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페인어: Valle de los Caídos(바예 데 로스 카이도스)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북서쪽 산로렌소데엘에스코리알의 화강암 바위산에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만든 무덤, 성당, 수도원 등의 복합건축군. 스페인 내전 기간에 사망한 전몰자 4만여 명의 무덤이 조영되었으며 프랑코가 좌우 화합을 내세워 1940년 공사 승인이 이루어진 후 1942년공사를 시작해 1959년에 완공했다. 152.4m 높이의 초대형 십자가가 바위산 꼭대기에 세워졌고 바위산 내부를 굴착해 '전몰자의 계곡 성 십자가 대성당(Basílica de la Santa Cruz del Valle de los Caídos)'을 건설했으며 프랑코 자신의 무덤도 이곳 성당 지하에 있었다.
2018년 8월 스페인 정부에서 프랑코의 묘지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겠다고 발표했다. 2019년 10월 24일에 프랑코의 유해를 꺼내 아내 묘 옆로 옮겼다. #
2. 역사
1936년에 발생한 스페인 내전 내내 공화파를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한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좌우로 나뉘어 대립한 스페인 국민의 화해를 도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좌파와 우파 전몰자 모두를 안장할 무덤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엘 에스코리알이 위치한 산로렌소데엘에스코리알을 선정했다. 이에 따라 내전이 종식된 직후인 1940년에 공사가 승인되었고 1942년부터 공사에 들어가 1959년에 완공했다.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은 이틀 노동에 하루씩 형기를 감해준다는 조건에 더해 당시 기준으로 일반적인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공화파 포로수용소 인력을 동원해 조달했다. 전몰자의 계곡은 정권이 자랑하는 랜드마크(즉, 보는 눈이 많다.)였기도 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코 정권은 그 강제의 정도가 상당히 누그러졌다. 전몰자의 계곡이 공화파 포로를 안치하고 화합의 장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시대가 변하고 서방권 눈치도 살피는 과정에서 내전 직후에 비하면 다소 누그러진 정권의 공화파에 대한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3. 건축
20세기 스페인 건축의 랜드마크로 불리는 전몰자의 계곡은 인근에 자리한 엘 에스코리알을 본떠 네오 에레리안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산 정상에는 32km 바깥에서도 보이는 높이 152.4m짜리 십자가가 세워져 있으며 산 내부에는 260m 길이로 화강암 암반을 굴착해 건설한 성당과 수도원이 들어섰다. 산 지하에 자리한 이 성당의 정식 명칭은 '전몰자의 계곡 성 십자가 대성당'이다. 전체 넓이는 축구장 크기와 맞먹고 전체 길이가 가톨릭 교회에서 이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없다고 정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길이 220m보다 40m나 더 길다. 그러자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m 짧은 지점에 격벽과 중문을 만들어 '이곳부터 성당'이라고 주장하는 꼼수를 썼다. 그 때문에 1960년 교황 요한 23세가 축성 미사를 거행했을 때 중문 너머부터만 성당으로서 축성받았다.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무덤 | 舊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무덤 |
4. 논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던 좌파-우파 전몰자들을 합장하는 과정에서 프랑코에 대항하던 공화정부측 전몰자들을 유족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이장해서 프랑코가 사후에도 두고두고 비난받는 이유가 하나 추가되었다. 심지어 프랑코에 의해 처형된 공화주의자들도 안장했다고...하여간 건축 과정에서 벌어진 노동으로서의 인권 탄압[3][4]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이 쿠데타 정권에게 학살당한 후 암매장 당한 것도 모자라 암매장된 걸 다시 파헤쳐지고 좌파적 관점에서는 역겨움만 유발하는 우파 권위주의 정권의 거대 종교적 기념물에 다시 던져지는 걸 봐야 했던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다시 박은 건물이다. 말이 좋아 좌우 갈등의 회복이니 나발이니 하지 당장 정권의 희생자인 공화파의 시신[5]을 아무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정권의 승전 기념물 용도로 지어진 교회에 대충 던져 넣은 꼴이다. '전몰자 계곡은 내전 후 화해를 상징하는 기념비다'라는 주장은 스페인 현지에서도 프란시스코 프랑코 재단 같은 프랑코 정권과 직결된 극우 옹호자들만 내세우는 주장이지 나머지 사회, 대중에선 화해가 아니라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와 과시를 상징하는 걸로 인식한다.
