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오페라 | |||||||
리엔치 |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
탄호이저 | 로엔그린 |
트리스탄과 이졸데 |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
니벨룽의 반지 | 파르지팔 |
1882년 초연 당시 바그너가 직접 연출한 성배의 사원(The Temple of the Grail) 장면 |
1. 개요
바그너의 신성무대축전극 (Bühnenweihfestspiel, Stage consecration festival drama)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서사시 파르지팔을 바탕으로 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만년의 종교적인 이상을 담은 대작 악극으로 바그너의 최후의 작품이기도 하다.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성배의 기사 파르지팔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단순히 전설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을 넘어 자신의 종교관과 철학을 바탕으로 타락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심오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2. 작곡과 초연
바그너는 한창 중세의 전설에 관심을 기울였던 1840년대 중반에 이 파르지팔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으며 이 전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최초 구상한 것은 1857년이었다. 하지만 이후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니벨룽의 반지 4부작 등을 작곡하느라 계속 계획은 미뤄졌다. 니벨룽의 반지의 초연 이후 루트비히 2세의 독촉을 받고 본격적으로 대본 작업에 착수한 바그너는 1880년 초연을 목표로 작곡에 매진했지만 지병인 심장병 때문에 진척도가 느려졌고, 결국 2년이 더 지난 1882년에야 완성되었다.대본은 언제나 그렇듯이 바그너 자신이 썼으며 중세기의 문학가 볼프람 폰 에센바흐(Wolfram von Eschenbach, 1170경~1220경)의 서사시 '파르지팔'을 바탕으로 했다. 바그너는 볼프람의 작품에 크게 매료되어 있었으며 이미 젊은 시절 에센바흐의 다른 작품을 바탕으로 로엔그린을 작곡했다.[1] 파르지팔은 애초에 로엔그린의 후속작이 될 예정이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말년에 겨우 작곡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간 바그너는 이런저런 인생경험을 겪고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불교 사상 등을 접하면서 생각과 신념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파르지팔은 로엔그린과 전혀 다르게 관념성이 강한 작품이 되었다.
초연은 1882년 7월 26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건강이 매우 안좋았던 바그너는 이 작품을 초연한지 7개월만에 결국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3. 작품에 대해
작곡가 본인은 이 작품을 오페라나 악극이라 하지 않고 신성한 무대 축전극이라 했는데, 오페라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바그너가 괜히 이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니다. 작품 자체가 타락과 구원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적 상징과 관념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스토리라인만 보면 좀 무겁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여자 캐릭터는 사실상 쿤드리 한명만 나오고[2] 남녀간의 사랑과 갈등과 같은 통상적인 주제도 나오지 않는다.하지만 관념적이라고 해서 극적인 요소가 부족한 작품은 결코 아니며 타락한 세력을 상징하는 클링조르와 이를 극복하고 구원을 이루려 하는 파르지팔의 대결이 나름 볼만하다. 또한 과거와 비교해서 여성관과 구원관도 많이 바뀌었는데, 이전의 오페라에서는 구원의 주체가 남성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여성이었던 반면 파르지팔에서는 남성 자신이 구원의 주체로 바뀌었으며 오히려 남성이 저주에 빠진 여성을 구원하고 있다.
한편 파르지팔의 음악은 물론 매우 훌륭하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만큼 난해하지는 않다. 물론 이미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통해 과거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만큼 파르지팔의 음악도 탄호이저나 로엔그린처럼 직관적이지는 않으며 특히 2막의 음악은 반음계적인 진행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급진적인 실험을 추구하는 대신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는데, 이는 극 내용도 내용인데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극장의 시설과 음향을 최대한 활용하는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 3막이며 공연시간은 4시간을 훌쩍 넘어간다. 1막은 무대전환음악(Transformation music, Verwandlungsmusik)을 기점으로[3]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4막과 다름없다. 때문에 1막 공연에만 장장 1시간 50분이 소요된다. 2막과 3막은 각각 1시간 10분 남짓 걸린다.
때문에 보통 1막이 끝난 후 1시간 정도로 인터미션을 길게 주고, 2, 3막 간의 인터미션은 짧게 주는 경우가 많다. 2013년 우리나라에서 공연되었을 때도 1막이 끝나고 1시간의 인터미션이 주어졌으며, 2 ~ 3막 사이에는 20분이 주어졌다.[4] 참고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는 보통 막간에 40분에서 한 시간씩 인터미션을 준다.[5]
바그너는 이 심오하고 신성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 떠들석한 세속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극장에서만 상연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물론 현재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있는데 이유는 후술.
