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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훈 관련 여담을 정리한 문서.2. 목록
- 나니와 상고 시절의 친구로 전직 야쿠자이며 화가로 활동 중인 야마모토 아츠무가 있다. V시네마[1]화 된 야마모토의 자전적 저서 「나니와 상고의 야먀모토다!」에서는 장훈과 관련된 수많은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다. 또 야마모토가 야쿠자 생활에서 손을 씻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장훈으로부터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라는 설득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학창시절 장훈은 그만의 독특한 타격 훈련법을 갖고 있었다. 한밤중에 방안의 불을 끄고 컴컴한 상태에서 타격 자세를 취한 채로 방 한 구석을 응시하면 가상의 야구공이 떠오르고 장훈은 그 공을 향해 스윙을 하는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이었다. 그 와중에 정말 맘에 쏙 드는 스윙이 되면 귓가에 "퓽"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장훈은 그 소리를 한번 더 듣고 싶어서 밤새도록 몇 백번이고 스윙을 불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훈이 밤마다 계속 스윙 연습을 하면서 그의 방 다다미는 발자국이 움푹 패일 정도였다고. 프로 입문 이후 장훈은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다고 느낄 때 마다 이 훈련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 백인천과는 형-동생 하며 격의없는 의형제 사이이다.[3] 토에이 시절 장훈은 백인천에게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줬고, 한국인에게 척박하기 그지없는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서 생존하는 법도 알려줬다. 백인천이 입단 후 몇년간 불펜 포수 노릇을 하느라 타격 훈련할 시간이 부족할 때 팀내의 확고한 실력짱, 싸움짱(!)인 장훈은 백인천이 프리 배팅을 할 때 일부러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었고, 그 어느 투수도 백인천을 불러 공 좀 받아달라고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장훈은 백인천에게 위협구를 던지는 투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기습번트 후 1루로 커버하러 들어오는 투수의 발을 사정없이 밟으라고 알려줬고, 백인천은 이를 실전에서 시전했다.
- 또한 타격왕이나 MVP 등을 수상하며 일본 최고의 타자로 군림하던 시기에도 자만하지 않고 노력하는 태도로 후배 백인천에게 감명을 받게 한 일화도 있었다. 바로 위에 서술된 장훈 특유의 타격 훈련법과 관련된 일화인데 그는 자신의 스윙이 만족스럽지 못한 날마다 밤에 다른 동료들이 자는 사이에 몰래 그 연습을 하곤 했다. 하루는 불 꺼진 숙소 식당 구석에서 혼자 그 타격연습을 하던 차에 자다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식당을 지나가던 백인천이 깜짝 놀라 "아니 장이형, 여기서 지금 뭐하우?"라고 묻자 장훈은 "아 오늘은 스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좀 더 연습한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아니 형님처럼 잘하는 사람이 무슨 이 밤에 그렇게까지 합니까?"라고 하자, "그런 게 어디 있냐? 부족하다면 더 해야지!!"라고 짧게 대답하고 계속 스윙 연습을 했다고 한다. 백인천은 후일에 방송 인터뷰에서 그 날의 일을 회상하며 당시 "아, 저렇게 훌륭한 선수도 만족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항상 노력하는구나. 나도 꼭 그래야 되겠다."고 생각했고, 그날 이후로 자신의 성적이 좋건 나쁘건 부족한 부분이 느껴질 때는 그날 밤 배트를 묵묵히 휘두르던 선배 장훈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도 그에 뒤쳐지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이를 악물고 밤새 훈련에 매진 했었다고 털어 놓은 바 있다. 장훈은 여러 방면에서 직간접적으로 백인천에게 큰 영향을 준 훌륭한 선배였던 것이다.
-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내서였는지 프로에 입문한 후 식사 때 마다 동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엄청난 먹성을 자랑했다. 특히 야키니쿠를 무척 좋아해서 목구멍까지 고기가 꽉 차서 안 들어갈 때 까지 먹어야만 직성이 풀렸는데, 이런 식성 탓에 데뷔 첫 해인 1959년 시즌 도중 새벽에 두 번이나 위경련으로 인하여 앰뷸런스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장훈은 치료를 받고 나와 시합 전 우유 한 잔만 마시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출전했다고 한다.
