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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0:33:46

페루 주재 일본대사관 인질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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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
2.1. 기습적인 침입2.2. 협상2.3. 전격 진압작전
3. 주범과 목적4. 여파5. 매체

1. 개요

1996년 12월 17일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 무장단체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MRTA) 조직원들에 의해 페루의 수도 리마의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일어난 인질극.

20세기에 일어났던 대표적 인질구출 작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외교관의 신분이 언제든지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2. 전개

2.1. 기습적인 침입

당시 페루 주재 일본대사관은 12월 23일에 있을 아키히토 덴노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연회가 열릴 계획이었고 여기엔 페루 주재 한국 대사였던 이원영 대사도 초청을 받아 현지시각 오후 7시 40분쯤 리마에 위치한 일본대사관으로 출발했다. 당초 파티 시작은 오후 6시였으나 소베로 페루수산장관과의 오징어 선단 입어권 교섭 논의가 길어진 까닭에 출발이 늦었다. 아울러 부부동반 초대였으나 수산장관과의 면담이 늦어져 다행히 부인은 동행하지 않았다. 이 대사가 탄 차는 20여분 뒤인 8시쯤 리마 시내 중심가인 산 이시드로에 위치한 일본 대사관저에 도착했다. 이 대사가 파티가 열리는 대사관저 뒤뜰 정원에 들어서자 이미 수백 여명의 인사들이 칵테일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 대사는 아오키 모리히사 일본 대사와 인사를 나눈 뒤 외국 사절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프란시스코 투델라 페루 외무장관이 파티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별안간 관저 밖에서 폭음과 함께 총성이 울려퍼지고 무장 게릴라 14명이 관저에 난입한 후 "엎드려! 움직이면 쏜다. 우리는 '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 당원이다. 해치지 않을 테니 지시를 따르라!" 스페인어로 외쳤다. 순식간에 일본 대사관저에 모인 주요인사 700여 명이 인질로 전락했다. 즉각 페루군과 경찰이 응전에 나섰으나 1시간 30분이 지나도록 계속되던 교전은 밤 10시에 가까스로 멈췄다. 관저에 인질로 있던 각국 대사들이 확성기로 페루군에 교전중지를 요청한 까닭이었다. 게릴라군은 지역라디오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부녀자와 노약자를 석방하겠다"고 통보한 후 밤 10시부터 11시 사이 100여 명을 우선 석방했다. 이후 게릴라군은 인질들을 외교사절, 일본인, 페루인, 정부각료 등 각 방으로 분산 수용했고 외교사절들은 관저 2층에 위치한 대사관 침실에 수용되었다. 게릴라군은 삼엄한 경계태세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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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들의 모습

이튿날 아침 이 대사는 인질범들이 자신을 비롯한 대사들에 대한 전화통화를 허용하여 자신이 무사함을 알렸다. 그리고 그 날 오후 인질범들이 독일 캐나다, 그리스 대사를 일차로 석방했는데 인질범들이 페루 정부와 수감된 MRTA 수뇌부와 인질들을 맞바꾸는 협상을 중재하란 뜻에서 풀어준 것이었다. 이때 이 대사와 친분이 있던 앤서니 뱅상 캐나다 대사는 먼저 석방되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 대사의 손을 꼭 쥐었다고 한다. 한편 페루 정부는 인질범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테러리스트와의 타협은 없다'는 원칙을 내세워 아예 협상에조차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는 대사관의 전기와 수도까지 단절시키면서 인질범들을 압박했다. 결국 궁지에 몰린 인질범들은 "불응 시 30분마다 인질 1명씩 살해하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여기에 전기와 수도마저 단절되면서 대사관에 비치된 비상식량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고 국제 적십자사 요원들이 생수와 음료수, 그리고 간단한 식량을 대사관 안으로 반입했으나 그것마저도 양이 부족했던 관계로 식빵 하나를 두 명이 나눠먹어야 했을 정도였다.