4. 줄거리
4.1. 배경 설명
이 오페라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오페라 스토리의 배경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간략하게 언급한다.성배(聖杯, Holy Grail)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 12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잔이다. 항목에 있듯이 예수는 이 만찬에서 술잔에 포도주를 담아 제자들에게 권하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또는 이것은 나의 피이다,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와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이 일화가 나중에 중세의 성배의 전설로 이어진다.
한편 성창(聖槍, Holy Lance)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사망한 후 로마병사가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으로, 이 병사의 이름을 따서 흔히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한다. 이 창은 켈트족 전설에 나오는 항상 피가 묻어 있는 창의 이야기와 맞물려서 성배 못지 않게 중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신앙싶이 깊고 위대한 기사 티투렐은 성창과 성배를 구한 후,[6] 스페인 북부에 있는 몬살바트성에 이 성배와 성창을 보관하고 이 보물들을 수호하기 위한 성배(&성창) 기사단을 조직한다. 이후 티투렐은 나이가 들자 자신의 아들 암포르타스에서 성배 기사단장직을 물려준다.
한편 티투렐 시절 클링조르라는 인물이 성배기사단이 되고 싶다고 몬살바트성에 찾아온다. 그는 과거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성기능까지 포기했지만, 기사단에서는 그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며 성유물을 차지하려는 흑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서 받아주지 않았다. 클링조르는 이에 앙심을 품고 복수를 위해 거세를 통해 얻은 마법의 힘으로 몬살바트성 근처의 숲에 정원(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유흥업소)을 차려놓았으며, 자신의 마법에 걸린 여인들을 이 곳으로 불러 모은다. 이 여인들은 지속적으로 성배수호 기사단의 기사들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면서 성배 수호 임무를 방해한다. 오페라에 나오는 쿤드리도 이 저주에 걸린 여인 중 한명인데, 평소에는 매우 순수하고 순박한 여성이지만 클링조르의 마법이 작동되면 남자를 유혹하는 꽃뱀이 되어 버린다.
부친에 이어 성배 기사단장이된 암포르타스는 클링조르를 처단하기 위해 성창을 들고 클링조르의 본거지로 쳐들어간다. 하지만 경험과 전술력이 없이 혈기만 가득찼던 암포르타스는 저주에 걸린 여인들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클링조르에게 성창을 빼앗기고, 싸움 도중에 이 성창에 찔려서 큰 부상을 입는다.
부상을 입은 암포르타스는 몬살바트성으로 돌아와 온갖 약과 치료법을 써보고 성배(聖杯)앞에 예배도 드리면서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라지만 전혀 차도가 없이 오히려 고통만 가중된다. 성배는 직접 치료의 기적을 내리는 대신 '순수한 바보가 나타날 것이고 그가 당신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테니 참고 기다려라'라는 메시지를 준다. 이에 부상을 당한 암포르타스를 대신해서 성배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노장 기사 구르네만츠가 성배의 메시지를 찾아 나서는 상황에서 오페라가 시작된다.
4.2. 1막
4.2.1. 1장
배경은 몬살바트성 부근의 숲이다.구르네만츠(바리톤)가 시종들을 깨워서 암포르타스왕이 목욕을 하러 올테니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잠시 후 쿤드리라는 여인이 말을 타고 와서는 왕의 부상을 치료할 아라비아의 약 바르삼을 가져왔으며 이게 듣지 않는다면 더 이상 약으로는 그 부상을 치료할 수 없을 거라고 한다. 이윽고 암포르타스가 나타나서 쿤드리의 노력에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암포르타스는 이 약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순수한 바보가 너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성배의 메시지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부상을 고치려면 순수한 바보가 필요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왕이 목욕하러 떠나자 시종들은 쿤드리를 마법에 걸린 이교도라고 비난하고 쿤드리가 이를 음해라고 받아치면서 말싸움이 벌어진다. 구르네만츠가 이를 말리면서 매우 길고 장황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티투렐이 성배와 성창을 천사로부터 건네받은 이야기, 클링조르가 앙심을 품고 복수를 계획 한 이야기, 암포르타스가 낫지 않는 부상을 입게 된 이유 등등 전술한 이 오페라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때 호수 쪽에서 날아다니던 야생백조 한 마리가 화살에 맞아서 떨어지고, 기사들과 시종들이 화살을 쏜 젊은이를 붙잡아온다. 이 젊은이는 파르지팔이라는 인물로, 사람들이 왜 백조를 죽이냐고 비난하자 파르지팔은 적반하장으로 자기는 뭐든지 다 맞출 수 있다고 자랑한다. 구르네만츠가 신성한 숲에서 살생을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게다가 왕이 목욕중인 상황에서 무기를 쓰는 것은 매우 불경한 행동이라고 꾸짖자 몰라서 그랬다고 태연하게 답한다.