- 1961년 시즌을 앞두고 도에이 감독으로 취임한 미즈하라 시게루가 불시에 선수단 기숙사를 방문하여 장훈의 방에 들어왔는데, 평소에 장훈은 배트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벽에 일일이 못을 박아 배트를 수평으로 걸어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를 본 미즈하라는 "자네처럼 장비를 소중히 여기는 선수는 프로에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라며 짧게 장훈을 격려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한다. 명감독에게 칭찬을 받은 장훈의 기분이 뿌듯해 진 것은 당연지사.
- 미즈하라 시게루가 도에이 감독 취임 후에 정규시즌 중 시합 막판에 수비가 약한 장훈을 대수비 요원으로 교체한 적이 종종 있었는데, 그 자체야 흠이 될 것은 없지만 문제는 이미 이닝이 시작되고 장훈은 좌익수 수비 위치에 가 있던 후에야 심판에게 교체를 통보했다는 점이다. 처음엔 장훈도 존경하는 스승님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장훈의 인내심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어느 날 경기 후반 장훈이 좌익수 자리에 도착한 후 미즈하라가 또다시 교체 사인을 보내자 장훈은 분통을 터뜨리며 도에이가 아닌 상대 팀 덕아웃을 통해 야구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상대 선수들은 당연히 어리둥절 했고, 그것도 모자라 장훈은 그 길로 선수단 기숙사에 가서 홧김에 배트로 기숙사 유리창을 모조리 깨뜨려버리는 대형 사고를 쳤다. 지금 같으면 벌금에 출장정지 정도는 약과였을 상황이었지만, 미즈하라는 이 사실에 대해 아무 말 않은 채 다음 날 장훈을 변함없이 선발 좌익수에 4번타자로 기용했고, 미즈하라의 질책을 각오하던 장훈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미즈하라는 "뭐? 무슨 일 있어?" 라는 듯한 태연한 얼굴로 장훈을 바라봤다고 한다. 차후에 미즈하라는 장훈을 불러서 "이닝이 시작하기 전에 수비를 바꿔줘야 한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경기 후반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머리를 쥐어짜다 보면 이미 이닝은 시작해 있고 그제서야 아차 싶어서 수비 교체를 하게 되더라. 자네 기분이 상한 건 미안하지만 내 입장도 생각해 다오" 라며 양해를 구했고 장훈은 '그렇게 시합에 몰두하신다니 어쩔 수 있나. 이런 감독님이라면 내 야구 인생을 걸어볼 만 하다' 라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 1970년 타율 0.383을 기록하여 역대 시즌 최고타율을 경신할 때 다른 팀이지만 친하게 지낸 미국인 선수 잭 블룸필드(Jack Bloomfield)[4]의 덕을 본 일이 있다. 블룸필드가 킨테츠 버팔로즈 소속으로 뛰던 1960년대 초반, 장훈은 평소 자기보다 발이 느린데도 기습 번트에 능숙했던 블룸필드를 어느 날 미국 야구에 대해 알려달라는 명목으로 긴자의 스테이크 전문점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던 중 "세이프티 번트 잘 대는 법 좀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처음엔 '이 자식 뭔 소리야 남의 영업비밀을 알려달라니' 라는 듯한 태도의 블룸필드는 장훈의 정중한 부탁에 팀을 떠나 같은 야구인으로서 식당에서 밥먹다 말고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며 자신의 세이프티 번트 비법을 알려줬다. 블룸필드의 비법은 1. 절대 상대방에게 번트의 낌새를 보이지 말라 2. 타석에 들어섰을 때 스윙을 크게 하며 강공인것 처럼 페이크를 쳐라 3. 번트를 대는 순간 왼발을 오른발과 크로스시켜 1루 쪽으로 내딛으며 몸을 틀어라... 그렇게 하면 1루에 최소 반 발짝 내지 한 발짝은 먼저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블룸필드로부터 세이프티 번트 비법을 전수받은 장훈은 이후 번트 안타로 짭짤하게 재미를 봤고, 5타수 4안타 이상을 쳐야 시즌 최고 타율을 경신할 수 있었던 1970년 시즌 최종전에서 3안타를 때려낸 장훈은 5번째 타석에 들어서 1루쪽으로 기습번트 안타를 성공시키며 오시타 히로시가 1951년 세웠던 0.3831를 3모 넘어서는 0.3834로 기록을 경신할 수 있었다.[5] 덧붙이자면 블룸필드는 장훈에게 비법을 알려준 이후 종종 아침 댓바람부터 숙소를 찾아가 늘어지게 자고 있던 장훈을 깨워 "하리모토, 아침이나 같이 먹자. 물론 네가 쏘는 거임"이라며 장훈의 컨디션을 자주 흐트러 놓았다고.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짜증을 냈겠지만 블룸필드는 장훈에겐 은인이었던 지라 군말없이 따라 나섰다고 한다...[6][7]
