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趙) 국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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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169E1> 조(趙)나라 4대 국군 성후 成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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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영(嬴) | |
씨 | 조(趙) | |
휘 | 종(種) | |
아버지 | 조경후(趙敬侯) 조장(趙章)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350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50년 |
[clearfix]
1. 개요
조(趙)나라의 4대 국군이자 조씨 18대 종주. 조경후의 아들. 조숙후의 아버지. 호복기사를 도입한 조무령왕의 할아버지다. 위나라가 조나라를 압박하는 일이 많았으나 제나라의 도움으로 위나라의 압박에서 벗어난다.2. 재위
2.1. 재위 초기
조성후 원년( 기원전 374년), 공자 승(公子 勝)이 조성후와 조후(趙侯) 자리를 다투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조승(趙勝)이 패했다.[1]조성후 3년(기원전 372년), 조성후는 태무오(太戊午)[2]를 상국으로 임명했다. 조성후는 위(衛)나라를 쳐서 73개 읍을 얻었다. 그리고 위(魏)나라의 난구에서 싸워 위군에게 패했다.
조성후 4년(기원전 371년), 조준은 진나라 군대와 고안에서 싸워 이겼다.
조성후 5년(기원전 370년), 조나라 군대가 제나라 군대와 견 땅에서 싸웠다. 위나라군과는 회 땅에서 싸웠으나 패했다. 그리고 조나라는 정나라와 싸워 이겼다.[3]그리고 그 땅을 한(韓)나라에게 넘기고, 한나라는 장자 땅을 조나라에게 주었다.
조성후 6년(기원전 369년), 조성후는 위나라를 쳐서 훼택에서 위나라군을 이기고 양혜왕을 포위했다.[4]
조성후 7년(기원전 368년), 조성후는 제나라를 쳐 장성을 점령했다. 그리고 주나라를 쳤다.
조성후 8년(기원전 367년), 조나라는 한나라와 함께 주나라를 둘로 나누었다.[5]
2.2. 재위 중기
조성후 9년(기원전 366년), 제나라군과 아성에서 교전을 벌였다.조성후 10년(기원전 365년), 위(衛)나라를 쳐서 견성을 점령했다.
조성후 11년(기원전 364년), 진(秦)나라가 위(魏)나라를 치자 위나라가 조성후에게 구원을 요청해 석아에서 구원했다.
조성후 12년(기원전 363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양성을 치자 다시 위나라를 구원했다.
조성후 13년(기원전 362년), 위나라군은 회 땅에서 조나라와 한나라를 이겼다. 그리고 피뢰가 점령당했다. 조성후는 한소후와 회맹했다.
조성후 14년(기원전 361년), 한나라와 연합해 진나라를 쳤다.
조성후 15년(기원전 360년), 위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쳤다.
조성후 16년(기원전 359년),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진(晉)나라를 3분하고, 단지 땅을 주었다.[6]
조성후 17년(기원전 358년), 양혜왕은 갈얼에서 회맹했다.
2.3. 재위 후기
조성후 19년(기원전 356년), 조성후는 제나라, 송나라와 평륙 땅에서 회맹했다. 그리고 연나라와 아 땅에서 회맹했다.조성후 20년(기원전 355년), 위나라가 좋은 목재를 보내주어 단대를 만들었다.
조성후 21년(기원전 354년), 양혜왕이 조나라를 치자 조나라의 수도 한단이 포위되었다.
조성후 22년(기원전 353년), 위나라군이 한단을 점령하자 조성후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니 제나라는 손빈을 보내 계릉 전투에서 위나라군을 이겼다.
조성후 24년(기원전 351년), 위나라는 한단을 돌려주며 장수에서 회맹했다. 같은 해 진나라가 조나라의 인 땅을 쳤다.
조성후 25년(기원전 350년), 조성후가 죽고 공자 설이 태자 어와 군주 자리를 다투다가 실패해 한나라로 달아났다. 태자 어가 조성후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조숙후다.
[1]
공자 승이 평원군과 이름이 한자도 같지만
동명이인이다.
[2]
달리 태성오(太成午)라고도 한다.
[3]
그도 그럴게
전국칠웅 중 최약체인
한(韓)나라가 근처에 있어서 압박을 받아 결국 견디지 못하고 결국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4]
아주 틀린 말이 아닌게, 조나라는 점점 상승세인 반면에, 위나라는 후일
제나라를 무리하게 치는 바람에 결국 국운이 다하게 된다.
[5]
그리하여 동주(東周)가 또 다시 동주(東周: 여기는 주공이 다스리는 주나라)와 서주(西周: 여기가 주나라 본가.)로 갈라지게 된다.
[6]
이것은 기원전 346년
진(晉)나라가 망했다는 설에 따른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