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강점기 이전
지금의 증평 도안 지역에 고구려 도서현(道西縣)이 있었고 신라 경덕왕 때 도서현(都西縣)으로 바꾸었다. 이 당시에는 흑양군(黑壤郡, 진천군) 소속 영현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도안현(道安縣)으로 개칭되고 청주목의 속현이 되었으며, 도안현과 이웃한 청당현(淸塘縣)이라는 속현도 있었는데 이곳 또한 청주의 속현이었으며 현재의 청안면 일대가 중심이었다. 조선시대에 청당현과 도안현을 합쳐서 청안현이 되고, 23부제 시행과 함께 청안군이 된다.2. 근현대
본래 현재의 괴산군은 충주목 관할에다 한강 수계인 괴산현, 연풍현과 청주목 관할이었던 금강 수계의 청안현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후 1895년 23부제가 시행되면서 모두 군으로 일원화된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에는 청안군, 연풍군과 청주군, 충주군에서 할양한 지역들을 합쳐 괴산군으로 편입했다. # 즉, 문화와 생활권이 서로 다르고 지형도 서로 나눠져 있는데도 일제의 의해 억지로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묶여 불편을 초래한 것. 청안군은 청주군에 넘어가 북이면의 일부가 된 서면[1]을 제외한 전체가 괴산에 편입되었다.
이후 충북선 철도가 놓이면서 옛 청안현 지역의 중심지 역할은 원래 청안현의 읍내였던 청안면에서 증평으로 넘어가고[2], 1949년에는 괴산읍보다 먼저 증평읍으로 승격되었다.[3] 1973년에는 청원군 북이면 초중리를 증평읍에 편입하였다. 1991년 충청북도 직할 증평 출장소가 설치되어 괴산군과 행정이 분리되었다.[4] 그리고 시 승격 요건인 인구 5만이 되면 괴산군에서 분리하여 시로 승격될 예정이었으나, 계룡시도 그러하였듯 예상만큼 인구가 늘지 않았다. 바로 옆 청주시로 인한 빨대 효과가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5]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5년부터 도농복합시가 출범하면서 기존 군이나 시의 일부 지역만 분리하여 시로 승격시키는 일이 없어졌다. 증평시 단독 승격은 물 건너간 셈.
이런 배경에서 도 직할 출장소인 만큼 인사, 예산 등의 행정 사항은 도 직할로 두면서도, 주소상으로는 괴산군의 일부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선거권은 괴산군에 행사되는 이중적 구조가 이어져갔다. 이게 왜 문제가 되나면, 괴산군청은 증평에 손댈 수 있는 권한이 없으므로, 증평 주민들은 괴산군수와 괴산군의원을 뽑아봤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3.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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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출장소 시절 깃발과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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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활권이 워낙 달랐던 만큼 괴산군에서 떨어져 나오려는 노력은 계속되었고, 해당 시 승격 조건이 ' 도 직할 출장소 + 자체 인구 3만 이상 + 인구 15만 이상의 도농통합시 소속[6]'으로 내려가 계룡시가 논산시에서 분리되어 나오던 2003년에서야 구 청안군의 일부였던 증평출장소(증평읍·도안면)가 증평군으로 승격되어 89년 동안 지겹게 이어지던 괴산과의 불편한 동거(?)를 간신히 청산할 수 있었다. 물론 계룡시처럼 시 승격도 같이 노렸으나 계룡시가 군사 본부인 계룡대의 소재지로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반면, 증평은 별다른 게 없는지라 시 대신에 별도의 생성 요건이 없는 군으로 독립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7] 그렇게 괴산군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긴 했지만, 옛 청안현의 중심지인 청안면을 가져오지 못하면서, 역사적으로 같은 고을이 2개로 쪼개진 게 되어버렸기에 現 증평군은 아직 반쪽짜리인 셈이며, 이 지역의 행정구역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남았다. 추가로 역사적으로는 괴산 소속이었으나 생활권은 증평 쪽인 사리면을 더해 청안면, 사리면 2개 면을 증평군으로 편입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만일 시행되어 현실로 나타났더라면 현재 괴산군의 모습이 달라졌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 더 나어가 증평군 면적과 괴산군 면적이 대동소이하거나 괴산이 분할되어 역사 속 지명으로만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후자의 경우에는 지역 여론에 의해서 부결 내자는 부동의 처리되어 백지화될 가능성이 크거나 높으므로 괴산군 분할 및 소멸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로 보인다.
참고로 증평군을 괴산군에서 분리하겠다는 구상은 그 옛날인 1967년에도 나온 바가 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8] 여담으로 이 기사에는 증평 말고도 경상북도 의성군을 2분할하자는 구상[9]도 있고, 정작 분리 이전의 증평과 가장 비슷한 사례인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은
[1]
절반은 현재 진천군 관할이 되었다.
[2]
증평역이 처음 개업했을 때도 청안역이었다.
[3]
반면 괴산읍은
1979년에야 읍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전국의
군청 소재지가 읍으로 승격되면서 읍이 된 것이다.
[4]
쉽게 말하자면 한 군에 군청 2개. 명목상으로는 증평이 계속 괴산군으로 유지되지만, 인사, 예산 등의 사항을 전부 괴산군청과 분리하여 따로 관장한다. 증평 사람들이 군청 일을 볼 때도 괴산군청이 아니라 증평출장소에서 업무를 보았다. 지방자치제 부활 이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5]
현재 증평군의 위치는 정확히 서술하자면
2014년
청주로 편입된
청원군 옆이다.
[6]
당시
논산시에 해당하는 조건이다.
[7]
참고로 증평군
8월 30일, 계룡시는 약간 늦은
9월 19일에 분리되었다.
[8]
한자를 인식할 때 曾과 會가 혼동되었는지 '텍스트 보기'에는 회평군(...)이라고 써있다.
[9]
의성군은
부군면 통폐합 이전 의성군과 비안군이라는 2개의 고을이었던 역사적 근거가 있다. 분할되었다면 각각 의성군과 비안군, 혹은 안계군이 되었을 것이다.
[10]
분리 이전의 증평과 벌교읍 모두 소속 군(괴산군/보성군)의 끄트머리에 위치했다는 점, 조선시대에는 다른 고을(청안현/
낙안군)이었다가 통합된 점, 일제 강점기 때부터 교통망의 확충을 통해 도시의 성장을 시작했다는 점, 소속 군 중심지보다 인구가 많고 번화하다는 점, 소속 군 중심지와의 교류가 별로 없고 인접 도시(청주/순천)와의 연계성이 더 강하다는 점 등 공통점이 아주 많다. 심지어 증평군으로 분리가 된 이후에도 벌교읍과 공통점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속해있던 도시의 중심지(청안면/
낙안면)과는 다른 지자체(괴산군/순천시)에 속해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