여행 가이드북이나 피상적인 블로그를 통해 전쟁 이후 화해의 상징 이런 식으로 소개하는 책자들이 많은데 전몰자 계곡은 그 존재만으로도 치열한 정치/역사상의 논쟁거리다. 2018년 페드로 산체스 정부가 프랑코 이장을 결정한 후 수도권 마드리드는 물론, 스페인 전역에서 #elvallenosetoca[6]라는 해시태그를 붙힌 친프랑코 성향 시민들과 이장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거나 아예 전몰자 계곡의 전면 철거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특히 카탈루냐 독립운동 문제와 맞물려 긴장감 팽팽한 시위, 맞시위, 격한 토론 등이 드물지 않았다. 스페인 현지인들, 특히 공화파에 심정적으로 더 가까운 사람들 입장에서는 전몰자 계곡을 내전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미화하는 걸 심각한 역사 왜곡으로 받아들이니 대화 주제로선 굉장히 민감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법적으로 번져 2019년 9월 24일 스페인 대법원이 프랑코의 유해를 이장해도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 정부는 10월 24일에 발굴한다고 전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관을 지고 떠나는 후손들과 관계자들 |
프란시스코 프랑코 묘소 이장 과정 그림 (더 타임즈 제공) |
5. 관련 문서
[1]
후에 프랑코의
팔랑헤당이 된다.
[2]
호세 안토니오 데 리베라는 스페인 내전 발발 당시 쿠데타 발발 얼마 전 화기 불법 소지 혐의로 공화국 정부가 사수하는 데 성공한
알리칸테의 감옥에 있었다. 자신들의 지도자가 적진 복판에 포로로 잡혀 있었던 팔랑헤 당원들은 포로교환이나 하다 못해 구출금 자금 수집으로 호세 안토니오를 끄집어 내려고 했지만 전쟁 이전부터 서로 '얄팍한 플레이보이(un playboy pinturero)', '일자무식 싸움꾼'이라며 디스하던 관계였던 프랑코가 포로교환 관련 일체 교섭이나 기금 모집 같은 구출 시도를 차단했다. 그러고도 막상 죽은 다음에는 노선과 성격 차이가 뚜렷했던 자신을 무슨 데 리베라의 계승자로 내세운 다음 나머지 스페인 우익과 달리 순수
파시즘에 가까웠던 팔랑헤의 독자적 이념과 노선을 지키려고 했던 팔렝헤의 2인자 마누엘 에디야를 포함한 소위 '구 셔츠파(camisas viejas)'라고 불리던 팔랑헤 1세대 원로들은 친위 쿠데타로 숙청해 버렸다. 에디야 같이 대포까지 동원해 난리를 일으킨 선을 확실히 넘긴 사람은 징역을 살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고 선을 크게 넘기지 않은 이들은 주로 외국의 대사 등으로 보냄으로써 국내 정치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했다. 일부는 출세가도를 달렸는데 후안 야구에는 프랑코의 사관학교 동기이면서 동시에 팔랑헤 구 셔츠파였으나 국민진영의 손꼽히는 명장이었기 때문에 원수 및 공군대신에 오를 정도로 출세했다.
[3]
무임금 노동은 절대 아니었고 당시 기준 통상적인 임금은 지급했다. 형기 감면 효과도 있었기 때문에 사실 공화파 포로들 사이에서 전몰자의 계곡에서 일하는 것은 외려 그냥 수용소에 있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리고 원래는 불법이었지만 작업 현장에서 가족과 외박하는 것도 묵인되는 부가적인 혜택도 있었다.
[4]
인권 탄압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매장 과정에서 유족의 동의를 얻지 못한 점이나 현장 안전조치가 미비했던 점, 공사장 노동 외에 수용소 시설이 열악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이런 수용자들이 추후 사회에 복귀하더라도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다른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서 다시 전몰자의 계곡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점에서 찾을 수 있다
[5]
프랑코는 공화파의 시신을 안치할 때 생전에 가톨릭 교도였을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현장에서의 착오라면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가톨릭에 적대적인 세속주의자들 시설에 안치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6]
el valle no se toca. "계곡을 건드리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