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aipėda 클라이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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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클라이페다 시 문장.gif | |||||
시장 | |||||
국가 | 리투아니아 | ||||
주 | 클라이페다 주 | ||||
면적 | 98km² | ||||
인구 | 150,590명[1] | ||||
인구밀도 | 91,500/km² | ||||
시간대 | UTC+02:00( 서머타임 적용) | ||||
클라이페다 행정 사이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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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의 도시. 리투아니아 서쪽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리투아니아가 보유한 유일한 항구도시이다. 인구는 약 15만명( 2020년)으로 리투아니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자 발트 3국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기도 하다. 2017년 기준 시민의 87%는 리투아니아인, 10%는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등 동슬라브 민족이다. 쿠로니아 반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2. 언어별 표기
리투아니아어 | Klaipėda |
독일어 | Memel(메멜) |
3. 역사
도시 자체는 12세기 무렵에 발트족이 건설하였고 도시의 항구는 1252년 튜튼 기사단이 건설하였다. 당시의 이름은 독일어인 '메멜부르크(Memelburg)'였다. 메멜부르크가 있던 소(小)리투아니아(Mažoji Lietuva)'[2] 지역의 리투아니아인들은 발트 독일인 엘리트들의 지배를 받을 때, 가톨릭을 주로 믿는 다른 리투아니아인과 달리 루터교회를 믿게 되었고, 아예 독일인으로 동화되어 리투아니아인 정체성을 버리게 된 경우도 많았다. 프로이센 공국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지배를 받는 소리투아니아 지역과 독립 국가였다가 훗날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는 나머지 리투아니아 지역을 가르는 국경은 500년 넘게 바뀌지 않았으며 둘은 완전히 다른 역사를 걸어오게 되었다.1919년까지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령이었으며, 나폴레옹 전쟁 때는 프로이센의 임시수도였다. 독일 제국 최동단 도시였기에 독일 국가의 가사에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마스에서 메멜)로 나온다. 독일 제국 시절에는 클라이페다 시 자체는 인구 중 70%가 독일인이었지만, 주변 지역은 리투아니아인이 더 많았다.
베르사유 조약 이후 프랑스 총독이 관리하는 국제연맹령 '메멜란트'가[3] 되었다. 리투아니아는 소리투아니아 지역 전체가 국제연맹령이 되기를 원했지만 해당 지역은 독일의 뿌리와 같은 지역이라 아무리 패전국이라 해도 그곳을 넘기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졌고 애초에 소리투아니아인들이 주류도 아니라 명분이 부족했다. 대신 폴란드의 지지로 벨기에처럼 ' 전쟁의 책임을 물어 작은 땅을 받아낸다'는 식으로 네만 강 북쪽의 땅을 뜯어낼 수 있었다. 이 지역이 바로 메멜란트가 된다. 폴란드가 리투아니아를 지지한 이유는 과거에 한 국가를 이뤘던 동지의식 때문이 아니라[4] 먼저 리투아니아에게 네만 강을 통해 발트해로 나아갈 수로를 준 뒤에 리투아니아의 영유권을 주장할 생각이었다. 1923년 지역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이 루르 점령으로 빠져나가자 리투아니아 정부의 사주를 받은 봉기로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클라이페다는 리투아니아어와 독일어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자치 지역이었으나, 1930년대 나치당이 독일에서 인기를 끌면서 클라이페다에 사는 독일계 주민들도 나치당에 동조하게 되었고, 이들이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에 리투아니아 정부는 나치당원들을 체포하였고 이들을 재판하였다. 그러나 1939년 나치 독일이 최후통첩을 보내며 반환을 요구하자 독일에 반환하여 다시 독일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독일인들이 동프로이센을 탈출하며 이곳도 텅 비어버렸고 소련군이 진입하였다. 이 지역은 러시아 SFSR 영토가 된 칼리닌그라드와는 다르게 제1공화국 시절처럼 다시 리투아니아의 영토로 편입되어 '클라이페다(Klaipėda)'라는 이름이 되었다. 루터교회를 믿는 리투아니아인들은 종교 차이로 인해 대부분 현대 독일로 이주해서 독일인에 동화되었다 한다. 그리고 1991년에 리투아니아가 재독립을 달성해 현재와 같은 리투아니아의 유일한 항구도시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5만 명을 넘은 적이 없는 소도시였으나, 리투아니아 SSR 시절에 소련의 부동항이자 군항으로 발전해 인구가 증가하여 독립 직후( 1992년)에는 한때 20만명을 돌파했다가 이후 감소하였다. 1991년에 클라이페다 대학교가 창설됐다.
4. 경제
리투아니아 유일의 항구 도시답게 액화천연가스 터미널이 있다. 쿠로니아 석호에 있는 누가라 섬 북쪽에 부유식 저장 재기화 설비가 있는데, 대한민국의 현대중공업이 설치하였다. 운영은 노르웨이 업체 레이그 회에그 엘엔지(Leigh Höegh LNG) 사가 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리투아니아가 가스관을 통한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중단하면서, 액화천연가스 터미널로만 천연가스를 수입하게 되어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5. 언어
202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클라이페다 시민들의 모어는 리투아니아어 73.79%, 러시아어 19.83%, 폴란드어 0.14%로 조사되었다.6. 기타
현재는 리투아니아 현지인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해변 리조트로 개발되는 중이며,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와의 국경 근처 쿠로니아 모래톱 위의 니다(Nida)라는 마을에는 독일의 유명 소설가 토마스 만이 1929년부터 수년간 기거한 집에 세워진 기념관도 있다.[5]독일인의 노래 1절에 나오는 마스에서 메멜까지 라고 할때 메멜이 바로 여기다. 물론 현재 뫼즈강 유역이 프랑스령인 것처럼 지금은 독일령이 아니라서 1절은 금기시 되고 있다.
[1]
통계인구, 2022년 기준.
[2]
독일어로는 Kleinlitauen. 대략 옛
동프로이센의 동쪽 절반 정도라고 보면 된다.
[3]
혹은 클라이페다 지역이라고도 한다
[4]
애초에 두 나라는 당시에 동지의식은 온데간데 없이
빌뉴스의 소유권을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과거 두 나라가 연합했을 당시에
폴란드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던 도시임을 생각하면...
[5]
이 당시 니다는
독일국(
동프로이센)과의 국경에 위치한 리투아니아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