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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42:41

조계현/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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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교 및 대학 시절2. 실업 야구단 경력3. 프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연도별 성적

1. 고교 및 대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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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상고 시절. 사진 맨 오른쪽이 조계현.

야구 명문인 군산상고 출신이다. 1981년 고교 입학 직후 팀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시켰으며, 1학년 신분으로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어 IBAF 청소년야구대회에 출전, 선동열이나 김건우 등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 활약을 펼치며 우승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한일 고교야구 정기전에서도 1승 2세이브의 활약을 거두며 대한민국 팀의 3전 전승에 기여했으며, 이러한 초고교급 활약을 바탕으로 일찌감치 고교야구 스타로 군림했다.[1]

1982년 천안북일고와 맞붙은 청룡기에서는 당시 또다른 초 에이스급 선수였던 안성수[2]와 결승전에서 1:1로 3회~12회 소화[3] + 다음날 다시 연장전을 계속하는 강행군을 하는 무지막지한 혹사를 당하면서도 결국 팀을 우승시켰으며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MVP 및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봉황대기에선 대구고를 상대로 18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맹위를 떨친 끝에 6경기 37.2이닝 ERA 0.72라는 대활약을 펼치며 팀에 우승을 안겼다.

그러나 고교야구 대회와 국제대회에서의 무지막지한 혹사 때문에 안성수는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가 소리없이 사라졌고, 조계현도 어깨를 다쳐서 파이어볼러에서 평범한 구속의 투수로 전락했다. 2학년 때인 1982년 일본에서 벌어진 한일고교야구 정기 교류전에서 조계현은 3차전 내내 혼자 마운드를 책임지다시피하여 2승 1패를 거뒀다. 당시 감독이었던 경북고 구수갑 감독이 라이벌 팀 에이스를 일부러 굴렸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 그때의 무리 때문에 부상을 입어서 1983년 한일고교야구 정기전에는 부상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혹사로 인해 연세대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타자로 전향도 고려했다고. 그러나 재학 후반부에 조계현은 팔색조 변화구라고 불리는 다양한 구질을 연마하여 변화구+컨트롤 위주의 기교파 투수가 되었고, 이것 덕분에 그는 전성기 못지 않은 투수 시절을 보내게 된다. 조계현 하면 승부사처럼 조금은 경직되고 무서운 인상으로 기억하는 팬들이 많은데, 대학 시절 그는 귀여운 곰돌이처럼 푸근한 인상의 매력남이기도 했다.

2. 실업 야구단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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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농협 입단 사진

대학을 졸업하는 1988년, 해태 타이거즈로부터 1차 지명을 받았으나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실업야구 농협 야구단에 1년간 몸을 담았다. 당시 올림픽 등의 국제대회는 아마추어 선수만 출전할 수 있었던 탓에 대학 졸업과 국제대회가 맞물리면 1년을 강제로 실업리그에서 뛰어야 했다. 서울올림픽 대표팀에서 이런 사례는 조계현 외에도 강기웅, 노찬엽, 송진우 등이 있었다. 거기에 조계현은 초등학교 시절 유급 경력까지 있던 탓에 동갑내기보다 2년 늦게 프로에 진출한 셈이 되었다.[4]

3. 프로 경력

3.1. 해태 타이거즈

올림픽이 끝난 1989년, 지명권을 가졌던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덕에 1989년은 국가대표급 신인들이 다수 쏟아져나온 해로 기록되었는데,[5] 당시 해태는 조계현과 이강철, 이광우라는 국가대표 투수 세 명을 모두 쓸어가면서 화제가 되었다. 다만 조계현은 혹사 이력 및 이로 인한 구위 하락 문제로 셋 중에서는 가장 낮은 대우를 받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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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이강철과 더불어 투수진의 삼대장이었던 영광의 해태 타이거즈 리즈 시절.

