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일본서기
1. 임나일본부설의 단서와 실마리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이 되는 쟁점은 다음과 같다. 이는 2010년대 전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집중적으로 쟁점이 오갔던 내용들이다. 한일 양국 사학계간에 주요 논쟁이 되는 항목들은 이렇다.- 왜의 정치적 통합시기 혹은 일부 일본 사학계에서 주장하는 통일시기
- 일본서기에 기록 되어있는 왜의 실체 (ex.지방호족이나 분국들의 구전)
- 왜왕 무(武)는 유랴쿠 천황인가?
- 가야와 일본의 관계
2. 한반도 관련 기사의 해석문
일본서기에는 한반도 관련 기사가 많은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4세기 이전에는 백제와 관련된 기사는 없고 죄다 신라와 가야 관련 기록이다. 제국주의 시절에 한일동족론을 주장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진무 덴노가 신라인이라는 등의 학설이 많았는데, 일례로 일본 건국 신화에서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인 스사노오가 먼저 도착한 곳은 신라이고, 니니기가 한반도를 거론한 점,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삼국사기에는 도일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있고, 일본서기에는 신라의 천일창, 가야왕자 쓰누가 아라시토의 기록도 있다.언어학적인 부문에서도 신라와 연관이 짙다는 학설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이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일본은 국가 형성 전부터 백제보다 신라나 가야와 관련이 많다. 애초에 한국의 ‘한’자는 일본어로 ‘카라’라고 하는데 이 ‘카라’는 말 그대로 가라 즉 가야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서기에서 신라, 가야에 집착하는 이유도 일견 납득할 수 있다. 사실 그다지 놀라운 사실도 아닌게 신라 초 일종의 건국 신화를 보면 왜국 출신인 호공(瓠公)이라는 인물도 나온다.[1] 즉,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구전이나 고고학적 증거가 아닌 기록으로 된 한일의 교류도 그 기원이 아주 오래 되었다.
특기할 점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면 한반도를 금은보화가 많은 나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서기 뿐만 아니라 고사기 등 도처에서 발견된다. 일례를 들면 신공황후기 246년의 기사를 보면 왜의 사신들에게 백제의 왕이 그들과 통교하길 원한다면서 보물창고를 보여주며 백제는 이렇게 금은보화가 많은데 왜왕에게 바치고 싶다는 등의 서술과 아마테라스의 동생 스사노오가 한향(韓鄕)은 금은보화가 많은 나라라는 식의 말을 한다.
<일본서기>
소잔오존(素戔嗚尊, 建速須佐之男命)[2]은 그 행상이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므로 신들이 그 벌로 많은 공물로 속죄하도록 하고 소잔오존을 고천원에서 쫓아내었다. 그래서 소잔오존은 그 아들인 오십맹신(五十猛神;이타케루노카미)을 데리고 신라국으로 내려와 증시무리(曾尸茂梨;소시모리)라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서 큰 소리로 “이 땅은 내가 있고 싶은 곳이 아니다.”라고 외쳐 말하며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항해하여 출운의 파천 상류에 있는 조상봉(鳥上峯;토리카미노타케)에 이르렀다. (중략)
애초에 고사기에는 진구황후는 천일창의 여식에게서 나온 모계 후손이라고 대놓고 나온다. 또 니니기가 큐슈에 강림하며 한반도를 보며 이 땅은 한반도를 향하며 아침해가 비치기 때문에 좋은 땅이라고 말한다. 이를 두고 일본학자들은 대놓고 한국(韓國)이라고 나오는데도 한국의 한자가 한반도를 가르키는 게 아니라 중국을 가르키는 거라고 곡필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일본은 건국 신화부터 한반도 특히 신라와 가야와 연관이 깊으며, 도래인이 일본이라는 국가가 형성 되는데 큰 축을 담당한 것임을 알수 있다.
此地者 向韓國 有真之道通笠紗之御前 又此地者 朝日之直刺國 夕日之日照國也 故 此地甚吉地也
이 땅은 한국(韓国, 고대 한국)을 향하며, 가사사(笠沙)의 곶까지 원래 있던 길이 있어서, 아침해가 잘 비치는 나라, 석양이 잘 비치는 나라이다. 그래서 이곳은 매우 좋은 땅이다."
<아마테라스의 손주
니니기 (ニニギ)가 큐슈에 강림하며 한 말>이 땅은 한국(韓国, 고대 한국)을 향하며, 가사사(笠沙)의 곶까지 원래 있던 길이 있어서, 아침해가 잘 비치는 나라, 석양이 잘 비치는 나라이다. 그래서 이곳은 매우 좋은 땅이다."
한반도 관련 기사가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은 유랴쿠 천황와 긴메이 덴노 치세기이다. 특히 유랴쿠 천황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일본이 통합되고, 큐슈 기반의 야마타이 국을 중심으로 지방 호족들이 연합체로 모이기 시작했고, 대외관계가 활발해지고 한반도에 용병을 파견하고, 마치 자신들이 유일한 고구려의 맞수이며, 백제 가야 신라 왜의 동맹에서 마치 자신들이 맹주인척 행세하며 '고구려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니깐 고구려 좀 치게 군사 좀 원조해주세요' 라고 중국의 황실에 한반도가 마치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언론플레이 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서기의 연대 조작인 이주갑인상이 사라지고 정상의 년도로 복원 된다. 이를 근거로 이주갑인상이란 년도 조작을 한 이유가 열도가 어느정도 통일된 뒤 한반도의 역사와 비교하니 너무 초라하게 느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서기에서 일본 국내를 다루는 기록은 이주갑인상의 해당 사항이 아니다. 오직 한반도 관련 기록 특히 백제의 기록과 비교 했을 때 오차가 생길뿐이다.[3][4]
이 이주갑인상은 신공황후의 집권기부터 시작해서 유라쿠 천황의 시대에서 마무리가 되는데 이 시기는 백제에겐 근초고왕부터 5세기 중반 비유왕이 죽고 개로왕의 치세기 까지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중흥기인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집권기에 의해 코너에 몰렸던 백제와 그 곤핍한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려고 노력했던 백제의 외교 기록등을 기반으로 이들 기록을 악용해 마치 자신들이 백제나 신라보다 우위에 있고 고구려가 백제에게 한 일을 마치 자신들이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끼쳐 전횡을 저지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백제신찬을 인용한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이 기사년 (429년)에 즉위 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이르면 429년은 비유왕이 즉위한 년도로, 개로왕은 455년에 즉위한다. 보통 당대에 작성된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충돌하면, 일본서기의 기록은 당대에 백제인에 의해 작성된 백제삼서의 기록을 인용했기 때문에 윤색을 걷어내면 꽤 디테일하고 어느면에선 삼국사기보다 더 사실에 부합되는 서술이 많지만, 이 기사만큼은 이주갑인상을 위해 비유왕의 치세기를 노골적으로 소거 했기 때문에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비유왕이 일본서기에 등장 조차 하지 않는 이유와 추론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본 학자 하마다 고사쿠는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비유왕 치세기에는 백제와 왜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다고 언급 했다. 그 이유는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대비하여 이 시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서로 연합하고 동맹을 강화했는데 이에 왜국이 크게 반발 하였다라는 설이 있다. 그도 그럴것이 딱 비유왕의 치세기에 (422~455년) 왜왕 제(濟)가 독자적인 외교로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백제와 한반도 남부 국가들의 군사권을 요구한 시점이 이 시기이다. 또 비유왕이 일본서기에서 종적을 감춘 다른 추론에는, 신공황후 치세기부터 시작된 이주갑인상이 5세기 중반이 되면서 정상 년도로 돌아가는데 이에 맞물려 불가피하게 사라졌다는 해석도 있다.
3. 한반도 관련 기사
서기 □□□년은 이주갑인상을 고려해서 120년을 더한 년도이다. ()안의 숫자는 일본서기에서 나오는 년도이며, ()가 없으면 이주갑인상이 발생한 기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한반도 관련 첫 기사는 일본의 건국신인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가 신라에 강림했다가, 이곳에서 살기 싫다면서 도해하는 기사가 나온다. 년도는 기록 되어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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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잔오존이 한향(韓鄕)의 금은때문에 배를 위한 나무를 만들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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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8년 가야왕자 쓰누가 아리시토의 귀화. 년도가 기록된 첫 한반도 관련 기사다.
