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프르 원수의 사진 | ||
이름 |
조제프 자크 세제르 조프르 (Joseph Jacques Césaire Joff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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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새 | 1852년 1월 12일 | |
사망 | 1931년 1월 3일 (향년 78세) | |
계급 | 프랑스군 원수(Maréchal de France) | |
장례식 | 1931년 1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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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말 ~ 20세기 초 프랑스의 군인.제1차 세계대전 초 서부전선에서 독일의 속전속결 시도를 저지하고,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성공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여 '마른의 승리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후 베르됭 전투에서는 대놓고 공세가 있을 것이라는 낌새와 첩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시하였다. 결국 이 판단 실책으로 인해 비교적 잘 막을 수 있었던 싸움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현장지휘권을 박탈당하고 사임했다.
그래도 마른 전투의 공이 있었기에
2. 1차 대전 이전
에콜 폴리테니크를 졸업한 뒤 파리 공략(1870~71)에 소위로 참전했고, 그후 인도차이나·서(西)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 등지에서 복무했다. 1905년 사단장으로 승진한 그는 1911년에 참모본부장으로 임명되었고, 3년 후 1차대전이 일어나자 총사령관이 되었다.3. 초반의 실패
조프르는 프랑스-독일 국경을 넘어 쳐들어가는 대규모 침공 작전을 세웠고, 프랑스 육군은 이 작전에 따라 1914년에 독일을 공격했지만 그 결과는 비참하게 끝났다. 독일군 주력부대가 벨기에를 통해 우회하는 바람에 조프르를 비롯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오히려 적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측면에서 포위당할 위기에 빠졌으며 파리도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상태였다.4. 마른 전투: 방어의 성공
프랑스군은 초기에 실패를 겪었지만 아직 전역에서 패배하지는 않았고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여럿 있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과 달리 효과적인 지휘통제 체계와, 최초의 손실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은 지휘관들이 있었다. 독일군의 통신체계가 붕괴된 반면, 프랑스군의 통신체계는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게 정보를 전달했다. 조프르는 급속한 상황 변화를 바라보았고 여러 번 자신의 주요 지휘관들과 회동했다. 프랑스군은 병력 배치를 위한 완벽하고 신뢰할 수 있는 철도망도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1871년의 패배 이후 철도망을 상당히 개선했고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한쪽 국경에서 다른 쪽 국경으로 용이하게 이동시킬 여러 철도선을 새로 만들었다. 1914년에 프랑스군은 우익에서 좌익으로 병력과 장비를 수송하면서 조프르의 위협대처 능력을 크게 개선시켰다.조프르가 독일군의 전략을 느리게 파악하고 적의 주공 지역도 늦게 파악했지만, 그는 독일군의 의도를 이해한 후 신중하게 프랑스군의 작전상 배치를 재조정했다. 프랑스에게는 운 좋게도 몰트케의 전략은 조프르가 빠르게 병력을 재배치하고 서쪽에서 독일 제1군과 제2군의 바로 앞에 병력을 수송하게 허용해 주었다. 8월 24일에 조프르는 제1군과 제2군이 우익에서 위치를 고수하라고 명령했고, 제3, 4, 5군과 벨기에군은 남쪽으로 후퇴시켰다. 조프르는 독일군을 솜 강에서 베르됭에 이르는 선에 고착시키려 했다. 조프르는 좌익을 강화하려고 새로 편성된 2개 야전군을 집결시켰다.
조프르는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왼쪽 측면에 공격을 강화할 것이라고 확신하여 병력을 그쪽으로 돌리고, 독일군의 포위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제6군을 창설하여 직접 지휘를 맡았다. 가장 어려운 이 시기에 그의 뛰어난 자질이 드러났다. 조프르의 침착하고 강인한 성격과 용기로 프랑스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파리 북쪽으로 조여들고 있는 막강한 독일군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으면서, 독일군이 파리에 바싹 접근할 때까지 후퇴를 계속했다. 이와 동시에 현실을 인정하고 동쪽에 있던 병력을 대대적으로 서쪽으로 옮겨 병력을 확보했다. 이 당시에 파리에 있던 차량이란 차량은 모두 동원해서 병사들을 이동시켰다고.[2] 새로운 제6군이 미셸 J. 모누리(Michel J. Maunoury)의 지휘 아래 파리 일대에 집결했고, 제9군은 페르디낭 포슈(Ferdinant Foch)의 지휘 아래 후퇴하는 제4군과 제5군 뒤에 위치해 두 야전군 사이에 발생한 틈을 막았다.
