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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6:03:01

켈리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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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larenceLeonardKellyJohnson.jpg
Clarence Leonard "Kelly" Johnson
1910년 2월 27일 ~ 1990년 12월 21일
1. 개요2. 생애3. 항공기 개발4. 일화5. 제작에 관여한 항공기들

1. 개요

클래런스 레너드 "켈리" 존슨 미국 스컹크 웍스 소속 공학자이다.

2. 생애

미시간 주의 이쉬페밍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으로 이주한 스웨덴인 부모를 둔 스웨덴계 미국인이다. 집이 가난하였기에 뛰어난 실력으로 이를 만회하고자 하였고, 13세에 첫 비행기 설계로 상을 받았다. 한편으로 학창 시절에는 Clarence라는 이름 때문에 클라라(Clara)라고 놀림을 받았는데, 놀리던 친구의 다리몽댕이를 분질러준 것을 계기로 켈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별명이 우리가 흔히 아는 이름인 '켈리 존슨'이 되게 했다.[1]

1933년에 석사 취득 후 록히드에 취직하여 공구 디자이너로 근무하던 중 당시 수석 엔지니어인 홀 히버드에게 미시간 대학교에 다니며 록히드 모델 10 엘렉트라 여객기의 풍동 실험을 하던 도중 알아차린 비행안정성 관련 모델 10 엘렉트라의 문제를 보고했고, 이후 여러 번의 테스트 후 록히드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H형 수직미익을 장착하여 여러 문제점을 성공적으로 고치자, 록히드의 높으신 분들의 눈에 띄어 항공 엔지니어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후 시험비행 엔지니어, 피로분석 등의 일을 하다 1937년 경리부서의 Althea Louise Young과 결혼하였고, 이듬해(1938)에는 수석연구기술자가 되었으며 1956년엔 연구개발 부사장까지 승진했다. 58년엔 고등개발과제(ADP) 부사장으로 임명되어 75년에 벤 리치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하였다. 은퇴한 후에도 스컹크 웍스의 자문을 맡았으며, 83년에는 켈리 존슨의 50년 근무를 기념하는 차원으로 Lockheed Rye Canyon Research and Development Center의 이름을 켈리 존슨 리서치 센터로 바꾸었다.

1955년엔 CIA의 의뢰를 받아 네바다주의 그룸 호수에 그 유명한 AREA 51을 만들어 한동안 U-2 YF-12와 같은 군용기들의 시험비행을 극비리에 진행하기도 했다.

1985년에는 <Kelly: More Than My Share of it All>이라는 이름으로 자서전도 출간했다. 아쉽게도 한글 번역판은 없다.

3. 항공기 개발

여러 가지 의미로 철두철미한 공학자였기에 극도로 실용성을 강조하였다. F-104의 전방동체를 U-2에 활용하는 등의 예로도 이런 성격이 잘 드러났다.

자신이 확신할 수 없는 기체는 만들거나 제안하지 않는다는 신조가 투철했다. 설령 경쟁자가 고객의 적절치 않은 요구나 입맛에 맞는 제안서를 내어 계약을 따내고 이후 설계를 수정하는 행태가 만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조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록히드는 LWF(경량전투기) 사업에서 홀로 공군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설계안(더 큰 익면적과 중량, 연료탑재량 등)을 내서 초반에 탈락하였다.

당시 미 공군은 연료 탑재량 5000(약 2.3톤)파운드, 주익면적 275 ft²의 17000파운드 급(약 7.5톤 가량) 기체를 요구했다. F-20보다 1.5톤, 주익면적은 38%, F-5에 비하면 3톤, 주익면적은 48% 더 큰 기체에 연료탑재량은 같은 전투기를 바랐다는 뜻이다. 기체 중량으로 따지면 F-8, J35와 동급이고 주익면적은 작다. 전투기는커녕 단거리 요격기에 붙어도 시원찮을 요구사항이다. 이에 스컹크 웍스는 1만 9천 파운드, 연료탑재량 9000파운드, 주익면적 310 ft²의 기체를 제안했고 당연히 서류에서 탈락했다.

