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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종교단체. 약칭은 '조불련\'이다.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통제를 받으며, 북한 각지에 소재한 사찰 67개 소와 승려 300명 및 신도 10,000명을 통제 하에 두고 있다.
2.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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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북한이 궁금해] 북한의 사찰과 불교, 머리 긴 스님들 (2023년 5월 27일 방영분) |
불상조각 같은 것도 지난날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숭배하던 우상의 하나라는 것을 똑똑히 인식시키는 한편 불상조각 자체는 잘된 조각품이라는 것을 새로 자라나는 새세대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새 세대들이 부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게 하는 것보다 부처라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그 허위성을 똑똑히 깨닫도록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 김일성(1969), 《사회주의 문학예술론》
- 김일성(1969), 《사회주의 문학예술론》
불교는 봉건시기에 침습하여 봉건지배계급의 사상적 도구로 리용되면서 계급의식과 투쟁의식을 마비시키는 해독을 끼쳤는데 북조선에서는 이미 없어졌으나 남조선에서는 계속 남아있으면서 인민들의 혁명의식을 마비시키는데 적지 않은 해독적 작용을 하고 있다.
- 북한 사회주의과학출판소(1973)
- 북한 사회주의과학출판소(1973)
발고여락(拔苦與樂)[1]을 기본이념으로 삼고 현세에 지상정토(地上淨土)[2]를 실현함을 기본사명으로 표방한다.
대외적으로는 불교의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도제양성 포교 역경의 3대 사업을 적극 벌이는 불교도들의 단체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불교에 종사하는 인적·불적 자원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선노동당의 관변 단체이다.
설립 초기엔 상무위원 16명에 회원 27만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나, 이후의 정확한 현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3. 역사
1945년 12월 26일 ‘북조선불교도련맹’으로 결성되어 1948년 ‘북조선불교총련맹’으로 개칭하였다. 이와중에 1946년 소련군을 앞세운 김일성의 권력 접수가 완료되자 해방후 북한 당국은 500여개 절을 폐쇄하고 재산을 몰수 하였고, 승려들은 뿔뿔이 흩어졌다.1950년대 이후 잠적하였다, 1955년 ‘조선불교도련맹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1965년 잠시 활동을 멈추었다가 1972년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가 출현하면서 재조직되었으며, 1987년 세계불교도우의회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80년대 들어 김일성의 지령에 의해 종교활동의 자유가 보장된 것 처럼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여러 국제회의에 참여하고, 북한의 불교문화재를 보존한다며 국제사회아 특히 남한에 돈을 많이 요구해서 받아먹었다. 1984년 묘향산 보현사에 팔만대장경보존고를 세우고, 1989년 팔만대장경해제본 전15권을 출간하였다. 이 해제본은 해인사 고려대장경을 풀이하여 간추린 것으로, 북한 당국이 지원하고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에서 발간하였다.
4. 평가
조선불교도련맹은 사실상 조선로동당이 정치적 목적에 맞게 만들어 낸 '관변 어용 조직'으로 평가받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피니언(자유아시아방송) 북한의 다른 종교 단체와 마찬가지로 국가무신론과 주체사상 등 국가 이데올로기에 부합하게끔 승려들을 관리하고 대외적으로 북한의 국가이미지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외견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듯 착각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에서 세웠다. 북한의 종교 실태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관련 자료의 링크 참조. PDF(대한변호사협회)[3] PDF(통일부)[4] PDF(통일부)[5]개신교의 경우 김일성의 창덕학교 스승이자 외가친척인 강량욱을 앞세워 근근이 구색을 갖춰 조직을 연명[6]하지만 조선불교도련맹은 겉보기에도 실체 자체 허접한 단체이라 1950년대 종교와 종교인들을 박멸하고 뜬금없이 1980년대에 다시 등장했다. 20년간의 활동은 통일전선부 작가들이 열심히 창작을 해주었지만 천도교나 개신교와 달리 기본적인 불교관련 지식조차 처참해서 남한 불교인들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가짜 승려가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감안하여 북한의 어용 교회를 지원하나, 불교계에서는 북한 불교계(?)와의 교류가 거의 없는 편이다. 남북 관계가 유화 모드에 있을 때 북측의 시설을 보수해주거나, 북측 사찰에서 합동 법회를 열거나, 이런저런 공동 성명문을 내는 정도에 불과하다. 주성하 기자에 의하면 보현사 같은 유명사찰은 외국인 기자나 관광객이 올때나 급히 통일전선부 소속 공무원들이 머리깎고 나가 준비하며, 아예 깎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7] 평소에는 가발쓰고 원래 직장 출근한다고 한다. 여성 성직자(비구니)는 전혀 없으며, 모두 남성(비구)뿐이다. 이 근무자들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이 결혼하고 가정을 가진다. 조불련과 30여년 간 교류해 온 대한불교조계종 승려 법타스님은 이에 대해 "해방 전 대처승 제도가 북한에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박태화를 비롯한 일부 원로 승려를 제외하면 탄압으로 인해 기존의 법맥이 붕괴되어버린 상황에서 종교인을 급조해 낸 것인지라 대처승의 연장선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불교 성직자에 대한 칭호로써 ' 스님'은 금기어가 되었고, '중'이나 '책임지도원'만 허용된다. 절에 꾸준히 방문하는 신도는 없다고 봐야 하나, 사하촌(절 아래 마을) 사람들은 정초나 불교 관련 명절이면 요식행위로 과일이나 야채 등 공양물을 바친다고 한다. 물론 사실상 이 불공은 조선노동당에 헌납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간혹 정기법회에 '불자'들이 참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이 불교 경전이나 찬불가집을 소지하는 것은 절대 허용되지 않으며, 책임지도원의 의식 집행을 지켜볼 뿐이다. 탈북자 출신 만화가 최성국의 만화에 따르면, 북한 주민이 중(책임지도원)에게 말을 거는 것은 제지되지 않지만, 중은 이들이 나눈 대화를 조선노동당에 빠짐없이 보고해야 한다. 게다가 이 중들도 철저한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만에 하나 불상 앞에서 기도를 원하는 주민이 있더라도 '바윗덩이에 소원을 빌어봤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여긴다고 한다. 주체사상과 겹치는 요소가 많고, 실제로 김일성 김정일 10대원칙을 비롯한 개인우상화에 개념이 차용된 기독교와는 달리, 불교는 탈북자들이 거의 접해 본 간접경험도 드물다. 애초에 통일부 북한인권보고서나 북한인권센터에의 북한종교의자유 보고서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북한에서 '종교'가 무엇인지도 잘 가르치지 않는다.
