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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21:00:21

크레타 자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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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자치국
Cretan State
Κρητική Πολιτεία
파일:크레타 자치국 국기.svg 파일:크레타 자치국 국장.svg
국기 국장
지도
파일:Crete_Vilayet,_Ottoman_Empire_(1900).svg
1898년 12월 9일 ~ 1913년 12월 1일
국가 크레타의 찬가
수도 이라클리온
언어 그리스어, 튀르키예어
종교 그리스 교회, 수니파, 이슬람교
정치체제 군주제
통화 크레타 드라크마
역사 • 건국: 1898년 12월 9일
• 멸망: 1913년 12월 1일

1. 개요2. 기독교인 연합파의 반란3. 연합파의 크레타 점령과 혼란4. 국제 전대의 통치와 건국5. 그리스 왕국과의 연합 선포와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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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열강들의 개입으로 건국된 국가.

2. 기독교인 연합파의 반란

크레타 섬은 크레타 공방전이 끝난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대다수는 기독교인( 정교회 신자)이었다. 그리고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섬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 왕국과의 연합을 추구하며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대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잔인하게 진압되었지만, 유럽 국가들의 압력으로 오스만 제국 정부로부터 약간의 양보를 얻어냈다. 그 후 1878년 할레파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자치정부가 되었고, 이후 1889년 오스만 제국이 이 조약을 파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3. 연합파의 크레타 점령과 혼란

하지만 조약의 붕괴는 크레타 섬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결국 1895년에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으며 1896년부터 1897년까지 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랑스,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영국 등 6개 강대국은 1897년 2월 크레타 섬에 군함을 파견했고, 그들의 해군들은 크레타 섬에서의 전투를 중단시키기 위해 개입하는 임무를 맡은 "국제 전대"를 구성했다. 한편 그리스 왕국에서는 민족주의 비밀결사들과 열렬한 여론이 그리스 왕국 정부가 이 섬에 군대를 파견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국제 전대는 신속하게 작전을 중단했지만, 크레타 그리스군이 주둔하면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크레타의 대부분은 크레타 반란군과 그리스군의 통제 하에 있었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그리스군은 테살리아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이 전쟁은 열강들의 개입으로 끝났고, 이들은 그리스군 크레타에서 철수시키고 오스만 제국군은 진격을 중단시켰다. 콘스탄티노플 조약에서 오스만 제국은 할레파 조약의 조항을 이행하기로 약속했다.

4. 국제 전대의 통치와 건국

1897년 2월, 열강들은 국제 함대를 구성하는 6개 강대국의 제독들로 구성된 제독 회의를 통해 크레타 섬을 일시적으로 통치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크레타 반란군에 대한 해상 포격, 해군 해병대를 해안에 배치하여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크레타와 그리스 왕국의 주요 항구를 봉쇄함으로써 국제 전대는 1897년 3월 말까지 크레타에서 조직적인 전투를 종결시켰다. 하지만 1897년 3월 말과 4월에 독일 제국 크레타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기 위해 도착했다. 이후 제독 공의회는 오스만 제국 크레타 통치를 종식시키지 않고 반란을 종식시키는 협상된 해결책에 초점을 맞췄고, 크레타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하에 자치정부가 될 것이라고 결정했다. 그 후 독일 제국은 1897년 11월 크레타에서 철수했고 이후 1898년 3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침공을 해왔지만 나머지 4개국은 계획을 계속했다.

1898년 9월 6일 크레타 섬에서 무슬림 폭도들이 수백 명의 그리스인들을 학살하고, 영국 부영사의 가족과 14명의 선원들을 살해했다. 이후 동년 11월 국제 전대와 점령군은 크레타 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몰아냈다. 크레타 자치국은 그리스 왕국이 제공한 국제 주둔지였으며, 그리스 왕국과 덴마크의 왕자 요르요스가 최초의 고등 판무관으로 취임하면서 건국되었다.

그리스 국립은행은 크레타 은행을 설립했는데, 크레타 은행은 40년 동안 지폐 발행을 독점했다. 그리고 크레타 정부는 또한 공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이탈리아 왕국 카라비니에리를 모델로 한 준군사 조직인 크레타 헌병대를 창설했다. 그리고 크레타 헌병대는 조지 왕자가 도착하기 전에 4개의 점령 세력이 만든 4개의 소규모 헌병대를 통합했다.

5. 그리스 왕국과의 연합 선포와 멸망

1907년 2월 헌법이 공포되었지만, 1908년 오스만 제국의 혼란과 자이미스가 휴가를 떠난 시기를 이용하여 크레타의 대표들은 그리스 왕국과의 일방적인 연합을 선언했다. 그리고 크레타 주의 국기는 그리스 왕국의 국기로 대체되었고, 모든 공무원들은 그리스 왕국의 요르요스 1세에게 충성 맹세를 했으며, 그리스 왕국 헌법과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1910년 그리스 왕국의 총리로 선출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를 포함한 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1912년 5월, 크레타 자치국의 대리인들은 아테네로 가서 그리스 의회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경찰에 의해 강제로 저지당했다.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그리스 왕국은 마침내 동맹을 인정하고 스테파노스 드라구미스를 크레타 섬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열강은 1913년 2월 14일 수다 요새에서 깃발을 내리는 행위로 암묵적으로 기정사실을 인정했고, 1913년 5월 런던 조약으로 메흐메트 5세 크레타 섬에 대한 공식적인 권리를 포기했다.

12월 1일, 하니아의 피르카 요새에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콘스탄티노스 1세가 참석한 가운데 그리스 왕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크레타 섬의 무슬림 소수민족은 처음에는 섬에 남아있었으나, 1923년 터키 그리스 왕국 간의 로잔 조약에서 합의된 일반 인구 교환에 따라 터키로 이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