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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양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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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衡陽保衛戰(헝양 보위전)
일본어: 衡陽作战(헝양 작전)
영어: Defense of Hengyang (헝양 수비전)
헝양 공방전
제2차 세계 대전 중일전쟁의 일부
파일:faf2b2119313b07ea6e3952506d7912397dd8c45.jpg
▲ 형양 공방전 형세도
파일:304263426d633030.jpg
일본군 전차부대
파일:88abf8bbc19d4d1d8073ccd914821688.png
▲ 기관총 사격 중인 국민혁명군 병사
파일:Hengyangdefense.jpg
▲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헝양 주민 유골
날짜
1944년 6월 22일 ~ 1944년 8월 8일
장소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헝양
교전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일본 제국
지휘관 파일:대만 국기.png 방선각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요코야마 이사무
결과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일본군의 헝양 함락
영향
국민혁명군이 재정비할 시간 확보
병력 파일:대만 국기.png 17,600명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약 10만명
피해규모 파일:대만 국기.png 전투요원 4,700명 사상, 비전투요원 2,900명 사망, 포로 9,400명[1]
- 시민 3,100명 학살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일본측 통계: 19,000명 사상
- 중국측 통계:48,000~60,000 사상.

1. 개요2. 배경3. 전력
3.1. 일본군3.2. 국민혁명군
4. 경과
4.1. 국민혁명군의 전쟁 준비4.2. 강동 연안 및 경계진지 전투4.3. 제1차 형양 공방전4.4. 제2차 헝양 공방전4.5. 제3차 헝양 공방전
5. 결과6. 일본군의 전쟁범죄
6.1. 학살6.2. 강간6.3. 건축물 및 문화재 파괴
7. 후일담8. 참고 문헌

1. 개요

1944년 6월 22일부터 8월 8일까지 헝양시에서 벌어진 공방전. 일본군은 47일간에 걸친 시가전 끝에 헝양을 함락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혁명군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악에 받친 일본군은 헝양 공략 후 학살, 강간, 파괴 등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2. 배경

헝양은 후난성 중남부의 교통거점과 물자 집산지이며, 광둥성과 광시성 일대의 문호였다. 중일전쟁 시기, 국민정부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중심지가 서쪽으로 이동했는데, 이중 상공금융기관 및 문화기관 다수가 형양으로 이전했다. 또한 형양은 전시의 충칭, 쿤밍에 이어 제3의 상업도시이자 금융 중심지로, 중국인들은 허양을 "작은 상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헝양엔 호궐문(胡闕文)의 신민기계공장, 주금수의 화학전기공장, 담가준(談家駿)과 오사훈(吳士熏)의 주철공장, 예우계의 민생철공장, 축섭신(祝燮臣)의 기계공장, 석경복(石慶福)의 고화전기 수리공장, 장왈림(張曰琳)의 기계공장, 강인귀(江仁歸)의 영생화학공장 등 중국을 대표하는 산업단지는 전시에 헝양과 헝양 외곽의 백사주, 황차재, 합강으로 이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1943년까지 허양에 자리잡은 규모가 큰 공장은 215개이며 수공업 기업은 천개에 육박했으며 종업원은 약 1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헝양의 상공업자들은 당시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본 공군의 공습을 무릅쓰고 오전 동안 상점을 새롭게 꾸려 소비자들을 맞이했고 오후에는 시내에서 방공훈련을 이수하면서도 상점을 운영해 자정까지 영업을 했으며, 심지어 밤을 세우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가게도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시의 헝양을 '불야성(不夜城)'이라고 불렀다. 당시 국민혁명군 제10군 제10사단장이었던 갈선재(葛先才)는 훗날 헝양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헝양의 증수구에서 황차재까지 약 십여개의 거리와 샹강 양안의 공장이 이전에 없었던 성황을 이루었다. 샹강에 두 척의 배가 마주보고 있어서 강의 넓이와 상업의 번창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제10군의 병사였던 장홍희는 당시의 헝양성이 "거수마룡(車水馬龍: 수레와 말의 왕래가 많아 매우 떠들석한 상황), 모든 것을 다 갖췄다."라고 회고했으며, 장제스는 헝양에서 4차례나 군사회의를 열 정도로 이곳을 중시했다.