어이가 없어진 구르네만츠가 도대체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고 묻자 파르지팔은 자신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며 오직 자기와 같이 살았던 어머니의 이름 헤르체라이데만 알고 있다고 답한다. 이때 쿤드리가 끼어들어서 저 젊은이의 어머니 헤르체라이데는 아들이 전쟁에서 죽은 그의 아버지를 닮을까봐 두려워서 세상과 동떨어진 숲에서 홀로 키웠기 때문에 저렇게 바보가 됐다고 알려준다. 이어 헤르체라이데는 아들이 집 근처를 지나는 기사들을 보고 그들을 따라가 버리자
구르네만즈는 파르지팔의 철없는 행동을 보고 그가 성배의 메시지에 나오는 순수한 바보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를 성배예식을 치르는 성전으로 데려간다. 여기서 무대가 바뀌면서 무대전환음악이 나온다.
4.2.2. 2장
배경은 성전 안이다.성전에서는 장엄한 성찬예식이 거행되고 있으며 파르지팔은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다. 이 예식의 목적은 암포르타스의 기력을 회복하고 부상을 치유하기 위한 것. 예식이 거행되는 중 티투렐의 혼령이 나타나 아들 암포르타스에게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성배의 덮개를 열라고 하지만 암포르타스는 성배를 볼 경우 목숨이 연장되는데 이런 고통을 겪고 오래 사느니 그냥 빨리 죽고 싶다면서 거부한다. 하지만 티투렐이 재차 덮개를 열라고 명령을 하고 기사들이 이에 따라 덮개를 연다. 상처가 재발한 암포르타스가 고통스러워하자 기사들이 그를 가마에 태워 데리고 나간다.
의식이 끝난 후 구르네만츠가 파르지팔에게 무엇을 깨달았느냐고 묻는데, 파르지팔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느낀 것도 없다고 답한다. 이 답변에 실망한 구르네만즈는 그가 성배의 메시지에서 말한 순수한 바보가 아니라 말그대로 아무 것도 모르는 멍청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파르지팔을 성전에서 내쫓는다.
4.3. 2막
클링조르의 성클링조르는 마법에 의하여 깊은 잠에 빠져있는 쿤드리를 깨운 후 가서 성배의 기사들을 유혹하라고 요구한다. 쿤드리는 거부하려고 하지만 클링조르의 마법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때 파르지팔이 클링조르의 성으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클링조르의 부하들이 막아서지만 파르지팔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클링조르는 쿤드리에게 파르지팔을 유혹하라고 명령하면서, 혹시나 너의 유혹을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나의 마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해준다.
클링조르성의 정원(庭園)
파르지팔이 정원에 도착하자 정원에 있던 클링조르의 처녀들이[7] 몰려들어서 파르지팔이 클링조르의 부하이자 자신들의 애인들에게 부상을 입힌 것을 원망한다. 파르지팔은 자기를 막아섰기 때문에 물리친 것 뿐이라고 건조하게 이야기하고, 이에 처녀들은 자신들을 즐겁게 해줄 남자들이 없어졌으니 대신 파르지팔에게 자신들과 놀아달라고 요구하면서 유혹하기 시작한다. 처녀들이 서로 파르지팔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면서 싸움을 벌이는데, 부담을 느낀 파르지팔은 자리를 피해버린다.
이 때 갑자기 쿤드리가 나타나자 처녀들은 겁을 먹고 모두 달아난다. 마법에 걸린 쿤드리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해 있기 때문에 파르지팔은 그녀가 쿤드리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쿤드리는 파르지팔에게 당신의 이름이 파르지팔이라고 알려주고 이때 파르지팔은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다. 쿤드리는 이어서 파르지팔에게 부친과 모친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가 떠난 후 모친이 슬픔에 빠진 채 죽었다고 상기시키면서 이제 모친 대신 자신이 파르지팔에게 사랑을 베풀겠다면서 그를 유혹하고, 이에 두 사람이 키스를 한다.
