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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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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호
韓主浩 | Han Joo-ho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201003311723077141.jpg
본관 청주 한씨[1]
출생 1956년 9월 28일[2]
서울특별시
사망 2010년 3월 30일 (향년 53세)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도 인근 해역
복무 대한민국 해군 특수전전단
기간 1975년 ~ 2010년
임관 준사관후보생 41기[3]
최종 계급 준위
최종 보직 해군특수전전단 교관
주요 보직 해군특수전전단 교육훈련반장
해군특수전전단 특임대대 지원반장
가족 배우자 김말순(金末順)[4]
1남 한상기(韓相祺)[5], 1녀 한태경(韓汰冏)[6]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3묘역-312묘판-9467호

1. 개요2. 생애3. 순직4. 상훈5. 경력6. 사망 관련 논란7. 추모8. 여담

[clearfix]

1. 개요

(장비 부족과 반복된 잠수로) 몸에 상당히 무리가 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식 같은 애들이 물 아래 있어 잠수를 하지 않을 수 없다.[7]
천안함 피격 사건 구조현장에서.
대한민국 해군 군인이며 해군 UDT/SEAL 준사관이었다. 종교 불교이며, 법명은 해륜이다.

2. 생애

파일:external/bemil.chosun.com/20110628152212.jpg

1956년 9월 28일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한종영(韓鍾永, 1928. 1. 29 ~ 1978. 5. 16)[8]과 어머니 전주 최씨 최복금(崔福今, 1935. 1. 20 ~ 2008. 5. 4)[9]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가난하여 대한민국 해군 부사관에 복무할 조건으로 군장학생으로서 수도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하여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75년 2월, 대한민국 해군 하사로 입대한 뒤 같은 해 6월 1일 부사관후보생 36기로 임관하였다. 이듬해부터 35년간 줄곧 특수전전단에 근무했다. 한 준위는 교육훈련대에서 18년간 교관경력을 비롯해 특공대 팀장, 교육훈련반장, 특임대대 지원반장 등을 거쳤고, 25년간 부사관으로 복무한 후 준사관후보생 과정에 지원하여 2000년 준위로 임관했다. 또한 지난 2002년 8월 KBS에서 UDT요원이 되기 위한 48기 훈련생도들의 훈련과정을 생생히 담아 보도한 수요기획 "지옥에서 살아오라!"에서 훈련교관으로 등장하기도 했다.[10] 2009년 3월에는 청해부대 소속으로 소말리아 파병되기도 했다. 당시 파병 장병 중 최고령이었다. 당시 한 준위는 " 군인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기본임무" 라며 "나라가 여러모로 어려운데 이번 파병이 국민 모두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힌 참군인이었다. 해군지 2009년 03·04월호, 33페이지 참조.

2000년에는 부산광역시 태종대 앞바다에 유실된 M16 도약지뢰 대전차지뢰를 폭파해체한 바가 있다. #

3. 순직

2010년 3월 27일 천안함 피격사건 하루 뒤의 새벽 백령도로 급히 파견되었다. 한주호 준위는 출동 명령이 없었지만, '아들과도 같은 이들이 바다 속에 있다.' 라는 통화와 함께 자발적으로 구조작전에 참여하였고, 그는 30일 함수 부분에서 탐색구조작업을 펼치다 잠수병으로 실신해 미 해군 구난함 USS 살보(Salvor) 함의 감압 챔버(Chamber·감압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오후 5시쯤 순직했다. 향년 53세였다. 그는 함장실에 실내 진입을 위한 인도용 밧줄을 설치하는 팀에 속해 있었다.

그는 아끼던 후배와의 전화에서 '오늘 무조건 격실 전부를 탐색해 후배들을 구해줘야겠어' '가족들이 애태우고 있다, 빨리 구조해야해, 책임지고 해낼 거야' 등 희생정신과 군인정신을 보여주었고, 영웅이라는 칭호도 부족할 만큼 진정한 군인과 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보국훈장 '광복장'만이 추서되었지만 한 준위의 그동안의 군인으로서의 업적과 공로에 비해 부족한 예우라는 여론의 질타가 이어졌고[11],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무공훈장 수여 검토 후에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제3 장교묘역[12]에 안장되었고, 그 희생은 국정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영결식 당시의 영상이다.[13] 당시 UDT 대원들이 운구행렬을 가로막는 돌발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한주호 준위를 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대원들의 뜻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UDT 대원들 모두가 군가 《사나이 UDT》를 목메어 부르며 그의 영전에 바쳤다. 그리고 한주호 준위가 풋내기 시절이었을 때 고참이었을 연배의 퇴역 노병들까지 모두 목놓아 군가를 불렀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독기서린 특수부대원들이 눈물을 쏟아낸다는 것만으로도 고인이 살아생전에 얼마나 덕을 쌓았고 후임들에게 잘 대했는지 알 수 있다. 군가를 다 마친 뒤 UDT대원들의 마지막 경례를 받으며 운구행렬은 대전현충원으로 이동했다.

