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 이사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일본시리즈 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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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1994 |
1990년 8월 센트럴리그 월간 투수 MVP | ||||
1990년 7월 사이토 마사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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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이사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1990년 9월 사사오카 신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48번}}} | ||||
모리타니 아키라 (1979~1983) |
→ |
코다 이사오 (1984~1994) |
→ |
타니구치 코이치 (1995~1997) |
{{{#ffffff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등번호 12번}}} | ||||
마키시 야스나가 (1987~1994) |
→ |
코다 이사오 (1995~2001) |
→ |
야마무라 히로키 (2002~2004) |
{{{#ffffff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등번호 70번}}} | ||||
고바야시 시게루 (1996~2001) |
→ |
코다 이사오 (2002~2003) |
→ | 결번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89번}}} | ||||
무라타 신이치 (2002~2003) |
→ |
코다 이사오 (2004~2005) |
→ |
무라타 신이치 (2006~2018)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72번}}} | ||||
이노우에 신지 (2001~2005) |
→ |
코다 이사오 (2006~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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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노 히데유키 (2012~2015) |
두산 베어스 등번호 87번 | ||||
고마키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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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 (2013~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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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우 (2015~2022) |
{{{#000000 [[한신 타이거스|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90번}}} | ||||
츠즈키 토시유키 (2004~2013) |
→ |
코다 이사오 (2015~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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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보타 토모유키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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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이사오[1]고다 이사오를 등록명으로 사용했다.] 香田勲男 | Isao Koh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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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5년 5월 29일 ([age(1965-05-29)]세) |
나가사키현 히가시소노기군 히가시소노기촌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나가사키현립 사세보공업고등학교 |
신체 | 180cm, 80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좌타 |
프로 입단 | 1983년 드래프트 2순위 ( 요미우리)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4~1994)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2] (1995~2001) |
지도자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군 불펜코치 (2002~2003)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불펜코치 (2004)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불펜코치 (2005)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불펜코치 (2006~2007)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불펜코치 (2008~2011)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3) 두산 베어스 1군 불펜코치 (2014) 한신 타이거스 2군 투수코치 (2015) 한신 타이거스 1군 투수코치 (2016~2019) 한신 타이거스 2군 투수코치 (2020) 큐슈분카가쿠엔고등학교 감독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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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 현재는 야구 해설자 및 지도자 등으로 활동 중에 있다.한국 야구팬들에겐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두산 베어스의 코치직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현역 시기
2.1. 프로 데뷔 전
사세보 공고 시절 3차례 코시엔 대회에 출장하여 최고 8강 진출 및 통산 4승의 성적을 거뒀고, 3학년 하계 코시엔 대회 나가사키현 지역예선 때는 결승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이후 1983년 드래프트 2순위에서 이케야마 타카히로의 지명권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내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대체 지명자로 코다를 선택하며 프로에 데뷔하게 된다.
2.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데뷔 2년차인 1985년 6월 9일에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나고야 구장 원정경기에서 1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1군 경기에 출장했고 이것이 1군 데뷔 시즌의 유일한 등판이 되었다. 3년차인 1986년엔 13등판 22이닝 1승 무패 ERA 4.09를 기록하며 프로 첫 승리투수가 되었으나, 시즌 종료 후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게 되어 다음 시즌을 통째로 재활에 쓰게 된 것은 물론 연습생으로 격하되는 등 순탄치 않은 신인 시절을 보냈다.어깨 수술 재활에서 돌아온 1988년부터 기존 주전이었던 에가와 스구루, 니시모토 타카시, 카토 하지메 등이 노쇠화나 은퇴로 선발진에서 이탈하게 되면서 선발 투수로써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이후 5선발이나 불펜 등을 오가며 1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1989년엔 7승 3패를 거두며 요미우리의 2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공헌하였고,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일본시리즈에선 팀이 3연패로 스윕패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4차전, 7차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2번 모두 승리(4차전은 완봉승 기록)하며 팀의 리버스 스윕을 이끈 공로로 시리즈 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다음 해인 1990년엔 23경기(선발 19경기)에 등판하여 130.1이닝 11승 5패 ERA 2.90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규정이닝에 도달한 것은 물론, 8월엔 5승을 거두며 투수 부문 월간 MVP에 선출되는 등 팀의 센트럴리그 2연패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다만 당대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일본시리즈에선 구원 투수로 2차례 등판해 4이닝 무실점으로 나름 잘 던져줬으나, 팀이 세이부에게 무기력하게 4연패로 패퇴하면서 빛이 바랬다.