하지만 키스를 하던 파르지팔은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쓰러지는데, 이 때 몬살바트성 성전에서 성배의식을 치를 때 암포르타스가 괴로워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유혹을 받는 순간 암포르타스가 느꼈던 고통을 파르지팔도 느끼게 된 것. 놀란 쿤드리가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지만 쿤드리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파르지팔은 쿤드리를 밀어낸다.
쿤드리는 왜 암포르타스의 고통은 느끼면서 자신이 저주를 받은 것은 느끼지 못하냐고, 자신의 저주를 풀어달라고(즉 유혹을 받아달라고) 애원하지만 파르지팔은 이를 거부하면서 암포르타스왕에게 가겠다고 한다. 이에 쿤드리는 파르지팔을 비웃으면서 암포르타스를 유혹해서 클링조르에게 성창을 빼앗기고 부상을 입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면서 당신도 자신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파르지팔이 쿤드리를 비난하자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클링조르가 성창을 들고 나타난다. 클링조르는 성창으로 파르지팔을 죽이려고 하지만 성창이 파르지팔의 머리 위에서 멈추고, 이에 파르지팔이 성창을 잡아챈 후 성호를 긋자 클링조르의 성이 무너져 내린다. 파르지팔은 쓰러져 있는 쿤드리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는 잘 알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며 암포르타스왕을 만나러 가겠다고 한다.
4.4. 3막
4.4.1. 1장
배경은 몬살바트성 근처의 야영지이다.배경상으로 2막 이후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나이가 들어 기사단에서 은퇴한 구르네만츠는 기척이 들려서 자신의 숙소에서 나오는데, 숙소 앞에 쿤드리가 서 있었다. 쿤드리는 이제 당신을 위해 일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이것저것 허드렛일을 시작하는데, 구르네만츠가 자신은 이미 은퇴했기 때문에 하인이 필요 없다고 만류한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 멀리서 완전무장을 한 기사가 타고 방패와 창을 들고 다가오다가 풀밭에 앉는다. 구르네만츠는 기사에게 누구냐고 물으면서 오늘은 성배예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에 무기를 손에 쥐는 것은 불경한 행동이라고 하자 기사는 방패와 칼을 땅에 내려놓은 후 창을 땅에 꼽고 투구를 벗는다. 이 기사는 바로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 구르네만츠는 그가 땅에 꼽은 창이 성창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크게 놀라는데, 파르지팔은 자기가 바보였을 때 암포르타스의 고통을 깨닫고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고행의 과정을 겪었으며 이제서야 창을 갖고 왔다고 이야기한다. 파르지팔은 지쳤는지 이 말을 마치고 땅에 주저앉는데, 쿤드리가 그를 간호한다.
구르네만츠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크게 기뻐하면서 그간 암포르타스는 계속 고통으로 고생을 했고 기사들은 신념을 잃어버렸다고 한탄을 한다. 이어 파르지팔에게 당신이 암포르타스를 치료하고 성배의 기사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파르지팔에게 세례를 주고, 이제부터 파르지팔을 왕으로 모시며 자신은 신하가 되겠다고 한다. 파르지팔은 성배의 기사가 된 후 첫 의식으로 쿤드리에게 세례를 주면서 2막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구르네만츠는 그 사건이 성 금요일(성 요한의 축일)의 마법이라고 이야기해준다.
4.4.2. 2장
배경은 성전 안이다.성배의식이 시작되자 한쪽에서는 티투렐의 시신을 담은 관이 들어오고 다른 쪽에서는 부상당한 암포르타스를 태운 가마가 들어온다. 기사들이 선왕 티투렐을 위한 성배의식을 시작하려고 하자 암포르타스는 더 이상 성배를 보고 고통스러운 삶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면서 제발 죽여달라고 비명을 지른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서 당황하는 사이, 성창을 든 파르지팔이 암포르타스에게 다가간다. 파르지팔은 창끝을 암포르타스의 상처에 대면서 당신을 상처 입힌 이 창으로만 당신을 치료할 수 있으며 이제 치료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제 성배 수호 임무는 파르지팔 자신이 하겠다고 선언한다. 암포르타스는 오랫동안 괴롭혔던 상처와 고통에서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면서 감격해하고 파르지팔의 선언도 받아들인다.
