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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fliegende Holländer(데어 플리겐데 홀랜더)
1. 개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한 3막의 오페라로 1841년에 완성하고 1843년에 초연되었다. 항구에 정박하지 못하고 대양을 영원히 항해해야 하는 저주에 걸린 유령선의 전설에서 소재를 취해서 리하르트 바그너가 직접 대본을 썼다.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음악가 바그너의 본격적인 출세작이자 바이로이트 캐논(Bayreuth canon)에 속하는 최초의 작품이다. 음악적 관점에서는 바그너의 독창성이 나타나는 최초의 작품으로, 아직까지는 기존 오페라의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고 있지만 바그너 특유의 오케스트레이션과 몇몇 독창적인 음악적 수법이 엿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현재 이 작품은 바그너의 원숙기의 작품들처럼 많이 공연되지는 않지만 젊은 작곡가 바그너의 패기와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바그네리안과 연주자들에게는 상당한 인기가 있는 작품이다.
2. 작곡 배경과 초연
날카로운 리듬에 실린 선원들의 외침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선 떠나질 않았다. 곧 그 소리는 스르르 형태를 바꾸어 '선원의 주제'가 되었다. 이미 구상중이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 딱 맞아떨어지는 주제였다.
- 리하르트 바그너, <<나의 생애>>
- 리하르트 바그너, <<나의 생애>>
1834년 21살의 바그너는 마그데부르크의 극장의 취직자리를 얻으려다가 당시 마그데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4살 연상의 배우 민나 플래너(Christine Wilhelmine "Minna" Planer, 1809~1866)를 만나게 된다. 한눈에 민나에게 반한 바그너는 무작정 그녀에게 들이댔고, 당시 유명세를 얻고 있던 민나는 어리고 별볼일 없는 음악가 지망생 바그너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1834년 말 경에 두 사람은 어느덧 사귀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836년 두 사람은 결혼하는데, 이하 자세한 사항은 민나 플라너 항목 참조. 여튼 바그너는 민나와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돈벌이가 시원찮은데다 사치벽까지 있어서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 바그너는 1837년 간신히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지휘자 자리를 구했으나 거기서도 빚을 지고 다른 지역의 빚쟁이들까지 몰려오는 바람에 1839년 부인과 함께 러시아 국경을 넘어 야반도주를 했다. 바그너 부부는 1839년 7월 필라우(Pillau, 현재는 러시아의 Baltiysk)에서 런던행 배를 탔는데, 원래는 일주일 정도면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도중에 세번이나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노르웨이 잔트비케의 해변에 임시 정박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24일만에 간신히 런던으로 갔다.
구사일생으로 런던에 도착한 바그너 부부는 바로 파리로 건너가는데, 여기서 두 사람은 몇년간 상당한 생활고를 겪게 된다. 바그너는 파리에서 직장을 얻으려고 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자신의 오페라인 리엔치의 공연을 시도했으나 파리에서는 바그너같은 무명의 독일 작곡가의 작품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악보 사보나 음악 관련 기고문을 쓰고 적은 돈을 받아 간신히 연명했으며 심지어 거기서도 빚을 져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1]
한편 바그너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작곡을 구상한 것은 바로 런던으로 가는 항해길에서 폭풍을 만나 죽을뻔한 경험을 한 후였다.[2] 특히 그는 잠시 머물렀던 노르웨이 잔트비케 해변에 큰 인상을 받았는데, 이 오페라 3막 첫부분의 선원들의 합창은 잔트비케에서 노르웨이 선원들이 부르던 노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바그너는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얻은 경험을 음악으로 구현하기 위해 저주를 받아 한 군데 정박하지 못하고 영원히 대양을 떠돌아야 하는 18세기 유령선의 전설을 차용했다. 전설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인도로 향하던 네덜란드 출신의 선장 반 데르 데켄은 아프리카의 희망봉 부근에서 폭풍을 만났지만, "최후의 심판 날이 올 때까지라도 항해할 것이다”라며 선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항해를 강행하다가 결국 배가 침몰해 버렸다. 반 데르 데켄은 침몰선에서 신을 저주하면서 죽어갔는데, 이에 분노한 신이 그에게 저주를 내려서 배를 침몰시키는 대신 유령선으로 만들고 유령이 된 선장과 선원들은 영원히 이 배를 타고 대양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다만 이 유령선은 7년마다 딱 하루동안 육지 상륙이 가능하며, 상륙 했을 때 반 데르 데켄을 목숨을 바쳐 사랑해 줄 수 있는 여인을 만나면 저주가 풀리게 된다는 단서조항이 붙어 있었다.[3]
특히 바그너는 이와 관련된 전설을 다룬 하인리히 하이네의 풍자소설 '폰 슈나벨봅스키씨의 회상(The Memoirs of Mister von Schnabelewopski)'을 많이 참고했다. 하이네의 소설에서는 여인의 사랑에 의한 구원에 대해, '세상에 유령선 선장을 사랑하고 절개를 지키는 그런 여자가 어디 있냐? 여자들이 감상에 빠져서 유령선장같은 이상한 남자랑 결혼하면 신세 망친다는 교훈을 주는게 바로 이 전설이다'라는 식으로 조롱하고 있는데, '여인의 헌신적인 사랑'이라는 대목에 마음이 꽂힌 바그너는 이 이야기를 진짜 진지한 서사로 바꾸기 위해 젠타라는 여성 캐릭터를 창조했으며 갈등 구조를 만들기 위해 에릭이라는 캐릭터를 여기에 끼워넣었다.