다른 변화도 프랑스군의 효율을 높였다. 조프르는 전술을 고려하며 야전군 사령관들에게 보병이 반드시 포병의 공격준비사격 이후에 공격하라고 알렸고, 대규모 공격을 금지했다. 이건 30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배운 전술적 지혜였다. 조프르는 제3군과 제5군 사령관을 비롯한 지휘 구조도 바꾸었다. 수십 명의 여단장 및 사단장들도 면직당했다. 이런 조치는 가끔 불공정하기도 했지만, 냉철하고 자신감 넘치는 투사인 루이 프랑셰 데스프리(Louis Franchet d'Espèrey)가 지휘 구조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평시에는 훌륭했지만 실전에서는 성과가 좋지 못했던 장교들이 좌천당했다.
조프르가 좌익을 강화할 동안, 독일군의 작전계획에도 변화가 생겼다. 핵심적인 계획수정은 독일 제1군 사령관인 알렉산더 폰 클루크(Alexander von Kluck)가 자신의 병력을 파리 동쪽 끝으로 이동시킨 것이었다. 클루크는 파리 서쪽 끝으로 진출해 파리를 포위하기보다는 동쪽을 택했다. 슐리펜의 거대한 바퀴가 계속 돌자, 클루크의 결정은 독일군의 좌익을 파리에서 오는 공격에 노출시켰고 독일군의 작전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8월 2일에 프랑스 정부는 조제프 갈리에니(Joseph Galieni) 장군에게 파리 방어 임무를 맡겼다. 모누리의 제6군이 요새화된 파리 시로 들어가 갈리에니의 지휘를 받으면서, 파리 방어 병력은 서서히 증가했고 예비군과 식민지 부대들도 파리로 들어왔다. 프랑스군은 초기에 파리를 방어하려 했지만, 제6군의 규모가 증가했고, 독일군의 우익이 채널 해협을 통해 계속 노출되자,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기회가 왔다.
9월 4일에 갈리에니는 항공기 여러 대를 보내 파리 북쪽과 서쪽을 정찰하게 하였다. 조종사들이 돌아와 갈리에니에게 클루크의 제1군 소속 4개 군단이 마른 강을 파리 북동쪽에서 도하하고 있고 1개 군단이 독일군 우익 전체를 방어하려 남았다고 보고했다. 그 날 프랑셰 데스프리가 영국군 병력과 조우했다. 데스프리는 영국군의 좌익을 파리에 있는 병력으로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영국군을 공세에 가담시켰다.
조프르는 그날 저녁 늦게 데스프리에게 영국군과 만난 결과를 보고받았고 갈리에니와 취약해진 독일군 측방으로 빠르게 반격을 개시하려고 열띤 대화를 전화로 나누었다. 갈리에니가 여기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프르는 9월 6일 아침에 반격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몰트케는 룩셈부르크에 있는 사령부에서 클루크가 운명적인 결정을 내린지 하루 뒤인 9월 4일에 제1군의 우익, 즉 독일군 전선 전체의 우익이 파리에 있는 프랑스 제6군의 공격에 노출되었다는 상황을 알았다. 몰트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우익의 제1군과 제2군의 진격을 중지시켰다. 몰트케는 우익의 제1군과 제2군이 승리를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하자 제3, 4, 5군에게 중앙에서 계속 공격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좌익에서는 남쪽으로 공격을 하라고 명령했다. 제1군과 제2군은 파리 바로 앞에서 정지해 독일군의 우익을 방어했다. 클루크의 제1군은 마른 강 북쪽에 있을 뿐만 아니라 노출된 지점을 뒤로 뺐다.
마침내 9월 5일 프랑스군의 왼쪽 측면을 맡고 있던 부대가 파리 바로 밖에서 병력이 훨씬 우세한 독일군을 맞아 싸우기 시작했다. 이에 맞추어 조프르는 9월 6일 연합군의 반격개시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마른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부분적으로 물리쳤고, 이로 말미암아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작전은 오랫동안 교착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연합군이 6일에 반격을 개시했을 때, 작전의 성패는 모누리의 제6군과 존 프렌치(John French) 경의 영국 대륙원정군, 그리고 데스프리의 제5군에 달려 있었다. 상황은 연합군에 유리했다. 폰 클루크의 야전군은 마른 강 남쪽과 북쪽으로 쪼개져 있었다. 클루크는 몰트케에게서 온 전신을 받고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았지만 그의 선두 부대가 이미 마른 강을 건넜다. 클루크는 전력을 북쪽으로 옮겨 야전군을 파리에서 오는 프랑스군에 대적하게 하려 하다가 제2군과의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그동안 프랑스군의 독일 제2군 우익에 대한 공격은 독일 제1군과 2군 사이에 더 큰 틈을 만들었다.