2.2. 협상

나흘째가 되던 20일, 인질범들은 전과 같은 방법으로 이번엔 페루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의 대사들 3명을 석방하기로 하고 명단을 발표했는데 브라질, 쿠바, 그리고 대사들이 자체적으로 선정한 국가의 대사 이렇게 3명이었는데 브라질은 남미 최대의 국가인 만큼 그 영향력이 높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으며 쿠바 대사는 요통으로 인질로 있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대사들은 회의 끝에 신임장 제정 순서에 따라[1] 이집트 대사를 뽑았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한국 대사가 석방이 결정된 대사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찾아갔는데 뜻밖에도 쿠바 대사가 한국 대사에게 난 오늘 나가지 않겠으니 한국 대사가 나가라고 한 것. 놀란 한국 대사가 "저들이 당신보고 나가라고 하는데 왜 안 나갑니까?"라며 극구 사양했으나 쿠바 대사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하던 한국 대사는 당시 안면을 익히고 있던 좌익계 국회의원 디아스 칸세코 의원에게 조언을 구했고 칸세코 의원은 자신이 얘기해 보겠다며 인질범 중 한 명과 접촉했다. 그랬더니 인질범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당일 오후 6시 30분께 2층 인질로 잡힌 대사들을 수용한 2층으로 와서는 "한국 대사가 쿠바 대사 대신 나가라."고 통보했다.[2]

마침내 20일 오후 8시 대사관을 나왔지만 사실 이것은 완전한 석방이 아닌 협상을 마친 후 곧바로 대사관저로 귀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 '일시적인 석방'이었다. 그래서 한국 대사는 엄밀히 말해서 페루 정부와 협의를 마치면 바로 대사관저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미 석방된 3명의 대사들이 도밍고 발레르모 교육부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만약 문제가 생기면 엄청난 희생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를 표시했지만 발레르모 장관은 페루 정부의 종전 입장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 와중에 한국 정부는 "대사관저로 귀환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으나[3] 자신만 혼자 도망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대로 대사관으로 귀환하려 했으나 페루군이 이 대사의 귀환을 막아서는 바람에 귀환에 실패했고,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며 리마 한 호텔에 투숙해 있다가 1997년에 본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한 상황에서 2년 10개월 만에 대사직을 사직하고 귀국했다.[4]

페루 정부는 인질범과 4개월여간 협상을 하면서 교환코자 하는 구속된 테러범들 숫자를 줄여 나갔다. 또 테러 진압을 위해 자국 육해공군 장교 150여명을 선발, 미 육군 특수부대 고문관의 지도하에 비밀리에 대사관 부지 모델 하우스를 만들어 진압 훈련을 실시했다. 외부에서 대사관 내부로 진입하는 땅굴을 파 대사관 밑바닥까지 잇기 시작했는데 이를 위해 인근 주택 하나를 매입해 입구를 위장시켰다. 테러리스트들이 굴착 작업을 하는 소리를 듣고 뭔가를 의심하는 듯하자 대사관 주변에 수시로 헬리콥터를 띄우고 장갑차들이 확성기를 달고 방송을 내보내는 식으로 숨겼다. 이 과정에서 테러리스트와 장갑차 승무원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져 테러리스트가 경찰 장갑차 탑승자에게 소총탄 몇 발을 쏘았으나 빗맞는 사건도 일어났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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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직접 방탄복까지 입고 선봉에 나선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정치적으로 몰락한 이후 이 일은 더 이상 회고되지 않는다.

2.3. 전격 진압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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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 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진입구 폭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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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으로 진입하는 페루 특전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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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 탈환 후 환호하는 페루 특전대원들

마침내 1997년 4월 22일, 오랜 대치로 긴장감이 누그러져 있던 테러리스트들을 향해 작전이 개시됐다. 이는 페루군 특수부대원들이 대테러 훈련을 충분히 마치고 땅굴 굴착을 완료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지연된 것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대치가 길어지며 전 세계에서 뉴스도 거의 안 나올 만큼 잊혀져 갈 만큼 늘어져 테러리스트들이 지치고 방심하게 되는 효과도 냈다.

한창 실내 축구[6]를 즐기던 테러리스트 일부가 대사관 밑바닥이 폭발함과 동시에 무력화되었고, 뚫린 구멍으로 신속해 진입한 특수부대 150여명이 인질범 전원을 사살하고 남아있던 71명의 인질 중 테러리스트에게 사살된 판사 1명을 제외한 전원을 구해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수부대원도 2명 전사했다.

3. 주범과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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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을 습격, 점거한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 게릴라들

자신들이 밝힌 바와 같이 이들은 극좌 테러조직인 '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MRTA) 소속 단원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수감된 MRTA 지도자 빅토르 폴라이(Victor Polay)와 동료 400여 명의 석방이었으며 당시 페루 대통령이던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1995년부터 진행해 오던 '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검거, 수감된 상태였다.