1990시즌 이후로는 매 시즌마다 다소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전만큼의 성적을 내진 못했고, 투수진 내 입지도 줄어들면서 선발진에서 밀려 구원 투수로 간간히 뛰는 경우가 늘어났다. 1994년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1차례 더 달성하긴 했으나 이때도 1차전에서만 패전처리 투수로 등판하는 데 그치는 등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고, 결국 1994년 시즌 종료 후 아와노 히데유키와의 맞 트레이드로 킨테츠 버팔로즈에 이적하게 되었다.
2.3.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
킨테츠로 이적한 코다는 이적 첫 해인 1995년엔 20시합(12선발) 69.2이닝 2승 5패 ERA 4.91으로 계속해서 부진한 성적에 머물렀고 다음 해인 1996년엔 4시합 등판에 그치며 이대로 재기하지 못한 채 사라지나 싶었지만, 팀이 오사카 돔으로 홈구장을 옮긴 1997년에 18시합(18선발) 107.1이닝 9승 4패 ERA 3.69를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한 것은 물론 같은 해 감독 추천으로 데뷔 첫 올스타전 출장을 달성하며 성공적인 컴백 시즌을 보냈다.다만 1997년의 성적은 다소 플루크에 가까웠고, 다음 해에 4승 5패에 그치는 등 재차 성적이 나빠지며 1999년부턴 구원 투수로 완전히 전향하게 되었다. 구원 투수로 완전 전향한 후엔 당시 극도로 불안정했던 킨테츠 투수진에서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투수이자 베테랑으로 활약했고, 2001년 퍼시픽리그 우승[3]에도 공헌했다. 같은 해 일본시리즈에서도 등판했으나 팀은 투타 양면에서 부진하며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1승 4패로 패했고, 2001년 시즌을 끝으로 코다는 선수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3. 은퇴 후
은퇴 직후 킨테츠의 불펜코치로 선임되면서 2003년까지 코치직을 맡다가 2004년에 친정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불펜코치로 복귀했고, 이후 1-2군을 오가며 우츠미 테츠야, 야마구치 테츠야 등을 육성했다.2011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코치직을 그만둔 뒤 2012년엔 후지 테레비, 스포츠 호치의 야구 해설가를 맡았다가 2013년 시즌부터 킨테츠 시절 선수와 코치로 함께 뛰었던 송일수 2군 감독와의 인연으로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이후 2014년엔 송일수가 1군 감독으로 승격하며 1군 불펜코치로 보직을 변경했으나, 팀이 6위로 추락하며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송일수 감독이 사퇴하게 되면서 코치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간 일본인 코치들의 좋은 평가와는 정반대로 코다가 코치를 맡을 시기엔 투수진이 실시간으로 박살나는 모습을 보인 탓에 두산 팬들은 나갈 사람 잘 나갔다는 반응을 보였다.
두산에서 퇴단한 직후인 2015년부턴 한신 타이거스 2군 투수코치로 취임했고, 이듬해인 2016년부터는 1군 투수코치로 보직을 변경해 2019년까지 재직하며 팀 투수 성적을 리그 상위권으로 올려놓는 등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2020년에는 2군 투수코치로 보직을 바꿨고 시즌 종료 후 퇴임했다. 다만, 후지나미 신타로는 초창기부터 워낙 혹사당한 탓에 투구폼 교정 및 특별 지도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한신에서 퇴단한 후인 2021년엔 GAORA에서 야구 해설자를 역임했고, 2022년부터 고향 나가사키현의 큐슈분카가쿠엔고등학교 감독에 취임하며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로써 데뷔하게 되었다.[4]
4. 통산 성적
통산 기록 | ||||||||||||||
연도 | 소속팀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승리 | 패전 | 세이브 | 이닝 | 탈삼진 | 사사구 | ERA | WHIP | WAR |
1985 |
요 미 우 리 |
1 | 0 | 0 | 0 | 0 | 0 | 0 | 1.0 | 1 | 0 | 0.00 | 1.00 | 0.0 |
1986 | 13 | 0 | 0 | 0 | 1 | 0 | 0 | 22.0 | 25 | 10 | 4.09 | 1.05 | 0.0 | |
1988 | 27 | 11 | 2 | 1 | 4 | 3 | 1 | 93.2 | 76 | 24 | 2.59 | 1.04 | 2.5 | |
1989 | 19 | 12 | 2 | 2 | 7 | 3 | 0 | 88.0 | 71 | 21 | 2.35 | 0.94 | 1.9 | |
