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34632a><colcolor=#ffffff> 정선엽
鄭善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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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6년 6월 21일 |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안노리[1] | |
사망 | 1979년 12월 13일 (향년 23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방부 청사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제8묘역-2판-38315호 |
본관 | 하동 정씨 |
가족 |
아버지 정순남 어머니 한점순 형 정훈채[2] 누나 정정자, 정영임 동생 정규상 |
학력 |
영암 금정북국민학교 (졸업) 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 (졸업) 광주동신고등학교 (졸업) 조선대학교 공과대학 ( 전자공학 77 / 명예학사)[3] |
군사 경력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4] |
1977년 ~ 1979년 12월 13일 | |
최종 계급 | 병장 ( 대한민국 육군) |
근무 | 국방부 50헌병대 |
병과 | 헌병[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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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의 병장.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국방부 초병으로 근무하던 중 국방부에 진입하려던 반란군에게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12·12 군사반란 과정에서 국방부를 지키다 전사한 유일한 희생자였으며, 사태 전체로 확대해 봐도 김오랑 중령(특전사령관 비서실장)과 함께 반란 진압 중 전사한 유이한 인물이다.
2. 생애
2.1. 12.12 이전의 이력
학창 시절의 정선엽 병장[6] |
그는 태권도 유단자였고 덩치도 좋았으며 의협심과 애국심도 남달랐다고 한다. 영민했던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가족의 지원을 톡톡히 받았고 1977년 조선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7]( 77학번)에 입학하였고[8]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여 국방부 헌병으로 복무했는데 휴가를 나온 그를 본 친구들은 그를 '선엽 장군'이라 부를 정도로 군복이 잘 어울렸다고 한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잇따라 학도호국단 기수를 맡았다.
2.2. 12.12 당시의 상황
전역이 3개월 가량 남았던 1979년 12월 13일 전두환이 주도한 12.12 군사반란으로 ' 진도개 하나'가 발령되자 국방부에서 근무 중이던 군인들은 모두 경계근무에 배치되었다. 그의 선임은 전역을 앞둔 그를 배려해 보안실에 그를 배치하려고 했지만 그는 요충지인 B2 벙커에 후임 일병이 배치됐다는 소식을 듣고 벙커 초병을 자원했다고 한다. 당시 50헌병중대 행정병 출신에 따르면 B2 벙커에서의 근무가 어려울 것임을 우려한 그가 후임을 보안실로 보내고 본인이 B2 벙커에서 근무했다고 한다.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B2 벙커를 지켜야 하는 인원은 달랑 2명에 지나지 않았다. 김오랑 소령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결판이 난 대치였던 셈이다.
그러던 중 B2 벙커 출입구 외곽의 초소를 점령한 반란군 제1공수특전여단은 벙커를 점령하기 위해 5~6명의 공수부대원을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보냈고 이때 반란군의 총성을 듣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계단을 올라오던 그와 마주쳤다. 당시 지하 벙커로 내려오던 공수부대원을 보고 숨어서 이 대치를 목격한 한 방위병의 증언에 따르면 공수부대원이 정선엽에게 총을 건네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우리 중대장님의 지시 없이는 절대 총을 줄 수 없다"[9]고 외치며 끝까지 저항했고 공수부대원과 격한 몸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몸싸움을 하다가 그는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결국 그와 몸싸움을 하던 반란군 측 대위가 그의 목에 권총을 발포하고 말았다. 뒤이어 시작된 공수부대원들의 사격에 그는 목에서 머리를 관통한 1발, 가슴 부위에 3발의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 #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23세였다.
2.3. 전사 후
쿠데타에 성공한 신군부는 그의 죽음을 '계엄군 증가 인원과의 오인에 의한 총기사고'로 조작했고, 1980년 3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 제8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이뤄진 후에야 순직이 인정되었다.2017년 그와 함께 광주에서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한 그의 고등학교 친구들은 그의 모교인 광주동신고등학교에 그를 기리는 소나무 한 그루를 식수하였다. #
2022년 4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그의 죽음이 은폐되고 조작되었다고 규정하고 기존의 '교육훈련 중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했고 같은 해 12월 7일 유족에게 전사확인서를 전달했고 국가유공자임을 인정받았다. 故 정선엽 병장, "순직 아닌 전사, 43년만의 명예회복" 그러나 아직까지 계급 특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24년 1월, < 서울의 봄> 개봉에 힘입어 그의 모교인 조선대학교에서 그에게 44년여 만에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기로 했고 다음 달인 2월 16일에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
