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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2:44:47

루이스 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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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58><colcolor=#fff> 루이스 버웰 풀러
Lewis Burwell Puller
파일:attachment/Chesty_Puller.jpg
출생 1898년 7월 26일
미국 버지니아 웨스트포인트
사망 1971년 10월 11일 (향년 73세)
미국 버지니아 햄튼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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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버지니아 군사대학
직업 군인
복무 미군 (1918~1955)
최종 계급 중장
참전 바나나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2.3. 6.25 전쟁에서의 활약 및 그 이후
3. 평가4. 기타5.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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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군인.

2. 생애

2.1. 초기 생애

그는 버지니아 주 웨스트포인트에서 매튜 풀러와 마르타 풀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이스 풀러가 10살도 되지 않아 죽었지만, 그는 토마스 잭슨의 무용담과 남북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났다고 한다. 그는 191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참전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그의 나이는 어려서 부모의 허락을 얻어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의 어머니 마르타 풀러 씨는 그에게 참전에 대한 허락을 해 주지 않아 참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음 해인 1917년 그는 버지니아 군사대학(VMI)에 입교하였다. 재학 중이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미 해병대 제5해병연대의 [1] 활약상에 감명을 받아 입교 1년만에 자퇴를 하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미 해병대 병으로 입대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위치한 미 해병대 패리스 아일랜드 교육단에서 신병훈련을 받았다. 전쟁 중 해병대의 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그는 신병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부사관 학교에 입교하였고, 이후 콴티코에 있는 해병대 사관후보생( OCS) 과정에 입교, 1919년 6월 16일 OCS 과정 수료 후 해병대 예비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나, 전후 군축으로 인해 임관 10일 후 장교 임관이 취소되고, 부사관인 해병대 상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첫 근무지는 카리브 해의 섬나라인 아이티 헌병군이었다. 그는 미 해병대 부사관 신분으로 아이티 헌병군에 파견되어 아이티 헌병 중위로 근무 하면서 5년간 반란군과 40회가 넘는 전투를 수행하였으며, 1922년 미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나중에 미 해병대 사령관이 된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소령의 부관이 되어 그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1924년 6월 중위로 진급하여 노포크 해군기지 경비대와 해병대 기초교, 해병대 제10포병연대에 근무했다. 1926년에는 진주만 해군기지 경비대, 1928년에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해군기지 경비대에 근무했다.

1928년 12월 그는 니카라과 방위군에 파견된다. 그는 니카라과에서 그의 첫 번째 해군 십자장을 받게 된다. 1931년 그는 조지아의 포트 베닝 육군 보병학교에서 보병 중대장 과정을 수료하고, 1932년 니카라과로 복귀한다. 니카라과에서 그의 두 번째 해군 십자장을 수상했다. 이후 그는 중국 북경에 있는 주중미국공사관 경비대에서 근무하고, 미 대서양 함대로 근무지를 옮겨 체스터 니미츠 대령 함장으로 있던 미 해군 순양함 USS 오거스타(CL/CA-31) 함의 해병대 지휘관으로 근무했다. 1936년 다시 미 본토로 돌아와 미 해병대 기초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이때 그를 거쳐간 교육생은 루이스 로버트쇼(후일 해병 중장), 그레고리 보잉턴, 루이스 월트(후일 해병 대장) 등이 있다.

1939.5월에는 다시 오거스타함에서 근무했고, 1940.5월~1941.8월 사이 풀러 소령은 중국 상하이 주둔 미 해병대 제4연대 2대대 부대대장과 대대장을 지내고, 미 본토로 돌아와서 해병대 제1사단 7연대 1대대장을 지냈다.

2.2.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

파일:attachment/250px-PullerGuadalcanal.jpg
과달카날에서의 루이스 풀러.

그는 1941년 8월 말 미국으로 잠깐 복귀한 이후, 그는 해병 제 1사단 7연대 1대대장을 맡아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후 그는 과달카날 전투에 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앞장서서 싸운 것으로 이름을 높였다. 특히 그의 판단력은 마타니카우 강 전투에서 빛났는데, 그의 대대 휘하에 있는 3개 중대가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지자, 그는 해변가로 달려가 미 해군에게 신호를 보내 일본군에게 집중 포화를 때려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신호에 호응한 미 해군 구축함 USS Monssen 은 일본군에게 포격을 가해 공격부대를 박살을 내 놓았고, 그의 중대들은 큰 피해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 전투 후 그는 청동 무공 훈장을 받게 된다. 또한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때 쯤 그는 그의 3번째 해군 십자 훈장을 받기도 한다.

또한 존 바실론 M1917을 들고 활약한 룽가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당시 미군의 주력 부대는 마타니카우 강 북쪽에서 허먼 하네켄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예상과 달리 일본군의 주력이 모조리 룽가 방면으로 몰려오자 그는 기관총을 방어의 핵심으로 사용할 것을 지시하여 일본군의 주력을 붕괴시키고 방어선을 지켜 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글로세스터 곶 전투에서 그는 네 번째 해군 십자장을 수여받는다. 그리고 1944년 1월 대령으로 진급하여 해병 1연대의 연대장으로 전보한다. 그리고 펠레리우 전투에도 참전하였다.[2] 한편 그의 동생이었던 새뮤얼 D. 풀러는 해병 제4해병연대 부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전투에서 일본군 저격수에게 저격당하여 안타깝게 전사하고 만다.

그는 1944년 말 미국으로 귀국하여 보병 훈련연대장을 맡았다가, 또 다시 진주만으로 배속된다.