그러나 입단 이후, 그는 선빌과 중간을 오가며 174이닝을 던져 7승 9패 4세이브에 ERA 2.84를 기록, 구위 하락의 우려를 블식시키고 당당히 마운드의 한 축을 차지한다. 이후 선동열, 이강철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선발 3인방으로 맹위를 떨쳤다. 선동열의 마무리 전향 이후에는 역시 촉망받는 투수였던 이대진이 마운드에 합류하면서 투수왕국의 영광을 이어갔다.

비록 승수엔 기복이 있었을지언정 평균자책점 2~3점대의 꾸준한 활약을 선보인 조계현은 1991년까지는 선발투수로 활약하다가[7], 1992년에는 부상 이탈한 선동열의 롤을 이어받아 선발과 마무리를 겸업하며 10승 6패 12세이브를 거두었다. 이해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1실점 완투승을 거두기도 했다.[8] 당시 조계현은 37경기 중 9경기를 선발 등판, 156이닝을 던지며 선동열의 부재를 최대한 메꾸었다. 이 때의 혹사가 매우 힘들었던 탓인지 오죽하면 시즌이 끝났을 때 이대로면 야구를 오래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9]

이전까진 그래도 나름 강속구를 적절히 써왔으나, 이 시즌 느낀 위기감을 바탕으로 조계현은 팔색조로의 본격 변신을 꾀하게 된다. 겨우내 제구력 및 변화구의 연마에 힘썼고, 이는 곧 성과로 나타났다. 시즌 첫 등판이던 1993년 4월 11일 LG전에서, 조계현은 9회 2아웃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인상적인 투구를 펼쳤다.[10] 그 기세를 몰아 그해 17승 6패 방어율 2.15로 다승 1위, 평균자책점 4위를 차지한다. 그리고 1993 한국시리즈에서는 2승으로 해태의 V7를 견인했다. 특히 1승 1무 2패로 팀이 열세에 몰린 잠실 5차전에서 거둔 완투승은 압권 그 자체.[11] 한편 이러한 활약에는 선동열이 건초염 부상으로 인해 마무리로 고정되면서, 선발에 주력할 수 있게 된 것도 한몫했다.

1994년은 그의 커리어하이 시즌이었다. 이 해 조계현은 18승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다승왕[12]을 수성, 완투-완봉 1위를 기록하며 리그 최고 투수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특히 그 해 81승을 올리며 우승까지 접수하는 등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LG 트윈스에겐 저승사자급 활약을 펼쳤다. 당시 해태가 LG와의 맞대결에서 7승 11패를 거두었는데 그 중 조계현은 6승 무패라는 독보적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그해 투수 골든글러브는 최초로 40세이브 고지를 찍은 태평양의 마무리 정명원[13]이 받았다.[14] 그 해 8월 14일에 쌍방울을 상대로 1안타 완봉승을 거둔 적이 있는데, 그의 노히트노런을 저지한 주인공은 당시 쌍방울 부동의 4번타자이자, 후에 타이거즈 감독이 되는 김기태.[15]

1995년에는 시즌 중 부상을 당해 약 2달 정도 출장을 하지 못한 여파로 126이닝 9승에 그쳤으나,[16] LG 이상훈의 트리플 크라운을 저지하면서 1.71로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다. 규정이닝인 126이닝을 정확히 채운 덕택.[17] 그리고 시즌 후인 11월에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 한국대표팀으로 참가하게 되고, 2차전과 6차전에 선발등판한다. 특히 2차전에서는 이치로가 포함된 일본타선을 상대로 6이닝 2실점의 호투를 펼쳐 승리투수가 되었다. 다만 6차전에서는 부진했다.