그러던 1944년 봄,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거듭된 패배를 당해 해상 보급로가 마비되었다. 이에 일본은 중국 대륙을 뚫어서 보급로를 개통하기로 결정하고 1944년 4월부터 대륙타통작전을 개시했다. 그동안의 전쟁을 치르면서 전력 소모가 극심했던데다 얼마 전에 미국의 압력으로 유일한 전략예비군인 Y군을 버마로 파견해야 했던 국민혁명군은 무기력하게 무너졌고, 결국 일본은 제4차 창사 전투를 승리하고 창사를 장악했다. 이후 일본은 요코야마 이사무 중장의 지휘하에 헝양 공략에 착수한다.

3. 전력

3.1. 일본군

3.2. 국민혁명군

4. 경과

4.1. 국민혁명군의 전쟁 준비

5월 29일, 중화민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후난성 국군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미 육군이 남서 중국공군기지의 안보를 보장하고 일본의 공격을 지연시킬 것이니 2주간 헝양을 지키고 효과적으로 적의 침투를 저지하라."

이에 제10군 군단장 방선각은 군대를 이끌고 헝양에 진주하여 방어 준비를 갖췄다. 방선각은 헝양 외곽의 방어시설을 검사한 결과 진지의 범위가 너무 넒어 기존의 군사력으로는 철저하게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기존 공사를 포기하고 방어시설을 안으로 수축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다음과 같이 배치시켰다.
1. 제3사단은 헝양성 안을 방어하되 적시에 병력을 이동시켜 다른 수성구 방어선을 지원한다.
2. 제190사단은 오마귀구, 고무당, 연꽃지대에 주력을 배치해 우익에 중점을 두며 방어포를 촨시(泉溪)의 뢰하 서안에 있는 신부두에 배치하고 포병대 전방기지를 설치한다. 그리고 후난 철도-제경호의 서안-만당에서 오공교까지의 방어선에 경계 진지를 설치한다.
3. 에비 10사단은 마왕묘, 토리갱, 오자정, 황차령에 방어선을 설치하며 주력군은 도로 서역, 장가산, 풍수산, 오계령, 강서 회관 선에 주둔하고 1중대는 정병산과 고령의 독립 거점에 주둔한다.
4. 54사단(1개 연대 병력)을 임시로 편성하여 동가만에서 하산까지의 방어선을 따라 경계진지를 점령하고 주력은 풍가충, 좌변화 좌측 기슭을 따라 하구까지 거점을 유지한다.
5. 신편 19사단(1개 대대 병력)은 안탑을 거점으로 삼고 성안의 진지를 엄호하며 고가당, 삼리정, 호요, 마왕묘 방어선에 경계 진지를 건설한다. 그리고 주력은 초교, 관신도, 기와평에서 도로 서역까지를 점령하고, 와자평, 도로 서역간 지역을 중점적으로 사수하며, 두가항, 이라이묘 앞 거리, 청산 거리, 두선묘에 방어진지를 건설한다.
6. 헝양 경비보안 지원대(1개 중대 병력)은 석고취 일대에 주력을 배치하고 적의 도로 서역 진입을 저지한다.
7. 포병부대(야산포 총 147문)는 안봉사, 현 정부, 익양로, 만국상점 인근, 청천로 서쪽 지역에 진지를 설치한다.
8. 군사령부의 위치는 중앙은행이고 전진 지휘소는 오게령에 설치한다.