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의 귀환을 청함/임나와 신라 갈등의 시작
BC 27년 천일창의 귀화[5]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7개의 물건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옴
서기 319년(199년) 신공황후의 몸에 신이 빙의 됨.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에 금은보화가 넘치므로 침공하여 그 물건을 바치라고 명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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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20년 (200년) 신라를 정벌하고자 신의 가르침을 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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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20년 (200년) 신라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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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20년 (200년) 신라를 정벌하느라 제사를 못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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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24년 고구려의 사신이와서 연회를 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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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25년 (205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 인질로 보내진 태자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을 다시 데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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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53년 백제에 사신을 파견함. 백제의 왕족이 무례하게 굶. 이에 사신이 백제의 왕을 책망하니 겁을먹은 백제왕이 그 왕족을 일본으로 압송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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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66년 (246년) 사마숙녜(斯摩宿禰)를 탁순국에 보냄. 탁순국에서 346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일본과 통교하고 싶다고 탁순국에게 당도하는 방법을 물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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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66년 (246년) 3월, 사마숙녜(斯摩宿禰)을 백제에게 파견함. 백제왕이 일본에 조공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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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67년 (247년) 백제와 신라가 나란히 조공함. 백제의 사신이 신라의 사신이 자신들의 공물을 가로쳤다고 왜왕에게 고발함.이에 진상조사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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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69년 (249년) 가야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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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72년 (252년) 백제가 칠지도를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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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85년 (265년), 침류왕이 죽자, 진사왕이 조카인 아신왕의 왕위를 찬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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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92년 (272년), 진사왕이 일본에게 무례하자, 사신을 보내 꾸짖자,백제인들이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고, 아신왕을 옹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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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96년 (276년), 고구려,백제,신라,임나인이 내조[6]함. 여러 한인(韓人)들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게 함.[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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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97년 (277년) 백제의 아신왕이 무례하자 헌남 지침 곡나 동한의 백제 땅을 빼앗음. 이에 아신왕은 왕자 전지왕을 파견하여 선왕의 우호를 닦도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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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03년 (283년), 백제가 봉의공녀를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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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03년 (283년), 백제 궁월군(弓月君)이[8][9] 일본에 귀화하고자 가야에서 머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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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04년 (284년), 백제가 아직기를 보내자 태자의 스승으로 삼음. 아직기가 왕인을 추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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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05년 (285년) 2월, 백제에서 왕인이 오자 태자의 스승으로 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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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05년 (285년), 아신왕이 죽자, 전지왕을 백제의 왕으로 임명하여 빼앗은 동한(東韓)의 땅을 주며 귀국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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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05년 (285년) 일본으로의 귀화를 희망하며 가야에 머무르는 궁월군[10][11]이 오지 않자, 왜왕은 신라가 억류하고 있다고 생각해 신라를 정예병으로 쳐서 데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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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14년, 1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의사를 구함.[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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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14년 (294년), 백제의 전지왕이 죽고[14] 구이신왕이 즉위함. 목라근자의 아들 왜의 신하 목만치가 왕모와 밀통하며 전횡을 저지르기에 송환 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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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14년 8월 신라에서 온 의사가 천황의 병을 고침[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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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26년 (306년) 봉공녀를 구하러 고구려를 거쳐 오나라로 감[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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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28년 (308년), 직지왕이 그의 누이 신제도원[17]을 왜국에 보내어 (왜왕을) 섬기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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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53년 인교 천황이 죽음. 신라가 조문을 와서 공물을 바침[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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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53년, 왜국의 대박뢰(大泊瀨)황자[19]가 신라의 조문 사신이 왜왕의 채녀와 정을 통하였다고 의심함. 그러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짐. 신라 사신이 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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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58년, 백제의 지전원이 밀통하여 화형 시켜 죽이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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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61년, 백제가 지전원이 화형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동생 부여곤지를 파견하여 왜왕을 섬기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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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63년, 길비상도신전협(吉備上道臣田狹)의 아내를 총애하여 신접협을 임나국사로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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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64년, 신라와 고구려의 갈등의 시작. 신라 주둔 고구려군을 신라인이 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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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64년 2월, 신라가 임나왕에게 임나일본부[21]을 파견해 구원해 달라고 요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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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64년 2월, 일본부의 군대가 고구려와 대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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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65년 3월, 왜왕이 신라를 정벌하고자 함. 신라는 고구려가 왜국에게 바치는 공물을 방해하고 백제를 공격함. 이에 신라의 고을을 공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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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65년 3월, 신라의 탁지를 평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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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65년 5월, 신라원정을 온 장군들끼리 반목함. 백제왕이 중재를 나서려고 했으나, 기대반숙미(紀大磐宿禰)에게 한자숙미(韓子宿禰)가 암살당함.[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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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67년, 백제에서 사람이 도망쳐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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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76년,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죽음. 고구려의 신하들이 백제를 멸망 시키자고 제언 했지만, 장수왕이 백제는 일본을 섬기는 나라이므로 함부로 멸망 시킬수 없다함[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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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77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멸망하자, 고마나리(웅진)을 문주왕게 할양하여 재건하도록 함. 사람들이 천황 덕분에 백제를 재건 했다며 기뻐함[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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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79년, 삼근왕이 죽음. 부여곤지의 아들 동성왕을 축자국 병사 5백명에게 호위하게 하여 송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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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79년, 축자국의 장군 안치신(安致臣)과 마사신(馬飼臣)이 고구려를 침.[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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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82년, 바다 건너 번국(속국)들이 사신을 보냄[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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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83년, 바다 건너 번의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풂. 사신들에게 물품을 차등있게 나눠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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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87년, 임나에 있는 기생반숙녜(紀生磐宿禰)가 고구려와 내통하고 백제와 맞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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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93년 9월, 고구려에게 사신을 파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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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93년, 고구려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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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12년, 백제가 임나4현을 요구하자, 할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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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13년 6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기문과 대사를 대가야에게 빼앗겼다고 알림 그리고 다시 돌려달라고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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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13년 11월, 기문과 대사를 백제에게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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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31년 탁순국이 왜왕에게 기문의 땅을 요구 하였으나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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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0년 2월, 백제의 기지부(己知部)가 귀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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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0년 8월,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의 사신이 물품을 바침. 도래계의 호적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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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0년 9월 5일 신라 정벌의 계획을 신하들과 상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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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1년 4월, 안라 임나 가라 다라가 백제에 모여 임나 재건에 대해 토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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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1년 7월, 안라일본부가 신라와 내통하는 것에 대해 성왕이 분노하여 꾸짖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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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1년 7월, 성왕이 임나를 꾸짖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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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2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임나의 재건을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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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3년 4월, 작년에 파견된 백제 사신이 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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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3년 9월, 백제가 보물과 노예 2명을 바침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050_0020_0010&setId=132689&position=5
서기 543년 11월, 왜왕이 백제에게 백제의 임나 주둔 성주와 군령을 추방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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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3년 12월, 성왕이 왜왕의 임나를 재건하라는 조칙을 받들고, 임나의 사신들을 소집함. 신하가 임나일본부의 인사들을 추방하기 위해 왜왕에게 국서를 보내라고 제언함. 성왕이 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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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3년 12월, 성왕이 임나의 집사와 일본부를 소환 명령했지만 거부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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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4년 1월, 성왕이 재차 소집함. 그러나 또 거부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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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4년 2월, 백제가 임나와 일본부에 임나의 정물르 의논할 것을 종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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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4년 2월, 일본부가 이에 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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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4년 2월, 백제가 하내직을 꾸짖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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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4년 3월, 백제가 임나일본부 요인들을 본국 송환을 요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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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4년 3월, 탁국이 망한 이유를 들며 백제가 마도등의 송환을 요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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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4년 3월, 왜왕의 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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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4년 10월, 백제의 사신이 돌아감.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060_0040_0010&setId=132753&position=12
서기 544년 11월 , 백제에 안라 가라 다라 일본부에서 사람을 보내어 임나 부흥에 대해 토론함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060_0050_0010&setId=132753&position=10
서기 545년 3월, 백제에 사신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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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5년 5월, 백제가 사신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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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5년 9월, 백제가 임나에 사신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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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5년 9월, 백제가 장육불상을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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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5년 11월, 백제에 보냈던 사신이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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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6년 고구려에서 (545년 12월에) 대란이 일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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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6년 1월, 작년에 왔던 백제 사신이 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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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6년 6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조를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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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7년 4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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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8년 1월, 왜왕이 구원병 파견을 허락함. 사신을 돌려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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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8년 4월, 백제가 재차 다른 사신을 파견하여 임나일본부가 고구려와 내통하여 백제를 치려고 하는 계획을 알림. 일본부의 지원군은 필요없다고 보류를 청함. 진상조사 요구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100_0020_0010&setId=133009&position=9
서기 548년 6월, 백제에 조를 내려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해 임나와 협력하여 잘 막아내라고 당부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100_0030_0010&setId=133009&position=1
서기 548년 7월 , 백제 사신이 돌아감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100_0040_0010&setId=133009&position=7
서기 548년 10월, 백제에 인부들을 파견하여 고구려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성을 축조하는 것을 도움.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100_0050_0010&setId=133009&position=3
서기 549년 6월, 백제사신이 돌아감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110_0010_0010&setId=133073&position=3
서기 550년 2월, 백제에 사신을 보내,마무(馬武)를 본국으로 보내라고 함. 백제에 화살을 하사하여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게 함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120_0010_0010&setId=133139&position=4
서기 550년 4월, 백제에 있던 사신이 돌아와 성왕의 뜻을 전함.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120_0020_0010&setId=133139&position=6
서기 550년 4월, 백제가 사신을 파견함. 고구려의 포로 10명을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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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51년, 성왕이 고구려의 한성을 점령하고 평양을 침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130_0020_0010&setId=133204&position=4
서기 551년 3월, 백제가 보리 씨앗을 바침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130_0010_0010&setId=133204&position=2
서기 552년 5월 8일, 고구려가 신라와 화친을 맺자, 원병을 요청함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140_0020_0010&setId=133204&position=0
서기 552년,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포기함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140_0040_0010&setId=133268&position=3
서기 552년 10월, 백제가 불법을 전함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140_0030_0010&setId=133268&position=5
서기 562년 8월, 군사 수만명을 파병하여 고구려를 침. 고구려왕 (평원왕)은 담을 넘어 도망감 (...) [27]
http://contents.nahf.or.kr/search/itemResult.do?levelId=ns.k_0032_0220_0040_0010&setId=133139&position=0
3.1. 무(武)=웅략천황?
왜왕 무(武)가 유랴쿠 천황이라는 학설이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일본서기에서 보인 유랴쿠 천황의 행보는 왜왕 무(武)가 송나라에 보낸 서신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그가 478년 중국 황실에 주장하며 보낸 국서는 이렇다.