1996년은 사실상 조계현이 선발투수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시즌. 사실 스프링캠프 도중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에 연루되며[18] 시즌 시작부터 어수선한 상태로 출발했지만, 93~94년에 못지않은 압도적인 투구를 보이며 시즌 내내 1점대 평균자책점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전반기에 비해 시즌 후반기에는 조금 구위가 떨어지면서 평균자책점이 2점대 초반으로 올라왔고 그걸 만회하려던 최종전에서 부친상을 당해 출장하지 못했다. 그래도 191.2이닝 ERA 2.07(2위), 16승(3위)이라는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현대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호투하면서 해태의 8번째 우승에 공헌하는데, 특히 2승 2패로 맞서있던 중 잠실구장에서 5차전에서 선발 등판, 현대 정민태와의 맞대결에서 얻어낸 승리는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1997년, 해태 타이거즈 항명사건의 여파로 김응용 감독에게 찍힌 것과 더불어 김상진, 임창용 등의 신예들이 본격적으로 활약하며 조계현의 입지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프로에서만 8시즌을 쉼없이 달려왔을뿐더러, 만 33세라는 나이는 노쇠화가 오기에도 충분한 나이였다. 이해 조계현은 처음으로 규정이닝을 채우지 못했고, 8승 9패에 ERA 3.71[19]을 기록한다. 그래도 한국시리즈에 등판해 반지는 챙겼다.

해태 시절 통산 320경기에 등판해, 126승 92패 17세이브에 평균자책점 3.17을 기록했다. 중간중간 부상은 있었지만 8시즌 연속 규정이닝 달성을 기록할 정도로 꾸준한 활약을 펼쳤으며, 특히 그가 팔색조 투수로 본격 만개한 1993~96년은 명실공히 투수왕국 해태의 1선발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20] 다양한 변화구와 특유의 배짱을 바탕으로 어느 상황에서나 자신감을 갖고 임하는 그의 태도는 승부사와 싸움닭이라는 또 다른 별명을 만들어냈고, 팬들에게는 짜릿함을 안겼다. 이에 더해 투수로는 최고의 무기인 강속구를 잃고도 끝끝내 재기에 성공해 리그 최고의 투수로 군림했던 그의 투혼적인 스토리는 수많은 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오죽하면 지금의 타이거즈 팬들 중에서도 조계현의 등번호를 마킹한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정도다.

더불어 전성기에는 유난히 LG 트윈스에 강해서, 1993년~ 1995년[21] LG를 상대로 12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1993년 LG 김태원[22]과의 맞대결은 명승부로 유명했다.[23] 이 때문에 당시 LG-해태의 3연전은 잠실 야구장이 매진될 정도의 흥행력을 자랑했다. 조계현의 LG전 연승은 1995년 8월 18일 이상훈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이상훈의 1-0 완봉승으로 간신히 마감됐다.

3.2. 삼성 라이온즈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40109184459299.jpg
(출처 : 포토로)
순탄치 못했던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7년 한국시리즈 종료 후인 11월 10일, 현금 4억 원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됐다.[24][25][26] 사실 타이거즈의 재정난도 있었지만 1996년 시즌 후 해태 구단은 조계현과 이강철을 묶어서 LG의 이상훈과 트레이드하려는 시도를 했으나[27] 실패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조계현은 자존심이 상해서 구단에 트레이드 요청을 하게 된다. 당시 조계현은 트레이드 희망 구단으로 삼성을 골랐고 결국 모기업이 부도난 1년 후에 맞춰서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

삼성에서는 2시즌을 뛰었고 트레이드 첫 해였던 1998년에는 선발투수로 어찌어찌 뛰면서 150⅓이닝을 던졌지만 8승 11패 ERA 5.21로 2년 전 해태 시절 모습은 어디 갔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진했다. 한 술 더 떠 1999년에는 몇 경기 등판하지도 못하며 1승도 거두지 못하고 ERA 11.51로 퇴물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99년 시즌을 마치고 삼성에서 그대로 방출.[28] 사실 노쇠화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으며 해태에서의 마지막 시즌이던 1997년 조계현이 부진했다곤 해도, 100이닝 넘기고 10승 가까이까진 기록한 데다 평균자책점이 그래도 3점대를 마크했던 만큼 어느 정도 기대의 여지는 남아있었다. 때문에 삼성이 4억원을 투자하면서 데려왔던 것이나… 결과는 삼성의 명백한 투자 실패.

3.3. 두산 베어스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414165949560B2.jpg
(출처 : 포토로)
현역 마지막을 보낸 두산 베어스 현역 선수 시절.

