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프리드리히 마이네케 Friedrich Meineck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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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2년 10월 30일 |
프로이센 왕국 잘츠베델 | |
사망 | 1954년 2월 6일 (향년 91세) |
서독 서베를린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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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
베를린 대학교(역사학/박사) 베를린 대학교(역사학/하빌리타치온) |
경력 |
슈트라스부르크 대학교 역사학 교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역사학 교수 베를린 대학교 역사학 교수 베를린 자유대학교 총장 |
직업 | 역사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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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역사학자.20세기 전반기 독일 역사학을 대표하는 역사가로, '이념사(Ideengeschichte, History of Idea)'라고 하는 전통적인 지성사 영역을 개척했다. 역사주의란 용어를 정립한 인물로, 레오폴트 폰 랑케와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의 명맥을 잇는 후기 역사주의의 대표자로 평가받는다.
2. 생애
브란덴부르크의 알트마르크 지역의 소도시 잘츠베델[1]의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난 마이네케는 전형적인 프로이센 개신교 부르주아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베를린 대학에서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 하인리히 폰 쥐벨,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 등에게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마이네케는 베를린 대학에서 1886년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896년 교수 자격 논문을 제출하였다. 1896년 36세의 나이로 독일을 대표하는 역사학 저널인 '사학 잡지(Historische Zeitschrift)'의 편집자가 되었고, 1935년 나치의 압력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거의 40년간 사학 잡지의 편집을 담당했다.이후 베를린 대학의 사강사를 거쳐 1901년 슈트라스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로 부임하였고, 1906년에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옮겨서 1914년 베를린 대학교로 옮기기 전까지 근무했다. 스스로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하였던 이 시기 동안 마이네케는 3부작으로 엮이기도 하는 이념사 프로젝트의 구상을 시작하였다. 1908년 출간한 독일 민족국가의 성립 과정을 다룬 그의 대표작 세계시민주의와 민족국가(Weltbürgertum und Nationalstaat)는 그 출발점이었다. 마이네케는 이 작품에서 독일 민족국가의 성립 과정을 빌헬름 폰 훔볼트, 헤겔, 랑케, 비스마르크 등 '위대한 인물'들의 사상에 초점을 맞춰 그려내면서, 본래 세계시민주의적이었던 독일 '문화민족(Kulturnation)' 이념이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등장한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국가민족(Staatsnation)' 이념과 조화를 이루면서 비스마르크 주도의 독일 제국의 성립으로 실현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빌헬름 시대의 낙관주의적 전망이 반영된 것으로, 이 작품에서 마이네케는 국가권력에 대해 지극히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정치적으로 원래 보수적인 군주제 지지자였던 마이네케는 프리드리히 나우만의 영향을 받아 점차 좌파 자유주의 성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초기에는 당시 많은 독일인들이 그랬듯 그도 전쟁의 열광에 도취되었으나, 1915년을 기점으로 전쟁 확대를 반대하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마이네케는 '이성적 공화주의자(Vernunftsrepubliker)'라 불리는, 심정적으로는 군주제에 동정적이나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 체제를 분명히 지지하는 자유주의 그룹에 속했고, 독일 민주당의 성립에도 긴밀하게 관여했다. 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국가권력의 '마신적' 성격에 눈을 뜬 그의 변화를 보여 주는 대작이 바로 국가권력의 이념사(Die Idee der Staaträson in der neueren Geschichte)로, 본 저작에서 마이네케는 마키아벨리로부터 시작되는 국가이성의 이념을 프리드리히 대왕, 헤겔, 비스마르크 등 중요한 개인들의 이념을 중심으로 추적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1차 세계 대전 이전과는 다르게 국가권력의 확장 속에서 드러나는 '윤리(ethos)'와 '권력(kratos)' 간의 갈등을 강조하면서, 국가권력의 양면적 속성을 분명히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나치 집권은 마이네케에게도 큰 시련이었다. 자유주의자였던 마이네케는 곧 모든 공직에서 배제되었고, 1935년에는 사학 잡지 편집자 직도 내려놓아야 했다. 이 시기 마이네케는 '내적 망명(innere Emigration)'이라고 하는 은둔 생활에 접어들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1936년 이념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역사주의의 형성(Die Entstehung des Historismus)를 발표하였다. 이 저작에서 마이네케는 유스투스 뫼저,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독일 역사주의의 대표자로 내세우면서 계몽사상의 보편주의를 극복하고 개체성의 이념을 확립한 정신적 혁명으로 파악하였고, 독일 전통 문화와 정신의 가치를 옹호하고자 했다.
1945년 독일이 패전하면서 이미 80세를 넘겼던 마이네케는 노구를 이끌고 서독 역사학을 재건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48년 새로 새워진 베를린 자유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하였고, 베를린 자유 대학교의 역사학과는 1951년 '프리드리히 마이네케 연구소(Friedrich-Meinecke-Institut)'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마이네케는 1946년 독일의 파국(Deutsche Katastrophe)을 발표하면서 나치즘과 독일사에 대한 성찰을 전후에도 이어 나갔는데, 이 작품에서는 독일의 전통을 군국주의 전통과 문화적 전통으로 구분하면서 나치즘이라는 우발적 '사고'를 빚어낸 군국주의 전통과 단절을 주장하면서도 문화적 전통의 가치를 옹호하고자 하였다.
이후에도 90대를 넘기며 장수한 마이네케는 1954년 베를린에서 사망한다.
3. 명예
- 하이델베르크 아카데미 특별 회원(1909)
- 바이에른 아카데미 교신 회원(1911)
- 프로이센 아카데미 정회원(1915)
-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외국인 회원(1933)
- 미국 역사 협회 명예 외국인 회원(1947)
- 푸르 르 메리트(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