실마리를 잡은 영국원정군과 프랑스 제5군의 좌익이 이 틈을 통해 북쪽으로 이동하며 적의 수색 부대만 상대했다. 연합군 병사들은 독일 제1군과 제2군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의 중요성을 모른 채 느리게 이동했다. 8월 9일 아침에 영국군이 샤토티에리(Chateau-Thierry) 근처에서 뫼즈강을 도하해 뫼즈강과 독일 제1군과 2군 사이에 교두보를 만들었다. 이러한 성취로 독일의 2개 야전군이 방어를 취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영국군의 선두가 전방으로 갈 동안, 갈리에니는 모누리의 제6군을 증원하려고 애를 썼다. 갈리에니는 택시 600대를 동원해 1개 사단을 파리에서 수송해 왔다. 클루크는 프랑스 제6군을 막아내고 파리로 이동하려 했으나, 독일 제1군이나 제2군 모두 두 야전군 사이의 틈을 메우거나 연합군이 이 틈으로 들어오는데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조프르가 파리에서 독일군 좌익을 공격하려 시도하다 실패했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제1군과 제2군 사이의 틈으로 진격하며 독일군이 후퇴 말고는 방법이 없게 만들었다.
독일군이 파리 인근에서 후퇴하면서 전쟁의 서부전선 개전 전역이 끝났다. 독일군 우익의 다른 야전군들도 후퇴했고 이후 독일군과 연합군 모두 서로의 측방을 우회하려는 "바다를 향한 경주"가 실패하며 영국 해협의 니우포르트(Nieuwpport)부터 남쪽의 누아용(Noyon,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100 km), 동쪽의 베르됭, 그리고 남동쪽의 콜마르(Colmar)까지 이어진 참호선이 형성되었다. 조프르는 프랑스를 길고 잔혹한 전쟁에서 구하지 못했고 전역 초기에 여러 끔찍한 실수를 범하긴 했지만, 그는 결국 독일군의 결정적 승리를 막았다. 결국 프랑스군의 작전수행 능력이 "마른 강의 기적"을 달성하게 한 것이다.[3]
5. 마른 전투 이후
사람들은 조프르와 계속 함께 하기보다는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한 도박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무언가 달라진다면 누구라도 좋았다! 사람들은 희망, 어쩌면 공허한 희망에 매달렸으나, 조프르는 실망을, 사람들이 과장했을지 몰라도 너무 많은 실망을 안겨줬다.
-샤를 뷔뉴에 중령, 페르디낭 포슈의 전속부관
-샤를 뷔뉴에 중령, 페르디낭 포슈의 전속부관
1914년말에 이르자 서부전선은 수많은 참호가 설치된 철통 같은 방어선으로 굳어졌고, 이 방어선은 1918년까지 유지되었다. 1915년 조프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희생을 치르면서 독일군 진지를 돌파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조프르의 명성은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1916년에 독일군이 베르됭을 침공했을 때 프랑스군이 이에 대비하지 않은 것은 그의 책임이었다.
조프르는 직접지휘권을 박탈당한 뒤 1916년 12월 26일 사임했고, 같은 날 프랑스 육군원수로 임명되었다.
6. 말년
전쟁 후에도 13년을 더 살았고, 1931년에 타계했다. 그가 죽은 이듬해인 1932년에 2권으로 된 그의 《회고록 Mémoires》이 출판되었다.여담으로 1922년 일제강점기였던 조선을 방문하여 창덕궁에서 순종황제를 알현했다.
7. 기타
- 1914년 개전 이후 참호전이 시작되면서 포탄 파편에 머리가 깨지는 병사가 속출했다. 전선에서 철모를 보내달라는 애원이 빗발쳤지만, 조프르는 철모를 보급하기도 전에 이 전쟁은 끝난다면서[4] 그런 데 쓸 쇠가 있으면 포탄을 한발이라도 더 만들겠다고 묵살했다. 보다 못한 아드리앙이라는 일개 보급병의 제안으로 양철로 만든 철모가 보급되었는데, 이것만으로도 머리 부상을 입는 병사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자 조프르는 마지못해 철모 생산을 승인했다.