삼성에서 방출당한 뒤 은퇴 위기까지 몰렸다가, 1999년 겨울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29]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 두산에서는 예전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해태시절 후배였던 이광우와 함께 원투펀치로 이끌어 팀의 최고참으로 활동했다.

2000년 7승 3패 ERA 3.74를 기록하며 앞서 부진했던 삼성 시절에 비해서 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해 포스트시즌에서도 맹활약했는데, LG와의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 1차전과 4차전에 선발등판, 1승2패로 뒤쳐진 4차전 승리투수가 되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고, 현대와의 200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4차전 선발투수로 나와 승리를 거두며 만 36세 6개월로 역대 한국시리즈 최고령 승리투수 신기록을 세우는 등 성과를 올리며 여전히 큰 경기에서 강하다는 진면목을 보여줬다.[30] 다만 7차전에서도 선발 등판했지만 현대 톰 퀸란에게 결승포를 허용하며 패전 투수가 된 건 옥에 티.

어쨌든 2000년 재기에 성공하면서 시즌 후 FA까지 선언할 수 있었는데 1년에 1억 8백만원에 두산과 계약할 수 있었다.[31] 해태 시절 한 팀에 있던 김정수, 송유석이 FA를 선언했으나 헐값에 울며 겨자먹기로 계약한 후 트레이드 매물[32]로 오른 것을 생각하면 대조적인 부분.[33]

조계현은 두산에서 어느정도 반등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로 삼성에 있을 때는 운동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지나치게 웨이트를 하다 오버페이스로 시즌을 망쳤고 삼성 시절의 실패를 타산지석삼아 운동량을 조절한 게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2001년에도 38살의 나이에 전천후 투수로 뛰며 팀의 최고참이자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기도 했다. 당시 김인식 감독에게 재활공장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게 한 사례 중 하나였을 정도. 두산이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두산에서 우승 반지를 하나 더 낄수 있었지만 나이가 많은데다가 성적 하락이 뚜렷했다 보니 결국 2001년 11월 24일부로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고 만다.[34] 그리고 이듬해 KBS의 해설위원 제의를 수락하면서 선수 생활을 마치게 된다.

4.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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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색조, 변화구의 마술사라는 말로 대표되는 한국야구 90년대 최고의 기교파 투수. 팔색조라는 말 자체가 8가지 변화구를 던질줄 안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140km 수준의 직구와 130km의 변화구를 매우 다양하게 구사하였고, 공을 지저분하게 던진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상대 타자 입장에선 다양한 레퍼토리를 바탕으로 까다로운 투구를 했던 선수였다. 의도적으로 제구와 완급조절을 위해 다소 힘을 빼고 던졌기에 완투능력도 매우 출중했다.

와인드업을 하며 하이키킹을 구사했는데,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하이키킹은 박철순이나 최동원 등의 일부 투수만 구사하는 흔치 않은 동작이었다. 하이키킹이 주로 파워 피쳐가 힘을 짜내기 위해 쓰는 동작임을 생각하면, 이는 강속구 투수 조계현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조계현의 격렬한 투구폼은 당대 초딩들 사이에서 나름 인기가 있었다고. 디셉션 또한 뛰어난 투수였는데, 와인드업 및 키킹 동작의 속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면서 상대 타자의 타이밍에 혼란을 주었다.

변화구로는 특히 싱커나 슈트(투심)을 잘 던졌다. 고교 시절은 강속구 투수로의 이미지가 크지만 이미 이 때부터 싱커, 커브, 투심, 슬라이더 등 웬만한 변화구를 던졌으며 특히 1982년 봉황대기 때, 대구고를 상대로 18탈삼진을 잡은 경기에서는 싱커와 슬라이더만 던졌다고 할 정도로 이미 변화구 구사도가 높은 수준이었다. 프로에 와서는 포크볼도 던졌는데, 이는 대학 시절 배워두고 벌써 쓰면 나중에 간파당한다고 봉인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커터만큼은 못 던졌다고 하는데, 고교시절 팔꿈치 부상으로 팔을 비틀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렇듯 많은 변화구를 던질 수 있던 비결은 뛰어난 구종 습득 능력으로, 조계현 본인은 새로운 구종도 한두 번 연습삼아 던지면 바로 던질 수 있었다고 한다.