바그너는 1840년 리가 시절에 작곡에 착수했던 리엔치를 완성하자마자 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오페라의 대본 작성에 착수해서 1년 후인 1841년 5월 경에 완성했는데, 대본을 쓰는 틈틈이 작곡도 해 두었기 때문에 음악 작업은 6개월만에 완료되었다. 문제는 이 두 오페라를 어떻게 공연할 것인가였는데, 프랑스에서는 도무지 그의 독일어 작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천만 다행으로 바그너는 마이어베어의 도움을 받아 1842년 드레스덴에 있는 호프테아터의 악장(Kapellmeister)으로 부임하게 외었고, 이 극장에서 바그너의 지휘로 초연된 리엔치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이듬해인 1843년에 역시 호프테아터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는데, 이 오페라도 리엔치에 버금가는 대성공을 거두면서 바그너 부부는 지긋지긋했던 가난과 빚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었고 동시에 전도유망한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도 얻었다.
원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2시간 분량의 단막극으로 작곡되었으나 후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3막 작품으로 개작했다.[4] 또한 작중 배경도 처음에는 스코틀랜드 해안으로 설정했다가 노르웨이 해안으로 바꾸었다.
3. 줄거리
1막노르웨이 해변
달란트가 탄 배가 폭풍우에 표류하다가 노르웨이의 어느 해안에 정박하는데, 이때 달란트의 배가 도착한 해변가에는 이미 또 다른 배가 정박해 있었다. 검은 돛대와 붉은 돛을 단 이 배의 선장은 먼저 육지에 내려와 있었으며, 배에서 내려오는 달란트를 보자 자신은 네덜란드인으로 저주를 받아서 영원히 바다를 떠돌고 있으며 이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진실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어 선장은 달란트에게 돈과 보석이 가득 들어 있는 상자를 보여주면서 이 보화들을 자신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는 여인을 찾기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달란트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달란트는 자신의 딸 젠타와 이 네덜란드인 선장이 결혼하면 저 돈과 보물을 차지할 수 있겠다는 욕심에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기로 한다. 달란트는 선장에게 자신에게는 딸이 있으며 선장과의 결혼을 주선하겠다고 하자 선장은 이제야 저주에서 자기를 구원해줄 여인을 만날 수 있다는 예감을 갖는다. 폭풍우가 멎고 순풍이 불기 시작하자, 두 척의 배는 함께 달란트의 고향으로 향한다.
2막
달란트의 집
달란트의 딸 젠타와 그녀의 유모 마리와 처녀들이 물레를 돌리고 있다. 하지만 젠타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벽에 걸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다. 유모 마리는 그녀에게 일에 집중하라고 나무라지만, 젠타는 아랑곳 없이 마을 처녀들에게 저주받은 화란인 선장과 유령선에 대한 전설을 얘기해 주면서 저주 받은 선장을 사랑으로 구원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때 사냥꾼 에릭이 들어와 달란트의 배가 항구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젠타를 짝사랑하는 에릭은 마을 처녀들이 선원들을 마중하러 항구로 나갈 때 젠타를 붙잡고 자신의 꿈에서 달란트가 초상화와 똑같은 남자를 데리고 바다에서 돌아왔는데 젠타가 그 남자와 같이 마을을 떠나버렸다는 이야기를 해 주면서 멀리 떠나지 말고 마을에 머물러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젠타가 오히려 감격해하면서 기뻐하자 에릭은 실망하여 나가버린다. 잠시후 문이 열리며 달란트가 어떤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는데, 그 사람은 바로 초상화의 주인공인 네덜란드인 선장이었다. 젠타가 기절할 듯 놀란 것은 당연지사.