順帝昇明二年, 遣使上表曰: 「封國偏遠, 作藩于 外, 自昔祖禰, 躬擐 甲冑, 跋涉山川, 不遑寧處. 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 王道融泰, 廓土遐畿, 累葉朝宗, 不愆于歲. 臣雖下愚, 忝胤先緒, 驅率所統, 歸崇天極, 道逕百濟, 裝治船舫, 而句驪無道, 圖欲見吞, 掠抄邊隸[28],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 或通或不. 臣亡考濟實忿寇讎,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偃息未捷. 至今欲練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效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摧此强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假開府儀同三司, 其餘咸各假授, 以勸忠節.」 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순제 승명 2년(478)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봉해진 나라가 먼 곳에 치우쳐 있으며, 바깥에 번국을 이루고 있는데, 과거의 조상[29][30]으로부터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산천을 누비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동으로는 모인(毛人) 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중 이 (衆夷) 66국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해북(海北) 95국을 평정하니, 왕도는 화락하고 편안하며, 땅을 넓히고 왕기를 아득히 크게 하였으며, 여러 대에 걸쳐 조종(朝宗)하여, 해마다 어긋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이 비록 아주 어리석으나 조상의 뒤를 이어 다스리는 곳을 이끌고 중국의 조정을 존중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31]의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비록 길을 나서지만 혹은 통하고 혹은 통하지 못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실로 원수가 천로(天路)를 막는 것에 분노하니, 활을 쏘는 병사 100만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아버지와 형을 잃으니, 수성(垂成)의 공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마지막 한 삼태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쉬고 있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32] 지금에 이르러 갑옷과 무기를 잘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니, 의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문무로 공을 이루어,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또한 눈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세상을 뒤덮는 덕으로써 이 강적을 무찔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가수(假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적당한 관작을)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하여 무를 사지절,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순제 승명 2년(478)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봉해진 나라가 먼 곳에 치우쳐 있으며, 바깥에 번국을 이루고 있는데, 과거의 조상[29][30]으로부터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산천을 누비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동으로는 모인(毛人) 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중 이 (衆夷) 66국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해북(海北) 95국을 평정하니, 왕도는 화락하고 편안하며, 땅을 넓히고 왕기를 아득히 크게 하였으며, 여러 대에 걸쳐 조종(朝宗)하여, 해마다 어긋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이 비록 아주 어리석으나 조상의 뒤를 이어 다스리는 곳을 이끌고 중국의 조정을 존중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31]의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비록 길을 나서지만 혹은 통하고 혹은 통하지 못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실로 원수가 천로(天路)를 막는 것에 분노하니, 활을 쏘는 병사 100만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아버지와 형을 잃으니, 수성(垂成)의 공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마지막 한 삼태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쉬고 있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32] 지금에 이르러 갑옷과 무기를 잘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니, 의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문무로 공을 이루어,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또한 눈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세상을 뒤덮는 덕으로써 이 강적을 무찔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가수(假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적당한 관작을)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하여 무를 사지절,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노중국 교수는 조미(祖禰)의 용례를 주목하며, 과거 중국에서 사용된 뜻은 이미 돌아가신 부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갔는데, 일본측은 조미(祖禰)는 그냥 조상을 뜻하는 것이라며 본문에는 부왕을 뜻할 경우 제(濟)라고 명시 했다고 맞받아 쳤다. 이와 같은 논쟁은 임나일본부설과도 깊게 연관이 되는데, 노중국 교수의 견해는 상대적으로 왜왕 무(武)의 2-3代[33] 이전에 큐슈 열도와 주변이 통일 혹은 정치적 통합이나 연합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왜왕 상표문에서 그가 주장한 한반도의 군사권을 진실이라고 수용하기 어렵고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온 왜군의 실체를 축소하고 또 정규군이 아닌, 지방 호족이나 지방국가에서 파병한 용병 수준이나 해적 수준으로 보는 것이다. 또 한반도 남부를 침략 했다는 왜군들이 경영하지도 못했고 또 그럴 능력도 없고 주체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큐슈 일대도 통일 하지 못한 국력으로 어떻게 바다를 건너 정복 국가를 건설 하겠는가. 이것은 중국인 고구려사 연구자 왕건군도 동의하는 학설로, 그는 광개토대왕릉비에 등장하는 왜구의 실체를 북큐슈를 기반으로 한 해적 집단으로 봤다. 조선족 연구자 박진석 (朴眞奭) 또한 조미(祖禰)을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해석했다. 반대로 일본 사학자들 입장에선 조미(祖禰)을 조상으로 해석해 적어도 수대 전에 통일을 이룩하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한반도에서 활동 했다는 왜군과 그들의 영향력을 더 부풀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학회에 참가한 일본 학자 이시이 마사토시, 하마다 고사쿠 등은 왜의 상표문을 토대로 그 시기 이전에 중앙집권을 이룩하고 '통일'을 이룩 했다고 주장했지만, 최근 고고학 발굴과 연구로 힘을 얻는 중론은 5세기에 일본은 통일을 하지 못했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다만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 야마타이 왕국을 중심으로 다른 부족국가들이 따르는 형태를 완성 했다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선술 했듯이 송나라에 보낸 왜왕 무(武)의 국서에는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으며 국경을 맞대고 있어 자칫보면 '이게 뭔가' 싶긴 하지만 일본서기에 비슷한 시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긴 하다. 이 비슷한 시기 왜왕 무(武)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인물이 일본서기에 있는데, 이것을 두고 유랴쿠 천황과 무(武)는 동일인물이라는 추정이 있다. 아래는 일본서기의 내용들이다.
<일본서기 웅략 8년 (464년 2월)>
於是, 新羅王, 夜聞高麗軍四面歌儛, 知賊盡入新羅地. 乃使人於任那王曰, 高麗王征伐我國. 當此之時, 若綴旒然. 國之危殆, 過於累卵. 命之脩短, 太所不計. 伏請救於日本府行軍元帥等.
이에 신라왕이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을 듣고 적이 모두 신라 땅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이에 임나왕(任那王)에게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니 흔들리는 깃발과 같이 불안합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은 것보다 더하고 목숨의 길고 짧음을 심히 헤아릴 수 없는 바입니다. 엎드려 일본부(日本府)의 행군원수(行軍元帥) 등의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신라왕이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을 듣고 적이 모두 신라 땅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이에 임나왕(任那王)에게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니 흔들리는 깃발과 같이 불안합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은 것보다 더하고 목숨의 길고 짧음을 심히 헤아릴 수 없는 바입니다. 엎드려 일본부(日本府)의 행군원수(行軍元帥) 등의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 웅략 8년 (464년 2월)>
由是, 任那王勸膳臣斑鳩[斑鳩, 此云伊柯屢俄.]吉備臣小梨難波吉士赤目子, 往救新羅. 膳臣等, 未至營止. 高麗諸將, 未與膳臣等相戰皆怖. 膳臣等乃自力勞軍. 令軍中, 促爲攻具, 急進攻之. 與高麗相守十餘日. 乃夜鑿險, 爲地道, 悉過輜重, 設奇兵. 會明, 高麗謂膳臣等爲遁也. 悉軍來追. 乃縱奇兵, 步騎夾攻, 大破之. 二國之怨, 自此而生[言二國者, 高麗新羅也.]. 膳臣等謂新羅曰, 汝以至弱, 當至强. 官軍不救, 必爲所乘. 將成人地, 殆於此役. 自今以後, 豈背天朝也.
이로 인해 임나왕이 선신반구(膳臣斑鳩;카시하데노오미이카루가), 길비신소리(吉備臣小梨;키비노오미워나시), 난파길사적목자(難波吉士赤目子;나니하노키시아카메코)에게 신라를 구원하도록 권하였다. 선신(膳臣;카시하데노오미) 등은 군영을 설치하고 머무르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은 선신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하였다. 선신 등은 직접 힘써 군대를 위로하고 나서 군사들에게 빨리 공격할 준비를 시켜 급히 진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대치한 지 10여 일이 지나자, 밤에 험한 곳을 파서 땅굴을 만들어 군대의 무기와 식량을 모두 운반하고 매복병을 배치하였다. 새벽에 고구려는 선신 등이 달아났다고 생각하여 병력을 모두 이끌고 추격해왔다. 그러자 매복병을 풀고,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두 나라는 고구려와 신라를 말한다.]. 선신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지극히 약한데도 지극히 강한 나라와 대적하였다. 관군(官軍)이 구하지 않았으면 반드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하마터면 나라를 빼앗길 뻔하였다. 지금부터는 어찌 천조(天朝)를 배반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로 인해 임나왕이 선신반구(膳臣斑鳩;카시하데노오미이카루가), 길비신소리(吉備臣小梨;키비노오미워나시), 난파길사적목자(難波吉士赤目子;나니하노키시아카메코)에게 신라를 구원하도록 권하였다. 선신(膳臣;카시하데노오미) 등은 군영을 설치하고 머무르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은 선신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하였다. 선신 등은 직접 힘써 군대를 위로하고 나서 군사들에게 빨리 공격할 준비를 시켜 급히 진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대치한 지 10여 일이 지나자, 밤에 험한 곳을 파서 땅굴을 만들어 군대의 무기와 식량을 모두 운반하고 매복병을 배치하였다. 새벽에 고구려는 선신 등이 달아났다고 생각하여 병력을 모두 이끌고 추격해왔다. 그러자 매복병을 풀고,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두 나라는 고구려와 신라를 말한다.]. 선신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지극히 약한데도 지극히 강한 나라와 대적하였다. 관군(官軍)이 구하지 않았으면 반드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하마터면 나라를 빼앗길 뻔하였다. 지금부터는 어찌 천조(天朝)를 배반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고국양왕 치세 이후로 신라는 고구려에게 복종하였는데, 신라에 주둔하던 고구려 군인이 피살 되는 사건을 계기로 두 국가 사이의 관계는 틀어지고 마침내 전쟁까지 하였다. 이에 신라 왕은 임나에 사신을 보내 일본부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464년에는 고구려를 패퇴시켰다고 나온다. 이듬해 465년 3월 기사에서는 마치 고구려가 왜국에게 공물을 바치는데, 신라가 이를 방해하기 때문에 정벌에 나섰다. 이후에는 신라와 전쟁 중에 오호토모노키미라는 일본 장수가 전사하고 패퇴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마립간 5년 5월과 6년 2월 자로 기록된 것과 동일한 사건을 묘사했다고 추정한다. 5월에는 왜군 장수들간 내분 때문에 기대반숙녜(紀大磐宿禰;키노오히하노스쿠네)가 한자숙녜(韓子宿禰)와 반목하여 한자숙녜(韓子宿禰)[34]
<삼국사기 462년 5월>
五年, 夏五月, 倭人襲破活開城, 虜人一千而去.
5년(462) 여름 5월에 왜인(倭人)이 활개성(活開城)을 습격해 깨뜨리고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5년(462) 여름 5월에 왜인(倭人)이 활개성(活開城)을 습격해 깨뜨리고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삼국사기 463년 2월>
六年, 春二月, 倭人侵欿校勘 良城, 不克而去. 王命伐智·德智, 領兵伏候於路, 要擊大敗之. 王以倭人屢侵疆埸, 縁邊築二城.