- 현역시절 퇴장처분을 받은 적은 없지만, 자이언츠 시절에 사건에 휘말려 경찰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정차해 있던 요미우리 구단 버스가 경기 중 판정 문제를 이유로 히로시마의 팬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팬들과 시비가 붙어 "장훈에게 맞았다", "아니, 나는 때리지 않았다"라며 서로 옥신각신한 것이다. 특히, 자이언츠 시절의 사건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냥 받아들이기엔 도저히 견디기 힘든 지독한 야유를 받았던 것이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이 있었던 경기에 장훈의 어머니인 박순분 여사가 아들이 히로시마로 원정경기를 하러 오는 데 맞춰 직관을 왔었지만, 참고 넘기기 어려운 팬들의 야유에 감정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렸고, 경기를 다 못본 채 돌아갔다고 한다.
* 장훈이 현역 말기에 접어들던 1979년 11월, 장훈의 전기 영화 터질듯한 이 가슴을이 개봉되었다. 이상언이 감독했고 이동진(장훈 역), 하명중(장훈의 형 역), 김애경(장훈의 어머니 역) 등이 출연했으며 장훈 자신과 왕정치, 나가시마 시게오도 특별출연 했다.
- 장훈은 도에이 플라이어즈 소속일 때, 모기업인 도에이 영화사가 제작한 야쿠자 영화 몇 편에 카메오 출연한 적이 있다. 또한 히로시마가 고향인 그는 도에이가 만든 영화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의 주연 배우인 스가와라 분타에게 히로시마 사투리를 개인지도 해주었다고 한다.
-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한 1980년, 당시 감독이던 야마우치 카즈히로와 가네다 마사이치[8] 등 모든 평론가가 혹평한 오치아이 히로미츠(전 주니치 감독)의 특이한 타격폼(일명 신주타법)을 "훌륭하다, 이대로도 잘 때릴 수 있다" 라고 극찬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타격 3관왕을 차지하는 등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타자 반열에 올랐다.
- 같은 나이에 프로입문 동기로 일본 이외의 국적을 갖고 있으며, 요미우리 시절에는 함께 중심타선 "OH포" 를 형성한 왕정치와는 프로입문 당시부터 둘도 없는 친구지간이다. 1979년 시즌 초반 장훈이 중심성 망막염으로 일시적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고 데뷔 이래 최악의 성적을 남기자 요미우리에서는 장훈을 롯데로 방출하려 했는데, 이제껏 구단에 의견을 한 번도 제시한 적이 없는 왕정치가 시즌 종료 후 납회식 때 "하리모토(장훈)가 거인에서 3000안타를 치게 해 주십시오" 하며, 당시 오너 쇼리키 토오루에게 읍소했다. 쇼리키 구단주가 "오(왕정치) 자네 술 취했나?"라며 불쾌해 하자 장훈이 왕정치의 소매를 잡아끌며 만류했고, 장훈 스스로 "그동안 감사했다. 롯데로 가겠다"라고 선언하여 왕정치의 입장을 난처하지 않게 해 주었다. 결국 장훈은 롯데로 이적했지만 그날의 일 이후로 무슨 일이 있어도 왕정치를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왕정치가 오랜 세월의 침체를 극복하고[9] 감독으로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대망의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어냈을 때(1999년)에는, "지금까지 왕짱(왕정치의 애칭)을 바보 취급해 온 놈은 모조리 머리를 밀고 사과해라"라고 큰 소리를 쳤다.