여기에 미군은 쿤밍에서 허양 수비군을 지원하기 위해 37전방포 9문, 75산포 6문, 구포 26문, 로켓포 2기를 준비했다. 제10군속 포병 대대는 대대장인 장쭤샹 중령의 인솔하에, 곤명으로 가서 이 무기들을 수령하고 훈련을 받았다.그런데이들이 헝양으로 돌아가던 중 광서 계림 포병 제1여단에 의해 억류되어 모든 무기를 빼앗길 뻔했으나 장쭤샹이 장제스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나서야 비로소 광서를 떠날 수 있었으나 그때는 이미 헝양이 공격당하고 있어서 진입이 불가능했다. 결국 이 무기는 헝양 공방전에 쓰이지 못했다.

6월 중순, 장제스는 10군 보급과 관련해 유비붕 후방부장을 파견하여, 일본군이 도시를 포위하기 전에 530만 발의 소총탄과 2만8000발의 수류탄을 서둘러 수송했다. 이후 방선각은 헝양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 30만 명에게 도시를 떠나도록 권유했다. 이에 광둥-한커우 철도국과 상계 철도국은 기차의 동서구역에서 헝양시민을 소개시키기로 합의했다. 이후 도시에 남아서 방어군과 함께 도시를 사수하기로 결의한 수천 명의 시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민은 기차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갈선재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피난민들은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데리고 기차에 찹승했다. 참으로 혼란하고 처참한 광경이었다. 차내에는 사람이 꽉 차 있었고 차 꼭대기에도 사람이 꽉 차 있었다."

그후 1944년 6월 18일 창사를 함락한 일본군은 리링, 상담, 주저우 등지를 잇달아 공략한 후 헝양으로 쳐들어왔다.

4.2. 강동 연안 및 경계진지 전투

6월 19일, 일본군 선봉대가 하부군과 리수이 강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제3사단과 맞붙었다. 당시 제3사단은 샹강 동서 양쪽에서 일본 육군의 대규모 부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의 전진 속도를 늦추기 위해 지연 작전을 수행했다. 6월 22일, 일본군의 폭격기가 처음으로 헝양을 폭격했다. 이후 일본군 폭격기들이 매일 날아다니며 비행장 및 시내를 폭격했다. 일본군 폭격기들이 떨군 소이탄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자, 헝양 제10사단 28예비연대 및 10군 직할 소방부대가 즉시 투입되어 불을 껐다.

6월 22일 저녁 8시, 일본군 제 68사단이 상강변 동쪽에서 남쪽으로 진군하여 헝양시에서 30리 떨어진 촨시에 도착했다. 이에 국민혁명군 190사단 제568 대대 제1경계부대가 투입되어 소규모의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주민들의 협조에 힘입어 가볍게 격퇴하고 뢰하 양안에서 일본군과 대치했다. 6월 23일 새벽, 일본군 68사단은 다시 촨시에서 강을 건너 국민혁명군이 지키고 있던 신부두에 공격을 가했다. 이에 국민혁명군 190사단 568대대 제1경비대대 병사들은 박격포와 기관총을 동원해 일본군의 목선과 고무보트를 모조리 전복시켰다.

6월 23일 오후, 일본군은 정면 공격이 쉽지 않다는 걸 파악하고 촨시의 남쪽으로 몰래 진군하여 강을 건넜다. 190사단 568연대 제1경계부대는 이 사실을 파악하고 뢰강 서안에서 철수하여 오마귀구에 귀완했다.

4.3. 제1차 형양 공방전

6월 27일, 일본군은 샹강을 건너 황차령, 고령, 강서회관, 장가산 등지의 국민혁명군을 향해 돌진했으나 큰 성과를거두지 못했다. 이에 6월 28일 새벽에 제 68, 116사단이 기습 공격을 감행해봤지만 뜻밖에도 국민혁명군의 방어가 매우 견고해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황차령 인근에 배치된 국민혁명군은 박격표를 동원해 68사단에 퍼부었고 68사단장 사쿠닌 히로토 중장, 하라다 다이조 참모, 마쓰자카 소좌 등 여러 고위 장성들이 부상당했다.