6년(463) 봄 2월에 왜인(倭人)이 삽량성(歃良城)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벌지(伐智)와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중도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다. 왕은 왜인들이 자주 영토를 침입하였으므로 변경에 두 성을 쌓았다.
6년(463) 봄 2월에 왜인(倭人)이 삽량성(歃良城)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벌지(伐智)와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중도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다. 왕은 왜인들이 자주 영토를 침입하였으므로 변경에 두 성을 쌓았다.
또 479년의 기록에는,
<일본서기 웅략 23년 (479년)>
是歲, 百濟調賦, 益於常例. 筑紫安致臣馬飼臣等, 率船師以擊高麗.
이 해에 백제가 바친 조부(調賦)가 평소보다 많았다. 축자의 안치신(安致臣;아치노오미)과 마사신(馬飼臣;우마카히노오미)등이 선사(船師)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
이 해에 백제가 바친 조부(調賦)가 평소보다 많았다. 축자의 안치신(安致臣;아치노오미)과 마사신(馬飼臣;우마카히노오미)등이 선사(船師)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쳤다.
라고 나온다. 바로 앞의 기사에서는 (479년 4월) 개로왕이 죽고 말다왕( 동성왕)을 일본에서 백제로 송환 시키며, 축자국 군인 500명을 함께 보내 호위하게 하였다는데, 이때 파견된 장군이 아치노오미와 우마카히노오미라는 학설이 있다.
재밌는 점은 비슷한 시기(472년)에 백제의 개로왕 또한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북위에 보내, 고구려 장수왕은 무도하고 포악하기 그지없어 고구려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다. 사실 그들은 남조와 내통하고 있으며 북조를 능멸하고 있으니, 군사를 일으켜 쳐달라. 또 북위 사신이 백제로 오던 중에 고구려군에게 살해 당했다며, 시신을 수습하고 관복과 기물을 거두어, 북위에 증거라고 내밀어 보였으나, 북위의 반응은 시큰둥 했다. 위서(魏書) 백제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내용을 볼 수 있다. 내용도 상당히 유사하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犲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涼風微應. 伏惟皇帝陛下恊校勘 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驤將軍·帯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㑮校勘 , 遣進萬一之誠. 兾校勘 神祗垂感, 皇靈洪覆, 克逹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又云, “臣與髙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軽廢鄰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湏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三十餘載, 財殫力竭, 轉自孱踧. 若天慈曲矝校勘 , 逺及無外, 速遣一将, 来救臣國. 當奉送鄙校勘 女, 執箒校勘 後宫, 并遣子弟, 牧圉外厩, 尺壊匹夫, 不敢自有.”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之期, 假手之秋也. 且馬校勘 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懐首丘之心, 天威一舉,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効畢力, 當率所綂, 承風響應. 且髙勾麗不義, 逆詐非一, 外慕隗囂藩卑之辝校勘 , 内懐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蠕蠕, 共相脣鹵校勘 ,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甞稱仁, 不捨塗詈. 㳙流之水, 冝早壅塞, 今若不取, 将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并得衣·噐·鞍·勒, 視之非髙勾麗之物. 後聞, 乃是王人来䧏臣國, 長虵校勘 隔路, 以沉校勘 于海. 雖未委當, 深懷憤恚. 昔宋戮申舟, 楚莊徒跣, 鷂撮放鳩, 信陵不食. 克敵立名, 羙校勘 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况陛下合氣天地, 勢傾山海, 豈令小竪跨塞天達.校勘 今上所得鞍, 一以實驗.” 顕祖以其僻逺冒險朝獻, 禮遇尤厚, 遣使者邵安, 與其使俱還. 詔曰, “得表聞之, 無恙其校勘 善.校勘 卿在東隅, 處五服之外, 不逺山海, 歸誠魏闕, 欣嘉至意, 用戢于懐. 朕承萬世之業, 君臨四海, 統御羣生, 今宇内清一, 八表歸義, 襁負而至者, 不可稱數. 風俗之和, 士馬之盛, 皆餘禮等親所聞見. 卿與髙句麗不穆, 屢致凌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讎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逹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校勘 舊乗,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以具别旨.” 又詔曰, “知髙句麗阻疆, 侵軼卿上校勘, 修先君之舊㤪, 弃息民之大徳. 兵交累載, 難結荒邉. 使兼申胥之誠, 國有楚·越之急. 乃應展義扶微, 乗機電舉. 但以髙句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雖有自昔之釁, 於國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㑹, 理亦未周. 故往年遣禮䓁至平壤, 欲驗其由狀. 然髙句麗奏請頻煩, 辭理俱詣, 行人不能抑其請, 司法無以成其責, 故聽其所啓, 詔禮等還. 若今復違旨, 則過咎校勘 益露, 後雖自陳, 無所逃罪, 然後興師討之, 於義爲得. 九夷之國, 丗居海外, 道暢則奉藩, 恵戢則保境. 故羈縻著於前典, 楛貢曠於歳時. 卿備陳彊弱之形, 具列徃代之迹, 俗殊事異, 擬况乖衷. 洪規大略, 其致猶在. 今中夏平一, 宇内無虞. 每欲陵威東極, 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逺服. 良由髙句麗即叙, 未及卜征. 今若不從詔旨, 則卿之來謀, 載恊校勘 朕意, 元戎啓行, 將不云逺. 便可䂊率同興, 具以待事, 時遣報使, 速究彼情. 師舉之日, 卿爲郷導之首, 大捷之後, 又受元㓛之賞, 不亦善乎.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逹,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别.” 校勘 又詔璉護送安等. 安等至髙句麗, 璉稱昔與餘慶有讎, 不令東過, 安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後使安等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襃其誠節. 安等至海濵, 遇風飄蕩, 竟不逹而還. 王以麗人屢犯邊鄙, 上表乞師於魏, 不從. 王怨之, 遂絶朝貢.
18년,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藩屛)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서늘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하는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제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내고자 하옵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저의 뜻을 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표문에서 또한 말했다.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 출신이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쇠(釗)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수(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 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쇠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馮氏) 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사람들이 고구려로 도망해 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戰禍)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렇게 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표문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연(璉)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馮族)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 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겉으로는 외효(隈囂)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화란과 행동을 꿈꾸면서, 남쪽으로는 유씨(劉氏)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丹水)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苗蠻)에 벌을 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의복,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송(宋)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나라 장왕(莊王)이 맨발로 뛰어 나갔고,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를 모으고,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와 같은 애숭이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합니까? 이제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현조(顯祖)가 백제의 사신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 하여 융숭하게 예우하고, 사신 소안(邵安)으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이때 조칙을 내려 말했다. “글을 받고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동쪽 한 구석, 오복(五服)의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리 여기지 않고 위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억해 두리라. 내가 만대에 누릴 위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이제 나라는 깨끗이 통일되고 8방에서 귀순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군사는 여례 등이 직접 듣고 보았다. 그대는 고구려와 불화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지만 만일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원수에 대하여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그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대가 보낸 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니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의심되는 일을 사실로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별지에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이 조서에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도다. 즉, 고구려는 국토의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대의 국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 임금의 오랜 원한을 갚으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큰 덕을 버린 것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니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은 신포서(申包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초(楚), 월(越)과 같이 위급하게 되었구나. 이제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선대로부터 번방의 신하로 자처하며 오랫동안 조공을 바쳐왔다. 그들 스스로는 비록 이전부터 잘못이 있었으나, 나에게는 명령을 위반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그들을 곧 토벌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사리를 검토해 보아도 토벌의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 등을 평양에 보내 고구려의 상황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여러 번 주청하고 그 말이 사리에 모두 맞으니 우리 사신은 그들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고, 법관은 그들에게 죄명을 줄 만하지 못했던 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 주고 예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만약 고구려가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그들의 과오가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모든 오랑캐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중단되면 자기의 영토를 지켜 왔다. 따라서 중국과 예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의 법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호시(楛矢)를 바치는 일은 세시에 그쳤다. 그대가 강약에 대한 형세를 말하였으며 지난 시대의 사실들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중국은 통일 평정되어 나라 안에 근심이 없다. 이에 따라 매번 동쪽 끝까지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가 그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미처 토벌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나의 조칙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큰 군사가 토벌의 길을 떠나는 것도 장차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대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며, 때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을 즉시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성의는 잘 알겠도다. 이제 별지와 같이 내가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라.” 또한 고구려 왕 연(璉)에게 조서를 보내 안(安) 등을 백제로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이 예전에 여경(餘慶)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 하여,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안 등이 모두 돌아가니, 위나라에서는 곧 고구려 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안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를 주어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자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위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위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18년,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藩屛)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서늘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하는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제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내고자 하옵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저의 뜻을 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표문에서 또한 말했다.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 출신이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쇠(釗)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수(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 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쇠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馮氏) 의 운수가 다하여, 남은 사람들이 고구려로 도망해 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戰禍)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렇게 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표문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연(璉)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馮族)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 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겉으로는 외효(隈囂)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화란과 행동을 꿈꾸면서, 남쪽으로는 유씨(劉氏)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丹水)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苗蠻)에 벌을 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의복,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송(宋)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나라 장왕(莊王)이 맨발로 뛰어 나갔고,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를 모으고,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와 같은 애숭이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합니까? 이제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현조(顯祖)가 백제의 사신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 하여 융숭하게 예우하고, 사신 소안(邵安)으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이때 조칙을 내려 말했다. “글을 받고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동쪽 한 구석, 오복(五服)의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리 여기지 않고 위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억해 두리라. 내가 만대에 누릴 위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이제 나라는 깨끗이 통일되고 8방에서 귀순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군사는 여례 등이 직접 듣고 보았다. 그대는 고구려와 불화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지만 만일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원수에 대하여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그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대가 보낸 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니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의심되는 일을 사실로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별지에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이 조서에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도다. 즉, 고구려는 국토의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대의 국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 임금의 오랜 원한을 갚으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큰 덕을 버린 것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니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은 신포서(申包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초(楚), 월(越)과 같이 위급하게 되었구나. 이제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선대로부터 번방의 신하로 자처하며 오랫동안 조공을 바쳐왔다. 그들 스스로는 비록 이전부터 잘못이 있었으나, 나에게는 명령을 위반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그들을 곧 토벌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사리를 검토해 보아도 토벌의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 등을 평양에 보내 고구려의 상황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여러 번 주청하고 그 말이 사리에 모두 맞으니 우리 사신은 그들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고, 법관은 그들에게 죄명을 줄 만하지 못했던 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 주고 예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만약 고구려가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그들의 과오가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모든 오랑캐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중단되면 자기의 영토를 지켜 왔다. 따라서 중국과 예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의 법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호시(楛矢)를 바치는 일은 세시에 그쳤다. 그대가 강약에 대한 형세를 말하였으며 지난 시대의 사실들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중국은 통일 평정되어 나라 안에 근심이 없다. 이에 따라 매번 동쪽 끝까지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가 그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미처 토벌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나의 조칙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큰 군사가 토벌의 길을 떠나는 것도 장차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대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며, 때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을 즉시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성의는 잘 알겠도다. 이제 별지와 같이 내가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라.” 또한 고구려 왕 연(璉)에게 조서를 보내 안(安) 등을 백제로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이 예전에 여경(餘慶)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 하여,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안 등이 모두 돌아가니, 위나라에서는 곧 고구려 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안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를 주어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자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위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위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요약하면 고구려 장수왕은 무도하고 포악하기 그지없어 고구려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다.[35] 사실은 그들은 남조[36]와 내통하고 있으며 북조를 능멸하고 있으니, 군사를 일으켜 쳐달라. 또 북위 사신이 백제로 오던 중에 고구려군에게 살해 당했다며, 시신을 수습하고 관복과 기물을 거두어, 북위에 증거라고 내밀어 보였으나, 북위의 반응은 시큰둥 했다. 위서(魏書) 백제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내용을 볼 수 있다.