- 터피 로즈가 55홈런을 치고 일본 한 시즌 홈런 기록을 갈아치우려 할 때, 왕정치 감독이 이끄는 다이에와의 경기에서 사실상 경원당한 것에 대해, "투수도 맞고 싶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중략) 그렇게 치고 싶었다면 스트라이크가 두 개 들어왔으니 그걸 쳤으면 됐을 거 아닌가."라고 했는데, 이 발언은 왕정치와 관계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 2014년 8월 10일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추사랑 에피소드에서 특별출연했다. 역도산의 예를 들어주면서 추성훈과 추사랑에게 격려를 해주었다. 사랑이에게는 자신의 싸인볼과 큰 곰인형을 선물했다.
- 부인 역시 재일교포이며 슬하에 2녀를 두고 있다. 장훈 옹은 야구선수가 결혼을 하면 전부 실력이 하락한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부인과 각방을 쓴다고 하고 은퇴 이후에도 동침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장훈 옹의 방에 종이 하나 있는데 그 종을 울리면 부인이 베개를 들고 동침을 하러 오며 딸들이 다른 방에 있으니 문을 잠근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부부간의 일에 대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2023년 5월 한일정상회담 당시 "(한국이) 언제까지 일본에 사과하라 돈 내라 반복해야 하나? 이제는 우리도 프라이드를 갖고 일본과 대등하게 손을 잡고 나가면 안 되는 것이냐?"라고 반문하며 "반일 소리 적당히 해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일본을 적으로 돌렸을 때 우리 재일교포는 너무나 괴로웠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윤석열에 대해서는 그가 한일관계의 눈을 녹여 주고 있어 감사하다며 "윤 상은 멋있는 구석이 있다. 한반도의 진짜 사나이"라고 평했다. 기시다 후미오가 '사과한다'는 표현까지는 안 쓰고 '가슴 아프다'라고까지만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라고 발언했다. #
3. 성격
재일 한국인으로서 차별을 많이 받아서인지 성격이 거칠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고교시절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싸움꾼으로도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형님은 제가 야구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야쿠자가 될 줄 아셨다"라고 말하기도. 그렇지만 자신은 그럴 근성이 없어서 프로야구 선수가 되지 못했다면 아마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덤프트럭 운전기사나 형을 따라 택시 기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장훈의 불같은 성격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일본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노무라 카츠야의 트래쉬 토크의 대응이 바로 그 예이다. 포수가 타석에 들어선 타자에게 "너, 새벽에 긴자에서 홈런 세 방 쳤다며?[10] 다리 후들거려서 타석에 설 수나 있냐?", "어젯밤 네 마누라 어떤 남자랑 술먹고 계시더라", "요새 모 술집 아가씨랑 새살림차렸다며?", "너 요새 선배들한테 인사 안 하고 다닌다며? 선배들이 널 단단히 벼르고 있더라" "어? 너 타격폼이 완전히 망가져 있네" 등의 음담패설, 욕설이나 주의력을 산만하게 만드는 말을 지껄이며 타자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것을 트래쉬 토크라 하는데[11] 노무라는 특히 음담패설이나 농담 따먹기나 주의력을 산만하게 하는 헛소리를 남발하는 수법을 쓴다고 한다.[12]
노무라는 트래쉬 토크 전술이 통하지 않았던 타자로 세 명을 꼽았는데, 그 세 명이 바로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그리고 장훈이었다고 한다. 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나가시마는 오히려 웃으면서 더 심한 음담패설로 맞받아 쳤으며, 장훈은 노무라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하지만 어느 날은 장훈도 노무라의 야유에 결국 참을 수 없었는지 일부러 크게 헛스윙을 하는 척 하면서 배트로 노무라의 뒤통수를 갈겨버렸고, 이때 된통 혼이 난 노무라는 그 후로 장훈의 신경을 긁는 짓을 그만두었다고.[13]
은퇴 후 정식 코치, 감독으로 일한 적이 없는데 한국 국적자인 그를 각 구단들이 지도자로 데려오기 꺼렸으리라는 추측도 있으나 사실 그는 몇몇 구단에서 코치, 감독 제의를 받았었다고 밝혔다[14].