파르지팔이 제단에 놓여진 성배 앞에서 기도를 하자 하늘에서 합창소리가 들리고 이어 파르지팔은 성창을 들어 기도하고 있는 기사들을 축복한다. 이때 저주로부터 구원을 받은 쿤드리는 그대로 쓰러져 죽는다.[8]
5. 주요장면
5.1. 1막
전주곡한스 크나퍼츠부슈 지휘, 1951년 7~8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1979~1980년[9]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스튜디오 녹음[10] |
무대전환음악(Verwandlungsmusik, Transformation Music)[11]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1979~1980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스튜디오 녹음 | 주세페 시노폴리 지휘, 1998년 5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12] |
1막 2장 "성배 의식 장면(Grail Scene)"
한스 크나퍼츠부슈 지휘, 1951년 7~8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1979~1980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스튜디오 녹음 |
5.2. 3막
성금요일의 마법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쿠르트 몰(Kurt Moll, 구르네만츠), 지크프리트 예루살렘(Siegfried Jerusalem, 파르지팔), 발트라우트 마이어(Waltraud Meier, 쿤드리), 1992년 베를린 오페라 극장 실황 |
피날레
피에르 불레즈 지휘, 1970년 7~8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1979~1980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스튜디오 녹음 |
6. 기독교, 불교적 색채
성배의 기사, 성창과 성배가 등장하는지라 매우 '기독교적 색채'를 띄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막 중반부 이후 수십분을 통째로 기사단의 예배와 의식을 묘사하는데 할애했기 때문에 이 작품을 관람한 사람들은 이 작품의 종교적 색체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하지만 이 작품은 바그너가 만년에 도달한 종교/철학적 관점이 몽땅 녹아난 작품으로 기독교, 불교, 게르만 신화 등 다양한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오히려 작품에서 시종일관 강조되는 주요 덕목들은 불교와 연관된 것들이다. 바그너 본인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했던 만큼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13] 이 작품에는 불교에서 강조하는 덕목들이 녹아있다. 이러한 불교적 덕목들을 서양사람들이 친숙하게 여겼던 기독교라는 포맷을 빌려 표현한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실 바그너는 《승리자》(Die Sieger)란 이름으로 불교 오페라를 따로 구상했지만 이루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는 걸 보면, 《승리자》의 플롯이 사실상 파르지팔에 흡수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7. 니체와 파르지팔
니체는 유명한 바그네리안였지만 이 작품으로 인해 바그너와 니체는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기독교의 극복이 서구문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난제라고 여겼던 니체는 이 작품을 기독교적이고 또한 데카당스적이라 여겨 바그너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바그너가 뮌헨의 정적들으로부터 정치적 공세를 받고 반강제적으로 스위스 트립셴 산속에서 은거해 살던 시절, 인근 바젤 대학에서 24세에 독일 최연소 대학교수가 되었던 프리드리히 니체와 조우하게 된다. 이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심취해 있었던 니체와 바그너가 가까워진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스위스의 한적한 산골에서 바그너와 니체는 매일 같이 쇼펜하우어에 대한 토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니체는 스스로 바그너는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또 니체는 세상에서 바그너보다 쇼펜하우어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로 바그너의 철학적 식견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얼마 후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저술해 독일 철학계의 총아로 떠올랐는데, 비극의 탄생에서 지향하는 예술은 다름아닌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이었다.
하지만 니체와 바그너는 이후 여러가지 이유로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우선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저택으로 이사가면서 지리적으로 멀어졌다. 또 바그너의 여러가지 사상이 복잡다단하게 녹아있는 작품인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초연과정에서 니체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철학과 바그너간의 불일치점을 느끼게 된다.
젊은 시절 여러차례 바그너의 사상과 음악을 지지하는 글을 썼던 니체는 서서히 바그너에게도 비판적을 가하기 시작하는데 하지만 아직도 바그너에 대한 애정도 동시에 드러난다. 니체가 바그너와 결별해 나가는 과정은 그의 철학의 완성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저작 중 적지 않은 부분이 바그너에 대한 내용으로 할애되어 있다. 니체에게는 인간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바그너가 너무나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가 바그너에 대한 그의 애증이 묻어나는 글들을 보면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니체 스스로는 바그너를 뛰어넘지 않는한 철학가로서 나아갈 수 없기에 안티 바그너의 길로 갔다고도 한다.
