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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00:38

샤일로 전투

<colcolor=#000>샤일로 전투
Battle of Shiloh
시기 1862년 4월 6일 ~ 4월 7일
장소
교전국 파일:미국 국기(1861-1863).svg 미합중국(북부) 파일:아메리카 연합국 국기(1863-1865).svg 미연합국(남부)
지휘관 율리시스 그랜트
돈 카를로스 부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P. G. T. 보우리가드
병력 66,812명 44,699명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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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 전쟁 초기 서부전선에서 일어난 주요 전투 중 하나이다. 피츠버그 랜딩 전투(Battle of Pittsburgh Landing)라고도 한다.[1]

1862년 4월 북군 지휘관 율리시스 그랜트는 철도도시 코린트를 노리고 테네시 주의 남쪽 하단에 위치한 샤일로에 도하한다. 그런데 이를 포착한 남군이 북군을 도하지점에서 그대로 강물속으로 밀어넣어버릴 계획으로 오히려 먼저 선공에 나서면서 벌어진 전투다. 직전 포트 헨리, 포트 도넬슨 전투에서 승승장구한 율리시스 그랜트가 첫 번째 위기를 맞았지만, 그는 뚝심으로 패전 위기를 극복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 이전까지 미국이 치른 어떤 전투보다도 더 많은 사상자 수를 기록한 전투이다.


2. 배경

북군 사령관 헨리 할렉은 부하 율리시스 S. 그랜트가 포트 헨리와 포트 도넬슨을 점령한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오하이오와 캔자스까지 포함하는 서부전선 사령관이 되었다. 그랜트의 전공 덕분에 북군은 테네시의 주도인 내슈빌을 점령했는데, 이는 북군이 최초로 장악한 남부연합의 주도였다. 이후 그랜트는 미시시피 강을 따라서 교통의 거점들을 장악하여 남군의 물류망을 끊어버린다는 계획을 할렉에게 한달 가까이 거듭 제안해서 결국 승인을 받아낸다. 한달이라는 시간이 보여주듯이 할렉은 그랜트의 전쟁관(물류전, 총력전)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해서 이미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다만 이는 할렉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폴레옹식 공격적인 기동과 결전, 기하학적인 전술을 강조한 군사교육을 받은 당시 군인 한 세대 전체가 공유한 문제였다. 그랜트는 육사 성적이 그럭저럭(졸업생 39명 중 21등)이었고 미국-멕시코 전쟁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전쟁 이후 평시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주정을 부리다가 스스로 전역하여 미육사 출신들 사이에서도 아직 별 존중을 못받고 있었다. 그나마 할렉이 그랜트를 쓴 것은 당시 군인부족으로 비육사출신 연대장이 넘쳐나는 가운데 그에게 있는 단 몇명의 육사 출신장교라는 이유가 크다.

그랜트는 이에 따라서 남쪽의 철도와 강의 배들이 드나드는 코린트를 목표로 테네시 남쪽의 샤일로에 도하하고, 야영지를 설치한다. 또한, 그랜트의 테네시군 못지 않은 세력을 가진 북군 오하이오군의 돈 카를로스 뷰얼 또한 할렉의 명령에 따라 내슈빌에서 남하하여 그랜트에게 합류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남군 지휘관들은 시간이 갈수록 북군이 샤일로에서 병력을 증강해서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라 우려했다. 따라서 북군이 준비가 되기 전에 먼저 공격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코린트를 나와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3. 전개

맙소사, 우리는 공격받고 있어! (“My God, we are attacked!”)
윌리엄 테쿰세 셔먼
남군은 야밤에 코린트를 나와서 움직이는데, 시작부터 비 때문에 길이 진창으로 변하면서 처음에 계획한 공격시간(해가 뜰 5시 무렵)을 맞추는데 실패했다. 이미 해가 떠서 군대의 모습이 드러나자 남군 지휘관들은 기습의 요소를 날려버렸다 생각하고 군대를 돌릴 것을 사령관 존스턴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존스턴은 계속 공격을 할 것을 고집했고 남군은 북군의 도하지점, 피츠버그 랜딩으로 향했다.

한편 샤일로 교회에서 야영 중이던 보병사단의 지휘를 맡고 있던 윌리엄 테쿰세 셔먼은 아침 7시에 숲에서 나타난 남군의 산병을 맞닥트렸다. 앞에 나가있던 북군 산병들이 대규모의 남군의 움직임으로 보인다는 보고를 올렸지만, 적이 코린트에서 기어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셔먼은 이것이 본격적인 남군의 공격이란 것을 깨닫는데 시간을 지체하였다. 얼마전에는 오하이오군은 필요도 없을 거라며 뷰얼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네기도 했던 그였다.
"오하이오로 돌아가게. 여기에 일이 없을테니."