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해태 31 174 7 9 4 - 0.438 2.84 153 3 73 97 64 55 1.27
1990 30 178⅓ 14
(4위)
13 0 - 0.519 3.28 144 8 81 130
(5위)
73 65 1.25
1991 21 130⅓ 9 9 0 - 0.500 3.25 100 6 52 75 50 47 1.12
1992 37 156 10 6 12
(4위)
- 0.625 2.94
(5위)
123 13 59 98 64 51 1.14
(4위)
1993 28 196⅓
(3위)
17
(1위)
6 1 - 0.739
(4위)
2.15
(4위)
141 8 58 118 54 47 0.98
(2위)
1994 27 210
(2위)
18
(1위)
5 0 - 0.783
(2위)
2.61 171 12 68 135 69 61 1.11
1995 19 126 9 6 0 - 0.600 1.71
(1위)
97 2 43 59 28 24 1.06
1996 27 191⅔
(5위)
16
(3위)
7 0 - 0.696
(3위)
2.07
(2위)
145 12 52 116 51 44 0.99
(3위)
1997 25 114 8 9 0 - 0.471 3.71 111 11 36 71 64 47 1.23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8 삼성 29 150⅓ 8 11 0 - 0.421 5.21 171 19 76 94 99 87 1.56
1999 12 20⅓ 0 3 0 - 0.000 11.51 36 5 15 16 27 26 2.36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두산 16 89 7 3 0 0 0.700 3.74 81 7 31 53 40 37 1.20
2001 18 87 3 5 0 0 0.375 5.28 99 7 38 38 53 51 1.52
KBO 통산
(13시즌)
320 1823⅓ 126 92 17 0 0.578 3.17 1572 113 684 1100 736 642 1.19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9 7완투 0완봉
1990 10완투
(1위)
5완봉
(2위)
1991 1완투 0완봉
1992 3완투 1완봉
1993 10완투
(공동 4위)
4완봉
(1위)
1994 14완투
(1위)
5완봉
(1위)
1995 4완투 0완봉
1996 11완투
(1위)
3완봉
(공동 2위)
1997 2완투 1완봉
(공동 4위)
1998 2완투 0완봉
1999 0완투 0완봉
2000 0완투 0완봉
2001 0완투 0완봉
KBO 통산 64완투 19완봉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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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무지막지한 인기를 누리던 고교야구에 힘입어 하이틴 스타와 맞먹는 인기를 얻었는데, 여학생 대상 잡지들이 벌인 가장 좋아하는 스타 설문조사에서 연예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정도였다. [2] 1965년생으로 북일고의 에이스 투수였으며 조계현과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혹사로 한양대 진학 후에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제 막 창단한 연고팀 빙그레 이글스에 1987년 입단했으나 통산 성적 0승 1패, 평균자책점 13.50의 부진한 실적만 남긴채 프로야구계를 떠났다. 1993년에 심판이 되어 잠시 야구계에 돌아왔으나, 1년 만에 떠났고 2008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 #2 [3] 당시 군산상고 측 선발은 이동석이었다. [4] 프로 동기이자 같이 서울올림픽 대표팀을 했던 송진우도 마찬가지로 동년배보다 2년 늦게 프로에 진출했다. 