바그너 부부도 니체를 자식처럼 여겼지만 했지만, 니체의 인생에서 바그너가 차지하는 비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니체가 서서히 자신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한 바그너는 처음에는 무반응을 보이다가 마침내 니체가 매독 때문에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러한 와중에 바그너의 기독교를 소재로 한 파르지팔을 접한 니체는 애증의 감정이 교차하던 바그너와 드디어 결별을 결심하게 되고 이후에는 맹렬한 비판자로 돌아선다. 그 와중에도 니체는 파르지팔의 음악에는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8.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극장과 파르지팔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하우스의 독특한 울림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작곡했는데 그 결과가 현재 이 작품이 들려주는 경이로운 음향이다. 만년이기도 했지만 바그너 작품 중에서는 비교적 작곡에 많은 시간이 걸린 편이다. 바그너는 이 작품을 작곡하면서 몰입하기 위해 방과 욕실을 온통 보라색으로 도배하고 향수를 자욱할 정도를 뿌리고 작업했다고 한다.바그너는 이 작품을 세속적인 오페라 하우스의 떠들석한 분위기[14]에서 이 작품이 연주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품이 오직 바이로이트에서만 연주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한편으로 그가 이런 유언을 남긴 것은 파르지팔이 철저하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극장의 음향과 시설을 염두에 두고 만든, 이 극장에 특화된 작품이었기 때문에 다른 극장에서 상연할 경우 이 오페라가 추구하는 상징성이나 음악적 효과가 반감될 것을 우려한 측면도 있다.
1882년 여름 제2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가 신임하던 유대인 지휘자 헤르만 레비[15]의 지휘로 초연되어 총 16회 공연되었다. 바그너는 청중들에게 박수를 치지 말라고 했고 실제 페스티벌 기간 청중들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는 객석에서 혼자 박수를 치는 무뢰한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바그너 자신이었다.
바그너 사후 그의 음악적 유지를 받들기 위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부활시킨 미망인 코지마는 이 작품을 바이로이트에서만 연주하라는 바그너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코지마는 법원으로부터 법적인 보호를 받으려고 했는데, 독일 법원은 원저작권자인 바그너의 사후 30년 동안만 바이로이트의 독점 상연을 인정했다.
하지만 독일 국내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초연 20년 후인 1903년 이 작품의 국제적 저작권이 소멸되었다고 주장하며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코지마 바그너가 항의했고 법적 대응도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당시 메트로폴리탄측은 중부지방에서 올 청중들을 위해 뉴욕 시카고간 파르지팔 특급열차를 운행할 만큼 떠들석하게 홍보했다. 이후 암스테르담에서 수 차례 파르지팔 공연이 이루어졌지만 그 밖의 극장들은 1914년까지 파르지팔의 바이로이트 독점 상연권을 침해하려 하지는 않았다. 독일에서 보장된 30년간의 독점 상연 기간이 끝나자 바이로이트는 1914년 1월 1일을 기해 전세계에 파르지팔의 상연을 허가했다. 1914년 1월 1일을 기해 전세계 여러 극장에서 파르지팔을 올렸다. 일부 극장은 1913년 12월 31일부터 1914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공연을 시작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7월말까지 파르지팔은 유럽에서 50개 이상 극장에서 상연될 정도였다.