이들은 후지모리 대통령이 일본계라는 것과 페루 정치권과 사회에서 일본 대사관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점을 노렸다.[7] 특히 이들은 후지모리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투델라 외무장관이 대사관저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직후 인질극을 벌일 정도로 치밀함을 보였다. 당시 대사관에서 시중을 들던 웨이터 중 한 명이 이들 게릴라군의 첩자였다는 카더라가 존재했다.[8]

4. 여파

페루 정부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테러리스트들과의 협상은 없다'는 원칙을 초지일관 유지해 나갔다. 이 대사도 페루 정부의 이러한 강직함을 높이 평가했을 정도였다. 수많은 외교사절들과 자국의 정치인들이 인질로 잡힌 상황에서도 '테러리스트와 협상불가'라는 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갔는데 이것은 오히려 수많은 인질들을 살리는 효과를 낸 것이다.

리마 증후군이 이 사건을 계기로 조명되었는데 테러리스트들이 인질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처지에 동감하게 되고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상을 일컫는다.

일본 대사관은 이후 다른 건물로 이전했고 대사관 건물은 철거되었다.

사건 당시 페루는 대테러작전에 전문화된 특수부대가 없었기 때문에 자국 육해공군 장교들을 선발해 급조한 특수부대를 편성했다. 훈련 기간이 짧았음에도 이들의 숙련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미 육군 고문관도 놀랐다고 한다.

FN P90이 처음으로 실전에 등장한 사건이기도 하다. 님로드 작전으로 H&K MP5가 유명해진 것처럼 이 사건을 계기로 P90이 유명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시에 대우정밀의 자동산탄총 USAS-12를 특수 부대원 중 1명이 장비하고 있는 모습이 방송에 나와서 당시 밀덕들의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

성공적인 작전이긴 했으나 특수부대원들이 항복 의사를 표한 테러리스트까지 전부 사살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비판받기도 했다.

이 사건 당시 인질로 잡힌 한국인 중에 광개토대왕릉비의 조작설을 제기한 재일 사학자 이진희와 그의 아들도 있었다.

5. 매체



[1] 신임장(credential)은 특정인을 외교사절로서 파견한다는 내용의 문서로 외교사절의 장(주로 대사)은 접수국에 도착한 이후 접수국 측에 신임장을 제정하며 직무를 개시한다. 대사들 간의 서열은 신임장 제출 일자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국제관습법상 원칙이자 의전의 기본 사항으로, 제출 일자가 빠를수록 서열이 높다. 여기서 '제정'은 '법률 제정'의 '제정'(制定)이 아닌 提呈, 즉 '제출'(提出)의 동의어로 사실상 현대 한국어에서는 '신임장 제정'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다. [2] 쿠바 대사가 살신성인을 한 것이 아니라 반군과 같은 이념을 가진 국가의 대사로서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컸다. 오히려 일찍 석방될 경우 본국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그다지 좋게 비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리라는 것. [3] 당시 기사를 보면 유종하 당시 외무부 장관은 석방 직후 이원영 대사에게 일본 대사관저 복귀 문제에 대해 이 대사 본인 선택에 맡긴다고 했다고 나온다. # 그러나 어디까지나 언론플레이용 발언이었을 뿐이지 자국 외교관이 다시 인질로 잡히는 것을 허락할 정부는 어디에도 없다. [4] 한편 한국 정부는 인질극 직후 이원영 대사가 인질로 잡혀서 주한 페루 대사관의 인질극 대응에 제약이 걸린다고 판단해 주 아르헨티나 대사 조기성을 급히 페루로 파견했다. 이원영 대사가 석방된 뒤에도 한국의 인질극 대응은 조기성 대사의 지휘하에 이뤄졌다. [5] 이 장면은 현장에 항시 대기중이던 텔레비전 카메라에 찍혀 생중계됐고 관련 다큐멘터리에도 나온다. 장갑차에 탄 경찰관이 화면상에는 보이지 않는 테러리스트와 욕설을 주고받다가 뻐큐를 날리고 곧바로 총격을 받고 장갑차 안으로 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상 링크 [6]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테러리스트들이 이나 체스 같은 오락거리들을 요구해 반입해 왔다. [7] 당시 페루는 남미에서 브라질과 아울러 친일 분위기가 강했던 나라였다. [8] 페루 정부도 역으로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의 공개로 회견장에 진입한 기자들이 촬영한 영상을 인질 구출 작전에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