하지만 곧 남군이 대포까지 숲에서 끌고나오자 상황은 명백해졌다. 이 기습으로 북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특히 전투 경험이 없는 연대들(북군의 1/2)에서 상당수 병사들이 배가 있는 북군의 도하지점까지 도망가버리면서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오전동안에는 군 전체가 하천과 숲을 따라 일직선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일단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앙적인 사건이 그날 오후에 발생하였다. 남군은 북군 우익의 셔먼과 맥클렌 사단의 측면이 습지대를 제외하고는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과감하게 습지대에다가 여단들을 밀어넣었다. 숫적 열세로인해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셔먼은 멀찌감치 후방의 언덕으로 후퇴를 결정했다.한편 북군 좌익의 헐버트 사단 또한 같은 방식(좌익 좌측면이 습지였다)으로 측면이 노출될 위험에 처하자 멀찌감치 후방으로 후퇴를 결정했다. 문제는 북군의 중앙에 있던 윌리엄 월레스와 프렌티스의 사단이 양익이 후퇴했다는 사실을 한참동안 모르고 있다가 남군이 양쪽에서 밀고들어오면서 포위를 당해버렸다는 것이었다.


고립된 월레스는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남군이 포위망을 완성시키고 대포까지 끌고와서 공격을 퍼붓자 피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때 월레스가 갇혔던 지역은 사방에서 총탄이 날아드는 소리가 마치 말벌 소리 같다고 해서 남군 병사들이 놀리듯 불렀던 말벌집(Hornet's Nest)이라는 별명으로 남았다. 그리고 끝내 지휘관 월레스는 전사하고 그의 사단은 여기서 항복했다. 이는 대략 북군의 1/6 병력이 소멸한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남군도 어이없는 손실을 겪는데 총사령관 존스턴이 다리에 총탄을 맞아 전사한 것이었다. 남군의 보병 전열 뒤에 있었고, 거리도 상당히 두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어난 일이라 재수가 심하게 없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특히 그가 월레스의 사단을 "이걸로 놈들은 체크메이트다(That makes checkmate on them)."라며 몰아붙이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휘권을 잡은 남군의 보우리가드는 북군이 증원군도 없고, 이만한 손실을 입었으니 당연히 물러날 것이라 여기고 리치먼드에 승전보를 전신으로 보냈다. 여기서 그는 '다음날은 "뒷정리(Mop up)", 전과확대만 남았다'고 자신하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었다. 북군의 그랜트는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패주한 병사들이) 본래 어느 연대이었는지는 상관없다. 연대들을 재편성하라."
율리시스 그랜트
그랜트는 패주한 북군을 도하지점 야영지에서 재편성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북군 도망병들이 강에 막혀서 도주를 멈추고, 자포자기 식으로 총을 잡았다는 점이다.

그랜트는 견고한 방어선을 찾았는데, 그가 고른 방어선은 약간의 고지에 파여진 지형이라 자연적인 참호 역할을 했다. 북군은 이곳에서 대포와 함께 대기하다가 일제 사격을 가하여 남군의 진격을 주춤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늦은 오후 기다리던 루 월레스의 사단이 도착했다.[2] 이 증원 병력을 받고서 그랜트는 가까스로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끌면서 남군의 공세를 좌절시켰다. 남군은 탄약이 떨어져서 더 이상의 공격을 지속할 수가 없었고, 결국 뷰리가드는 내일을 기약하면서 공격 중지 명령을 하달하였다.

하지만 밤 사이에 북군 오하이오군의 돈 카를로스 뷰얼이 보낸 대규모의 증원병력이 더 도착하였다. 훗날 남군의 유명한 기병대장이 되는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는 아직 보병 연대를 맡고 있었는데, 이러한 증원을 목격하고 뷰리가드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한밤중에 비가 내려서 찾지 못했고, 결국 이 보고는 전달되지 못했다.
셔먼 : "이런, 그랜트, 우리 오늘 악마의 날을 겪었군. 그렇지 않은가?" (Well, Grant, we’ve had the devil’s own day, haven’t we?)
그랜트 : "그래, 그래도 내일은 갚아주자고." (“Yes, lick “em tomorrow, though,”)
방어가 성공적으로 끝난 4월 6일 밤의 대화
"내일 정각 10시 전에 우리는 개같이 박살나겠군." (We will be whipped like hell before ten o’clock tomorrow.)
4월 6일 밤에 북군의 증원군을 본 남군의 연대장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

그랜트는 다음날 4월 7일 모든 전선에서 반격에 나섰다. 아침 6시에 공격개시가 되었을 때 북군은 4만명, 남군은 2.8만명으로 이미 북군의 숫적 우세로 크게 기울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북군의 절반은 뒤늦게 증원되어서 전투피로가 없는 병력이었다.