조불련에서는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으며, 법회에서는 남한보다 중저음에 조금 느린 속도로 염불을 한다.[8] 한문으로 되어 있던 불교 경전은 모두 문화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경전은 독송보다는 공부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그나마 반야심경은 독송한다고 하지만, 전반부에는 '조불련강령'을, 후반부에는 '주의주장'이라 하여 선전선동적인 대여섯 줄 분량의 가사를 1분가량 첨가해서 독송한다.[9] 법회를 진행하기 전에는 반드시 시기별 북한 당국의 주요 정책이나 입장에 대해 '지지'하거나 '적극 참여'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해야 한다.
책임지도원은 평상시 양복이나 인민복을 입는다. 목탁은 손으로 깎아 만들어 투박한 것을 사용한다. 국가 행사를 제외한 각종 불교행사에서는 법복을 상의로 입지만, 아래에는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는다. 남한 승려들이 고무신이나 털신, 운동화 등을 신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두루마기와 장삼은 회색과 검은색 2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 위에 덧입는 가사는 붉은색이다. 여자들은 법복 형태의 옷을 전혀 입지 않는다. 또 백팔염주는 사용하지 않지만, 손목에 단주는 많이 착용하고 있다. 예불에 사용하는 용품은 이전부터 절에서 전해 내려오는 물품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당으로부터 배급받아 사용한다. 보여주기식 예식에 한번 사용하고 나면 모두 정리하여 보관해두고 필요할 때 꺼내 아껴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절에서는 기념품점에서 수제 목탁을 판매한다고 하나, 북한의 체제 특성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외국인 관광객만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 조불련에서는 대선사-선사(禪師)-대덕-중덕-선덕의 5품계나 '강주(講主)' 등의 직책을 마련해 두고 있으며, 사찰 근무자들은 참선과 경전 강론을 함께 지도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원, 강원, 율원 등의 수행 조직체계가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아 허울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율에 대해서도 '위선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분단 전의 북한 지역에는 많은 선사들이 수행하고 있었지만, 분단 전부터 참선을 해온 노승들을 제외하면 현재 북한에서 전통적인 참선의 맥은 끊겼다고 봐야 한다. 불교 수행은 염불과 독경 정도가 외형으로나마 전해질 뿐이다. 사찰 근무자들에게는 법명이 있지만 대외행사 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평소 일터에서의 직책과 이름을 사용할 뿐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사찰 근처에 거주하면서 약초 농사나 건설업 등에 투입되어 노동력을 제공한다. 출신성분이 매우 좋은 사람만 책임지도원으로 근무할 수 있다고 한다. 2002년 기준으로 사찰 근무자는 월 150원의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조불련에서 가르치는 불교관도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에 입각한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북한에서 출판된 불교 관련 논문들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북한 학계에서는 불교의 전통적 수행관을 "인격양성의 길을 스콜라적 사변과 맹목적 신앙에서 찾는" 것으로 보아, 노동자 인민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반동적이고 고루한 사고로 취급하고 있다. 원효의 화쟁 사상에 대해서는 "반동적으로 세련된 사상"이라고 평가절하거나, "물질의 1차성을 부정하고 정신의 1차성을 주장하는 철저히 관념론적인 견해"로 보아 반동적으로 본다거나, "봉건통치배들의 집권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 폄하하고 있으나, 나중으로 갈수록 변증법적 유물론과 결부시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원효의 논리학적 성취[10]는 높게 평가한다는 점에서 남한의 대중적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승랑의 삼론종에 대해서는 그가 한반도 이북에 속한 고구려 출신 승려라는 점 때문인지 매우 높게 평가하며, '동방나라들의 불교철학발전을 적극 추동'했다고 묘사한다. 지눌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수행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우호적이면서도, 그가 모든 고통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주어진 처지에 순종하고 살 것을 요구하는 숙명론적 관점"을 폈다고 비난하고 있다. # 자비 정신은 긍정적으로 기술되고 있으나, 역사 발전에서 인간의 역할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주체사상과 다름없는 것으로 여긴다. 열반에 대해서도 '아집과 욕망의 부정이며, 진실된 인간애이자 인류애'라는 이유로 주체사상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이런 식의 윤색은 물론 세계 불교계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지만, 북한에서는 이러한 이념적 의미 부여가 1980년대를 기점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불교 시설 및 문헌들이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보수될 수 있었다.