달란트는 젠타에게 이 선장과 결혼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서 네가 수락만 하면 내일 당장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한다. 선장과 젠타는 서로를 보는 순간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선장은 젠타와 내일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고 일단 배로 돌아간다.
3막
마을의 항구
항구에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고, 노르웨이 출신 선원들은 갑판에 모여서 술을 마시며 선원들의 합창을 부르고 있다. 마을의 처녀들이 네덜란드 선장이 타고 있는 배에 술과 먹을 것을 갖다 주려고 하지만 배에는 인기척도 없다. 이에 달란트호의 선원들이 마을 처녀들에게 저 네덜란드 배는 유령선으로 선원들은 모두 죽었고 선장은 바로 전설 속의 저주받은 네덜란드인이라고 이야기하자 처녀들은 겁을 먹고 부두에 먹을 것을 놓아둔 채 물러간다.
이어 네덜란드 배 근처에 젠타와 에릭이 등장한다. 에릭은 계속 젠타에게 구애하는데 젠타는 별 반응이 없다. 에릭은 젠타에게 예전에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느냐면서 젠타에게 따지는데, 하필 이 노래를 듣고 있던 네덜란드인 선장은 젠타에게 속았다고 착각해서 선원들에게 출항준비를 시킨다. 다른 사람을 사랑했던 경험이 있는 여인은 자기를 구원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네덜란드 선장은 이번에도 공쳤다고 생각하고 선원들에게 돛을 올리라고 소리친 후 출항하려고 한다.
이에 젠타는 네덜란드 배에 올라타려고 하지만 소동을 듣고 나타난 달란트와 에릭, 마을 처녀들이 모두 젠타를 꼭 붙잡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배가 항구를 빠져나간 후에야 젠타는 풀려나는데,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절벽으로 달려간다. 벼랑 끝에 선 젠타는 ‘자신은 결백하며 죽을 때까지 네덜란드 선장에게 충실할 것'을 맹세한 후 바다로 뛰어든다. 젠타의 희생으로 드디어 저주가 풀린 유령선은 그대로 부서져서 바다에 가라앉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구원받은 네덜란드인 선장이 젠타와 함께 승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4. 주요 음악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유명한 음악은 서곡과 2막 도입부의 물레의 합창에 이어지는 젠타의 아리아, 3막 도입부의 선원의 합창 등이다. 한편 공연할 때는 피날레의 연출이 항상 관심대상이 되는데, 젠타가 뛰어내린 후 젠타와 선장이 승천하는 장면을 연출하기가 쉽지 않은 탓에 이를 처리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여기 소개된 피날레 동영상에서도 승천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서곡 :
▲ 칼 뵘(Karl Böhm) 지휘, 1971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
2막 도입부의 물레 합창(Humm und brumm, du gutes Rädchen, 휭~ 휭~ 물레질하세)와 이어지는 젠타의 발라드 Traft ihr das Schiff im
meere an(그 배를 보았나요)?.
3막 도입부와 이어지는 노르웨이 선원의 합창 Steuermann, lass die Wacht(선원들아, 망보는 것 그만 하게)!
3막 피날레 - 젠타가 네덜란드 선장의 의심을 풀기 위해 바다에 뛰어내린다.