- 1915년 초, 조프르는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에게 "5월 이전에 우리 땅에서 결판이 날 겁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그 해 봄부터 가을까지 상파뉴와 아르투아 전선에서 수백만의 프랑스 병사들이 아르곤, 와브르, 보주, 보쿠아, 에파르즈, 랭주, 비에유 아르망 등에서 겨우 몇 미터의 땅, 포탄 구덩이 하나, 망루 하나를 걸고 며칠에서 몇 주에 걸쳐 공세를 벌여야 했다. 46만 명의 전사자와 132만 명의 부상자, 117만 명의 병자를 대가로 프랑스가 얻은 것은 몇 킬로미터의 숲(이었던 것)과 몇몇 마을(이었던 것)이었다.
- 조프르는 "전쟁이 끝나면 독일군에 투항했던 비겁자들이 조국에 돌아오는 대로 군법재판에 세우겠다"라고 공언했다. 공격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대나 대대에서 무작위로 선발된 병사들을 처형하는 10분의 1형이 성행했다. 1914년 9월에는 이런 사건도 있었다. 모 지역 전선에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설익은 열매를 주워먹고 장염에 걸린 병사 다섯 명이 후방으로 후퇴하자, 한 장군이 권총으로 그들을 전부 즉결처분해 버렸다. 그러자 지난 2주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 25kg의 군장을 메고 굶주림 속에 퇴각하던 수만 명의 병사들이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익은 이삭 그늘 앞으로 쓰러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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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르가 받았던 비판 중 하나는 요새를 해체했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리비에르 요새화 체계와 요새에 기반한 수비를 찬양하던 요새 신봉자들이 시작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1918년에 출판되어 기동전을 비난하며 방어를 신성시하는 논리를 펼치고 영향력을 떨쳤던 페르낭 앙주랑의 '국경의 비밀'을 성경처럼 여기다가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패망하자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진 비판자들이다.[5] 1915년 8월 5일, 프랑스군의 교리에서 2가지 조항이 수정되었다. 먼저 1909년 요새 교리 조항이 수정되며 군사지역 내 요새와 요새화지대의 지휘권을 총사령관이 얻었다.[6] 이건 요새의 모든 자원을 조프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1차대전 발발 당시 프랑스군의 교리였던 Conduite des grandes unités :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Décret du 2 décembre 1913,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 Service en campagne도 수정되었는데, 그리하여 요새군과 야전군의 역할을 더이상 분리하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요새군도 야전군처럼 프랑스군 총사령부인 GQG의 예하가 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내려진 후인 8월 9일엔 뒤바일이 베르됭 요새화지대처럼 넓은 공간을 방어할 방법은 기동방어밖에 없다고 지적하며, 베르됭 요새들이 연속적인 참호선의 방어망에 구성되도록 하여 영구적 방어구조물을 기동방어에 적응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간단히 말해 야전군과 요새화지대의 차이점이 사라진 것이다. 또한 이 명령으로 기동할 공간을 위해 요새화지대가 종심방어에 적합하도록 조정되었다. 요새는 요새화지대의 종심방어체계에 완벽하게 통합되었다. 콘크리트 외루는 절대 무용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요새가 아니라 여러겹의 방어선을 따라 종심으로 건설된 저항중심지 덕분에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요새가 필요할 때만 필요했고, 애초에 그러도록 방어망의 구조가 변했다는 뜻이다. 요새는 능동성이 필요한 상황에선 큰 쓸모가 없었다. 거듭 말하지만 베르됭이 점령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인 요새화지대의 종심방어체계로 인해 요새의 역할이 바뀌어 그렇게 된 것이다. 요새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역할이었다. 요새는 대피호였고, 그 역할에 충실했다. 독일군도 다를 바 없었다. 독일군은 두오몽 요새를 일종의 안식처로 사용했을 뿐이다. 양쪽 모두 요새에 의존하는 대신 보급, 치료, 순환배치를 위해 요새를 이용했다. 독일군은 요새를 점령한 후 복구하긴 했으나 방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무기만 배치했다. 프랑스군이 전투 초기 후퇴하는 과정에서 요새를 지나쳐갔다는 사실도 특기할만 하다. 관측소 역할을 제외하곤 능동적 방어에서 요새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요새에 들어가 버티지 않은 것이다.