북군의 대공세에 깜짝 놀란 남군은 잠시후 방어선을 구성하고 방어에 나서지만, 북군이 몰려오면서 그 밀도가 높아지자 숫적열세를 견디지 못하고 2시간만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패퇴를 거듭하며 바로 전날의 전투 진행을 거꾸로 감듯이 밀려나다가 결국 코린트로 퇴각하였고 결국 전투는 북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4. 결과

사상자가 북군 13,047, 남군 10,699명이 발생했다. 이는 그때까지의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이었으며, 제1차 불 런 전투 등 그때까지 남북전쟁의 주요 전투보다 훨씬 많은 인명피해였다. 특히 북군은 포로로 3,000명에 가까운 뼈아픈 손실을 겪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근성으로 전투에 임한 율리시스 그랜트는 결국 남군의 영웅[3] 뷰리가드를 패퇴시키면서 일약에 남북군 통틀어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남군은 미시시피 강 주변 지역에서 대규모로 반격하지 못했고, 북군은 미시시피 주의 철도 요충지 코린트를 점령하여 주요 교통망을 장악했다. 코린트는 이후 빅스버그 포위전을 위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또한 뉴올리언스, 배턴루지, 멤피스 등 주요 거점들을 북군 해군이 장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만 마냥 긍정적인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 일부 언론에서 그랜트가 피츠버그 랜딩을 요새화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고, 술에 취한 상태로 기습을 당했다고 비난한 것. 전자의 주장은 일부 사실이었지만, 후자의 경우는 완전한 음해였다. 게다가 여론에서는 이 전투의 사상자에 기겁하면서 그랜트에게 '도살자'라는 별명을 붙이고 그를 기용하는 것에 큰 반대가 일어나서 한동안 그랜트는 위기에 빠진다. 그래도 링컨은 그를 내치기를 거부하는데, 전투에 소극적인 다른 북군 지휘관들과 비교하며 "그가 싸우기 때문(He fights)"이라 했다. 그랜트의 상관 헨리 할렉은 그랜트의 직위를 해제시키고 한동안 참모로 내버려 두는데, 이 때 그랜트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위로나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4] 교과서적으로 전쟁에 임하던 할렉으로서는 그랜트가 지나치게 창의적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래도 다행히 할렉이 동부전선의 사령관으로 승진해 떠나면서 다시 그랜트에게 기회가 오고, 이후 그는 빅스버그 포위전의 지휘권을 잡게 된다. 한편 윌리엄 테쿰세 셔먼은 첫날 안일하게 기습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그랜트와 할렉이 그를 비호하면서 살아남았다. 셔먼은 손과 어깨에 두 발의 총상을 입으면서도 세 번 말을 갈아타며 용감히 싸우고 휘하 병사들을 독려한 것이 인정받았다. 또한 이 전투를 계기로 셔먼은 의욕을 얻었고 이는 그가 북군의 가장 중요한 장군 중 하나로서 일어서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남군의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장군이 전사한 것은 남군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샤일로 이후로 남부는 다시는 웃지 않았다. (The South never smiled again after Shiloh.)
조지 워싱턴 케이블 (당시 신문사)
앨버트 존스턴은 텍사스 독립전쟁, 미국-멕시코 전쟁, 유타 전쟁 등에서 풍부한 지휘 경력을 가졌으며, 전쟁 발발 당시에 실전 지휘가 가능한 연령이었던 몇 안 되는 현역 장성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그는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남군 전체에서 서열 2위였다.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 본인이 존스턴을 남군 최고의 장군으로 꼽기도 했다. 존스턴은 남북전쟁 전체를 통틀어 전사한 장교들 중 가장 계급이 높았다. 패전 후 남부에서 존스턴은 'Lost Cause' 신화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1] 남군측에서 샤일로 전투로, 북군측에서 피츠버그 랜딩 전투로 불렀는데 보기 드물게 남군측 이름이 공식적으로 정착한 경우이다. [2] 그랜트와 할렉은 루 월레스의 합류가 늦어진 것을 크게 질책하고 그에게 책임을 물어 후방으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후세 학자들은 격렬한 전투로 인해 전장과 남군, 북군 부대의 위치가 이동한 탓이 크며 월레스에게만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평가한다. 월레스는 이후에도 계속 후방에서 활동했고, 결정적으로 1864년 7월 피터스버그 총력전의 허를 찔린 남군 주발 얼리 군단의 워싱턴 D.C. 기습을 후방에서 저지해 비록 패했지만 남군의 진격을 하루 늦추어 결과적으로 공격을 막아내 총사령관 그랜트를 구했다. 그렇게 세운 공훈 덕에 그랜트 대통령 재임기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베스트셀러 벤허의 작가가 되어 부와 명성을 얻고 한을 풀었다. [3] 제1차 불 런(매너서스) 전투에서 남군의 승리를 이끈 바 있다. [4] 게다가 당시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 토마스 장군이, 고의인지 실수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면담하러 온 그랜트를 방치해서, 그랜트는 몇시간동안이나 천막 바깥에서 비를 맞으며 서있는 굴욕을 당했다. 이때문에 이후 그랜트가 토마스의 진급을 방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