노중국 교수는 개로왕이 보낸 서신과 왜왕 무(武)가 보낸 서신을 작성한 식자층이 같은 집단으로,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전사하고 망명간 이들에 의해 비슷한 내용의 서신이 써졌을거라고 추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서신의 내용은 수많은 중국의 고전을 인용하고 있어서, 당대 일본에서 수용되고 있는 유교의 수준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문장이라고 말했다. 여담으로 백제 8성 중 목씨가 이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한다. 목씨는 개로왕이 아차산에 끌려가 참수 당할 때 문주왕을 피신 시키고 도왜하여 지원군을 요청한 집단으로 추정한다.[37]
두 서신이 다른 점은 개로왕은 북위에 서신을 보냈고, 왜왕은 남조인 송에 상표문을 보냈으며, 연도도 6년 차이가 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서두에는 자신들의 선조의 공업에 대해 중국 고전을 인용하며 언급하고 있으며 그 후에는 고구려가 간악한 무리이며 자신들이 천자를 섬기는데 있어서 방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왜왕 무(武)는 처음으로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로 임명된 제(濟)의 손자이며, 본인 스스로도 중국 황실로부터 같은 관작을 받은 바 있다.
이를 두고도 한일 양국사학자들이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토론한 적이 있는데, 일본에서는 일단 실효성 없는 직위라고 인정하는 게 중론이지만,
하마다 고사쿠 : 아 그렇습니까? 그것과 아울러 변예(邊隷)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건데요. 왜왕 무는 "사지절 왜백제 .."이라, 사지절 안에서 백제를 의식하여 넣고 있습니다. 사지절을 푸는 범위로서. 그러면 이 상표문 중에서 "길을 백제에게 빌려서 중국 남송에 다녔는데, 구려(고구려)가 무도하여 그것을 삼키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변예(邊隷)를 뺏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죽이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역시 왜 안에, 왜 세계 안에, 왜 뿐만이 아니라 백제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변예(邊隷)라는 것은 백제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노중국: 예, 그러면 거꾸로 뒤집어서. 하마다 선생님! 왜왕 흥(興)이 '新嗣邊業' 할 때 邊는 왜입니까 백제입니까? 새로이 邊隷을 이었다 했을 때 邊은 백제인가 왜인가 하는 문제 입니다.
하마다 고사쿠: 예 이것 말입니다, 왜 입니다. 변이 왜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의 전매특허가 아닙니다. 어디에도 해당되는
노중국 : 상표문 안에서 이야기 할 때는, 邊隷의 邊은 왜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상표문에 있어서는 왜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한 얘기가 되는데 邊隷을 백제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이 상표문 어디서 찾을 수 있냐는 거지요. 상표문에는 변경백제(邊逕百濟)에서 볼때 상표문에는 백제는 백제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시이 마사토시: 그래서 저 말입니다. 아까 하마다 씨도 관련된 말씀을 하셨는데, 아까부터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인데요, 나누어 드린 사료의 2396페이지, 상표문 입니다. 그 왼쪽에서 1,2,3,4,5 여섯째 줄의 아래쪽 입니다. 아까 하마다 선생님이 읽으신 부분인데요, 길(道)의 아래 글자는 아마 '지나서(徑)'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길은 백제를 지나서 船舫을 장치하였다. 그러나 구려(고구려)가 무도해서 꾀어서 견탄(見吞) 하려고 하여 邊隸을 초략했다"고 써 있습니다 '견탄'이란 것은 보통 병합인가요, 병합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럴 경우 노 선생님은 무엇을 견탄하려고 했다고 해석하셨나요. 왜인가요, 백제인가요.
노중국 : 이것 자체만 가지고는 왜냐 백제냐 단정 짓기는 어려운데요. 여기에서 상표문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왜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하고 왜하고의 관계에 의해서 圖欲見은 해석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상황에서 봤을 때, 바로 그 밑에 抄邊邊隷가 나오거든요. 바로 그 밑에 邊隷을 抄邊했다. 이때의 邊隷은 백제가 아니고 邊隷을 抄邊했기 때문에 송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어떤 때는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못가기도 하고 막혀 버렸다는 거죠. 그렇게 보면 이때의 邊隷나 견탄은 기본적으로 왜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이시이 마사토시: 애매한 답변이라서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견탄하려고 했다, 그 대상이 무엇입니까? 고구려가 견탄하려고 한 대상. 무엇을 견탄하려고 했는지.
김태식: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에 조공하러 가는데, 가는 길이 백제에 들러서 船舫, 즉 배를 꾸미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무도해서 삼키려고 했다 하는 삼키려는 대상은 그 배라고..
이시이 마사토시 : 그럴때 견탄이라는 표현을 쓸까요?
김태식: 배를 삼킨다, 그 배는 아주 보물도 많고 그런 배이기 때문에 삼킨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시이 마사토시: 좀 이해가 안됩니다. 견탄이라는 것은 뭔가 영역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사토 마코토 : 저도 견탄이라는 말이 있으니깐 변예의 예는 예속민이라고 하기보다 예속하는 땅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하마다 고사쿠 : 아니 이 부분인데요, 처음의 변업(邊業)이라는 것은 송나라의 황제가 왜왕 흥에게 詔를 내렸을 때, 송에서 봐서 새로 왜왕이 된 흥이 변업(邊業)[38]을 계승하고 있다, 그런 의미고, 송 황제에서 보면 주변의 왕으로 정치를 계승 했습니다, 라는 것이라서, 실질적으로 왜를 나타내는데요. 또 다음에, 지금의 문제가 돼 있는 변예(邊隷 변방의 속한 곳)라는 것은 이 왜왕 무(武) 상표문을 보냈을 때, 역시 여기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과대망상적인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모한 진한 칠국 제군사 안동장군왜국왕'이라는 이름으로 상표문을 보냈을 것으로 틀림없을 겁니다. 그래서 그때의 과대망상적인 왜왕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이 상표문이 작성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역시 변예(邊隷)라는 것은 한 상인이라든가 사절단이라는 게 아니라 좀 더 큰 범위로 생각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중국: 예, 그러면 거꾸로 뒤집어서. 하마다 선생님! 왜왕 흥(興)이 '新嗣邊業' 할 때 邊는 왜입니까 백제입니까? 새로이 邊隷을 이었다 했을 때 邊은 백제인가 왜인가 하는 문제 입니다.
하마다 고사쿠: 예 이것 말입니다, 왜 입니다. 변이 왜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의 전매특허가 아닙니다. 어디에도 해당되는
노중국 : 상표문 안에서 이야기 할 때는, 邊隷의 邊은 왜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상표문에 있어서는 왜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한 얘기가 되는데 邊隷을 백제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이 상표문 어디서 찾을 수 있냐는 거지요. 상표문에는 변경백제(邊逕百濟)에서 볼때 상표문에는 백제는 백제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시이 마사토시: 그래서 저 말입니다. 아까 하마다 씨도 관련된 말씀을 하셨는데, 아까부터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인데요, 나누어 드린 사료의 2396페이지, 상표문 입니다. 그 왼쪽에서 1,2,3,4,5 여섯째 줄의 아래쪽 입니다. 아까 하마다 선생님이 읽으신 부분인데요, 길(道)의 아래 글자는 아마 '지나서(徑)'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길은 백제를 지나서 船舫을 장치하였다. 그러나 구려(고구려)가 무도해서 꾀어서 견탄(見吞) 하려고 하여 邊隸을 초략했다"고 써 있습니다 '견탄'이란 것은 보통 병합인가요, 병합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럴 경우 노 선생님은 무엇을 견탄하려고 했다고 해석하셨나요. 왜인가요, 백제인가요.
노중국 : 이것 자체만 가지고는 왜냐 백제냐 단정 짓기는 어려운데요. 여기에서 상표문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왜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하고 왜하고의 관계에 의해서 圖欲見은 해석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상황에서 봤을 때, 바로 그 밑에 抄邊邊隷가 나오거든요. 바로 그 밑에 邊隷을 抄邊했다. 이때의 邊隷은 백제가 아니고 邊隷을 抄邊했기 때문에 송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어떤 때는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못가기도 하고 막혀 버렸다는 거죠. 그렇게 보면 이때의 邊隷나 견탄은 기본적으로 왜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이시이 마사토시: 애매한 답변이라서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견탄하려고 했다, 그 대상이 무엇입니까? 고구려가 견탄하려고 한 대상. 무엇을 견탄하려고 했는지.
김태식: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에 조공하러 가는데, 가는 길이 백제에 들러서 船舫, 즉 배를 꾸미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무도해서 삼키려고 했다 하는 삼키려는 대상은 그 배라고..
