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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21:02:57

퍼거슨 소총

Ferguson Rifle
퍼거슨 소총
파일:Ferguson Rifle.jpg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종류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 소총
원산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영국
]][[틀:국기|]][[틀:국기|
속령
영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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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역사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 1776년~ 1778년
개발 패트릭 퍼거슨
개발년도 1770년
생산년도 1776년~ 1778년
생산수 200정
사용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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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영국
]]
사용된 전쟁 미국 독립 전쟁
세부사항
탄약 .650 구형 탄환
급탄 브리치로딩
단발
작동방식 플린트락
총열길이 1,200mm
전장 1,500mm
중량 3.5kg
발사속도 6~8RPM
유효사거리 180~270m }}}}}}}}}
1. 개요2. 상세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4. 여담5.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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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orgotten Weapons의 리뷰 및 사격[1] 영상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군인이었던 패트릭 퍼거슨 (Patrick Ferguson, 1744년~ 1780년)이 설계한 소총으로, 영국군에 도입되어 실전에서 사용된 최초의 후미장전식 소총이다.

2. 상세

패트릭 퍼거슨 소령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군 장교로, 외삼촌이었던 제임스 머레이의 영향을 받아 10대 시절부터 군 경력을 시작했다. 7년 전쟁 중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 잠깐 복무했으나 지병으로 얼마 안 가 귀국했으며, 1768년 제70보병연대의 지휘권을 매입하여[2] 서인도 제도에서 복무했다. 이 기간 동안 퍼거슨은 영국군을 위한 새로운 후장식 소총을 설계했다.

퍼거슨 소총이 세계 최초의 후장식 총기는 아닌데, 이미 16세기 헨리 8세가 사냥용 총으로 브리치로딩 총기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바다 건너 명나라에도 체단총(掣電銃)이라는 이름의 브리치로딩식 화승총을 운용했다. 그러나 당시 후장식 총기는 기술의 한계로 화약 폭발로 인한 가스 밀폐가 완벽하지 못해 메커니즘 자체에 결점이 있었다. 퍼거슨의 설계는 이전의 후장식 메커니즘의 결점을 보완하여 군대에 제식 보급을 하려 한 최초의 시도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당대의 전장식 머스킷은 장전을 위해서 총구를 통해 화약과 탄환을 넣어 꽂을대로 쑤시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했는데, 퍼거슨 소총은 총구가 아닌 약실을 통해 곧바로 장전할 수 있어 장전 속도가 획기적으로 빨랐다. 방아쇠를 보호하는 방아쇠울을 크랭크축으로 하여 한 바퀴 돌려 주면 나사산으로 닫혀 있던 약실이 개방되어 장전이 가능했으며, 약실 내부에 탄환과 화약을 장전하고 방아쇠울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려 주면 약실이 폐쇄되었다. 장전 속도가 빠르다는 점 외에도 퍼거슨 소총은 당대 머스킷 대비 장점이 여럿 있었는데, 강선이 파여 있기 때문에 사격의 정확도가 훨씬 높았으며, 꽂을대로 총구를 쑤시기 위해 일어서거나 앉아 있어야 했던 머스킷과 달리 장전 절차가 간편하여 엎드려 엄폐한 상태에서도 장전이 가능하다는 전술적인 이점도 있었다.

퍼거슨은 자신의 발명품을 영국군에 테스트용으로 제출했는데, 200야드 밖에서 분당 6발의 속도로 표적을 정확하게 맞추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상황에서도 장전 및 사격을 수월하게 해 내[3] 영국군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영국군은 퍼거슨 소총을 경보병 부대에 시범적으로 지급하여 운용하기로 했고 약 100정의 퍼거슨 소총을 생산했다. 이렇게 생산된 100정의 퍼거슨 소총의 시범 운용을 위해 시험용 부대가 창설되었으며, 퍼거슨이 해당 부대의 지휘관을 맡았다. 이 시험용 부대는 한창 독립 문제로 시끄럽던 13개 식민지로 파병을 나가 실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실전 운용된 전투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때는 1777년 9월에 벌어진 브랜디와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퍼거슨은 오른팔에 총상을 입어 불구가 되었으며, 회복하는 사이에 퍼거슨 소총 부대는 해산되어 부대원도 전원 원대로 복귀했다.

퍼거슨 소총이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당시 영국군 제식 무기였던 브라운 베스를 밀어내지 못하고 도태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산업 혁명 초기 영국의 생산 기술력으로는 기술적으로 너무 앞서간 이 소총을 생산하는 데 시간과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었으며, 약실 부품이 너무 무거웠던 탓에 실전에서 개머리판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쉽게 부러지는 문제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퍼거슨 소총은 영국군에서 도태되었고, 패트릭 퍼거슨은 3년 뒤인 1780년 킹스 마운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4] 이후 영국군은 그로부터 100년 뒤인 1866년이 되어서야 후장식 소총인 스나이더-엔필드를 제식으로 채택했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4. 여담

브랜디와인 전투 직전 퍼거슨의 부대는 길목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 길목으로 두 명의 적국 장교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퍼거슨은 상당한 명중률을 자랑하던 자신의 발명품으로 무장하고 있었던데다가 그 자신도 숙련된 사수였기에 이들을 사살할 수 있었지만, 상대방이 자신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던데다 등 뒤를 비겁하게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유로 그냥 이 둘에게 별다른 공격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 보내 주었다. 나중에 그는 당시 그 길목을 대륙군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 장군이 프랑스군 장교와 함께 지나갔었다는 후문을 들었으며, 퍼거슨은 그 장교가 조지 워싱턴이었다 하더라도 그날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소회했다. 아직도 퍼거슨이 마주친 두 명의 장교의 신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만일 퍼거슨이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퍼거슨 소총뿐만 아니라 미국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5. 참고 자료


[1] 재생산 버전이다. [2] 당시 영국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에서는 매관매직이 당연시되었다. 영국군에서의 매관매직은 이로부터 약 100년 뒤 크림 전쟁에서의 발라클라바 전투를 계기로 폐지되었다. [3] 흑색화약은 습기에 매우 취약해 비가 오면 머스킷 사용이 불가능했지만, 후장식이었던 퍼거슨 소총은 전장식에 비해 비로부터 화약이 젖지 않게 조치를 취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4] 퍼거슨이 전사할 당시 자신이 발명한 소총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오른팔이 불구가 된 그의 몸 상태를 감안하면 소총을 사격하기에 무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