2017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밝히길 일본에서 세 차례, 한국에서 한 차례 감독직 제안을 받았었다고 한다. # 롯데 신격호 회장이 "너 언제 일본 롯데 감독할 거냐"라고 혼내기까지 했다는 증언을 봐서 롯데 오리온즈가, 그것도 회장 본인이 나서서 감독직을 주려고 했던 것이 유력하다. 여담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내에게 절대로 감독하는 것은 말리라고 했다고 한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분명 죽을 거라며(!) 걱정했다고. 장훈 스스로도 감독보직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또한 나가시마, 오 같은 스타 출신도 감독 경력 초반부엔 자질 부족이라고 욕만 들어먹었던 것을[15] 생각하면 한국인인 자신이 지도자가 되었을때 일본인들의 더 심한 비난과 인격모독을 받으며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친지들도 격한 성격을 가진 그가 지도자에는 별로 맞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내세웠다고 한다. 게다가 이미 팔순을 넘긴 고령인지라 앞으로 지도자로 부임할 확률은 더욱 희박해질 듯 하니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은퇴 후 40여년 간 줄곧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며 방송에서의 입담이나 칼럼의 필력은 선수출신 평론가 중에서 으뜸이라는 평이다.
한국 프로야구의 초창기에 KBO 각 팀에 재일동포 선수들을 이어주는 등[16] 여러 공헌을 했지만, 한국 프로야구가 성장했던 1990년대에도 1980년대 수준으로 생각, 3군 수준의 퇴물을 소개해줘서 각 구단의 프런트들로부터 욕을 먹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 그가 "괜찮을 것" 이라고 소개해서 한국팀에 입단했던 여러 명의 재일교포 선수들은 거의 활약을 못하고 방출되었다.
프리미어12의 결과에 대해서는 일본이 오타니를 완투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며 고쿠보 히로키 감독의 안이함을 지적했고, 김인식 감독의 인내력을 칭찬했다.[17]
4. 오른손 장애
문서 상단의 영상 캡쳐 | 2006년 3월 5일. 도쿄돔에서 열린 WBC 아시아라운드 1, 2위전에 참석한 장훈의 오른손. |
오른손에 화상으로 인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사진을 보면 오른손의 엄지가 바깥쪽으로 휘어져있고, 새끼손가락과 넷째손가락이 붙어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 오른손을 누구에게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왼손으로 가리거나 뒷짐을 지고, 식사할때도 오른손은 항상 탁자 밑으로 숨긴다고 한다.[18] 손을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1959년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신인왕을 수상한 후 온 가족이 히로시마에 새로 지은 집에 모여 식사하던 중 장훈이 "이 오른손이 멀쩡했다면 성적이 좀 더 좋지 않았을까?"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어머니 박순분 여사가 "저 어린 것을 혼자 내버려 뒀다가 손을 다치게 만들었으니, 나도 참 나쁜 어미다"라며 펑펑 눈물을 흘렸고, 그 일을 계기로 장훈은 다시는 남에게 오른손을 보이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야구인 중 가장 존경하는 대 선배 카와카미 테츠하루에게만 유일하게 자신의 오른손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카와카미는 "엇" 하며 놀라더니 "그런 손으로 어떻게..."라면서 말문이 막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
토에이(東映)가 제작 발매하는 렌탈 전용의 영화.
[2]
이나가와카이 초대 회장 이나가와 세이죠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3]
백인천은 장훈을 '장이형'이라고 부른다.장형도 아니고 훈이 형도 아니고
[4]
1932년생 으로 선수 등록명은 블룸. 미국 마이너리그를 거쳐
킨테츠 버팔로즈(1960~1964),
난카이 호크스(1965~1966)에서 활동했고 1962, 1963년 2년 연속 퍼시픽리그 타격왕을 수상했다.
[5]
여기서도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애초에 4타수 3안타를 치면 기록을 경신하는 줄 알고 있던 장훈은 이날 경기에서 3타석만에 3안타를 치고 1루에서 만세를 불렀지만, 팀 선배인 부스지마 쇼이치가 달려와서 "계산을 잘못했다. 안타를 하나 더 쳐야한다" 라고 알려주는 바람에 김이 샌 장훈은 다음 타석에서 범타로 물러났지만 기어이 마지막 타석에서 기습번트를 성공시키면서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6]
다만 이와는 별개로, 위의 통산성적에서 보듯이 선수생활 동안
번트를 잘 대지 않았기에, 통산 번트는 고작 4개뿐이다.(2개 이상 댄 시즌도 없다.) 심지어 번트를 처음 댄 때가 프로 15년차인 1973년이니 말 다했다. 다만 통산 번트가 4개라는 건 희생번트가 4개라는 말이다(기습번트가 성공하면 기록상 내야안타가 되고 번트로는 기록되지 않는다). 장훈은 도에이 시절엔 팀의 주포였기에 희생번트를 거의 대지 않았고 요미우리에 가서도 감독의 희생번트 지시는 거의 안 받았다. 대신 기습번트는 많이 시도해서 성공율이 높았기에 1995년
한일 슈퍼게임 현장에서
전준호에게 기습번트 요령을 알려주면서 "나의 타격왕 7회의 비밀 중 하나는 기습번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타율 0.383을 기록한 1970년에는 21번 기습번트를 시도해서 20번 살아나가기도 했다.