이시이 마사토시 : 그럴때 견탄이라는 표현을 쓸까요?
김태식: 배를 삼킨다, 그 배는 아주 보물도 많고 그런 배이기 때문에 삼킨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시이 마사토시: 좀 이해가 안됩니다. 견탄이라는 것은 뭔가 영역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사토 마코토 : 저도 견탄이라는 말이 있으니깐 변예의 예는 예속민이라고 하기보다 예속하는 땅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하마다 고사쿠 : 아니 이 부분인데요, 처음의 변업(邊業)이라는 것은 송나라의 황제가 왜왕 흥에게 詔를 내렸을 때, 송에서 봐서 새로 왜왕이 된 흥이 변업(邊業)[38]을 계승하고 있다, 그런 의미고, 송 황제에서 보면 주변의 왕으로 정치를 계승 했습니다, 라는 것이라서, 실질적으로 왜를 나타내는데요. 또 다음에, 지금의 문제가 돼 있는 변예(邊隷 변방의 속한 곳)라는 것은 이 왜왕 무(武) 상표문을 보냈을 때, 역시 여기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과대망상적인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모한 진한 칠국 제군사 안동장군왜국왕'이라는 이름으로 상표문을 보냈을 것으로 틀림없을 겁니다. 그래서 그때의 과대망상적인 왜왕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이 상표문이 작성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역시 변예(邊隷)라는 것은 한 상인이라든가 사절단이라는 게 아니라 좀 더 큰 범위로 생각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4. 광개토대왕릉비,삼국사기와 년도 비교 및 교차검증
삼국사기와 백제의 실전된 사서인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기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칭원법에서 기인한 오차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당대에는 두가지 원년 기산 문제가 있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선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그 새로운 왕이 즉위한 년도를 원년으로 지정 할 것이냐 아니면 해당년도를 선왕의 마지막 년도로 계산하고 그 이듬해를 원년으로 계산 할 것이냐이다.또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395년기록을 보면, 백제가 먼저 선공을 했고 이에 고구려는 방어에 성공하고 광개토대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서 크게 백제를 대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는 광개토대왕릉비 396년과 동일한 기사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의 기년를 단독표기로 기사가 써져있는 반면에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육십갑자와 광개토왕의 기년을 병기하고 있으므로 (ex. 영락5년,병신년=396년 / 영락8년 무술년 = 398년 etc.)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당대 고구려인들이 계산에 착오가 있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고로 삼국사기에의 기록을 1년씩 당겨와야한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년도부터 사망한 년도까지 계속 1년씩 어긋나기 때문에, 적어도 광개토왕의 치세기에 한해서는 삼국사기의 오기가 지속 되고 있다. 그렇지만 광개토대왕릉비의 년도가 맞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1년 당겨오면, 백제본기 395년의 기사가 광개토대왕릉비 병신년의 기사와 2년씩 격절이 나오기 때문에 의문점이 생긴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사건을 두고 기록을 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추정의 영역이지 확실하지는 않다.
혹자들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년도가 교차검증 가능하며 일치하므로, 삼국사기의 기년에 릉비의 내용을 끼워넣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2004년에 호태왕 신묘년이라고 적힌 청동방울이 발견 되었으므로, 적어도 391년 = 신묘년이나 그 이전에 광개토왕이 즉위한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즉,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광개토왕의 392년 즉위 기사가 오기 되었다는 증거로 작용하는 셈이다. # 또 광개토왕이 승하하고 나서 장수왕은 삼년 동안 상을 치른 것으로 추정하는데, 삼국사기의 광개토왕 승하 기사를 1년을 당겨오면 412년 10월이 되고 만 24개월이 지난 후에 릉비의 증언에 따르면 414년에 9월 29일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39] 이는 무령왕릉의 지석에서도 왕이 승하한 시기와 장사를 지낸 기록에도 27개월의 차이가 나는 것을 보아, 당대에서도 통용되는 관례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와 백제삼서 또 그것을 인용한 일본서기가 우연의 일치로 1년씩 오차가 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삼국사기와 백제삼서의 1년 오류 때문에 그 백제삼서를 인용한 2차 사료 일본서기 또한 1년 오차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국책사업으로 편찬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석도 이러하다.
능비는 광개토왕이 죽은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즉 장수왕 3년 9월에 대왕의 능과 함께 건립되었다(종래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년에 따라 414년을 장수왕 2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유월칭원법을 사용하였던 까닭에 광개토왕이 죽은 412년은 곧 장수왕 원년이 된다. 따라서 비가 건립된 414년은 장수왕 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
5. 임나=가야인가?
일본서기에서 임나의 용례는 일관되게 가야 제국 또는 연합의 통칭으로서 사용된다. 일본서기가 증언하는 임나의 강역은 경상남도 전라남도 일대는 물론이요, 일부 충북과 충남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 대해 김현구 교수는 고대 한반도에서 사용된 임나의 정의는 가야의 일원 즉 연맹체의 一國에 불과하다고 밝힌바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등장하는 '임나가라' 종발성,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숱하게도 많다. 그도 그럴것이 고대 한국어로 가라는 나라라고 추정하기 때문에 가라=가야는 접미어에 불과한 명사이고 앞에 붙는 금관가야의 '금관' 아라가야의 '아라'등은 고유명사 내지는 지역명에 불과하다.삼국지 위지동인전에서도 "구야한국"이라고 금관가야를 지칭하고 있는 시점에서 구야는 금관이 중국어로 음차한 단어이며 한국은 가야에 상응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고대 일본인의 인식에 오류가 있었고 고대 한국인이 말하는 임나의 용례와 차이점이 있음을 알수 있다. 후대에 와서야 일본서기에서 그렇게 지칭하고 있으니 편의상 일본서기의 정의를 따르고 있지만, 임나에 대한 명칭이 와전 된 것은 분명하다.
왜왕 진(珍)부터 중국 송나라 황실에 집요하게 요구한 관작을 보면 백제,임나,신라,모한,진한,왜 6국 제군사라며 자칭하다가 계속 거부 당하고, 진(珍)가 죽고나서 즉위하는 제(濟)에 이르러서는 계속 황당한(?) 요구를 하자 황실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임나,가라,신라,모한,진한,왜 6국 제군사를 하사 받고, 무(武)에 이르러서는 또 백제를 껴넣어 다시 자칭하며 요구를 했지만 또 거부 당하고 임나 가라 신라 모한 진한 왜 6국 제군사를 하사받은바 있다.[40]
임나와 가라를 지칭한게 아니라고 하면 임나-가라 ( 금관가야)가 되어 6국은 5국이 되고 7국은 6국이 되어야 하는데, 왜왕은 정정요구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武)는 7국제군사를 자칭하며 임나와 가라를 병기하며 자신이 자칭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봐선 임나와 가라를 개별 국가로 취급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그렇지만 임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가야 연맹의 총칭이며 임나는 그 일부분인데 이런식으로 해석하면 임나와 가라를 동렬에 취급할 수 있냐는 의문이 생기고 또 임나는 가라의 일부이므로 중복되는 개념이다.
이를 두고 광개토대왕릉비를 집중 연구 했던 중국인 고구려학자 왕건군은 당대에 한반도 남부는 백제,신라,임나가라 뿐이었는데[41] 왜왕이 자칭한 작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요구이며, 백제 신라 가야등을 지배 했다고 반복하고 있는 것은 왜가 통치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당대에 한반도 남부에는 백제와 신라 임나가라만 존재했는데 가야와 임나를 별개 국가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지적했고 이는 자신이 자칭해서 다스리는 나라의 실정[42]도 제대로 모르고 요구한 것이라며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조선족 연구자 박진석 (朴眞奭) 또한 왜왕 무(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조예(祖禰), 즉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통일을 이룩 (440~470년)한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 광개토대왕릉비가 써진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에 한반도까지 진출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고 또, 왜왕 스스로 자칭한 관직이 백제보다 낮았다는 점에서 이미 백제를 지배했다는 사실이 없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라고 했다.[43]
왜5왕이 말하는 가라와 임나가 가라가, 임나는 가야 제국의 통칭을 뜻하고 가라는 대가야를 뜻한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견한 타당한 이유가 일본서기에서도 백제가 대가야에게 영토를 빼앗기자 백제왕이 왜왕에게 서신을 보내 다시 돌려 달라고 하는 내용이 나오고 대가야에게 막대한 권력을 행사해 왜왕은 조칙을 내려 대가야로 하여금 백제에게 다시 할양하게 한다. 이러한 관념으로 다른 두개의 국가라고 치부하면 6국 7국 지위가 맞긴 맞다.[44] 그러나 이 논리도 아직 맹점이 하나 있는데, 임나라는 용례는 당대 일본에서 금관가야로서 사용된바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고대 한국인들의 인식이지, 당대의 왜국의 인식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일본에서 이러한 구승에 의해 와전된 개념이 고착화 되는 경우는 이뿐만이 아닌데, 대표적으로 삼한을 예로 들을수 있다. 삼한은 원래 한반도의 마한 진한 변한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후대 한국에서 이 명칭이 앞서 언급된 세나라의 통합 강역, 즉 한반도의 하삼도를 뜻하는 명칭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일본서기 신공황후조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이라고 부른다. 이는 명백히 잘못 서술된 것이다.[45] 백제를 무너뜨린 무열왕의 공로를 삼국사기에서 삼한을 통일 했다고 한다. 일본측 삼한의 개념이 옳다면,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 한 것은 무열왕이 아니라 문무왕이다. 이를 미루어보면, 삼한은 적어도 7-8세기에 들어서는 세개의 나라를 뜻하는 게 아니라 한반도 남부, 즉 백제와 신라의 통합된 영토를 뜻하는 것임을 알수가 있다. 즉 마한=백제, 변한=가야, 진한=신라이고 이 세나라를 지칭하던 명칭이 후대에는 이 세나라가 다스리던 영토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이며, 일본에서 말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 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와전이다.