조프르는 프랑스군에 전무후무한 공병 출신 참모총장이다. 그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기 전부터 콘크리트 요새에 의구심을 품었고, 참호와 기관총과 철조망의 조합이라는 새로운 요새가 더 쓸만하다고 판단하는 통찰력을 보였다. 실제로 그는 참모총장이 된 후 그랑 쿠롱네, 오트 드 뫼즈, 몽메디 등에 참호망 건설과 후일을 위한 측량을 지시했다. 프랑스군이 러일전쟁을 분석한 후인 1906년에 참호 교리를 제작했기 때문에 참고할 수도 있었다. 조프르는 리에주와 나뮈르 요새가 무너지자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신하고 1915년에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또한 조프르는 정적인 상황은 오직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전투를 벌인다는 목적을 위해서만 정당화된다고 믿었고, 독일군과 달리 극심한 물자 부족을 겪고 있던 프랑스군이 역동적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선 모든 물자를 GQG가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프랑스군은 요새의 자원까지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사상자로 인한 빈 자리를 채워야만 했다. 야포도 심각하게 부족했다. 베르됭의 브루주 포대에는 40문의 75mm 야포가 있었는데, 이것들은 해체되자마자 위급한 상황에서 즉시 야전에 투입될 수 있었다. 한편 30문의 75mm 단포신 포들은 야전에서 쓸모가 없었으므로 방치되었다. 하지만 중포야말로 제일 심각한 문제였다. 조프르가 요새에서 뜯어낼 수 있었던 중포는 대부분 120mm 장포신이거나 155mm 단포신이었다. 다만 중포 문제는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안지나 대두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진작 해체되어 야전에 배치된 상태였다. 그리고 개폐식 회전포탑은 중포 해체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지 않았기에 포탑의 중포는 그대로 남겨졌다. 베르됭 요새에서 해체된 화포가 전부 다른 전선으로 떠난 것도 아니다. 잠시동안 요새가 황량해지긴 했으나, 1915년 9월부터 요새화지대에 증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15년 말엔 베르됭에 약 40문의 중포만 존재하긴 했으나, 베르됭 전투 초반에 40문의 중포만으로 싸우지는 않았다. 빠르게 중포가 수송되어왔기 때문이다. 요새에 배치되어 있던 중포는 발사대에 결합되어 있어 수송이 불가능했으나 해체 과정에서 수송과 야전 운용이 가능하도록 개조되었기 때문에 도로와 철도를 타고 베르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수동적인 요새에 처박혀 있는 대신 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상태였던 셈이다. 전쟁이 발발한 1914년 중후반과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된 1916년 초 베르됭 요새들에 설치되어 있던 화기 숫자를 비교해봐도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중포, 야포, 기관총 전부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다. 브루주 포대엔 단포신 75mm만 남아있긴 했으나 일반 75mm 야포가 어디에 쓰였는지는 이미 이야기했다. 그러니 조프르 때문에 베르됭이 비무장화되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7] 만약 요새 교리를 바꾸지 않고 요새에 의지하는 수동적인 공성전을 했을 경우 결과가 더 나았을지는 의문스럽다. 독일군은 베르됭에 420mm 초중포를 가져왔다. 이미 리에주와 나뮈르 요새를 파괴해본 물건이 이젠 베르됭 요새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 1915년 12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에 정식으로 임명된 조프르는 독일을 "자근자근 먹어치워 버리겠다"라고 호언장담했다. 2월 초, 베르됭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가해질 것이라는 첩보가 점점 명확해져갔다. 이미 독일군의 공세에 대한 소문이 의회와 대통령궁에서 공공연하게 돌았고 심지어 푸엥카레 대통령이 자신이 직접 베르됭을 시찰해야겠다고 조프르에게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연합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서 여름에 있을 솜 공세 준비에 목매달고 있던 조프르는 "정부가 이런 종류의 허위정보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군대의 규율을 심각하게 뒤흔드는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카스텔노 장군도 1월 중순에 베르됭의 방어진지가 절망적인 상태라는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조프르는 이에 대해서도 "전략적 측면에서 봤을 때 독일이 베르됭을 칠 리가 없다. 이 전쟁은 큰 변화가 있어야만 끝나는데, 베르됭은 변화가 일어날 곳이 아니다."라고 묵살했다. 결국 조프르가 베르됭에서의 공세 가능성을 인정하고 예비대를 파견하기로 한 건 2월 10일이었는데 불과 이틀 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독일군이 총공세를 감행했다.[8]
- 이렇게 보면 매우 무능한 장군으로 보이고, 실제로도 조프르는 작전술, 전술 등 실전 지휘에서는 무능한 장군이 맞았다. 이는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그 주된 커리어가 식민지에서의 수송, 요새 건설과 같이 대규모 부대지휘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조프르가 프랑스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것도 극도로 분열되어 누가 사령관이 되든 쿠데타 걱정부터 해야 했던 프랑스군 내에서 나름대로 (자기 전공 내에서) 유능한 장군이면서 쿠데타의 우려가 없었던 장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전 지휘에서의 무능함과 달리 조프르는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온갖 파벌로 분열되어 권위있는 교리조차 마련하지 못했던 프랑스군을 교통정리하고, 통합된 교리를 마련하고 조직하였으며, 무능한 장교들을 숙청하는 등[9] 프랑스군을 현대화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또한 협상국에서 승리의 전략을 개발하고 실행한 사람을 한명만 뽑아야 한다면 그것은 조프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전략 면에서는 호평받는다. 