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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릭스 호세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2. 한국에 오기 전
오클랜드 시절 | 세인트루이스 시절 |
캔자스시티 시절 |
3.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
1999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로 마이클 길포일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시범경기에서도 타격감을 과시하더니 5월 9일 KBO 리그 통산 10,000번째 홈런을 친데 이어[3] 5월 29일에는 좌-우타석에서 홈런을 치며 최초로 좌-우타석에서 모두 홈런을 친 선수가 되기도 했다.[4] 6월 20, 21일 한화전에선 두 경기 연속 만루홈런을 첬다. 호세가 이렇게 맹활약을 펼치자 사직구장에는 호세 열풍이 불 정도로 그의 인기는 높았다.
호세는 1999 시즌을 타율 .327, 151안타, 36홈런, 122타점으로 마무리하며 박정태- 마해영과 함께 일명 박마호 트리오로 롯데 자이언츠의 플레이오프 진출 일등공신으로 뽑혔다,
특히 1999년 기적적인 7차전에 묻혔지만 플레이오프 5차전은 호세가 가장 만화같은 모습을 보여줬던 경기였다. 삼성이 1차전과 2차전 승리후, 4차전까지 이기며 롯데가 1승 3패로 1경기만 더 지면 끝나는 상황. 그리고 맞이한 5차전에서 롯데가 5:3으로 밀리는 상태로 9회말을 맞게 되었다. 당시 최고의 마무리였던 애니콜 임창용을 맞아 롯데는 2루타와 볼넷으로 무사 1, 2루의 찬스를 만들었으나 4번타자 마해영이 삼진을 당하고 호세가 타석에 들어섰다.[5] 벤치에서는 호세를 고의사구는 아니지만 볼로 빼면서 안되면 볼넷으로 내보내고 다음타자를 상대하자는 사인을 내보내게 된다. 임창용의 공이 2볼까지의 상황이 가게 되고 다음 공도 볼이었다. 기다리면 걸어 나갈수 있는데도, 호세는 헛스윙을 하였고 다음 공에도 헛스윙을 하였다.
마치 승부를 보자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에 승부욕 하면 뒤지지 않는 임창용은 스트라이크 존에 직구를 쏘아 던지지만 호세가 그대로 받아쳐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플레이오프에서의 역전 끝내기 홈런[6]을 날리며 6:5 승리를 이끌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던 사직 팬들의 열광은 덤. 벼랑끝 상황에서 롯데를 살린 이 홈런으로 결국 롯데는 6, 7차전까지 3연속으로 6:5로 이기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4.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
1999 시즌 후 롯데에서의 호성적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 재진입을 노리며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였다가, 그다지 많이 출장하지 못하며 2001년에 롯데로 복귀했다.
복귀 후 더욱 뜨거워진 호세는 엄청난 불방망이를 선보이며 리그를 지배했고, 2001년 9월 18일 마산야구장에서 벌어진 배영수와의
여담으로 당시 호세는 바로 전년도 양키스에서 20경기 타출장 .241 .281 .345에 1홈런, 마이너 AAA에서 타출장 .310 .379 .567 OPS .901에 11홈런이라는 전형적인 AAAA선수급 성적을 기록하고 왔는데, AAA에서보다 더 압도적인 성적으로 완전히 KBO리그를 파괴해 버린 것을 보면 지금보다도 더 MLB와의 리그 수준차가 심했음을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지표.
시즌 후 롯데는 호세와 재계약하겠다는 의사를 보였고, 롯데와 총액 22만 달러에 재계약하며 2002 시즌도 롯데에서 뛸 걸로 보였으나 호세는 돌연 롯데의 스프링캠프 합류를 거부, 연락을 끊어버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는 당연히 이중계약에 해당되며 KBO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고 호세는 결국 영구제명 처분을 받게 된다.
야만없이지만 이 당시 이중계약 파동만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롯데가 암흑기까지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002년과 2003년, 호세는 애리조나 소속의 마이너리그 팀에서 활약했고 2003 시즌에는 약물 복용 소식이 알려지기도 했다. 다만 롯데는 이후에도 꾸준히 호세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언제든지 재영입하려는 의사를 드러냈고,[9] 호세 역시 한국에서 다시 뛰고 싶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롯데 구단과 KBO 측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KBO 측에서 호세의 영구제명을 풀어주지 않아 복귀가 불발되는 듯 싶다가 롯데 구단의 간곡한 요청으로 2006년 1월에야 드디어 풀어주게 된다. 그리고 롯데는 2006년 시즌을 앞두고 5년 만에 호세를 재영입했다.
5. 롯데 자이언츠 3기 시절
2006 시즌을 앞두고 롯데와 계약하면서 5년 만에 한국에 복귀했다. 동시에 등번호 역시 변경하였는데, 1999년과 2001년에 달았던 기존 등번호 34번 대신[10] 99번을 달게 되었다.