현재 이 작품은 전세계에서 자유롭게 상연되지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극장에서의 연주는 오랫동안 특별한 권위를 인정받아왔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작곡가 본인이 의도한 공연철학이 가장 잘 지켜지고 있는 곳이 바로 바이로이트이기 때문. 바그너 사후 코지마 바그너는 남편의 유지를 받드는 것을 목표로 하여 작품의 변형을 일체 허락하지 않았고 연출에서도 바그너가 생전에 지시했던 동작 하나하나까지 모두 지키려고 노력했다.이처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초기에는 바그너 자신의 연출과 무대배경이 그대로 재현되어 상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감독이 된 손자 빌란트 바그너는 그의 할머니 코지마의 방침과 달리 할아버지의 생전 연출과 무관하게 조명을 활용한 창의적인 독자적인 연출을 시도하여 큰 호평을 받았으며, 음악 또한 거장 크나퍼츠부쉬의 지휘로 찬사를 받았다. 빌란트 바그너의 연출은 무려 20여년이나 지속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빌란트 바그너는 1966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사후에도 파르지팔은 그가 생전에 연출했던 방식으로 1971년까지 계속 상연되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연주되는 열개의 바그너 오페라(또는 악극) 중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과 파르지팔은 기본적으로 매년 상연되는 것이 원칙이다.[16]
9. 기타
- 한국에서는 2013년 10월 1일 국립오페라단 기획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지휘는 로타 차그로섹(Lothar Zagrosek), 연출과 무대는 필립 아를로(Philippe Arlaud), 연주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맡았다. # 당시 공연 중 1막 1장과 3막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1]
에센바흐의 파르지팔은 프랑스의 시인 크레티엥 드 트루아(Chrétien de Troyes, 생몰년대 미상)의 '페르스발 또는 성배 이야기(Perceval ou le Conte du Graal)'를 근간으로 아더왕 전설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파르지팔의 아버지는 갈라하드(Galahad)인데, 먼저 성배를 찾아 떠나지만 성배를 찾지 못했고 결국 아들이 성배를 찾아서 수호기사가 된다. 한편 로엔그린은 파르지팔의 아들로 아버지에 이어 성배의 수호기사가 된다.
[2]
2막에 클링조르의 꾐에 빠진 처녀들이 나오기는 하는데 거의 특별출연 수준이다.
[3]
구르네만츠가 파르지팔을 데리고 성배기사단의 성으로 갈 때 배경이 바뀌면서 무대전환음악이 나온다.
[4]
그 사이에 저녁 먹고 오라는 뜻. 그러다보니 총 공연시간이 5시간 30분을 넘어서는 일까지 있다.
[5]
바이로이트의 경우 성지순례라는 표현도 쓰듯이, 아예 날잡고 와서 호텔에서 숙박하면서 관람하는 것이 정석이기 때문에 다른 오페라하우스보다 공연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인터미션을 여유있게 두는 편이다.
[6]
오페라에서는 천사로부터 받았다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성유물을 구하는 지난한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7]
쿤드리처럼 클링조르의 마법에 걸려서 성배의 기사를 유혹하는데 이용당하고 있는 여성들이다.
[8]
똑같이 파르지팔로부터 구원을 받은 암포르타스가 상처도 치유되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반면 쿤드리가 굳이 죽는 것이 어색하다다는 지적이 많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최근의 연출에서는 쿤드리를 죽이지 않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대본과는 정반대로 암포르타스가 결국 성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걸로 내용을 바꾸는 공연까지 있다고 한다. 다만 설정을 자세히 보면 그렇게 뜬금없은 설정은 아닌데, 쿤드리는 과거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조롱한 업보로 오랫동안 죽지도 못하고 성배의 기사들을 유혹해야만 하는 숙명 속에서 살았기 때문.
[9]
정확히는 1979년 12월 4~7일, 10~12일, 27~29일, 1980년 1월 2~4일, 4월 15일 및 7월 1일 디지털 녹음으로 녹음되었다. 참고로 이 스튜디오 녹음은 1980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에 참여한 출연진과 같은 출연진을 썼다.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
참고자료 3(그라모폰 리뷰)
[10]
카라얀의 전체 녹음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는 녹음 중 하나로, 매우 투명하면서 시원한 음향이 특색이다. 특히 1막 2장 전체는 필청급. 카라얀 최초의 디지털 녹음이기도 하며, 1981년
영국의 유명 클래식 전문 잡지 그라모폰에서 올해의 음반상과 오페라상을 수상받았다.
[11]
몬살바트성 인근 숲을 무대로 한 1장과 성전 안을 무대로 한 2장 사이를 이어주는 곡이다.
[12]
뒤에 성배의 기사들의 입장이 이어진다.
[13]
말년에
채식주의자가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14]
당시 오페라 공연 시에는 객석까지 실내 조명을 밝게 유지했으며 관객들이 연주 도중에 수시로 입장하거나 이동했고 잡담도 나누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15]
Herman Levi, 1839~1900, 독일의 지휘자. 파르지팔 초연 6년 후인 1888년에 바그너의 첫 완성 오페라 '요정'의 초연을 지휘했다. 즉, 바그너의 최초의 오페라와 최후의 오페라를 같은 지휘자가 처음으로 연주한 셈.
[16]
연출이 바뀔 때는 1년을 건너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