불교 경전 번역 인력도 남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로 인해 2005년 남한 측의 여성 번역자가 북측 번역자들을 만났을 때, 이들이 매우 신기해하며 "여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나? 누구한테 배웠나?" 등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번역소는 금강산과 묘향산에 마련되어 있으며, 번역자들은 번역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이곳에 틀어박혀 국가로부터 번역료를 받으며 일했다. 인원 구성은 대장경 번역 당시를 기준으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 소속 조선왕조실록 번역 인력이 그대로 투입되었다고 하며,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볼 때 종교적 사명감이라기보다 어디까지나 고전 연구의 차원에서일지언정 후학 교육은 최소한으로나마 진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장경 번역팀에 합류하려면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원고지 3천 매를 번역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후에도 약 60페이지 분량의 번역요강을 몇 달에 걸쳐 숙지하고 토론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역경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불교에 대한 북한의 탄압은 휴전 후 농업 집단화를 강행함과 함께, 사찰에 있던 승려까지 모조리 강제 노동에 내몰고 탄광 등에 강제수용함으로써 불교의 씨를 없애버렸다. 이리하여 사찰에는 조선노동당에서 통일전선부파견한 관리인이 들어앉게 되었다. 사찰은 역사/문화적인 고전 건물이자 민족주의 고취[11]의 수단으로 보존되고 있을 뿐이며, 휴양소와 정양소, 지질 탐사대와 임산의 숙사로서도 이용되고 있다. 그나마 지금 수준으로 관리인이 사찰에 상주하고 예식이 이루어지게 된 데는 음악가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여사의 제안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
북한의 불교 문화재 중 가장 특기할 만한 것으로 '다라니 석당'이 있다. 남한에는 거의 없는 이 특이한 양식의 석당은 다라니의 경문을 돌에 새겨 당간지주와 같이 세운 것이다. 평북 용천다라니석당(龍川陀羅尼石幢), 황해도 해주다라니석당(海州陀羅尼石幢), 개성 현화사 당간지주(玄化寺 幢竿支柱) 3기가 현존하고 있다. 석당에 새기는 경문은 주로 한자 음역이었으며, 〈불정존승다라니 佛頂尊勝陀羅尼〉인 경우가 많았다.
5. 위원장
[1]
자비로써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 주고 즐거움을 주는 일
[2]
현실세계에 있는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
[3]
대한변호사협회(2022), 《2022 북한인권백서》, 제9집, 서울:
대한변호사협회
[4]
통일부(2023), 《2023 북한인권보고서》, 서울: 통일부 북한인권기록센터
[5]
오경섭 등(2021), 《북한인권백서 2021》, 서울:
통일연구원
[6]
물론 관제 종교 기관이긴 하지만 적어도 강량욱과 친소 관계가 있던 해방 전 기독교 신자와 그 후손들은 단순히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받는 것은 피했다. 다만, 이것은 북한 정부가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기보단 이들을 양지화해서 교세가 더 퍼지지 못하도록 관리한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7]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 내 사찰 근무자들은 머리를 깎지 않고 법복만 입었다. 일부나마 머리를 깎게 된 것은 남한과의 교류를 의식해서이다.
[8]
남한 스님들 중에서는 1970~1980년대에 걸쳐 녹음되어 불자들 사이에서 널리 유통된 김성공 스님의 독경이 북한식 염불과 매우 비슷한 음색과 속도를 보여준다.
[9]
직접 들어보면 옛날 정박 스타일의 단조로운 랩처럼 들린다.
[10]
원효는 사구부정(catuskoti)을 포함한
중관학파 특유의 논리 전개 방식을 많이 수용하였다.
[11]
김일성은 '옛 조선 인민들의 슬기로운 건축술 전통'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찰의 존속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