이후 선정된 제너럴 다이내믹스이 안은 F-16이 되면서 1만 9천 파운드, 연료탑재량 7400파운드, 주익면적 310 ft²가 되었다. YF-17은 21000파운드, 연료 7400파운드, 주익면적 350 ft². 이후 최종경쟁자였던 노스롭과 경쟁에서 승리하여 공군과 계약한 제너럴 다이내믹스의 최종 설계안과 시제기는 결국 중량과 익면적, 연료탑재량을 늘려 설계되었다. 그것이 바로 YF-17과 YF-16이다. 결국 승리자인 제너럴 다이내믹스와 F-16이 록히드 마틴에 인수되었음을 생각하면 굉장한 아이러니이다. 노스롭 역시 YF-17을 기초로 만들어진 F/A-18이 삽질로 맥도널 더글라스(현 보잉)로 주계약이 넘어가가끼자 했으니...

그 외에도 SR-71의 원형 즉 CIA 정찰기 사업에서도 다른 제작사의 제안이나 정부 및 국방부의 제안에 과장된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지적할 정도로 그 신념은 확고했다. 초도예산이 거의 1억 달러에 달하는 수소추진 공군정찰기 연구 및 개발을 하면서 무슨 수를 써도 원하는 항속거리가 안 나온다는 결론이 나오자 바로 gg치고 사용한 600만 달러를 제외한 9천만 달러를 바로 정부에 돌려주었다. 만약 다른 기업들이었으면 이를 숨기고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며 연구비를 쓰려 했을 테니, 켈리 존슨의 성격이 어떠한지 알고도 남는다.

또한 밀덕, 그중에서도 항공기 덕후라면 여러 번 들어보고 남았을 항공업계의 전설적인 괴수다. 이분이 중심으로 개발된 항공기만 따져도 후덜덜한데 실제 미군이나 CIA에 의해 사용된 것만 해도 쌍둥이 악마란 별명이 있던 P-38, 미 최초의 제트기 F-80 슈팅스타, 최초로 마하 2를 돌파한 전투기 F-104, 운용고도 7만 피트급 고공정찰기 U-2와 최초의 M.3 급 항공기기이자 U-2를 넘어서는 고공정찰기인 SR-71. 물론 항공기 설계에 있어서도 천재였지만 항공 및 군사 업계에서 레전드라 할 수 있는 스컹크 웍스[2]를 직접 만들어 25년을 장으로 지낸 만큼 조직관리에 있어서도 천재, 조직 내에서는 Organizing genius로 불리신 모양이다.[3]

당연히 항공기 설계에 관해서도 상도 여러 번 받았고 콜리어 트로피도 두 번이나 수상했다. 라이트 형제의 첫 비행 100주년을 맞아 Aviation Week & Space Technology지에서 뽑은 항공기 역사상 손꼽히는 인물 100인 중 8위에 들기도 하였다.[4]

4. 일화

원문[5]

1.
동료: "어이, 켈리. 그 괴상한 전투기는 뭔가? 설마 P-38?"
켈리: "응." (슥슥슥)
동료: "...그런데 주익 그리면서 계산은 왜 안하나?"
켈리: "하고 있는데?"
동료: "어디에?
켈리: "머릿속에."
(그런데도 잘만 날아다녔습니다.)

2.
후배: "아,U-2의 도안입니다."
켈리: (슥 보며) "목표고도가 성층권을 넘어갔었지?"
후배: "넵!"
켈리: "익면적 늘려. 8% 정도."
후배: "예?!"
켈리: "안 그러면 안 올라가. 수식 검산해보고."
후배: (계산해보고) "헐 진짜다..."