다만 송진우는 호적신고가 늦어 애초부터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케이스. [5]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 신인왕은 고졸 2년차로 19승 성적을 거둔 박정현에게 돌아갔다. [6] 당시 이광우가 계약금으로 4,100만원을 받았고 이강철은 3,500만원을 받았으나 기를 세워준답시고 4,200만원으로 대외에 발표된 반면, 조계현은 그냥 3,500만원이 끝이었다. [7] 다만 1991년 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8월을 끝으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그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는 들었으나 출장하지 않았다. [8] 팀은 2승 3패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 이해 조계현의 활약은 물론 이강철이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던지라 선동열의 부재가 매우 아쉬웠던 시즌이기도 하다. [9] 원래 선발+마무리 겸업 롤 자체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구성이 뛰어난 투수가 많던 당시에도 선동열, 송진우 등 최강의 내구성을 자랑하는 에이스들한테나 겨우 시도해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수준 높은 혹사였다. 완투 시즌 1위도 몇 번 기록했을 정도로 내구성 하나는 확실했던 조계현이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는 점에서 선발+마무리 롤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힘들고 고된 것이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10] 9회 2아웃에서 송구홍에게 안타를 허용한다. 이후 강판당하면서 완봉승도 놓치고 승리투수에 만족하게 된다. [11] 9회 2아웃까지 무실점 투구를 이어가다가 이만수에게 투런홈런을 허용한다. 이후 후속타자를 범타 처리하고 완투승. [12] LG의 이상훈과 공동 1위였다. [13] 조계현의 군산상고 후배이기도 하다. [14] 리그 최초 40세이브 달성이라는 활약을 펼쳤다. 이는 전년도 선동열의 31세이브에서 9개를 더 거둔 것이다. 선동열 역시 전년도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15] 후에 김기태가 LG와 KIA에서 감독을 맡을 때 조계현이 수석코치가 되어 옆에서 그를 보좌한 걸 보면 참 인연이다. [16] 당시 이종범이 방위복무로 원정경기에 출전하지 못함에 따라 타선 공백이 발생한 점도 있었다. [17] 하지만 해태는 정규리그 4위를 했음에도 3위 팀 롯데와 경기차가 4.5경기 차이라 당시 3위-4위 간 경기차가 3경기 이상일 경우 준플레이오프를 생략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다. [18] 당시 항명사건을 주도한 선수들이 조계현과 더불어 이순철, 송유석, 김정수, 이건열, 정회열 등의 고참 라인이었다. 결국 이 선수들은 1996~1997년 사이에 방출이나 트레이드 등을 거쳐 대거 정리당한다. 이중 김정수는 어느 정도 사건 수습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오래 살아남았으나, 1999년 시즌 후 FA 당시 해태가 재계약을 거부하면서 미아가 될 뻔한 끝에 간신히 SK로 이적했다. [19] 이는 조계현의 해태 재적 시즌 중 가장 높은 시즌 평균자책점이다. [20] 동시기 선발을 지탱한 후배 이강철과의 라이벌리는 유명하다. 이른바 꾸준함의 이강철 Vs 임팩트의 조계현. 이강철이 10시즌 연속 규정이닝+10승+100탈삼진이라는 꾸준함을 선보인 반면 조계현은 2점대 평균자책점 5번과 1점대 평균자책점 1번이라는 임팩트를 보였으며, 이를 반영하듯 누적스탯은 이강철이 우위이며 비율스탯은 조계현이 우위다. 한편 스탯티즈 기준 1989년~1997년 시즌 누적 war은 조계현이 41, 이강철이 37로 조계현이 조금 더 앞선다. 그러나 팽팽한 논쟁으로 인해 1989~92년은 이강철 우위, 1993~96년은 조계현 우위 이런 식으로 정리되기도 한다. [21] 결정적으로 이 기간은 LG 트윈스가 신바람 야구를 하면서 리그에서 잘 나가던 전성기였다. 이때의 엄청난 활약상으로 인해 LG의 올드팬들은 선동열보다 조계현이 더 무서운 투수였다고 회고한다. [22] 1993년에 조계현과 김태원의 맞대결은 세 차례 있었는데 각각 0-0 무승부(더블헤더 1차전), 조계현의 1-0과 2-1의 두 차례 1점차 승리였다. 