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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13:10:34

조지 H. 토머스

조지 H. 토머스
George H. Thomas
파일:1000013065.jpg
본명 조지 헨리 토머스
George Henry Thomas
출생 1816년 7월 31일
미국 버지니아주 뉴섬즈
사망 1870년 3월 28일 (향년 53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복무 미합중국 육군
최종 계급 미국 육군 소장
복무 기간 1840~1870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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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남북전쟁 당시 치카모가 전투에서 얻은 '치카모가의 바위(The Rock of Chickamauga)'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버지니아주 뉴섬즈 출신으로 1840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20세에 입학하여 동기 중 나이가 많아 '올드 톰'으로 불렸으며, 윌리엄 테쿰세 셔먼과는 사관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다.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에 배치되어 제2차 세미놀 전쟁에 참전했으며 미국-멕시코 전쟁당시 몬테레이,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상관인 재커리 테일러, 존 E. 울은 그의 포격을 칭송했다.

전후 플로리다에 복귀해 이후 적으로 만나는 로버트 E. 리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1853년 대위로 진급하고 기병으로 전과했으며 대리 전쟁에 참가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버지니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제2기병연대의 주요 장교들[1]들이 남부로 이탈한 가운데 북군을 택했다. 남부연합을 지지했던 토머스의 가족들은 그의 사진을 보이지 않게 반대로 돌려 놓고 다시는 그와 대화하지 않았다. 토머스의 누이들은 전쟁 뒤 토머스의 지원을 거절하고 토머스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몇 안되는 육사 출신 장교로서 중령에서 의용군(volunteers) 준장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제1차 불 런 전투에 참전했지만 이후 경력은 모두 서부전선에서 쌓았다. 1862년 1월 18일 켄터키주의 밀 스프링스 전투에서 승전했고, 이는 연방이 동부 켄터키를 장악하는 데 기여하여 북군 최초의 의미있는 승전 중 하나로 꼽힌다. 돈 카를로스 뷰얼 휘하에 있었지만 샤일로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4월 25일 소장으로 승진한 토머스는 헨리 할렉에 의해 샤일로에서 지나치게 인명피해가 많았다고 비판받았던 율리시스 S. 그랜트 대신 야전군사령관격인 우익 사령관이 되었다. 이는 이후 그랜트와 토머스 사이의 냉랭한 관계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토머스는 할렉 휘하에서 미시시피주 코린트 점령에 참전했고, 이후 6월 그랜트가 자신의 옛 지휘권을 되찾으면서 토머스는 뷰얼 휘하로 돌아갔다.

뷰얼이 브랙스턴 브래그의 군대 중 일부와 페리빌 전투를 치렀을 때 뷰얼의 부사령관이었지만 그의 병력은 전투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다. 뷰얼의 후임으로 윌리엄 S. 로즈크랜스가 부임하자 토머스는 워싱턴의 에드윈 스탠턴 전쟁장관에게 항의하기도 했지만 로즈크랜스 휘하 컴벌랜드군에서 충실하게 군단장 역할을 수행했다. 스톤스 리버 전투와 털라호마 전역에서 연방군이 승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3년 9월 치카모가 전투에서는 로즈크랜스의 실수를 우연히 찔러들어온 제임스 롱스트리트의 돌격에 북군 전체가 대파될 뻔한 위기를 끈질긴 방어로 극복하는 데 성공했고, 그의 가장 유명한 별명인 '치카모가의 바위'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별명의 계기가 된 로즈크랜스의 참모장 제임스 A. 가필드는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브래그가 로즈크랜스의 북군을 추격하여 채터누가에 포위한 가운데 지원군을 이끌고 온 그랜트는 로즈크랜스 대신 토머스를 컴벌랜드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랜트는 토머스가 세운 작전 계획을 활용하여 채터누가에 '크래커 라인' 보급로를 뚫는 데 성공했다. 이어진 브래그와의 전투에서 그랜트는 셔먼의 테네시군에 전공을 몰아주는 작전안을 세우고 토머스의 컴벌랜드군과 조셉 후커의 포토맥군 지원군은 조공으로 돌렸다. 하지만 11월 25일 미셔너리 릿지 전투에서 토머스의 컴벌랜드군은 돌파가 불가능해 보였던 남군의 산악 방어선을 정면돌파로 뚫어내는 데 성공했다. 남군 방어선 꼭대기까지 진격하는 것은 토머스의 명령이 아니었지만, 컴벌랜드군 병사들은 치카모가 패전 이후 셔먼, 후커 휘하 병사들의 놀림감이 된 뒤 잔뜩 독기를 품고 있었고, 기회가 오자 자체적으로 돌격하여 복수하는 데 성공했다. 남군은 조지아주로 후퇴했고 북군은 채터누가를 본격적인 전진기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1864년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그랜트는 더 전공이 많았던 토머스 대신 친구 셔먼을 후임 서부전선 사령관으로 올렸다. 셔먼의 애틀랜타 전역에서 토머스는 셔먼 휘하 3개 야전군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컴벌랜드군의 사령관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애틀랜타 함락 이후 존 벨 후드가 셔먼의 후방을 위협하고 셔먼이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을 선택하면서 후드에게 대처하는 것은 토머스에게 맡겨졌다. 후드의 남군 테네시군은 프랭클린 전투에서 토머스 휘하 존 M. 스코필드의 잘 구축된 방어선에 돌격했다가 대패하며 큰 타격을 받았고, 토머스는 12월 내슈빌 전투에서 후드의 테네시군을 괴멸시켰다. 내슈빌 전투는 전쟁 전체에서 북군의 가장 큰 승리 중 하나이자 야전군 하나가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드문 전투였고, 토머스는 의회의 공식 감사 결의를 받고 정규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전후에도 군경력을 이어나가다가 1870년 사망했다. 남부 군정을 맡으면서 해방노예들을 보호하고 쿠 클럭스 클랜을 제어하려 했다. 1868년이라는 이른 시기부터 남부 백인들이 남부연합을 이상화, 낭만화시키고 있다는('잃어버린 대의') 통찰을 보이기도 했다.

독자적인 지휘권을 가진 군사령관을 맡은 적은 내슈빌 한 번밖에 없지만 예하 부대 지휘관으로서는 거의 무결점의 활약을 보였다. 현대에는 유명세가 덜하지만 당대에는 그랜트나 셔먼에 버금가는 북군의 대표적인 장군으로 알려졌으며, 실제 전쟁 기여에서도 필립 셰리든과 함께 3위 자리를 다툰다고 평가된다.


[1] 로버트 E. 리,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윌리엄 J. 하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