국방부와 육사는 정선엽 병장에 대한 추모비 건립은 타 전사자들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반대한다. 유족들은 전사 판정 이후 정 병장의 사망 경위를 정확히 규명하지 않았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인데, 이 소송에서 국가는 오히려 '유족에게 위자료를 주면 이중 배상의 우려가 있다'는 논리로 유족들을 허탈하게 만들고 있다. "전사자 분류에 따른 배상 체계가 이미 존재하기에, 별도의 위자료 청구는 현행법상 ' 이중배상금지 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또 "과거 부실수사에 따른 가족의 고통이 입증된다 하더라도, 그 손해의 발생일은 진상규명위 결정이 있던 2022년 3월 21일부터"라는 논리도 폈다. 유족들을 대리하는 김정민 변호사는 "정 병장 어머니는 사건 진상도 모른 채 2008년 돌아가셨는데, 국방부 말대로라면 아무런 고통 없이 떠나신 셈이냐"고 꼬집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국가배상법을 개정하겠다(순직 군경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게 하는 내용)고 공언했으나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해, 국가배상 소송을 지휘하는 법무부가 진의와 달리 국방부의 '이중배상 금지' 논리를 용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동생을 먼저 앞세운 정훈채씨는 1995년 검찰이 '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을 때, 기대를 모두 내려놓았다고 했다. 그러다 동생의 전사 결정과 최근 영화 '서울의 봄'에 보여준 시민들의 관심 덕분에 다시 희망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국가가 죄지은 사람을 벌 주는 게 당연하듯, 의로운 이를 치하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 #
그의 형인 정훈채는 당시 일반 직장인이었으나 동생이 전사한 뒤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으며 미얀마로 선교 활동을 가서 현지 어린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역사의 악연인지 그 어린이 중 일부는 미얀마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2024년 2월 5일, 1심 재판 결과 정선엽 병장의 유가족에게 정부가 총 8천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정부측은 순직으로 유족 연금이 이미 지급되었기에 '이중배상 금지 원칙'에 어긋나며 설사 정신적 고통이 생겼더라도 전사자로 확정된 2022년부터라고 주장했고 또한 유가족이 권리침해를 알고도 소송을 제기하지 않아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1심을 판결한 서울중앙지법 홍주현 판사는 국가의 위법행위로 고인의 생명과 자유, 유족들의 명예가 침해된 사실이 인정되며 2022년 진상규명위의 발표 전까지 유족들이 정선엽 병장의 전사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에 소멸시효가 만료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관련 기사1 관련 기사2 국방부는 판결 다음날 유가족의 어려움과 아픔에 충분히 공감하고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의사를 내비쳤으며 이후 2024년 2월 23일, 정부가 항소를 포기하여 그대로 판결이 확정되었다. 관련 기사
2.4. 명예 졸업식
3. 미디어
- 쿠데타 당시 진압군 측의 또 한명의 전사자였던 김오랑 중령과 달리 박윤관과 함께 12.12 군사반란 관련 창작물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10] 2023년 김성수의 영화 < 서울의 봄>에서 상업예술 작품으로선 최초로 영상화되었다. 배우는 김범수. 극중 이름은 가명을 사용한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조민범 병장'으로 변형되었다. 김진기(극중 이름 김준엽) 헌병감만 남은 육군본부 벙커로 진입하려는 반란군을 홀로 저지하다가 반란군 소속 공수부대원들에게 사살당하는 장면으로 등장한다.[11] 반란 당시 병사 전사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아[12]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영화를 보던 관객들이 놀란 경우가 꽤나 많았다고 한다.[13][14] 참고로 이 장면을 촬영한 장소는 다름 아닌 그의 모교인 조선대학교 본관 지하 대피소다.[15]
- 꼬꼬무에서는 총을 쏴 저항하다가 벙커로 도망치다 사망했다고 하지만 이건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내용이다.
[1]
하동 정씨
집성촌이다.
[2]
광주상업고등학교(현
광주동성고등학교) 졸업 후 은행에 취업하여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현재는 목사로 활동 중이다.
[3]
2024년 명예졸업
[4]
군번 12773787
[5]
현재의
군사경찰.
[6]
원래는 흑백 사진이지만 AI 기술을 통해 컬러로 복원했다.
[7]
그의 같은 과 후배로는 김동수 열사, 이철규 열사, 김영석 전
목포문화방송 사장, 배우
이은재 등이 있다.
[8]
원래는 사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공학계열로 가라는 권유를 받아서 조선대학교에 입학했다.
[9]
정식 규칙이 그렇다. 현행
군인복무기본법은 물론이거니와 12.12사건 당시 군인복무규율에서도 보초는 근무상 상관의 명령만을 받도록 되어 있다.
[10]
아무래도 영화적 입장에서 보면 진압군의 핵심 축중 한명인
정병주 소장을 지키고 있던 김오랑 중령을 각색하는 것이 더 극적이기에 비슷한 위치의 정선엽 병장은 크게 각색할 매력을 느끼기 힘들기 때문으로 보인다.
[11]
각색이 들어간 장면으로 김진기 헌병감은 육본 벙커에서 구금되지 않았다.
서울의 봄(영화)/탐구 문서 참조.
[12]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1회에서 다뤄진 정도다.
[13]
무엇보다 전사자가 김오랑 소령처럼 군 간부가 아니라 국방의 의무를 지기 위해 징집되어 군생활을 하던
병사라는 점에서 자식을 둔 부모세대와 군필자 관객들이 충격을 받았었다고 한다.
[14]
그다지 영화에서는 그다지 주목되지 않고 짧게 다뤄진 인물이지만 이 때문에 더더욱 군필자와 군인의 부모 관객에서 와닿은 인물이기도 하다. 특별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처럼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감될 수 밖에 없다.
[15]
이 곳은 원래 식당으로 사용되었다가 솔마루 완공 후에 폐쇄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