1990 | 23 | 19 | 4 | 1 | 11 | 5 | 0 | 130.1 | 106 | 38 | 2.90(4위) | 1.17 | 2.8 | |
1991 | 27 | 13 | 3 | 0 | 6 | 5 | 0 | 113.2 | 78 | 37 | 4.59 | 1.36 | 0.5 | |
1992 | 13 | 3 | 0 | 0 | 0 | 2 | 0 | 26.1 | 27 | 15 | 8.89 | 2.09 | -0.1 | |
1993 | 22 | 16 | 2 | 0 | 8 | 7 | 0 | 100.0 | 59 | 35 | 3.51 | 1.17 | 1.4 | |
1994 | 21 | 11 | 1 | 1 | 2 | 3 | 1 | 70.2 | 40 | 35 | 4.46 | 1.57 | 0.3 | |
연도 | 소속팀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승리 | 패전 | 세이브 | 이닝 | 탈삼진 | 사사구 | ERA | WHIP | WAR |
1995 |
킨 테 츠 |
20 | 12 | 1 | 0 | 2 | 5 | 0 | 69.2 | 39 | 28 | 4.91 | 1.56 | 0.8 |
1996 | 4 | 4 | 0 | 0 | 0 | 3 | 0 | 14.0 | 6 | 4 | 9.64 | 2.21 | -0.3 | |
1997 | 18 | 18 | 0 | 0 | 9 | 4 | 0 | 107.1 | 58 | 29 | 3.69 | 1.39 | 2.2 | |
1998 | 23 | 14 | 0 | 0 | 4 | 5 | 0 | 89.0 | 40 | 31 | 4.96 | 1.55 | 0.2 | |
1999 | 55 | 0 | 0 | 0 | 5 | 4 | 8 | 99.2 | 67 | 21 | 2.44 | 1.16 | 3.0 | |
2000 | 28 | 0 | 0 | 0 | 6 | 2 | 0 | 37.2 | 21 | 10 | 4.06 | 1.38 | 0.9 | |
2001 | 36 | 0 | 0 | 0 | 2 | 3 | 1 | 47.2 | 24 | 8 | 3.97 | 1.01 | -0.1 | |
통산 16시즌 | 350 | 133 | 15 | 5 | 67 | 54 | 11 | 1110.2 | 738 | 346 | 3.82 | 1.26 | 16.2 |
5. 기타
- 한신 퇴단 직후인 2021년에 요미우리 시절 팀 동료였던 마키하라 히로미의 유튜브에 출연하여 한국 시절에 대해 간략하게 썰을 풀기도 했다. 여기서 코다 본인은 한국 야구에 대해 " 한국 야구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만한 선수도 나오는 등 선수 개개인의 면모를 보면 뛰어난 선수들은 분명 여럿 존재하나, 팀으로써의 레벨 등 전체적인 면에선 아직 일본 야구보다는 수준이 낮다"라는 평가와 함께 일본과는 다른 미국식 야구 스타일이 주류였던 점이 신기했던 한편 한국에서의 코치 생활이 즐거웠다는 감상을 밝혔다. 덤으로 한국에 있을 적엔 국제운전면허증을 따긴 했으나 한국의 복잡한 도로 환경에 두려움을 느껴서 대부분 지하철로 출퇴근한 경험담과, 술을 좋아하는 선수들이 많았다(...)[5]는 썰도 풀었다. 영상
- 두산 베어스의 통역사인[6] 김용환 대리는 입사 전엔 아예 야구를 몰랐으나, 2014년 코다의 통역을 맡으면서 야구에 대해 알아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6. 관련 문서
[1]
두산 베어스 코치 시절엔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2]
1999년부터 팀명에 연고지
오사카가 들어갔다.
[3]
이 해
킨테츠 선수진은 211홈런을 기록한
슬러거 타선과 팀
평균자책점 4.98을 기록하며 불타오른 투수진의 극단적인 투병타신대조로 유명했는데, 당시 주전 투수진 중 제 몫을 다한 몇 안되는 선수 중 하나가 바로 코다였다.(36등판 47.2이닝 2승 3패 1세이브 ERA 3.97) 다만 세이버상으론 WAR 음수를 기록하며 그다지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4]
이전부터 "언젠가는
고향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야구로 보답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과 더불어 지역 내 야구 유망주들이 계속해서 타 지역으로 유출되는 것에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야구 해설가 일과 아마추어 지도자 공부를 병행했었고, 지도자 자격을 얻게 된 직후 감독직 요청을 승낙했다고 한다.
[5]
코다가 코치직을 사임한 후, 2015년부터 두산도 타 구단과 마찬가지로 음주 관련해서는 선수들이 스스로 관리하는 편이며
홍건희 등 게임을 취미로 삼거나 개인 트레이닝 등을 받는 선수들이 늘어나는 추세이고 시즌 중에는 음주를 자제하는 편이다. 이 때문에
김대한이 술을 마시는 사진을 올렸을 때 상당수 두산 팬들이 탄식하면서 김대한을 비판하였으며, 선수들도 술 대신에는 음료수를 곁들이거나 디저트를 먹으러 간다.
[6]
현재 운영1팀 과장. 2024년부터는 통역업무가 아닌 국제협력 관련 업무를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