당시 김태원은 141.1이닝 방어율 2.42라는 엄청난 호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조계현과의 맞대결에서 전혀 승리를 챙기지 못하는 등 불운이 겹쳐 시즌 8승에 그치고 말았다. [23] LG는 이외에도 이상훈과 OB 김상진 간 라이벌리가 있기도 했다. [24] 당초 삼성 내야수 김한수를 트레이드 카드로 써서 선수-선수 간 트레이드로 논의되었다가, 삼성 측에서는 김한수를 대신할 3루 자원이 없는데다 빠른 투수진 보강을 이유로, 해태 측은 자금난으로 인해 현금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로 결국 현금 트레이드가 이뤄졌다. 야만없이지만 삼성이 이 당시 조계현을 영입하려고 김한수를 해태에 넘겨줬다면 역대급 호구딜이 탄생할 뻔했다. [25] 이 시기 삼성은 우승의 한을 풀기 위해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타 팀에서 여러 선수들을 데려오는 등 현질을 했다. 그 사례들을 살펴보면, 1997년 시즌 끝나고 현금 4억에 조계현 영입, 1998년 시즌 끝나고 현금 6억 5천 김상진 영입, 현금 30억과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까지 주고 임창용 영입, 현금 20억 김기태, 김현욱 영입, 1999년 시즌 중 현금 4억 이상훈 주고 진갑용 영입, 1999시즌 끝나고 FA 3년 8억 김상엽 주고 김동수, 역시 FA 3년 8억 박충식 주고 이강철… 이후 김응용 사단까지 최고대우로 모셔온 건 논외로 해도, 종합하면 이 정도 영입에만 최소 현금 80억 5천만원을 썼다. 거기에 1994년 최용희에게 계약금 1억 9천, 1996년 최창양에게 계약금 5억에 트레이드 머니 1억 6천은 덤이다. 이렇게 현금과 선수를 아낌없이 내주고 영입한 선수들 중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까지 있던 선수는 임창용, 김현욱, 진갑용뿐이었다. 명백한 경영 실패였다. [26] 이는 IMF 금융위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맞물렸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당시 해태그룹은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타이거즈가 우승컵을 들어올린 지 정확히 1주일 후 부도가 나는 바람에 돈이 매우 필요한 상황이었으며, 리그 탑급이던 주축 선수들은 여기에 있어 더없는 현금화 자원이었다. 마침 시의적절하게 현대와 삼성 간 재계 라이벌리가 야구계를 불태우고 있었고, 해태는 이에 조계현과 임창용을 현금 트레이드로 삼성에 팔고 이종범을 일본 주니치에 임대를 보내면서 현금을 마련한다. 해태 뿐만이 아니라, 쌍방울 또한 97년 중순 부도가 나는 바람에 박경완 조규제를 현대에, 김기태, 김현욱을 삼성에 현금 트레이드로 넘기는 등 주축 선수들을 팔아 자금을 확보해야 했다. [27] 일단 이상훈이 LG에서 많이 굴려진 편이었지만 30대 중반에 접어든 조계현이나 언더핸드 투수여서 제법 많이 맞아나가는 이강철에 비해서는 더 매력적인 카드였다. 더군다나 해태는 좌투수, 좌타자 없는 팀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이상훈의 가치는 더 커보였을 정도. [28] 같은 시기에 이적한 정회열도 방출되었고, 류중일은 99시즌이 끝나자 은퇴하고 코치가 되었다. [29] 본인에 의하면 삼성에서 방출 통보를 받은 뒤 무작정 거제도로 낚시를 하러 갔다가 김인식 감독의 연락을 받았고, 곧바로 테스트를 거쳐 계약했다고 밝혔다. [30] 두산이 3연패 후 3연승으로 7차전까지 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31] 여기에 샤이닝 보너스 1억이 더 붙어있었지만 이를 이행하지는 못 했다. [32] 김정수는 연봉 5천, 송유석은 연봉 6천2백에 계약하고 각각 SK와 한화로 트레이드 되었다. [33] 해태에서 같이 원투펀치를 이뤘던 이강철도 삼성과 FA 계약에 성공했지만 조계현이 두산에서 부활투를 던지고 있을 때 이강철은 삼성에서 크게 부진했고 결국 2001년 7월 친정팀 KIA로 재트레이드되었다. [34] 이 때 충격이 컸는지 외부와의 연락을 전부 끊고 한동안 칩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