한주호 준위는 동료들과의 통화에서 '오늘(2010년 3월 30일)안으로 모든 실종자들을 책임지고 구조해내겠다.'고 말하고 구조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이 통화내용은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한주호 준위는 '많이 춥고 힘들지만 아빠는 끝까지 계속 할 거야' 라며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한주호 준위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인격으로, 임무에 있어서는 강인한 책임감으로 무장된 아주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한다.

4. 상훈

5. 경력

6. 사망 관련 논란

한주호 준위의 사망장소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데, 천안함 함수에서 작업 중 사망한 것이라는 정부 발표의 구체적 자료나 증언들이 서로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해도, 국방부 백서, 함수 구조 책임자였던 권영대 UDT대대장의 증언이 다 달랐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확한 사고지점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링크 KBS가 보도했던 제3의 부표지점 설에 대해서도 정확한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주호 준위가 제대로 된 장비를 장착하고 구조작업에 나섰더라면 숨을 거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실제로 한주호 준위가 사망 당시 사용하던 장비는 시가 30만 원짜리 장비로서 80년대에 사용하던 장비였는데 만약 한주호 준위가 200만 원짜리 최신장비를 사용했더라면 이렇게 순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한 준위의 순직을 계기로 해군을 무작정 욕하던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당시 이들은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각종 안전 기준을 넘는 상태에서 기를 쓰고 탐색 및 구조 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바다 상태도 SSU 못잖은 잠수 전문가들인 미합중국 해군 잠수사들이 작업이 금지되어 있는 기준이라며 잠수를 거부할 정도로 험했다. 이는 음모론을 신봉해 이를 증명하겠다며 자원하여 잠수했다가 실려가는 결과를 맞이한 민간인 다이버도 증언했으나, 악질 음모론자들은 심심하다는 이유로 흥미나 끌려고 그 다이버가 해군에 매수됐다는 전혀 근거도 없는 억지 주장만 반복했다. 그러다가 한 준위가 순직하자, 그때서야 겁이 났는지 난데없이 해군이 사람을 혹사했다고 태도를 바꾸려다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음모론자들 외에도 천안함 전사자 유가족들 또한 현장 상황도 모르면서 감정만 앞세우며 해군이 작업을 게을리하는 거 아니냐고 닦달하고 있었는데, 이후 한주호 준위의 유가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얼마후 더 이상의 희생자가 나오게 할 수 없다고 수색을 중단해 달라고 해군에 요청했다.

유가족들은 사건 초기에 출입 절차를 무시하고 2함대에 들어오려 하다 이를 제지한 해군 헌병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상황 설명을 하고 나가는 함장의 승용차와 2함대에서 임시로 설치한 천막이 색이 검자[14] 죽은 사람 취급이라 여겨진다는 이유로 파손하고 욕하는 등 정당한 법까지 무시하는 행동들을 하면서 여론의 반응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가족이 실종되어 애타는 마음에 바다의 상황에 대해 인지하기 어려우며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걸 감안해야겠지만. 어쨌든 한 준위가 순직하자 유가족 측이 현장 상황도 전혀 모르면서 무리한 구조작업을 요구하여 결국 억울한 희생자를 냈다는 비판까지 들었고 그제서야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과한다.

SSU가 아니라 UDT이자 고령자인 한 준위가 잠수하게된 상황에 대해서는 여러 말들이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특수부대 갤러리에서는 SSU, UDT 출신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끔 말싸움을 하기도 한다. SSU 측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마지막까지 일한 건 우리인데 한주호 준위 사고로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UDT에게 돌아가 본인들이 소외되었다고 주장하고 UDT 측 사람들은 당시 잠수가능자 지원 할 당시 잠수를 거부하여 지원자 조사하던 해군본부 측 장교에게 쌍욕까지 듣는 굴욕을 당해놓고 이제와서 무슨 소리 하냐고 주장한다.[15]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이었던 미 육군 대장 월터 샤프 장군이 조문 후 유가족에게 개인적으로 조의금을 건넸는데, 몇몇 음모론자들이 이를 두고 "미 해군 잠수함과 충돌 후 사망한 자국 군인들의 시신을 인양하다 죽은 대가로 미군이 준 돈"이라는 황당한 음모론을 전개하다 다굴을 맞았고, 몇몇은 형사 처벌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군인이 순직, 전사할 경우 1계급을 특진을 추서하게 되는데 한나라당에서 한주호 준위 소위 특진을 제안하겠다는 발언을 해서 비난을 받았다. 같은 위관이지만 소위는 장교 계급이고 준위는 그 아래 준/부사관 계급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다만, 준위라는 계급의 상징성을 생각하든 어쨌든 준위라는 계급은 소위보다 아래[16]가 맞다. 1계급 특진 자체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만큼, 논란이 될 여지가 있을지언정 절차상으로 물어보는 것 자체는 당연하다. 이 문제는 유가족들이 이를 사양하여 일단락되었다.[17][18]

7. 추모


그를 추모하는 동상[19][20]이 해군교육사령부 정문에 진해만을 바라보는 위치에 세워져있어 매해 3월 30일 추모식을 거행한다.


