러헌 내각을 실각시킨다. 이후 선거에서 SNP의 의석이 11석에서 2석으로 줄어들었다.
6. 참고 자료
7. 관련 문서
[1]
현재의 스코틀랜드보다 권한이 약한
런던의 의회는 Assembly를 쓴다. 다시 말해, 강화된 지방자치의 도입을 묻는 투표였다.
[2]
아래의 인용문대로 같은 조건을
브렉시트 투표에 적용하면 잔류가 되기 때문이다.
[3]
이 시기에 나온 유명한 질의가
웨스트 로디언 질의이다.
[4]
The National은 친 SNP성향 언론이다.
[5]
찬성 311 반대 310으로 원내 SNP의원 11인이
전원 찬성으로 투표한 것이다. SNP가 반대에 투표했다면, 찬성 300, 반대 321로 부결될 수 있었다.
[6]
당시
SNP의원의 보궐선거 당선은 1960년대 경기불황과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