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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09:45

담조전쟁

호남내전에서 넘어옴
譚趙戰爭
Hunan Civilwar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채견유의 반란3.2. 탄옌카이의 전진3.3. 화평의 결렬과 우페이푸의 참전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6.2. 사건

1. 개요

1923년 탄옌카이 자오헝티 사이에 후난성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전쟁. 우페이푸의 지원을 받은 자오헝티가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담연개 조항척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해서 담조전쟁으로 부른다. 호남내전이라고도 한다.

2. 배경

신해혁명 이후 호남성은 신사 출신의 탄옌카이가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1913년 계축전쟁에서 국민당의 압력으로 독립을 선포했던 탄옌카이는 위안스카이에게 찍혀 축출되고 탕향명이 호남장군에 임명되어 호남은 북양군벌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허나 1915년 위안스카이 홍헌제제를 선포하고 황제에 오르려 하자 차이어, 량치차오, 탕지야오가 이에 맞서 호국전쟁을 일으키면서 추방, 감금되었던 청첸, 자오헝티를 비롯한 상군의 장령들이 복귀하여 루룽팅 등과 힘을 합쳐 탕향명을 축출하고 호남성을 북양군벌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탄옌카이 정권을 다시 수립했다.

하지만 1917년 돤치루이 내각이 임명한 푸량쭤가 호남독군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탄옌카이 정권은 붕괴되었다. 탄옌카이는 1917년~1918년의 호법전쟁과 1920년 안직전쟁을 이용하여 푸량쭤와 그 후임인 장징야오를 축출하고 3차 탄옌카이 정권을 수립하는데 성공했으나 청첸계 장령들이 일으킨 평강정변에서 평소에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자오헝티가 지원을 거부하는 바람에 하야를 통전하고 상하이로 떠나야 했다. 자오헝티는 청첸계 장령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호남의 지배자에 등극, 호남성헌을 발표하고 호남자치를 선포했다.

허나 북방에서는 차오쿤 우페이푸 직예군벌 정권이 압박해오고 남방에서는 쑨원 중국국민당이 북벌을 주장하면서 압박하여 자오헝티 정권은 남북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였다. 여기에 쑨원이 북벌을 주장하면서 호남성 내부의 탄옌카이 세력들이 호응, 북벌을 요구하고 탄옌카이를 사령관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1922년 호남성장 선거에서 탄옌카이 세력이 아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1922년 가을에 중국국민당에 정식으로 가입한 탄옌카이는 연성자치론을 버리고 다시 호남의 자파 장령들을 사주하여 호남성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3. 전개

3.1. 채견유의 반란

그러던 중 1923년 6월, 호남 서부에 주둔한 탄옌카이계 장령인 원릉(沅陵) 진수사 채견유(蔡䋌猷)와 자오헝티 사이에서 아편 취수 문제로 분쟁이 발생했다. 자오헝티는 채견유를 면직하였는데 탄옌카이 계 장령들은 자오헝티에게 채견유 면직 철회를 요구하는 한편 탄옌카이에게 호남으로 돌아올 것을 청했다. 이에 6월 13일 자오헝티는 채견유를 독판으로 부임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7월 13일에 채견유가 호남 서부의 독립과 자오헝티 토벌령을 발표하면서 전쟁이 터졌다.

7월 15일에 자오헝티는 쑨원 및 서남의 각 성에게 연치정부 조직을 제안했지만 7월 16일 쑨원은 탄옌카이를 호남성장 겸 상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호남 내부의 혼란을 부추겼다. 7월 20일의 장령회의에서 장령들은 군사 대응을 반대하고 평화 해결을 주장했다. 7월 25일에 상군 군장 17인이 성헌 옹호, 자오헝티에 대한 복종과 채견유 토벌을 통전했다. 다음날인 7월 26일, 탄옌카이가 호남에 돌아와 호남성장 및 북벌토역군총사령관에 취임했다.

3.2. 탄옌카이의 전진

8월 7일 루디핑 등이 탄옌카이-자오헝티 중재를 상의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8월 19일, 자오헝티는 호헌총사령관에 취임하여 8월 23일 총공격령을 발동, 본격적인 담조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초기 전황은 탄옌카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서 자오헝티의 주력부대인 예카이신의 휘하부대들이 탄옌카이에 붙어 8월 31일 장사를 기습했고 자오헝티는 부득이하게 북으로 후퇴했다. 9월 1일 탄옌카이 군대가 장사에 입성했고 장사시의 공단과 성의회는 평화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루디핑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한편 호북독군 소요남에게 파병하지 말 것을 통전했다. 하지만 반조옹담의 분위기가 차차 짙어지면서 곳곳에서 탄옌카이의 입성을 환영하는 시민대회가 개최되었다.

9월 8일 탄옌카이가 위주(衛州)를 점령하자 각 상회, 공회, 농회, 교육회, 율사공회 등은 대표를 파견해 탄옌카이의 입성을 환영하고 학계와 공단연합회는 자치성헌 취소, 언론, 출판, 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모든 군벌 및 제국주의와 합작 거부, 혁명적 민주파 환영 등을 외치며 자오헝티 정권에 대한 반감과 중국국민당에 대한 환영을 드러냈다. 9월 13일 자오헝티는 반격을 감행해 장사를 탈환했으나 힘이 부쳐 잠시 정전하고 탄옌카이 측과 화평교섭에 들어갔다.

3.3. 화평의 결렬과 우페이푸의 참전

9월 14일부터 탄옌카이와 자오헝티 사이의 화평교섭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0월 14일 중립을 지키며 중재에 나서던 루디핑이 탄옌카이에 합류하면서 화의는 결렬되었고 10월 17일 자오헝티는 우페이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페이푸는 즉각 이에 응해 악주에 양호경비총사령부를 설치, 스스로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휘하 장령들을 파견하여 자오헝티를 돕게 했다. 또한 자오헝티의 측근이자 바오딩 군관학교 학맥을 중심으로 하는 1사단 2여단장 탕성즈가 신파 장령들을 규합하여 자오헝티를 지지하게 했다.

11월 2일 채견유 부대가 창사에서 직군의 공격에 격퇴되었고 11월 14일 탄옌카이는 압도적인 직군의 공격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쑨원의 지시에 따라 루디핑 등을 거느려 광동으로 퇴각했다. 12월 31일, 자오헝티가 채견유의 잔여부대를 완전히 격파하면서 담조전쟁은 자오헝티의 승리로 끝났다.

자오헝티는 성의회에서 전쟁 중 탄옌카이에 협력하거나 성헌취소 운동을 벌인 의원들을 제명하기 위해 제명심사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로 인하여 6명의 의원들이 제명되고 탄옌카이와 자오헝티의 중재에 실패해 호남을 떠난 국회의장 임지자(林支字) 등에게도 숙청의 칼날이 가해졌다. 또한 학생, 노동자 단체 등에 대해 자오헝티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여겨 11월 호남자치대학을 치안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유로 폐쇄하고 수구산공인구락부가 탄옌카이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폐쇄, 반발하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유혈진압했다. 또한 악북농공회도 폐쇄되고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4. 결과

탄옌카이 계열은 호남에서 물리적으로 제거되었으나 이후 국민혁명 운동의 대열에 더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고 자오헝티는 호남의 권좌를 지키게 되었으나 직예군벌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전처럼 호남자치를 노골적으로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자오헝티는 우페이푸의 요구에 따라 호남성헌을 차오쿤 헌법에 편입시켰고 직예군벌의 군사적, 정치적 통제를 감수해야 했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