3.
벤 리치: "선배님, 새로운 초고속 정찰기에요."
켈리: "오오, 가변식 덕트인가?"
벤 리치: "네, 여기부터 여기까지..."
켈리: "...그러면 덕트가 한 20% 가까이 낭비일 것 같은데? 너무 크니까 줄여."
벤 리치: (계산해보고) "...18%"

4.
엔지니어들: "자 , 이제 차세대 전투기를..."
켈리: "뭐야, 후퇴각 좀 더 주지? 5도쯤 더 밀어야 최적화될 텐데."
엔지니어들: (계산해보고) "...저 스웨덴 놈 눈엔 공기가 보이나?!"[6]

5.
동료: "여기 RS-71(SR-71)의 도안입니다."
켈리: "수직미익에 저항이 너무 커, 거의 1600도 가까이 올라갈 거야."
동료: (계산 후) "1580도...[7]"

은퇴 후에 후임자인 벤 리치의 책임 아래 제작된 F-117의 처음 모양을 보고 크게 화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똥덩어리가 날 것 같냐!" 하고 성질을 냈다고 하는데, 당시 F-117의 디자인 철학은 그 비행기를 설계하던 스컹크 웍스의 현직 설계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심했기 때문에 특별히 켈리 존슨의 능력을 의심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설계 당시 공기역학 담당자가 스텔스 담당자와 현피를 뜨려고 했을 정도. 공기를 본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던 그에게, 공기역학을 희생하다 못해 무시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날아다니는 다리미'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물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실제로 F-117의 형상은 공기역학적으로만 보면 매우 불안정한데 이를 컴퓨터로 제어하여 안정적으로 비행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 기존의 상식으로는 실패한 설계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5. 제작에 관여한 항공기들

일단 스컹크 웍스 시작때부터 일한 만큼 스컹크 웍스의 최근 항공기를 제외하고는 전부라고 할 수 있다.

[1] 켈리는 아일랜드계 및 콘월, 데본 출신의 이름이다. 실제 켈리 존슨은 전술하였듯이 스웨덴계. 그의 한 성깔 하는 성격이 아일랜드계 같아서 붙은 별명. [2] 뛰어난 기술로 유명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공학, 산업계에서 기술 및 생산 연구 관리까지 혁신의 대명사로 통한다. [3] 실제 스스로도 항공기 설계 능력은 물론이고 조직관리에 있어서도 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벤 리치가 HBS( 하버드 대학교 MBA)과정을 이수하고 싶다고 했을 때 보내주겠다고 말하면서도 '나라면 그딴 HBS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더 필요한 걸 반나절이면 전수해 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남는 시간인 저녁엔 나랑 한 잔 하러 가면 됨.ㅇㅋ?' 라고 했을 정도. 벤 리치는 HBS를 이수하고 돌아와선 켈리에게 2/3 HBS = BS 라는 공식을 선물했다. 뜻은 HBS의 2/3은 Bull Shit이라는 것. 켈리는 크게 웃으면서 액자에 넣어 걸어뒀다고. [4] 당연한 일이겠지만 1위는 라이트 형제이다. 비행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들이 1위가 아니면 그게 이상한 일. 2위는 베르너 폰 브라운. V2를 만든 사람이며 나치 사람이었지만 항공기에 대한 머리는 매우 뛰어났다. 특히 로켓. 3위는 현대 로켓공학의 아버지 로버트 고다드, 4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5위는 미국 최초의 파일럿 라이센스 습득자 글렌 커티스, 6위는 최초의 단독 무착륙 대서양 횡단을 한 찰스 린드버그, 7위는 현대 미 공군 탄생의 기틀을 세운 윌리엄 미첼. [5] 링크와 아래의 예시의 경우 실제 일화와는 발언자나 기종이 다른 것도 몇개 있다. 저런 일화가 있었다는 것 자체는 관계자의 증언 등이 있기 때문에 사실이다. [6] 벤 리치의 자서전에서는 해당 발언을 한 이가 히버드라고 밝혔다. 엘렉트라의 쌍수직미익 개조 이후에 있었던 일인데, 켈리 본인은 이를 가장 큰 칭찬으로 여겼다고 한다. [7] 섭씨 860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