5.1. 2006 시즌
시즌 초반에 잠시 부진하다가 6월부터 대폭발하며 이대호와 홈런부문 1위를 놓고 경쟁했고, 122경기 타율 0.277, 22홈런, 78타점으로 홈런 2위, 타점 4위, OPS 3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클래식 스탯이 좀 약해 보이지만 2006년은 손꼽히는 투고타저 시즌이었으므로 세이버상으로는 wRC+가 163으로 매우 훌륭한 성적이다. 참고로 이게 65년생 선수가 한국나이로 42세에 거둔 성적이며 2006년은 21세기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이라 리그에서 손에 꼽힐 만한 뛰어난 타격 능력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이 때문에 수비수로는 전혀 출장하지 않아 풀타임 지명타자로만 뛰었다.[11]5.2. 2007 시즌
시즌 후 일찌감치 재계약에 성공하면서 2007년 시즌도 롯데에서 뛰게 되었지만, 캠프 막바지에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며 시즌을 늦게 시작했고, 여기에 노쇠화까지 겹치면서 5월 11일 웨이버 공시되고 말았다. 그 와중 퇴출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출장한 경기인 5월 10일 인천 SK전에서 홈런을 하나 치는데, 이 홈런이 호세의 2007년 시즌 유일한 홈런이자 동시에 KBO에서의 마지막 홈런, 그리고 2024년 7월 24일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에서 열린 kt wiz와 SSG 랜더스의 경기에서 추신수가 갱신하기 전까지 약 17년간 KBO 역대 최고령(만 42세 8일) 타자 출장 기록, 최고령 안타 기록으로 유지 됐었다.[12]당시 마지막 경기 호세의 활약으로 SK에 승리를 거두었고, 상대전적 3승2패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호세가 퇴출 당한 후 SK에 상대전적 1승 12패를 제대로 셔틀을 당했기에 팬들은 아직도 당시 호세 퇴출을 아쉬워 하고 있다.
사실 나이가 상당히 많았기에 이전부터 방출설이 계속 나돌았고, 부진도 심했기에 대부분의 롯데팬들이 호세와의 작별을 예감하고 있었다. 호세는 롯데에 남기를 희망하며, 자신이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하려 했으나 부상과 노쇠가 겹치며 떨어진 배트스피드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그렇게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6. 롯데 방출 이후
롯데 방출 이후 멕시코 리그로 갔으나, 이번에도 2번째 약물 복용이 들통나서 방출[13], 캐나다 캘거리의 독립리그 팀에서 뛰다가 2009년 시즌에는 Northern League 라는 독립리그에 있는 Schaumburg Flyers 라는 팀에서 뛰었다. 09시즌에 타율 9위, 출루율 2위를 기록했다.
[1]
이 트레이드가 유명한 것은, NL소속 세인트루이스에서 AL소속 오클랜드로 리그 이동을 했는데 그해 내셔널리그 타격왕을
윌리 맥기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2]
여담으로, 1991년 MLB 올스타전에
훌리오 프랑코도 뽑혔다.
[3]
상대
허용투수는
해태 타이거즈의
최상덕. 이에 앞서 9999번째 홈런을 친 타자가 바로 해태의
양준혁이었는데, 불과 며칠 전
한화 이글스의
송지만이 홈런을 치고도
누의 공과를 범하는 바람에 이 홈런이 무효가 되어 양준혁은 10000번째 홈런타자가 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4]
후에
최기문,
서동욱,
조쉬벨,
국해성,
로하스도 좌-우타석에서 홈런을 쳤다.
[5]
당시 호세가 심각한 타격부진에 빠져있어 호세가 5번을 맡고 있었다.
[6]
역전 끝내기로서 최초인 이유는 플레이오프 끝내기 홈런 자체는 1996년 쌍방울의
박철우가 최초로 기록했기 때문. 이때는 동점 상황에서 날린거라 역전 끝내기 홈런은 호세가 최초인 것.
[7]
호세가 출장 정지를 받고 시즌을 마감하자
우용득 감독 대행은 호세를 1군에서 말소하고 그 해 갓 입단한 신인 우타자를 1군에 처음 올리는데, 그 선수가 바로
이대호이다. 사실상 호세 때문에 1군에 데뷔하게 된 것.
[8]
이승엽이 홈런왕을 차지하고 ops도 1.017로 준수했지만, 정작 타율이 2할7푼밖에 되지 않아 MVP치고는 매우 빈약했다.
[9]
이 때문에 당시 롯데 프런트 및 스카우트 팀은
막장을 찍던 성적과 더불어 다른 용병 영입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호세바라기' 라며 팬들에게 욕을 먹었다.
[10]
이 당시 34번은 2005년부터 팀의 일원이 된 부산 출신 투수
이용훈이 달았다. 본인이 삼성과 SK 시절부터 34번을 달았던 지라 애착이 남달랐다고 한다.
[11]
이로 인해
최준석이 우익수(!!!)로 잠시 뛰는 일이 생기게 된다.
[12]
실제 생년월일은 1956년생이나 KBO 등록 생년월일이 1961년생이었던
훌리오 프랑코가 더 나이가 많았겠지만, 프랑코는 사실 실제로 1956년생인지도 불명이며 무엇보다 메이저리그 올스타급일만큼 클래스도 다른 선수다.
[13]
선수 본인 말로는 2007년 아킬레스건 치료 과정에서 스테로이드가 쓰여서 그렇다고 한다. 실제로 아킬레스건염 치료로 고농도 스테로이드를 주사하는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