2.3. 6.25 전쟁에서의 활약 및 그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루이스 풀러는 진주만의 해병들을 지휘하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 제1해병사단 1연대를 다시 맡아 인천 상륙 작전에도 참가하여 은성 무공 훈장을 받는다. 이 당시의 에피소드.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가 훈장을 수여할 당시 풀러는 진지에서 공격을 대비해 엄폐해서 앉아 있었다. 알몬드가 이 곳은 적의 사정거리 바깥에 있다며 안심시켰지만 오히려 풀러는 위험하다며 알몬드를 강제로 무릎을 꿇게 했다.[3] 훈장 수여식 때도 순간적으로 일어나 경례를 하고는 알몬드가 건넨 훈장을 낚아채다시피 받고는 다시 알몬드를 옆에 앉혀서 작전을 논의했다고. 풀러의 신중함이 잘 나타나는 에피소드이다.

그는 해병 제1연대를 이끌고 6.25 전쟁 최고의 지옥도였던 장진호 전투에서도 살아남아 자신의 다섯 번째 해군 십자장을 수여받는다. 이후 그는 1951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1해병사단의 부사단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였고, 1951년 5월 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직위를 유지하였다. 그는 곧 소장을 거쳐 중장까지 진급하였으나, 1955년 고혈압으로 인한 질환으로 은퇴한다.[4]

루이스 풀러 중장은 1971년 10월 11일 사망하였다.

3. 평가

루이스 "체스티" 풀러는 미합중국 해병대 중장으로 아이티와 니카라과에서 게릴라들과의 전투에 참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6.25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이다.[5] 또한 그는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해병으로 미 해병대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전공으로 5개의 해군 무공훈장 해군십자장(海軍十字章, Navy Cross, 2등급 훈장)과[6] 1개의 육군 무공훈장 수훈십자장((受勳十字章, Distinguished Service Cross, 2등급 훈장)을 받았는데, 미군 역사상 5개의 해군십자장을 받은 사람은 단 2명에 불과하다.[7] 또한, 그는 미 육군 항공대의 에디 리켄배커(Eddie Rickenbacker) 대위에 이어 미군 역사상 2번째로 많은 무공훈장을 받은 수훈자이기도 하다.[8]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그에 대한 책이나 드라마, 영화가 많이 있고, 가장 최근에는 HBO 방송국에서 제작한 드라마, 더 퍼시픽의 등장인물로 나오기도 했다.[9] 그는 미 해병대에 37년간 복무한 후 1955년 퇴역했다.

4. 기타

5. 명언

해병 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장군의 "우리가 후퇴한다고?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당시 육군 중령의 "이제 주변이 모두 적이니까 신경쓰지 말고 마음껏 발포해라." 라는 명언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풀러 역시 수많은 명언을 남겼다.
그가 무슨 말은 하면 바로 기사 제목감이 된다고 해서 종군기자들은 '풀러리즘'이라고 불렀다.

[1] 미국 해병대에 사단편제급 부대가 신설된건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기 직전 1941년 초기가 되어서였고, 상륙군단급 편제는 1943년이 되어서 활성화되었다. 전간기에 있던 해병대는 연대, 여단이 전부였다. [2] 이 때 루이스 풀러는 상륙 제 1파로 섬에 진입하였는데, 일본군의 거센 반격으로 인해 LVT가 박살나서 전사할 뻔 했다고 한다. [3] 이 때 알몬드가 "아무 총알도 날아오지 못할테니 걱정말게"라고 하자 풀러가 "바로 그 총알에 제 동생이 죽었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4] 풀러의 경력을 보면 대장 진급도 당연시 됐으나 아쉽게도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5] 그가 참전하였던 큰 전투만 해도 과달카날 전투, 글로세스터 곶 전투, 펠레리우 전투, 인천 상륙 작전, 장진호 전투 등이다. 한 마디로 20세기에 아시아-태평양 권역에서 벌어졌던 피튀기는 혈전에는 그가 항상 있었다는 뜻이다. [6] 명예 훈장 바로 아래의, 군인이 받을 수 있는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의 훈장으로, 육해공군별로 동 서열의 훈장이 존재한다. 해군십자장은 해군과 해병대, 해안경비대를 대상으로 수여된다. 타군에게도 수여가 가능하나 그런 사례는 드물다. 풀러 장군은 바로 그런 사례 중 하나로 육군의 동급 훈장인 수훈십자장을 받았다. [7] 5개의 해군십자장을 받은 다른 한 명은 로이 M. 대븐포트(Roy M. Davenport) 해군 소장이다. 보통 미군에서 십자장을 두 번 수여하는 것은 명예훈장을 수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겨지는데(여담으로 살아서 명예훈장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살아서 받는 사실상 최고 무공훈장이 수훈십자장. 두 훈장 모두 군인에게는 최고의 영예다. 독일 국방군으로 치자면 황금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셈.) 루이스 풀러는 수많은 전장을 거치면서도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으면서 무려 6개의 십자장(해군 십자장 5개,육군 십자장1개)을 수훈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갯수. [8]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수훈한 에디 리켄배커 육군 대위는 7개의 육군 십자장과 1개의 명예 훈장을 수훈 [9] 배우 윌리엄 새들러가 풀러 배역을 맡아 연기했는데, 이 배우는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죄수 헤이우드 역을 맡았던 걸로 유명하다. MCU에서는 매튜 엘리스 미국 대통령 역. [10] 1997년 발병했고 어떻게든 재선까지 활동했으나, 결국 2015년 은퇴를 선언했다. [11] 공교롭게도 미합중국 해군의 함선임에도 불구하고 함선들에는 미합중국 해병대에서 복무한 군인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으며 본인의 이름이 붙여진 ESB-3 함선을 제외하면 나머지 함선들은 미합중국 해병대에서의 활약으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인물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