[7]
장타력이 있는 호타준족의 선수가 기습번트까지 능하다면 상대는 미칠 노릇이다. 수비를 전진 배치 하면 장타를 노리고, 수비를 후위에 넣으면 기습번트를 대 버리기 편하기 때문이다. 장훈은 개인 성격은 불같았지만 타격에 있어서는 철저히 냉정하고, 상황에 따라 매우 실용적으로 배팅했던 선수 였기에 살아나가기 좋은 무기를 손에 넣기 위해 더 더욱 열심히 연습했을 지도.
[8]
한국명 김경홍. 일본으로 귀화. 롯데 감독을 역임했으며 일본 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400승 투수.
[9]
1990년대 중반 호크스는 비밀번호나 찍던 막장팀 중에 하나였다. 연패를 밥먹듯이 하던 그런 팀의 감독으로 고생한 오 사다하루에게 공개사과를 받아내려고 했으니...
[10]
밤동안 내내 섹스했냐며 까는 거다.
[11]
국내에서는
이만수와
진갑용도 현역 시절 특유의 입담으로 선후배, 동기 안 가리고 농락한 것으로 유명하다.
[12]
거친 말보다는 이렇게 쓸데없는 말로 정신 집중을 방해하는 것을 일본에서는 속삭임 전술(ささやき戦術)이라고도 한다. 가짜
데드볼 조작으로 악명 높았던
타츠카와 미츠오 또한 이런 속삭임 전술에 능했다고 한다.
[13]
노무라 본인은 책 「プロ野球重大事件 誰も知らない”あの真相”」(프로야구 중대사건 아무도 모르는 "그 진실")에서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며 "장훈에게 속삭임 전술을 걸면 장훈이 너무 섬세하게 배터 박스에서의 위치를 조절하는 바람에 시합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만뒀다"라고 말했다. 안 통했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14]
한때
빙그레 이글스 감독설도 있었지만 무산됐는데 공교롭게도 1986년 이 팀에서 뛴 장훈은 본인의 이름과 한자가 똑같았다. 대신 도에이 시절 동료인 이와시타를 타격코치로 추천했다.
[15]
나가시마는 감독 첫 시즌인 1975년 요미우리의 사상 첫 리그 꼴찌란 치욕을 당한 데다 그 뒤에도 세리그 우승 2번 빼곤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고, 절친 오도 교진 감독 기간에 세리그 우승 1번만 기록했다. 거기다 다이에 감독 초기의 리빌딩 시절엔 화난 팬에게 날계란 투척사건도 당했고.
[16]
장명부,
김일융,
이영구,
주동식,
김무종,
홍문종 등이 이 시기 모국 팀으로 입단한 재일교포 선수들이다. 이들은 당시 야구선수로서는 고령 축에 속하던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나이에 모국으로 왔지만 나이를 무색케 하는 실력으로 리그를 평정했다. 장명부는 전인미답의 기록인 시즌 30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고 김일융은 한국인 후배
김시진과 원투펀치를 이루며 1985년 삼성의 전후기 통합우승을 견인했으며 주동식과 김무종은 1983년 해태의 첫 우승을 이끌면서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홍문종은 1984년 시즌 타격왕을 할 뻔 했지만 당시 홍문종을 상대했던 삼성이 9타석 연속 고의사구를 시전하며 홍문종의 타격왕 등극을 저지한 바 있다.
[17]
고쿠보는 장훈의 요미우리 직속후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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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 출연하는 방송에서도 왼손을 오른손 위로 감싼다던가 오른손을 오므린 상태에서 손등만 보여주는 등 최대한 손바닥 쪽이 보이지 않게 가린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