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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노비 콜로바노프

<colbgcolor=#CC0000><colcolor=gold> 지노비 그리고리예비치 콜로바노프
Зино́вий Григо́рьевич Колоба́нов
파일:Zhinovy_Kolobanov.jpg
출생 1911년 1월 7일[구력]
러시아 제국 블라디미르현 무롬스크군
사망 1994년 8월 8일 (향년 83세)
벨라루스 민스크
국적
[[벨라루스|]][[틀:국기|]][[틀:국기|]]
학력 오룔 기갑학교
직업 군인
최종 계급 중령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생애
2.1. 독소 전쟁2.2. 종전 후

[clearfix]

1. 개요

소련 전차 에이스이다.

2. 생애

지노비 콜로바노프
콜로바노프는 1910년 12월 5일에 태어나 1936년 5월 오룔 기갑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중위 계급을 받고 레닌그라드 전선군 제2전차여단 소속의 제3독립전차대대로 배치되었고 겨울 전쟁에 제1경전차여단의 전차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이때 전차 3대를 날렸으나 탁월한 지휘력을 인정받았다.

2.1. 독소 전쟁

독소전쟁이 발발한 뒤인 1941년 7월 3일에 콜로바노프는 제1전차사단 소속의 제1전차연대 제3전차중대 중대장으로 재배치되어 KV-1의 전차장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8일 독일의 북부집단군이 레닌그라드로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전선군은 진격을 둔화시킬 수는 있어도 격퇴할 수는 없는 압도적 열세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8월 19일, 대대장인 이오시프 보리소비치는 크라스노그바르데이스크(현 가치나)라는 작은 도시의 방어를 단 다섯 대의 KV-1 전차에게 맡겼다. 콜로바노프는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고속도로들과 기차역까지 위치한 저 요충지를 방어하라는 명령에 따라 자신과 휘하의 전차 포탄 중 2/3 가량을 철갑탄으로 적재하도록 지시하고 방어를 위해 출발했다. 그리고 다섯 대 모두 흩어져 각자 맡은 고속도로로 매복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콜로바노프는 질퍽한 도로에서 매복하기로 했다.

다음 날인 20일, 콜로바노프와 승무원들은 슈투카 편대가 지나가는 소리에 잠을 깨 하루를 시작했다. 콜로바노프의 864호차는 다행히도 위장을 해 놓았기 때문에 슈투카들은 그냥 지나쳐 버렸다. 곧 적들이 다가올 것을 직감한 콜로바노프는 같이 데리고 온 정찰대에게 전차 근처에 매복할 것을 명령했고, 자신과 승무원들은 전차 안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자 세 대의 오토바이에 나눠탄 독일군 정찰대가 나타났다. 콜로바노프는 사격하지 말 것을 명령했고, 독일군 정찰대는 근처 가옥에 기관총을 난사하고는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육군 제6기갑사단의 선봉대 전차 22대[2]가 도로 위에 나타났다. 콜로바노프는 대대장에게 적 전차부대가 나타났다고 무전을 보냈고, 대대장은 교전을 지시했다. 콜로바노프는 선두 전차에 사격 지시를 내려 한 방에 격파시켰다. 나머지 전차들은 선두 전차가 대전차지뢰를 밟은 것으로 알고는 그대로 정차했다. 이 기회를 놓지지 않고 콜로바노프의 전차는 두 번째 전차도 격파시켰다. 그제서야 독일군들은 자신들이 공격받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독일군은 어딘가에 적 전차가 매복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도로 주변 농장과 건초 더미에 총을 난사했지만, 콜로바노프의 전차는 좀처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나머지 전차 18대가 콜로바노프의 전차를 찾아내 집중 사격을 가했지만 소용없었다. 계속되는 피탄으로 요동치는 전차 안에서 콜로바노프는 침착하게 독일군의 전차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그 와중에 몇몇 독일군 전차들은 반격을 위해 도로 밖으로 나왔지만, 라스푸티차로 인해 진흙과 다름없어진 지면에 무한궤도가 맥을 못추며 정체되었다. 독일군은 PaK 36 대전차포까지 동원하여 콜로바노프의 전차를 격파하려 했지만, 정면에서 쏜 것까지 방호되는 등 전차포들과 마찬가지로 별 소용이 없었고 결국 네 대의 대전차포 역시 박살났다.

이 전투로 독일군의 전차 22대가 전부 격파되었고, 대전차포 네 대와 하프트랙 세 대도 격파되었다. 콜로바노프의 전차 외에 나머지 KV-1 전차 네 대 또한 21대의 전차를 격파해 콜로바노프 휘하의 KV-1 전차 중대는 20일 하룻 동안만 무려 43대의 독일군 전차를 격파했다. 이 피해로 인하여 독일군의 제6기갑사단은 최소 하룻 동안 진격할 수가 없었다. 콜로바노프의 전차는 98개의 피탄 흔적[3]과 깨진 잠망경 빼고 큰 손상은 없었다. 이 전공으로 콜로바노프는 적기훈장을, 포수였던 안드레이 우소프는 레닌훈장을 수여 받았다. 하지만 콜로바노프는 1941년 9월 15일 밤에 푸쉬킨 시에서 연료탱크와 탄약고에 날아들어온 독일군의 포탄 파편을 머리와 척추에 맞는 중상을 입으며 입원했고, 전쟁 후반기인 1945년 3월 15일까지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투병 중인 1942년 5월 31일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뒤인 종전 이후에도 현역으로 복귀하고 싶다고 간청해 1945년 7월 10일 바로노비치 군관구 제5근위전차군 제12기계화사단 제14기계화연대 제69전차대대의 부대대장이 되었다.

2.2. 종전 후

1951년 12월에는 동독 주둔 소련군의 전차대대장으로 배속되어 근무했고 1954년에는 근속 20주년을 맞아 두 번째 적기훈장을 받았지만, 1955년에 부하 중 한 명이 탈영해 서독의 영국군 관할 지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군사재판에서 문책을 당하고 벨로루시 군관구로 좌천되었다. 이후 해당 군관구 기갑부대들의 지휘관과 부지휘관을 맡은 뒤 1958년 7월 5일에 예비군으로 전속되어 25년 가까이 지속되어 온 군 생활을 마쳤다. 최종 계급은 중령이었다. 퇴역 후에는 계속 민스크에 살면서 민스크 자동차 공장의 관리직으로 일했다.

콜로바노프는 1986년 8월 20일에 자신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만든 기념상 제막식에 참석했는데, 다만 이 기념상 건립에는 콜로바노프가 전공을 세운 KV-1이 많이 없어서 대신 IS-2를 사용했다. 콜로바노프는 이 기념상을 보고 다소 씁쓸해 했다고 한다.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군 기갑 병과에서 손에 꼽을 만한 대승을 거두었던 에이스였지만, 드미트리 라브리넨코 알렉산드르 오스킨과 달리 콜로바노프에게는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후보에만 올랐다. 콜로바노프는 소련 붕괴 후에도 민스크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94년 8월 8일에 세상을 떴다. 출처. 게임 월드 오브 탱크에도 그의 이름을 딴 콜로바노프 훈장이 있다.[4]


[구력] 1910년 12월 25일 [2] 이 부대는 다름아닌 며칠 전에 KV-2 두 대한테 호되게 얻어터진 전과가 있는 부대였다. [3] 어떤 문서는 135개라고 표기했다. [4] 획득 조건은 혼자 남은 상태에서 다섯 대 이상의 상대 전차와 싸워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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