2022년 3월 30일, 해군 특전단, 제12주기 고 한주호 준위 추모식

8. 여담



UDT 53-2기 출신이자 현재는 군튜버로 활동하고 있는 에이전트 H도 살아생전 그가 나라와 UDT 후배들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셨던 분이며 그 과정 속에서 순직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아덴만 여명 작전 당시 UDT/SEAL 대원들이 삼호주얼리호에 승선하기 위해 사용한 사다리는 한주호 준위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1] 절제공파(節制公派) 31세 호(浩) 항렬. [2] 이는 실제 생일이고 주민등록상 생일은 1957년 9월 8일으로,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실제 생일과 주민등록상 생일이 같이 기재되어 있다. # [3] 본래는 군장학생 하사 출신이다. 하사에서 준위로 임관하면 군번이 새로 나온다. [4] 1955년생으로, 선산 김씨 김기술(金琪戌)의 딸이다. [5] 1986년생으로, 진주교대 ROTC 출신으로 아버지의 순직 당시 1사단 신교대 중위였으며, 전역 후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 중이다. [6] 1990년 6월 11일생이다. 교사의 꿈을 접고 해군 군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7] 한주호 준위는 천안함 피격 당시 경험 많은 베테랑으로서, 경험이 적은 후배들의 사고를 염려하여, 본인이 살신성인하여 보다 많은 다이빙을 자진하였다. [8] 자는 정수(貞洙). [9] 최성호(崔成浩)의 딸이다. [10] 8년 후 한주호 준위가 순직하면서 추모 차원에서 재방송되기도 했는데, 2020년 가짜사나이의 흥행으로 유튜브에 업로드 되었다. #1 #2 [11] 수십 년 군복무하고 전역한 군인에게도 보국훈장은 나온다. 물론 오랫동안 군에 복무한 것도 공은 맞지만, 이번 경우는 수십 년간 복무한 군인이 임무 도중 순직한 상황이기에 보국훈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저때는 보국훈장 수여 조건이 지금보다 좀 널널한 편이었다. 현재는 많이 빡빡해졌다. [12] 해군은 준위를 장교로 대우한다. [13] 장송곡 프레데리크 쇼팽 소나타 2장 3악장인 장송 행진곡이다. [14] 군용 천막의 겉에 입히는 방수포가 고무재질이라 검은색이기 때문이다. 육군은 위장을 위해 국방색을 칠하지만, 해군은 딱히 위장막을 칠 일이 없으므로 비용절감을 위해 별도 도장공정은 거치지 않고 마감 처리를 한다. 그 때문에 색이 검었던 것. 즉 딱히 정치적인 의도나 미신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해였다. [15] 당시 잠수여건이 워낙 악조건이어서 잠수자의 안전상 잠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퍼져가는 음모론과 유가족들의 압박으로 잠수를 강행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해군은 SSU, UDT 대원들을 모아놓고 지원자를 받았다고한다. 하지만 구조전문부대인 SSU가 아닌 UDT측에서만 소수의 지원자가 나와서 지원자 중 한 명인 한주호 준위가 잠수에 투입 되었고 반복적인 잠수 끝에 그만... 이 때문에 당시 지원자를 조사하던 해군본부 측 영관급 장교가 노발대발하여 말 그대로 육두문자를 퍼부었다고하며 이는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김태영 장관의 발언을 통해서도 유추 가능하다. 다만 한 준위의 사고를 기점으로 잠수를 하겠다는 인원들이 많이 늘었다. [16] 아무리 나이가 많은 준위라도 신임소위에게 경례를 붙여야하는 곳이 군대이다. [17] 게다가 당시 아들이 육군 중위로 있었던 만큼 입장이 난처하기도 하다. [18] 여담이지만, 부사관~ 준사관에서 소위로 진급하는 제도가 있는 군대에서는 병 시절부터 군공을 쌓아올려 초급 장교까지 진급한 인원들은 비록 계급은 같을지라도 갓 임관한 소위들과 확실히 다른 대우를 받으며 상급자들도 계급이 낮다고 함부로 하대하기 힘들다. 한 예로 프랑스 외인부대의 경우 원사까지 진급한 장병이 준위를 거쳐서 소위로 진급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같은 연도에 사관학교, 학사장교 등으로 임관한 소위들은 물론 다른 위관급 장교들도 함부로 아랫사람 대하듯이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단, 같은 소위라 해도 국군에서의 그것과 프랑스군에서의 그것이 지니는 상징성이 다르기 때문에 일대일로 비교가 무리이긴 하다. 참고로 프랑스의 각 군 사관학교는 그랑제콜 난이도 이상으로 입학 및 수료가 대단히 어려우며 학사장교 및 기타 루트로 임관하는 인력들도 대개 이에 준하는 난이도의 검증을 거쳐 군에 입문하기에 프랑스에서의 군 장교는 한국으로 치면 행정고시 합격 수준의 위상을 가지므로 소위 계급장 자체가 가지는 상징성이 크다. [19] 모교인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앞에도 있으며, 포항시 남구 송도동 동빈내항에 정박된 포항급 초계함 포항함의 함수에도 있다. [20] K201을 단 K2 소총을 든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