5. 분석 및 평가
5.1. 음악
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오페라 작곡가로서 바그너의 입지를 굳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후 작품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독창적인 수법들의 전조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바그너에게 여러 모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전작인 리엔치를 완성한 직후에 작곡(정확하게는 대본 작성)에 착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엔치와는 완전히 다른 음악성을 보여주고 있다. 리엔치의 경우 철저하게 프랑스 시장을 노리고 만든 작품이었기 때문에 당시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양식에 철저히 맞추었고 당시 최고의 그랜드 오페라 작곡가였던 지아코모 마이어베어의 음악 수법을 모방하였다. 하지만 정작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그에 대해 냉랑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성공으로 유서깊은 드레스덴 왕립 가극장의 음악 감독 자리를 맡게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온 바그너는 굳이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은 바그너 특유의 라이트모티프(시도 동기)가 이 작품에서 본격 등장한다는 것이다. 라이트모티프는 특정 인물이나 상황을 상징하는 짧은 선율을 말하는 것으로, 오페라 내에서 해당 인물이 등장하거나 상황이 닥칠 때에는 이 라이트모티프를 활용하여 관객들이 오페라의 진행과정과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라이트모티프는 바그너 본인의 발명품이 아니라 이전에도 있었던 개념이지만[5] 이를 오페라에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확실하게 정립된 기법으로 사용한 사람은 바로 바그너이다. 이 작품에서는 ‘유령선의 동기’, '노르웨이 선원의 동기', ‘태풍의 동기’, ‘젠타의 동기’ 등 많은 라이트모티프가 등장하며, 특히 3막 초반부에 마을 처녀들과 노르웨이 선원들이 잔치를 벌이다가 네덜란드 배로 가보자고 할 때는 선원의 동기와 유령선의 동기가 뒤섞이는 파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관현악법에서도 진일보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작에 비해 관현악의 역할이 많이 확대되어 있으며, 특히 금관악기를 적극 활용하였다. 행진곡, 춤곡 풍의 다양한 음악 양식에 바그너만의 극적인 상황과 심리 묘사가 더해지며 전례없는 관현악 기법을 나타내고 있으며 바그너의 중후기 작품의 작풍을 전조하고 있다. 서곡의 오케스트레이션에서는 바그너의 진일보한 새로운 오케스트레이션 기법들이 잘 녹아 있으며, 고금의 오페라 서곡 중에서 가장 손에 꼽을 만한 작품 중 하나이다. 극작법 자체는 아직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고 있어 아리아의 비중이 높으며, 종종 연극적인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노래와 연기가 분리되어 있는 등 아직까지 전통 오페라 양식의 틀을 존중하고 있다.
5.2. 대본
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바그너 캐논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아서(심지어 초기작들보다도 더 작다) 서곡을 포함한 연주시간이 2시간 조금 넘는 수준이며 그만큼 내용도 단순하다. 한마디로 저주받은 유령선 선장이 운좋게 자신에게 헌신하는 여인을 만나서 저주가 풀린다는 것. 흥미로운 것은 여주인공 젠타의 캐릭터성인데, 본 적조차 없는 유령선의 선장에게 무작정 사랑을 바치겠다는 젠타의 생각과 행동이 너무 뜬금없기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젠타의 비현실적인 캐릭터성을 무작정 결함이라고 치부하기도 어려운 것이, 바그너 본인이 젠타와 같은 여성을 진지하게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바그너가 참고한 하이네의 소설에서 하이네는 유령선의 전설에 대해 '유령선 선장 따위를 진심으로 사랑할 여자를 바라다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라고 조롱했는데, 바그너는 하이네와 달리 여자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이 남자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실제로 이런 여성을 만나고 싶어했던 바그너는 후에 친구 프란츠 리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네덜란드 선장이 사실은 자기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라고 밝히기도 했다.[6] 그래서 개연성이 약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젠타라는 캐릭터를 관철시킨 것.
이런 비판의 소지가 많은 여성관이 투영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흥미로운 전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다 인상적인 음악 덕분에서 초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의 성공을 계기로 바그너는 이후에 오페라를 작곡할 때 항상 과거의 전설에서 소재를 차용했으며 남성에 헌신하는 여성에 대한 동경도 계속 나타난다.
여담으로 바그너의 첫 번째 부인 민나 플라너는 바그너의 음악적 능력 자체는 매우 높게 평가했지만 그의 오페라는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는 바그너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가 크다. 심지어 자기에게 저런 여성성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진절머리가 났을 듯. 민나 뿐만 아니라 리스트와 사실혼 관계였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나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 슈만 등의 여류 명사들도 비슷한 이유로 바그너의 오페라를 몹시 싫어했다.
[1]
민나가 어렵게 보석금을 구해서 간신히 남편을 감옥에서 빼냈다.
[2]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알게된 바그너의 친구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빚 때문에) 도망가는 독일인이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3]
참고로 이 단서조항은 원래의 전설에는 없었다가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4]
현재는 종종 원안대로 단막극으로 공연되기도 한다.
[5]
바그너의 선배인 마이어베어도 바그너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자기 작품에 나름의 라이트모티프를 사용했다. 1836년에 초연된 그의 대표작 위그노(Les Huguenots)에서는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를 상황에 따라 변주를 시키면서 극의 분위기와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6]
이는 바그너의 결혼관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바그너는 자신의 아내는 자신을 무한히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논리로 조강지처 민나 플래너를 그렇게 고생시켜놓고도 나중에는 철저하게 외면했다.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바그너가 철저하게 마초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