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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5> 출생 | 1874년 11월 27일 |
러시아 제국 모탈[1] | |
사망 | 1952년 11월 9일 (향년 77세) |
재임기간 | 초대 이스라엘 공화국 대통령 |
1949년 2월 17일 ~ 1952년 11월 9일 | |
학력 |
다름슈타트 공과대학교 베를린 공과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
종교 | 무종교( 무신론)[2]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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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립은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쟁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쟁취했다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기적이란 때때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매우 큰 노력을 요구한다.
러시아 태생의 유대계 정치인, 화학자. 초대 수상 다비드 벤구리온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립, 건국을 주도한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
벤구리온이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유태인들의 단합을 주도하면서 건국 후의 초기 정부 지도자로 활동했다면, 바이츠만은 건국 이전 국제 무대에서 유대 국가의 재건을 위한 외교적 지지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으며,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874년 당시 러시아 제국 영토의 일부였던 모탈(현재 벨라루스 영토)에서 출생했다. 1892년 독일로 유학했고, 5년 후인 1897년 스위스로 다시 옮겨 2년만에 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01년부터는 스위스에서 교편을 잡다가, 1904년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로 옮겨 교수로 활동했다.2.2. 아세톤 제조법을 개발한 화학자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두 사람은 같은 과학자이자, 유태인으로서도 상당한 교분이 있는 편이었다.[3])
1910년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설탕을 이용한 인조고무 제조 실험을 하던 중 아세톤의 제조 방법을 우연히 발견했다.[4] 본래 그의 연구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4년 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아세톤이 군사적 가치(무연화약 생산)가 있음을 주목한 영국 정부에 의해 아세톤의 대량 생산에 공헌했다. 아세톤의 성공은 바이츠만이 영국에 대해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 ##
2.3.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
이미 1901년부터 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바이츠만은[5] 아세톤 개발에의 공헌을 통해 얻은 정치적 발언권을 유태 국가 재건에 적극 활용하려 했다. 그는 영국 외무대신 아서 밸푸어에게 '팔레스타인에서의 유태인 국가의 재건'을 영국이 지지해줄 것을 요구했다.그 결과물로 밸푸어는 1917년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태인들의 국가를 세우는 데 협조할 것이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밸푸어 선언이다.[6]
2.4. 건국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바이츠만은 그해 5월부터 9개월 동안 벤구리온의 뒤를 이어 임시정부격인 임시국가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이듬해인 1949년 2월에 성립된 내각제 형태의 첫 이스라엘 정부에서 실질적 지도자인 총리로 다비드 벤구리온이 선출되었고, 바이츠만은 상징적 국가원수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당시 그의 나이가 이미 70대의 고령으로 접어들었던 점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1952년에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전에 타계했다. 향년 77세. 유해는 텔아비브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레호르트에 안장되었다. 이곳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바이츠만 과학연구소가 세워져 있다.[7]
3. 기타
- 1970년대 이스라엘 화폐에 그의 초상이 쓰이기도 했다.
- 영화배우 벤 킹슬리가 그와 닮았다는 평이다. 킹슬리 본인은 유태인이 아니지만, 외증조부가 러시아계 유태인으로, 킹슬리는 유태인을 직접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도 출연한 바 있다. 한편으로는 아돌프 아이히만 체포작전을 다룬 오퍼레이션 피날레에서 아이히만을 연기하기도 했다.
- 동생인 농업경제학자 예켈 바이츠만의 아들 에제르 바이츠만은 영국군과 이스라엘군에서 복무한 뒤 소장으로 전역하고 국방장관과 대통령을 역임했다.
[1]
현
벨라루스
브레스트주 모탈
[2]
바이히만의 종교는
유대교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재로는
무신론자였다.
#
[3]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의 건국 당시, 바이츠만과 더불어 대통령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본인의 나이가 너무 많다면서 사양했다. 하지만 나이가 5살 더 많은 바이츠만이 멀쩡히 대통령이 된 걸 보면 아인슈타인은 정치에 엮이지 않으려고 한 것에 가깝다.
[4]
이 때문에 바이츠만은 화학계 연구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5]
4년 전인 1897년
테오도르 헤르츨 등이 주도했던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6]
해당 서한은 바이츠만이 아닌, 당시 영국 내에서 유태인들의 대변자로 간주되었던
로스차일드 일가에게 전달되었다.
[7]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이전인 1934년에 설립되었다. 노벨상 수상자를 3명이나 배출하기도 한 명문 연구기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