삼한이라는 명칭이 고구려 백제 신라로 혼용 내지는 와전 된것은 꽤 후대의 일이다. 소정방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백제를 멸하고 새긴 문장에는 형국공( 소정방)이 삼한을 평정 했다라고 기록 되어있다. 삼한이 고구려 까지 포함되는 개념이라면,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가 존속 되고 있는 시점에 이런 글귀를 남길리가 없다. 고로 삼한은 옛부터 마한,진한,변한을 뜻하는 단어였지만, 후에 이들 국가들이 무너지고 편의상 이들 국가의 통합 강토를 대충 삼한이라고 부른게 명확하다.
6.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도출된 한일 양국 사학자들의 견해 차이
제 1차 1분과 고대사하마다 고사쿠 4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1k.pdf
김태식 4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k.pdf
이시히 마사토시 5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3k.pdf
노중국 5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4k.pdf
사토 마코토 6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5k.pdf
김현구 6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6k.pdf
제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좌담회 토론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7k.pdf
제1차 1분과 고대사 일본어 링크
하마다 고사쿠 4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1j.pdf
김태식 4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j.pdf
아시히 마사토시 5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3j.pdf
노중국 5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4j.pdf
사토 마코토 6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5j.pdf
김현구 6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6j.pdf
제1차 1분과 고대사 좌담회
4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7j.pdf
5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8j.pdf
6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9j.pdf
새로운 한일 관계사 연구를 위한 좌담회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10j.pdf
제 2차 1분과 고대사
논문 + 좌담회 토론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
일본어 링크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j.pdf
한국어로 번역된 논문은 Searching ( control + F ) 기능을 사용 할 수 없다. 찾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한자로 기입한 뒤, 일본측 사이트에서 검색기능을 이용해서 타이틀을 읽고 찾은 뒤 한국어 사이트로 되돌아와서 찾는 것을 추천한다.
7. 일본서기 활용의 성과와 문제점
조선의 신숙주는 <<일본서기>> 의 왕대기를 옮기면서도 신라 정토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한말 장지연의 <<대한강역고>>(1903)와 김택영의 <<역사집략>>(1905)은 신라정벌과 임나일본부를 그대로 인정하였다. 이에 신채호는 "<<일본서기>> 에서 그대로 따다가 적고 그 박식함을 자랑하였다" 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1950~1970년대의 산발적 활용을 거쳐, 1976년 "<<일본서기>>는 僞書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책이다" 라는 언급이후, 한국고대사연구의 기본사료로 적극 활용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30년 간 고대한일관계사의 재조명과 한국고대사의 복원에서 적지 않은 성과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용들의 대부분이 <<일본서기>> 에 대한 우리 학계의 독자적인 사서적 검토나 사료비판론의 전개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학계의 다양한 연구에 대한 정리나 검토도 없이, 각 전공자의 구미에 맞는 단편적 기사만이 복원의 자료로 이용되어 왔을 뿐이다. <<일본서기>> 를 이용하는 위험성과 어려움에 대해서는 '고기는 맛있지만, 독이 있는 복어' 라든지, '말기 암환자의 수술' 과 같은 표현으로 경고되어 왔지만, 정작 '복어' 나 '암환자' 에 대한 기초적 연구가 선행된 적은 별로 없었다. 결국 <<일본서기>>의 활용을 위해 선행시켰다는 사료비판의 기준이란 광복 이후 일본에서 전개되었던 <<일본서기>> 비판론의 일부를 수용하거나, 역사나 사건 전개의 주체를 왜에서 백제, 가야, 신라 등으로 바꾸어 보는 것 같이, 한국인이란 정체성에 호소했던 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일본서기>> 의 활용에는 복원의 성과와 함께 적지 않은 문제점도 포함되고 있다. ...(중략)... 이러한 상황에서 삼국과 가야관련기사의 모두를 가려내 번역문과 용어설명을 제시하고, 최근까지 논의되었돈 쟁점들을 정리하면서, 나름대로의 연구결과를 담은 책자가 비로소 간행되었다. '연구' 라는 서명처럼 주석서는 아니지만, <<일본서기>>의 활용에 필요한 기본적 책갈피로서의 의미는 높게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신대기> 를 비롯한 신화적 기술은 제외되었고, 특별한 고증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七支刀=七枝刀(신공기)를 인정하는 것과 같은 부분도 있고, 모든 관련기사를 백제 주체 일변도로 보려는 해석의 문제가 있다. 반면에 자료의 부족과 특정의 기사에 바로 대입하기 어려운 고고학 자료의 특성 때문에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는 못했지만, 고고학 자료와의 대비를 통한 문헌고증을 시도하겠다는 시도는 참신했다. 다만 시종일관 견지되고 있는 백제 일변도의 해석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학계 <<일본서기>> 활용수준의 현주소를 보여주기도 한다. 한국사나 특정국 또는 연구자의 자설에 유리하면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고, 그렇지 않으면 <<일본서기>>의 창작과 윤색으로 간주하는 것 같은 이중적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 이영식, "<<일본서기>> 활용의 성과와 문제점" 에서. <<한국고대사연구의 새 동향>>(한국고대사학회편, 서경문화사, 2007) -
그러나 이중적 태도라고 치부하기엔 일본사학계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노골적인 년도 조작 이주갑인상도 있고 그에 따른 비유왕의 치세기를 완전히 소거 시키는 등 단순 오기나 누락 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다분히 의도적인 조작들이 발견되며, 이는 악의적인 편집과 창작이 가미 되었다고 단언 할 수 있다. 또 일본서기 안에서도 자체모순이 수 없이 많으므로 분명히 사료 비판을 하고 읽어야 하는 사서이다. 일본학계에서도 현재는 가야정벌 기사라든지, 삼한 정벌이라든지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편이다. 다만 그들은 이것들이 완전히 허구는 아니고 기본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부풀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사학계 조차도 백제가 다스리는 강역이었던 전라북도, 충청도 등지를 자신들이 통치 했다고 말하는 일본서기의 기사를 신용 할 수 없다는 입장이며, 광개토대왕릉비가 증언하는 왜군의 존재도, 일본이 여러 분국으로 나뉘어 졌을 때 지방 호족이나 변방에서 파견한 군인 혹은 해적 집단을 과장하고 또 이게 구승으로 전해지면서 윤색이 생겼다고 해석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5-6세기 까지 문자가 없다고 전한다.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후대에 일본이 통일을 이룩하고 나서 전국 각지에 있는 전승이나 구승을 집대성하고 또 편집을 거치고 윤색을 더하고 이것을 마치 소급적용 했을 공산이 매우 크다.
수서(隋書)
沒水捕魚 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글자는 없고 나무에 균열을 만들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불교를 숭상하여 백제에게 불경을 구하니 비로소 글자가 생겼다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글자는 없고 나무에 균열을 만들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불교를 숭상하여 백제에게 불경을 구하니 비로소 글자가 생겼다
일본어 위키의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해석은 이렇다.
天皇が百済王に「賜」わったという地は、忠清道の洪城、維鳩、公州付近から全羅道の栄山江、蟾津江流域にまで及んでいる。これは、滅亡時の百済王が独立して、かつ正当に統治していた国家の領土とほぼ一致する。しかし、7、8世紀の交の在日百済王族、貴族はそれを天皇から委任された統治と表現せざるを得ない臣下の立場にあった。このような観念を実体化して、「高麗、百済、新羅、任那」は「海表の蕃屏として」「元より賜はれる封の限」をもつ「官家を置ける国」だった(『継体紀』)などというのは信頼し難い
천황이 백제왕에게 하사했다는 땅은 충청도의 홍성,維鳩[46],공주 부근에서 전라도 영산강, 섬진강 유역까지 이르렀다. 이는 백제가 멸망했을 때 까지 백제왕이 독립적으로 통치하던 국토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7-8세기에 백제 멸망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귀족들은 천황으로부터 위임받아 통치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신하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관념을 실체화하여,'고려, 백제, 신라, 임나'는 '海表'[47]의 번병[48] '원래 내려진 봉한'을 가진 '관가[49]를 둘 수 있는 나라'였다(『계체기』)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다.
천황이 백제왕에게 하사했다는 땅은 충청도의 홍성,維鳩[46],공주 부근에서 전라도 영산강, 섬진강 유역까지 이르렀다. 이는 백제가 멸망했을 때 까지 백제왕이 독립적으로 통치하던 국토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7-8세기에 백제 멸망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귀족들은 천황으로부터 위임받아 통치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신하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관념을 실체화하여,'고려, 백제, 신라, 임나'는 '海表'[47]의 번병[48] '원래 내려진 봉한'을 가진 '관가[49]를 둘 수 있는 나라'였다(『계체기』)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다.
이것은 하마다 고사쿠 큐슈대 교수의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 투고한 논문에서 발췌한 일부이다. 일본이 임나일본부설과 그를 뒷받침하는 사료라고 주장하는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나오는 왜군의 실체에 대해 일본측의 시각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본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주장했던 내용은 이미 파기가 되었지만 어떤 현식으로든 왜군이 한반도 정세에 관여 했고 이것이 구전으로 남겨져 오면서 윤색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 중에서 4세기에 상당하는 기사로 표현된 천황이나 일본은 4~5세기에 아직 성룁되지 않는 다는 것, 또한 천조의 칭호도 중국 남조로부터 책봉을 기본으로 하는 백제의 외교자세를 고려하면, 백제가 일본에 대해 주창하는 호칭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것도 8세기 초반의 일본서기를 편찬하기 전후의 천황의 왕건을 수식하는 용어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씨족 시조의 업적을 '이야기'화 하고 또 후세의 백제 관련 기록도 일본서기 편찬 시의 '지금'즉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율령국가의 성립과정에서 씨족 국가에 대한 기여를 현시하면서 '이야기화'가 계속 된 것으로 생각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화가 전혀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기억'을 이야기 했던 점은 유의해야 한다.
