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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44:15

조선-여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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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조선 전기2.2. 조선 후기
3.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 여진의 관계.

2. 상세

2.1. 조선 전기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고, 여진족의 위세가 비교적 약화되었던 고려 말에는 최영과 나란히 여말 최고의 명장으로 명성을 떨친 이성계에게 여진족이 꽉 잡혀 있었다. 이후 조선을 위협하는 최대 세력인 건주여진의 이만주[1]나 '알타리 투먼' 갸온멍거터물(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등이 죄다 이성계의 부하 출신이었다.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이 먼 데서 오고, 이란투먼(移闌豆漫)[2]도 모두 와서 태조(이성계)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 · 서벌(西伐)할 때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진(女眞)은 오도리투먼(斡朶里豆漫)[3] 갸온멍거터물(夾溫猛哥帖木兒) · 할아[4]투먼(火兒阿豆漫)인 고론 어허츄(古論阿哈出) · 타온[5]투먼(托溫豆漫)인 가망 불어(高卜兒閼) · 하란 도다루가치(哈闌都達魯花赤)인[6] 히탄 하랑캐(奚灘訶郞哈) · 삼산밍간(參散猛安)인[7] 고론두란터물(古論豆闌帖木兒) · 이란투먼밍간(移闌豆漫猛安)인 푀모 월쥬(甫亦莫兀兒住) · 해연밍간(海洋猛安)인[8] 골야 쾻터물(括兒牙火失帖木兒) · 어두워밍간(阿都哥猛安)인 아툰 원져(奧屯完者) · 샨춘밍간(實眼春猛安)인 히탄 타사(奚灘塔斯) · 갸쥬밍간(甲州猛安) 운 강고(雲剛括) · 홍긍밍간(洪肯猛安)인[9] 골야 오난(括兒牙兀難) · 해툰밍간(海通猛安)인 쥬후 퀴툰(朱胡貴洞) · 툴우밍간(禿魯兀猛安)인[10] 갸온 부허(夾溫不花) · 위허밍간(幹合猛安)인 히탄 서러(奚灘薛列) · 울후리밍간(兀兒忽里猛安)인 갸온치후리(夾溫赤兀里) · 아샤밍간(阿沙猛安)인 쥬후 인다호(朱胡引答忽) · 닌추커시밍간(紉出闊失猛安)인 쥬후 원져(朱胡完者), 오롱소밍간(吾籠所猛安)인 넌투 구루(暖禿古魯) · 히탄 보야(奚灘孛牙), 투먼밍간(土門猛安)인 고론 보리(古論孛里) · 아모라(阿木刺)의 당고 히탄 구유누(唐括奚灘古玉奴)[11]이며, 우량캐(兀郞哈)는 투먼(土門)의 골야 발소(括兒牙八兒速)이며, 혐진 우디거(嫌眞兀狄哈)는 구쥬(古州)[12]골야 키무나(括兒牙乞木那) · 다비나(答比那) · 컬덕거(可兒答哥)이며, 남돌 우디거(南突兀狄哈)는 슈핑강(速平江) · 남돌 아라카 바얀(南突阿刺哈伯顔)이며, 콜칸 올적합(闊兒看兀狄哈)은 얀춘(眼春) · 골야 투칭개(括兒牙禿成改) 등이 이것이다.
《태조실록》 <총서> (여진 추장들의 이름의 한글 표기는 《 용비어천가》를 따른다.)

이지란같은 경우는 아예 태조 이성계를 따라 조선으로 넘어와서 후손( 청해 이씨)을 남겼다. 오랫동안 역사학자들 일부에서는 태조가 여진족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태조를 비롯한 선조들은 우리는 고려인이라는 정체성과 핏줄이 뚜렷했으며, 결정적으로 여진족이 이성계 일족을 동포가 아닌 앙숙으로 취급했다. 태조의 증조부인 이행리(추존 익조)가 이것 때문에 여진족들에게 죽을 뻔했다. 항목 참조. 때문에 이성계 여진족설은 곧 틀린 주장이다.

위에 나온 이름들 중에 고론 어허츄와 갸온멍거터물은 건주위 및 청나라 아이신기오로 황실의 조상이 되었다. 어허츄는 이만주의 할아버지였고, 갸온멍거터물은 청나라 태조 천명제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6대조였으며 이들의 후손이 15세기 말까지 건주 3위를 지배했다. 여진족의 주요 3부족 중 하나인 건주여진이 이성계에게 복속된 것은 거의 확실하고, 야인여진은 확실하진 않지만 목단강과 동해 연안지역의 핵심 지역이 이성계에게 복종했다.

이렇게 태조 이성계의 여진에 대한 영향력은 매우 높았지만 1392년 조선의 건국 이후, 명나라의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기 전부터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명나라가 초기에 우량카이나, 건주여진 등에게 조공을 요구하자 이에 대한 대책 회의가 조선에서 열렸다. 왜냐하면 이때 여진족은 아예 조선의 속국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실록).

하지만 태조 이성계 이후 여진족에 대한 조선 왕실의 영향력은 사실상 사라져, 조선은 명나라와의 충돌을 피하고 여진족에 대한 통제권을 사실상 포기하여 명나라에 넘겼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영향력이 상실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조선에 우호적인 여진족들은 제14대 선조 때까지 조선에 복종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조선에서는 번호(蕃戶)라고 불렀다. 선조의 치세 중에 일어난 니탕개의 난 때 조선을 공격했던 우을지의 선동에 호응한 니탕개를 비롯한 여진족 추장들의 경우, 처음부터 조선에 적대적인 인사들이 아니라 오히려 벼슬까지 하사받은 자들이었다.