간단히 말해 조프르는 무능한 분야와 유능한 분야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총사령관이었다. 조프르에 의해 조직된 프랑스군은 포슈, 페탱과 같은 유능한 장군들의 지휘 하에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으므로 눈에 보이는 전술, 작전 측면에서의 조프르의 무능만을 두고 그를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 체격이 후덕하고 얼굴도 통통한 이미지인데 자기관리의 실패를 떠나서 푸짐한 식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던 장군이다. 존 키건의 1차 세계대전사에 따르면 식사 시간에는 군무도 어느정도 놓을 정도로 먹는 것을 좋아했다. 조프르는 아무리 치열한 전투 상황이라도 8시간의 숙면 시간은 확보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실제로도 지휘에 도움이 되었다. 이전까지 프랑스 장교들에게 전투란 불과 몇 시간 이면 끝나는 것이었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투는 몇 달 동안 계속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사들 뿐만 아니라 장교들조차도 극도의 긴장 상황을 유지하다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으며 멘붕에 빠진 장교들의 지휘가 매우 비효율적이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10] 조프르가 나름대로 군무를 놓으면서 식사와 숙면 시간을 확보한 것은 그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안이었으며, 또한 조프르가 자신을 보좌할 참모진을 충실히 확보해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1]
종전 당시 프랑스군의 원수는 총 세 명이었으며 나머지 둘은
필리프 페탱과
페르디낭 포슈다.
[2]
독일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라면 강력한 요새지역이었던 베르됭을 포기할 각오까지 했다고 한다. 2차대전 프랑스와 아주 크게 비교되는 선택으로, 2차대전 프랑스군은 정 반대로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해 아르덴-스당쪽으로 보낼 수 있는 병력 중에 일부를 마지노선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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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Robert A. Doughty, "French Operational Art 1888–1940", in Historical Perspectives of Operational Art (Washington D.C.: Center of Military History, 2005), pp.7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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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에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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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계획이 공격 작전계획이라는 선동도 이 요새 신봉자들이 1920~1930년대에 조프르를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국경의 비밀은 요새를 찬양하며 기동전을 군사적 아마추어 행위라고 조롱하는데, 마침 조프르가 1914년 기동전에 실패했으니 자기들 주장을 강화하는데 쓰기 딱 좋은 샌드백이었다. 제17 계획이
슐리펜 계획[11]에 대응되는 계획이라는 잘못된 정보는 이러한 정치적 선동을 영어권 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며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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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엔 전쟁장관에게 지휘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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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것과 별개로 베르됭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건 조프르 때문이다. 국경 전투 때부터 상상력 없는 지휘로 악명높았던 조프르 때문에 베르됭 전투가 완벽한 기습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고 신호를 무시하며 베르됭의 방어망을 강화해야 한다는 모든 요구를 묵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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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그래픽노블 1차 세계대전" 부록, 프랑스 역사학자 장 피에르 베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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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르는 무능한 장교들을 파악한 뒤 보직해임시켜 리모주 등 후방으로 전보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때 프랑스 정치권에서는 무능한 장교들을 실제로 처형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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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르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이런 장교들을 무자비하게 숙청(보직해임 후 전보 조치)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