6월 29일, 제6사단 제116대대는 새벽에 공격을 개시했지만, 도로 옆에 주둔하고 있던 국민혁명군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일본군 독립보병 제5연대가 투입되었으나 탄약이 부족하여 공격이 실패했다. 6월 30일, 일본군은 재차 장가산을 공격했으나 수비대는 최신 무기로 반격하여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7월 1일, 일본군은 대규모의 화포를 퍼부었고 공군까지 동원해 장가산을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이러한 일본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린 국민혁명군 일부 병력은 후퇴했지만 많은 부대는 계속 산에서 저항했다. 일본군 제4비행중대는 산에 바짝 다가갔다가 로켓포 세례를 받고 큰 손실을 입었다.

7월 1일 오후 2시, 제2비행대대가 적에게 접근하던 중 난데없이 2개의 수류탄이 폭발해 비행 중대장이 전사했다. 또한 국민혁명군은 상당히 정밀하게 사용해 비행중대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 포병대대는 계획한 것보다 두배나 많은 탄약을 소비해 탄약이 거의 고갈될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중국 공군과 미군 공군이 수차례 헝양을 지원하려 했지만 일본 공군과 포병부대의 방해로 실패했다. 7월 1일 밤, 일본군 제1대대는 야습을 감행했지만 23시 무렵 격렬한 수류탄 세례를 받고 화재에 휩쓸리기까지한 그들은 제2여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윽고 제2여단과 합류한 제1대대는 제2대대와 함께 7월 2일 오전 1시에 장가 산꼭대기를 점거했다. 그러나 국민혁명군의 반격에 직면했고 일본군 제1대대장이 전사하고 장교 및 군인 대다수가 부상을 입었으며 제2대대장도 부상당했다.

7월 2일, 일본군은 다시 공세를 개시했다. 포병부대가 탄약을 다 썼기 때문에 별다른 지원을 못하는 상황에서도 감행된 공세에서, 제3대대 12중대가 절벽을 기어올라 적진으로 돌격했다. 그때 산꼭대기에 매복했던 국민혁명군이 뛰쳐나와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수류탄을 양손에 들고 투척 후 돌진하여 일본군 병사들과 육탄전을 벌였다. 또한 그들은 수류탄이 담긴 상자를 들고 산을 기어올라가 전장에서 분전 중인 아군을 도왔다. 일본군 11군 사령부 일지는 이러한 활약을 보이는 국민혁명군에게 "비록 적이라 해도 경탄받아 마땅하다."라는 찬사를 보냈다.

7월 2일 11시 10분 일본군 12중대가 산꼭대기를 점령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위가 전사했고 11중대에서도 여러 주위 및 소위가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은 일단 이것으로 공격을 종료하기로 결정하고 대신 폭격기 44대를 파견해 형양 주변의 군사시설을 폭격했다.

4.4. 제2차 헝양 공방전

일본군은 1차 공격를 종료한 후 며칠동안 탄약 및 무기를 보급받았다. 모든 보급이 완료된 7월 11일 오전 7시, 일본군은 2차 공세를 개시했다. 형양에 대량의 폭탄, 소티안이 쏟아졌고 독가스가 살포되었다. 그러나 국민혁명군은 절벽 위에 설치된 대형 철근 콘크리트 요새와 지하 진지에서 끈질기게 버티며 수많은 적을 살상했다. 그렇게 4일간 대격전을 치른 국민형명군은 7월 15일에 산지를 포기하고 제2방어선으로 후퇴했다. 이제 일본군은 헝양 남서쪽에서 도시 외곽을 공격했다.

7월 16일, 시민병원의 남쪽 고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의 공세는 북서쪽으로 이어졌지만 국민혁명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일본군 일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아군은 다시 총공격을 개시했으나 지난번과 마찬가지고 극히 일부 지역만 점령할 수 있었고 진전은 더뎠으나 손실은 오히려 더 심했다. 대부분의 보병 중대는 이미 사관생이 중대장을 대리했으며 전황이 매우 좋지 않아 공격이 다시 중지되었다.

