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신연의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희창(봉신연의) 문서 참고하십시오.
주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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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 西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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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국군 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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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 西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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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5대 국군
문왕 | 文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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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colbgcolor=#FFFFFF,#191919> 시조(始祖)[1] | |
시호 | 문왕(文王) / 문황제(文皇帝) | |
작위 | 서백(西伯) | |
성 | 희(姬) | |
휘 | 창(昌) | |
할아버지 | 주태왕(周太王) 희단보(姬亶父) | |
아버지 | 주왕(周王) 희계력(始季歷)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1152년(?) ~ 기원전 1056년(?) |
고향 | 기산(岐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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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주를 건국한 무왕의 아버지. 주족을 이끌고 상나라 정벌을 준비하던 도중 사망했다.상나라한테 받은 벼슬은 서백(西伯)[2]이었기 때문에, 이름 창(昌)과 합쳐 '서백 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생애
조부인 고공단보 이래 상나라의 조공국으로 있던 주나라(주족)를 다스렸다. 이때 주나라는 현재 섬서성 기산현인 기산(岐山)에 있는 소국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3] 그래도 사람 가리지 않고 잘 대해주는 문왕의 평판이 좋아 주변 제후국들의 인심을 모았다고 한다.문왕은 주나라에서 선정을 펼쳐서 성인으로 불렸는데, 주변 제후국 숭국[4] 군주인 숭후호가 상나라 주왕에게 문왕이 덕이 높아 제후들이 그를 따른다고 하자, 이를 시기 혹은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본 주왕이 문왕을 은허로 소환, 유리에 감금했다. 이에 주나라에서 주왕에게 미녀와 보물 등을 바쳐 문왕이 풀려나오게 했다.[5]
허나 주왕은 이 무렵 문왕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데, 바로 장남인 백읍고를 죽여서 만든 고기로 쑨 죽을 먹였다. 문왕이 눈물을 삼키며 그 죽을 먹자, 주왕은 "성인(聖人)은 사람을 안 먹는다는데, 네가 그러고도 성인이냐?"라며 조롱했다고 한다.[6] 이후 문왕은 상나라 멸망에 남은 일생을 바치게 되었다.
태공망 강상(姜尙) 등 인재를 등용하며 세력을 키운 문왕은 상나라 정벌 전 주나라를 위협하는 견융, 밀수국, 기, 우, 숭후호를 1년마다 순서대로 정벌했다. 주변국들을 정리하고 상나라와의 결전을 목전에 뒀지만 이미 나이가 들어 사망하고 만다.[7] 승하한 문왕의 뜻은 둘째 아들 주무왕이 이어받아 상나라를 정벌하고 천자가 된다.[8]
3. 가족
- 적자
- 장남: 희고(또는 희읍). 백읍고.
- 차남: 희발. 주무왕.
- 삼남: 희선. 관숙선. 관나라에 봉해졌으나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진압당한 이후 처형되어 후손도 남기지 못했다.
- 사남: 희단. 주공단. 노나라의 시조.
- 오남: 희도. 채숙도. 채나라의 시조.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진압당한 이후 유배지에서 죽는다.[10]
- 육남: 희진탁. 조숙진탁. 조나라의 시조.
- 칠남: 희무. 희숙무. 성숙무. 성나라의 시조로 원래 이름이 희무, 희숙무였으나 국명을 성씨로 삼아 성숙무가 되었다.
- 팔남: 희처. 곽숙처. 곽나라의 시조.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3년간 봉지를 박탈당했지만 이후 복귀한다.[11]
- 구남: 희봉. 강숙봉. 위나라의 시조. 주나라에서 사도를 맡았다.
- 십남: 희재. 염계재(담계재).[12] 염나라의 시조이나 후손을 알 수 없다고 기록할 정도로 약했다. 주나라에서 사공을 맡았다. 노나라 염씨 가문이 후손이라고 하나 근거는 없다. 주성왕이 염나라를 심나라(沈國)로 개칭한다.
- 서자
4. 기타
- 문왕이 상 주왕에 의해 감옥에 갇혀있을 당시 감옥에서 역경을 발전시켰는데[14], 이를 주역이라고 한다.
- 1976년 산시성 치산현에서 문왕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주택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은 숨겨져있는 2개의 토굴인데, 여기서 점을 치는데 사용한 갑골 조각들이 대량 발굴되었고, 이를 통해 문왕의 주택임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반대로 말하면 문왕은 여기서 상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한 일종의 점술 실험을[15]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문왕의 일곱째 아들 성숙무는 창녕 성씨의 시조, 열두째 아들 진탁은 창녕 조씨의 시조, 열다섯째 아들 필공고는 거제 반씨의 시조라고 한다.
- 황제(黃帝)의 후손이라고 전해지지만 후대의 미화가 있어보인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봉신연의에서는 서백이 아니라 한 단계 높은 벼슬인 서후(西候)로 나온다. 자세한 것은 희창(봉신연의) 참조.
[1]
무주
성신황제 추존.
[2]
다만
갑골문에는 이보다 격이 낮은 주
방백으로만 기록되어있어, 후대에 미화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3]
이 지역은 21세기 인구도 약 40만 명밖에 안 되는 깡촌이다.
[4]
상족이 직접 다스리는 직속 제후국으로, 이민족인 주나라를 포함한 상나라 서쪽 일대를 관할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5]
사서에 따르면 이때 문왕은 주나라 영지에서 가장 비옥한 낙서 지역을 바치는 조건으로 악형인
포락지형을 폐해달라고 했고, 주왕은 문왕의 의도를 알았지만 낙서가 탐이 났기 때문에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허나 역사학자들은 포락지형 따위 일화들이 후대에 과장되었을 확률이 높다고 보는 편이다.
[6]
해당 설화는 조금씩 변형된 버전들이 전해진다. 심지어 주왕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당시 상나라 종교 의식에 따라 오히려 주족을 받아들이는 제스처로 우대한거지 홀대한게 아니라고 보기도 하나, 자식 잃은 문왕 입장에서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7]
참고로
사기에 따르면 재위기간만 50년에 수명은 90살이 넘었다고 하지만, 과장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수명이 50대인데 재위기간으로 잘못 해석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8]
이때 아버지 서백 창에게 '문왕'이란
시호를 추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망하기 몇년 전부터 문왕이
천명을 받았다며
왕을 자칭했다는 설도 있다.
[9]
훗날 태임을 본받겠다는 의미에서 지은 호가 사임당. 즉,
신사임당이란 이름의 모티브가 된 사람이다.
[10]
다만
아들이 이후
채나라는 잇는다.
[11]
참여 여부에 논란이 있어 소극성과 반성 기미를 참작해 사면받은 모양. 곽나라도 후손들이 잇는다.
[12]
뒤에 나오는 염나라도 담나라로 불리기도 한다.
[13]
춘추시대에 전차에는 세 명이 탑승했는데 왼쪽, 중앙, 오른쪽에 타는 사람을 각각 거좌, 거어, 거우라 했다. 거좌가 전차의 주인이며 활을 쐈다. 거어는 전차를 몰았고 거우는 힘이 센 사람으로 창을 썼다.
[14]
여러 정황상 온전히 본인이 다 지은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애초에 상나라 전후 무렵부터 있던 역괘를 배워 본인 나름의 체계화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주왕이 문왕을 살려준 것도 자기 원정길 등에 써먹기 위한 이런 점술 능력 덕분 아니냔 주장도 있다.
[15]
신정국가인 상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그 종교 교리부터 무너뜨릴 혹은 대체할만한 뭔가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게
역경 등으로 드러났다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