정말로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끝장난 것은 후금-청나라의 두 번에 이은 공격 이후, 청나라가 야인여진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협상 조건으로 요구하면서부터였다. 야인여진은 청나라를 세운 건주여진과는 적대관계였는데, 어찌 보면 병자호란의 간접적인 피해자인 셈이었다.

특히, 여진족은 조선 시대 야인, 오랑캐, 되놈 등으로 불리며[13] 국경 지역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조선군과 충돌했다. 지금 대한민국의 북쪽 국경선인 압록강 두만강은 제4대 세종의 치세 때 이들과의 투쟁( 4군 6진)에서 얻어낸 것이었다. 여진족은 세력이 약해지면 조공을 바쳐왔으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백그라운드로 여진족 출신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상술된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이 있다. 명나라와 조선이 과거 몽골 제국의 발흥과 확산 이후 모든 오랑캐에 대한 경계가 노이로제급이 된 이유도 있다. 또한 끊임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여진족의 많은 사람들이 조선으로 계속 귀화했다.

조선 전기에는, 여진족 완안부의 세력을 방치했다가 금나라가 세워져 안보에 위협을 받았던 고려를 교훈으로 삼아, 명나라 및 조선에 빈번하게 침입해오는 여진족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지속적인 예방전쟁을 펼쳤다.[14] 자세한 내용들은 여진정벌 조선의 여진 정벌(建州女眞征伐)을 참조.

제3대 태종의 치세 때부터 시작된 조선의 여진 정벌은 특히 제4대 세종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토벌전을 펼쳐 제7대 세조때는 남이 장군의 활약으로 그야말로 건주여진을 중심으로 여진족이 가루가 되도록 갈렸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후 여진족의 세력내에, 누르하치의 여진족 통일 이전까지 100년 동안 강력한 추장이 나타나지 못할 정도였다. 16세기 말엽, 임진왜란 때 전사한 신립 또한 니탕개 등의 여진족을 아작낸 명장이었다. 아마 조선 전기의 조선인들은 당시 북방에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여진족이 먼 훗날 농민 반란으로 작살난 명나라를 접수하고, 세계 제국 청나라를 세울 정도로 성장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15] 그만큼 16세기 말엽~17세기 초엽의 상황이 임진왜란, 이괄의 난, 이자성의 난, 소빙하기로 인한 대규모의 흉년과 기근 등 정말 천운스럽게도 후금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던 것이다.

한반도의 북동부에 살았던 재가승이란 민족종교집단이 여진족의 후예라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다소 있으며, 설령 여진족의 피가 약간 섞였을지라도 재가승은 기본적으로 토종 한국인이었고, 단순한 지역적 풍습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다만 재가승이 거주하던 지역이 북변이었던 만큼, 혈통적으로는 여진족의 피가 꽤 섞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16]

2.2. 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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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련 문서



[1] 이만주의 조부 아하추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아합출(阿哈出) 혹은 어허추(於虛出)로, 중국 기록에는 아합출로 나오며, 해당 목록의 두 번째이다. [2] 이란(일란)은 '3', 투먼은 ‘10,000(萬)’을 의미하는 만주어로 이란투먼은 곧 3만호(三萬戶)를 이른다. 즉 오도리 투먼, 할아 투먼, 타온 투먼이다. [3] 오도리(吾都里)라고도 불렸던,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군 인근 두만강 유역이다. 이하 '투먼(두만)'이라는 건 만호(萬戶) 즉 만인대장이다. [4] 만주어로 후르하(虎爾哈)라고 부르며 지금의 목단강(무단강) 유역이다. [5] 알타리, 후르하, 타온 셋을 합쳐서 이란투먼(3만호)이라고 부른다. [6] 합란은 함주(咸州)로 지금의 함경북도 함주군이다. [7] 삼산은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지역으로, 고려에서는 이곳에 영주(英州)을 설치했고, 공양왕 2년( 1390년) 길주에 합쳤다. 밍간은 천호(千戶) 즉 천인대장이다. [8] 해양(해연)은 지금의 함경남도 길주군이다. 밍간이란 천호장(千戶長)을 뜻한다. [9] 홍긍은 고려의 웅주(雄州)로, 훗날 길주에 합병되었다. [10] 독로올(툴우)은 단주(端州)로,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군이다. [11] 당고씨(唐括氏, 당괄씨)는 과거 금나라의 황후 가문이었으며, 금태조 아골타의 황후였던 성목황후 역시 당고씨였다. [12] 지금의 영고탑 일대. [13] 되놈은 이미 도이의 입구 사건에서처럼 고려 시대에도 일본을 침공한 여진족 해적을 가리켜 부른 말로 일본 사서에 등장할 정도다. [14] 아무리 그래도 여진족의 잠재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세종은 이들과 왜구를 만만히 볼 것이 아니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이미 거란족도 "여진족 1만 명이 모이면 천하가 감당을 못 한다"고 할 만큼 여진족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 [15] 조선 후기의 조선인들이 자신들이 상국으로 섬기던 청나라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훗날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나라 없는 민족으로 몰락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구도인 셈이다. [16] 다만 이북 지역만 혈통적으로 여진족과 가깝다고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조선 왕조 500년 동안 귀부한 여진족들 가운데 경기 및 삼남 등으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꾸준히 많았다. 이들은 백정이라는 계급으로 자리잡아 조선 사회에서 멸시받기는 했으나[17] 4군 6진 뿐 아니라 조선 8도 전반에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4군 6진과 관련이 없는 현재의 남한인들에게도 여진족의 핏줄이 남아 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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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물론 모든 백정이 여진족이나 북방 민족 출신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