7월 17일, 일본군 6, 44전대 및 비행 제1연대는 두차레에 걸쳐 헝양의 주요진지와 방어시설을 폭격했다. 이후 일본군은 야습을 감행해 형양성 외곽 거점을 차례로 공략하고 수비군을 성 내부로 내몰았다. 그러나 국민혁명군은 여전히 거센 저항을 퍼부었고 비행전대를 향해 로켓포를 발사해 큰 피해를 입혔다. 결국 일본군은 7월 19일에 전투를 중단하고 대신 공군을 통한 폭격을 가했다.

7월 20일, 일본군은 재차 공세를 개시했으나 또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 일지에 따르면, 이때까지 형양에서 전사한 사람은 3860명, 부상자는 8327명이며 병에 걸린 이는 7099명으로, 도합 19,286명이 전투불능상태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에 일본군은 어떻게든 수비군을 격멸하기 위해 대규모 폭격을 가했고 형양 시내는 초토화되었다.

7월 21일, 손실이 워낙 컸던 일본군은 일단 군대를 뒤로 물렸다. 그러면서 10군에게 투항을 권고했지만 거절당했다. 그후 일본군은 몇차례 공격을 퍼부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7월 27일과 8월 2일, 중국 공군이 2차례에 걸쳐 형양성내에 착륙해 방선각에게 장제스의 친필 명령을 전달했다. 그 중 8월 2일 장제스의 친필 명령은 다음과 같다.
"헝양의 이익과 손실은 이 나라의 생존이며 결코 정상적인 성공이나 실패에 견줄 수 없다..... 두번째 증원군이 금일 아침에 도착할 것이니끝까지 헝양을 사수하라....."

8월 3일, 일본군은 헝양 공격을 중단하고 헝양성 전체에 폭격을 가했다.

4.5. 제3차 헝양 공방전

8월 4일, 일본군 제11군은 제3차 헝양 총공격을 감행했다. 제5항공군과 68,11사단을 주축으로 하는 공세가 수차례 펼쳐졌고 일본 포병군단은 헝양 인근 마을들에 설치된 토치카를 향해 맹포격을 퍼부어 하나둘씩 무너뜨렸다. 이러한 일본군의 맹공으로, 허양성내 건물이 거의 전부 무너졌다. 그러나 국민혁명군은 적의 압도적인 화력에도 굴하지 않고 거대한 보루를 버리고 지하에 숨은 뒤 포격이 잠시 멈춘 틈을 타 몰려오는 적을 향해 반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심지어 지하에 고인 물이 허리에 이르렀는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중에서 전투를 벌이기까지 했다.

8월 4일 오전 8시, 박격포를 통한 포격이 마무리된 후 일본군은 일제히 보병 돌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국민혁명군은 화재를 일으켜 적의 접근을 차단했고 부서진 건물 뒤에 숨어있던 병사들이 뛰쳐나와 지나가던 일본군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급기야 돌격대를 맡았던 대대가 괴멸되었고, 결국 일본군의 공격은 좌절되었다. 제13, 68사단 소속 포병들이 함께 불을 질러봤지만, 결국 100m밖에 진격하지 못했다. 22시, 일본군은 다시 박격포 등을 동원해 성내에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국민혁명군의 방어기지를 파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제120 보병연대 장병들이 최후의 사활을 걸어 총 돌격했다. 하지만 국민혁명군의 필사의 저항으로 번번히 실패했고 120연대 각 중대의 인원 중 살아남은 이는 40~50명, 적게는 20~30명만 남았다. 돌격대를 맡은 대대도 그 숫자는 1개중대에 불과했고 백병전을 벌이는 부대는 1개 소대 뿐이었다.

8월 5일 오전 7시, 일본군 제 133연대의 우익 대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국민혁명군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대대장 도조 대위가 사망했고 2중대장 사와다 소위가 부상을 입었다. 이로서 일본군은 헝양 공방전을 개시한 이래 7명의 대대장을 상실했다. 일본군은 야간 기습도 번번이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12개의 보병 대대에 10명의 장교만 남아있는 등 일본군의 손실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또한 58사단은 항공기-야전 중포의 협력 공격을 통해 적을 제압하려 했지만 국민혁명군은 끝까지 버텼고, 일본군의 전진은 늦어졌다.

그러다가 8월 6일 오후 10시 30분경, 마침내 일본군 51여단이 헝양성의 도심에 침입해 시가전을 개시했다. 뒤이어 한밤 중에 일본군 제 58사단이 주요 방어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국민혁명군든 건물 하나하나마다 배치되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저항했다. 제57여단장 시모 소장은 이 와중에 국민혁명군 병사가 쏜 총알이 머리를 뚫어버리는 바람에 즉사했다. 이에 일본군은 제 6, 제 44, 제16, 제48, 제 90 항공대대를 동원해 국민혁명군을 향한 맹렬한 폭격을 퍼부었다. 그럼에도 헝양 외곽의 충칭 육군 보병 제 44, 100, 79, 37사단의 역습이 상당히 강력해 일본군에게 또다시 큰 피해를 입혔다.

8월 7일 새벽, 일본군 11군 야전 중포병대가 2시간 동안 포격을 퍼부었다. 헝양시는 연기에 휩싸였고 진지 벙커가 대부분 무너졌다. 여기에 항공 25, 48, 6대대의 합동 공습이 이어졌고 제 116사단과 제 58사단이 반복적으로 보병 돌격을 감행했고 독가스를 살포했다. 결국 한계에 부딪힌 많은 국민혁명군 병사들이 이날부터 백기를 들고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여전히 저항하는 병사들이 많아서, 일본군은 날이 어두워진 뒤에도 포격을 멈추지 않았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국민혁명군 10군장 방선각은 참모장 손명옥(孫鳴玉)에게 충칭에 보낼 최후의 전보를 작성하도록 명령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이 오늘 아침에 성 북쪽을 돌파하여 성내에서 시가전을 전개했다. 우리 장병은 사상자가 거의 다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한 목숨을 바쳐 이 직책까지 오른 것에 대해 나라에 보답할 것이며 군인의 천직을 다하여 평생 동안 자식을 길러온 뜻을 저버리지 않겠다. 이 전보는 아마 마지막 전보일 것이다. 내생에 다시 보기를!"

그러나 부하들이 자살하려는 그를 만류했고, 결국 그는 남은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8월 8일 오후 21시, 손명옥 참모장은 일본군 사령부에 찾아가 휴전을 요청했고 일본군은 이를 수락했다. 뒤이어 방선각이 직접 일본군 사령부로 찾아가서 살아남은 국민혁명군 장병 및 장교 전원에게 어떠한 해꼬지를 하지 않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이로서 헝양 공방전은 47일만에 막을 내렸다.

5. 결과

국민혁명군 제10군은 이 전투에서 약 5,600명의 사망자를 냈고 포로 9400명을 기록했다. 반면 일본군은 사상자가 19,000명에 달하며 고급장교 390명이 전사하고 520명이 부상당했다. 중국측 사료에는 일본군 사상자가 약 48,000명~60,000명에 달한다고 기록되었지만 역사학계는 이를 지나친 과장으로 간주하고 있다.

6. 일본군의 전쟁범죄

6.1. 학살

남악사 불교 간행물 <해조음(海潮音)>에 따르면, 남악과 형양성에서 학살된 중과 여승은 2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7월 2일, 일본군은 헝양 변두리 지역을 점령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16살이었던 양선우(楊善瑔)는 일본군이 마을에 기관총으로 총격을 가해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여러 사람들이 일본군이 준 식수를 마시고 병에 걸려 죽는 광경을 목격하고 훗날 이 사실을 폭로했다. 또한 당시 8살이었던 사독원(謝篤元)은 거리가 시체로 가득찼고 아버지가 일본구에게 살해된 것을 목격했다.

7월 21일, 헝양시 기차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소대에 속한 한 병사가 동탕의 홍씨 성의 소녀를 강간하려다가 여성의 부친과 삼촌이 휘두른 괭이로 살해되었다. 이 소식은 즉각 일본군에게 보고되었고, 일본군은 즉시 보복에 착수했다. 다음날, 일본군 소대는 총 출동하여 현지 주민 18명을 살해하고 집 235개소를 불태워 10개 마을에 거주하는 200명을 집이 없는 처지로 내몰았다. 또한 11월 23일, 일본군은 헝양 외곽의 진주산에서 5명을 살해하고 개에게 먹였다. 이렇듯 헝양 전투를 치르면서 악에 받친 일본군은 헝양 공방전 전후 시민 3,100여 명을 학살했다.

6.2. 강간

전후 조사에 따르면, 헝양성의 옛 길롱 거리에서만 500명 이상의 여성이 일본군에게 강간당했다고 한다. 또한 상녕현 내 부녀자 5만 567명과 기양현의 3873명의 부녀자가 성폭행을 당했다. 6월 하순, 일본군은 헝산의 탄보 거리에 진입해 도망치던 수십명의 여성을 체포해 근처의 개인 주택에 가둔 뒤 윤간했다. 헝양 시민 류롱샹(劉隆祥)은 6월 30일 일본군이 광탕 마을에 침한 후 하루 동안 12명이 강간당했다고 회생했으며 광탕 마을과 인근 마을의 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한 후 강에 뛰어내리거나 정신 이상에 걸렸다고 밝혔다. 또한 근처 연못과 댐에는 종종 익사한 여성의 몸이 떠다녔다고 덧붙였다.

또한 강간을 저지르는 걸 막던 헝양 주민이 살해당한 사례도 많았다. 7월 5일 남악사의 스님이 광제에서 부녀자를 강간하는 일본군 병사들을 말리다가 총검에 찔러 살해당했다. 7월 21일엔 위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17세 소녀의 아버지와 삼촌이 강간을 시도한 병사를 죽였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주민 18명을 살해하고 집 235개소를 불태웠다. 또한 12월에는 남악 마을 사람들이 한 여학생을 성폭행한 일본군 병사를 처형하자 일본군이 보복으로 주민 13명을 총살형에 처했다.

6.3. 건축물 및 문화재 파괴

스구서원은 헝양 전투 당시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서원이 위치한 석고산은 민둥산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헝양 도서관 관사는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보관되었던 장서 2천여 권은 잿더미로 변했다. 또한 일본군은 헝양 공방전 당시 농촌 곳곳을 방화해 농가 500여 집을 전소시켰다. 그리고 유명한 서예가 및 회화가인 쩡시(曾熙)의 작품들은 대부분 그의 고향인 헝양에서 보관되고 있었으나 헝양 공방전 이후 파괴되거나 일본군에게 도난당했다.

7. 후일담

1944년 8월 20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전 부대에게 헝양에서 전몰한 수비대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전보로 명령했으며, 10군단장 방선각을 포함해 10군 소속 각 사단장에게 청천백일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그는 종종 방선각과 10군을 본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부하들에게 얘기하곤 했으며 전후 방선각이 돌아왔을 때 그가 적에게 투항했다는 걸 완강히 인정하지 않고 대대적인 환영식을 베풀어준 후 다시 39집단군 부총사령관 겸 10군장을 맡겼다. 반면 형양 공방전을 지휘하면서 병사들이 학살과 강간, 방화를 일삼는 걸 방조한 요코야마 이사무 중장은 1946년 7월 미군정에게 체포되어 1948년 8월 군사법정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다가 1950년 7월에 금고형으로 감형되었고 1952년 4월 21일 교도소에서 63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8. 참고 문헌


[1] 이중 8000명 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