이 처럼 일본서기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중론은 과장이나 윤색이 많이 되었지만, 100퍼 센트 허구는 아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구전을 후대에 기록한 것이다라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369년의 가야정벌, 신공황후기 삼한평정 등은 분명히 액면 그대로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부정하고 있지만, 완전히 허구는 아니고 부분적 사실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하며
김태식 : 그럼 문제제기를 하겠습니다. 첫번째로 <일본서기> 신공 49년조 해석을 통해서 369년의 왜의 임나 정벌을 사실로 인식하는 견해가 있었지만, 근래 학계에서는 이를 부정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전형적인 임나일본부설은 붕괴되었다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그 사료 즉, 신공49년조의 가치와 성격 및 그 의미에 대한 논의는 제 각각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두번째로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나오는 왜군의 성격에 대해서는 대개 그것이 일본기나이의 야마토 세력의 파견군인데, 각국이 대등한 국제관계 속에서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왜군들의 수가 고구려의 대군과 맞설 만큼 많지 않아고 무장상태도 가야에 비해서 빈약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실상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왜적 도는 왜군은 가야-왜의 연합군이었다고 보이는데 비문에서 이를 왜군으로 과장한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세번째로 그 동안 한국과 일본이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고대사에서 한일관계사에서의 중심지역은 가야지역인데, 가야지역의 독자적 왕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듯 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4세기 이전의 전기 가야는 경남 김해의 가야국 또는 김관국이라고 하는데요. 그 가야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소국연맹체였고, 5,6세기 후가 가야는 경북 고령의 가야국 또는 가라국이라고 합니다. 그 고령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소국연맹체 였으며 6세기 전반에는 가야 북부지역에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이루기도 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가 4,5,6세기에 300년에 걸쳐서 계속해서 신라나 백제에 비해서 작은 세력이었다거나 분열되어 있어서 힘이 없었다거나 하는 인식은 수정되었으면 합니다. 이에 대한 논의도 좀 더 하고 싶습니다.
조법종 : 예, 지금 김태식 선생님께서는 3가지로 나누어서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첫번째는 <일본서기> 신공49년조의 해석에 대한 기왕의 학계의 연구성과가 이를 부정하는 입장으로 정리 될수 있고, 그에 따라서 임나일본부설의 대변자였던 이 사료의 부정은 결국은 임나일본부설을 이해하는 인식의 이른바 일본적인 인식의 틀이 붕괴된 것으로 볼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것을 과연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고 논의 할 것인가를 좀 더 구체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제기를 하셨습니다. 두번째로는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왜군의 성격은 가야-왜의 연합군이 과장되어서 왜로 표현된 것으로 볼수 있겠다는 의견 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가야의 독자 왕권에 대한 한일 학계의 인식이랄까, 그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한 것 같다, 독자왕권 독자국가로서의 성격이 강조될 필요가 있겠다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마다 선생님, 말씀 부탁드립니다.
하마다 고사쿠 : 제 견해를 말씀 드리자면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특히 신공황후 49년조 또는 52년조 등 한반도 남부지역, 가야,백제를 중심으로 한 일본 중심의 역사상이라는 것은 그 이야기를 형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를 음미하면서 분해해 가야만하는 그런 사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 무엇이 남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런 관점에서 <일본서기>의 이른바 한반도 관계기사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기본자세입니다. 49년조는 분명히 고구려 백제 신라가 신공황후의 군대에 의해 정복된 이후 조공을 서약했다는 그런 기사였다고 기억합니다만, 그 기사의 액면 그대로는 부정되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후세에 <일본서기>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제까지의 일한, 한반도 지역과 여기서 말하는 일본의 야마토 조정이든 야마토 정권과의 관계를 어떻게 되돌아보면서 구성할 것인가? 그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자의적인 역사상입니다만, 전혀 황당무계한 망상이라고는 저는 보지 않습니다.그러면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과를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리 : 49년조는 가야 7국 평정 아닙니까?
하마다 고사쿠: 가야 7국 평정이었습니까? 조금 전에 369년은 백제 신라 가야 고구려를 평정 했다는 기사라고 말했습니다만, 모리 선생님의 지적으로 가야의 칠국 평정 기사라고 정정합니다. 광개토왕비에 나타나는 왜구 또는 왜적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아니었나, 그것을 비문에서 왜군을 굉장히 크게 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격파한 고구려군의 강력함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래의 왜구 왜적의 존재는 비문에서 과장된 것이라면서 힘을 작게 평가하는 견해가 최근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광개토왕의 군대가 5만의 보,기병이었다고 하는데, 과연 이것이 실제 수치였는지 어땠는지, 광개토왕비문 속에서 최종적으로 백제를 조공국으로 만들지 못했고, 신라는 고구려의 조공국으로 삼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적도 최종적으로는 근절시키지 못했고, 가야도 전멸하지는 않았습니다. 왕은 5만의 군대를 두번 정도 파병했어도, 한반도 전체를 고구려의 지배하에 넣지 못했다. 그리고 또 7세기까지 그토록 대단하던 고구려가 이 반도 전체의 유일한 왕권국가로서는 성립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일까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부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고 외부적인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 고구려의 5만 병사라는 군사가 실제 수치였을까 하는 것에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비문에서는 고구려와 적대하던 왜적에게는 왜적 단독이 아니라 역시 백제군이나 가야병사도 마구 섞여있지는 않았더라도 제휴해서 싸우고 있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과제인 가야는 매우 재미있는 지적으로 역시 '현대의 가야 국왕'이라고 할까, 가야 전문가이신 김선생님께서는 가야를 재평가 해야한다고 하신 지적은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제 신라 고구려에 비해 가야는 지리적으로는 낙동강 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에 걸쳐져 있다고 하는 한정된 자연조건, 그리고 정치적으로 서쪽에 백제,북동에 신라, 그리고 바다 건너에 왜로 세방향이 둘러 싸여있다. 그 세 방향으로부터 긍정적인 영향, 부정적인 영향 등이 있어서 이 가야 소국은 소국연맹체에서 독립된 고대국가로서는 매우 어려운 코스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도 있어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하면 가야는 작은 세력이었다고 하는 인식이 형성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각을 바꾸면 왜국의 문화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평가도 가능한 것이니깐요.
김태식: 우선 신공기 49년조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왜에 조공한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가야 7국 평정에는 뭔가 좀 사실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 되는데요, 그렇습니까?
하마다 고사쿠: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견해를 도출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그 안에서 어떤 사실을 반영한 기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야 7국을 평정 했다고 하는 것은 정확한 의미에서 평정이 아니겠지만, 이 369년의 반도와 열도의 국제관계를 생각해 볼때,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고 있는 가운데 그때에 왜인 병사들도 백제군에 참가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학설이 일본에는 있습니다. 그런 학설을 논하는 사람들은 그 왜인 병사들은 가야지역에서도 어떻든 공동행동을 취했을 것이라고, 그런 공동 행동을 후대에 어떻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역사상으로 기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에서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 49년조가 나온것이 아닌가하는 견해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런 입장인가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 역사서는 완전한 공상, 자신에게 유리한 공상이라고 부정하는 자세가 아니라, 이것이 역사의 어떤 부분을 반영하고 잇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문헌사학자인 제가 해석하는 자세입니다. 단 가야 7국을 평정 했다는 것은 그것은 부정되겠지요. 평정이라는 오늘날 시각에서 보는 해석으로 말하는 군사적으로 제압하여 점거 했다는 의미의 '평정'이라면 그것은 그렇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이 49년조는 완전히 싹 지워버려도 되냐 하면, 그럴수는 없습니다. 무언가 그 핵이 되는 것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이 저의 기본적인 자세 입니다.
김태식: 우선 4세기의 한일관계는 문헌이 아직은 불충분한 것이 많은 시기이기 때문에 일단 한일관계의 추세는 고고학적인 발굴성과를 토대로 설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제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4세기에는 가야지역에 김해라는 중심이 분명해지고 거기에 가야국이 다른지역의 전체 가야지역에 비해서 10배 이상의 규모, 또 10배 이상의 부장품을 내는 고분이 형성 되어서 가야지역에 분명히 중심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일본열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열도도 3세기 후반부터는 긴키 지방에 세력의 중심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야 중심지의 고분 규모라든가 부장품의 수준은 신라에 비해서 전혀 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한일관계는 일본 열도에서 출토되는 또는 제작된 철의 소재가 가야의 것으로 추측되는 관계, 이러한 것이 기본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서는 일본지역이나 가야지역에서 백졔계통의 유물은 거의 안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4세기의 한일관계는 일단 가야지역과 일본 긴키 지역과의 긴밀한 교역이 기본이 되는 것을 토대로 해석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49년조는 왜군과 백제군이 혼합이 된 왜군이 가야 7국을 평정했다고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일본서기에 다른 기록이 있습니다. 흠명기에는 근초고왕대의 사실을 언급을 하면서 백제 성왕이, 그 당시에 근초고왕때에 가야와 백제는 형제관계를 맺었고, 그 때부터 친하게 교류하기 시작했다는 정도의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더 사실성이 높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두개를 연결 지어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그러니깐 4세기 후반의 백제가 김해의 가야와 연결이 되기 시작했고, 그 때 백제는 간접적으로 왜와 연결 되었을 뿐이며, 거기에는 어떤 군사관계라든가 군사적인 복속 이런것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생각 되고 있씁니다. 그러한 것이 제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마다 선생님의 견해를 보니, 7국 평정이 아주 공상은 아니고 뭔가 있을 것이고 사실성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고 372년의 칠지돌르 백제가 보낸 것이라고 보시고 그것은 아마 369년조의 왜군의 공헌에 대한 백제의 보답이 아닌가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게 되면 49년조의 사실성을 굉장히 인정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조법종 : 예, 지금 김태식 선생님께서는 3가지로 나누어서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첫번째는 <일본서기> 신공49년조의 해석에 대한 기왕의 학계의 연구성과가 이를 부정하는 입장으로 정리 될수 있고, 그에 따라서 임나일본부설의 대변자였던 이 사료의 부정은 결국은 임나일본부설을 이해하는 인식의 이른바 일본적인 인식의 틀이 붕괴된 것으로 볼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것을 과연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고 논의 할 것인가를 좀 더 구체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제기를 하셨습니다. 두번째로는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왜군의 성격은 가야-왜의 연합군이 과장되어서 왜로 표현된 것으로 볼수 있겠다는 의견 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가야의 독자 왕권에 대한 한일 학계의 인식이랄까, 그에 대한 이해가 조금 부족한 것 같다, 독자왕권 독자국가로서의 성격이 강조될 필요가 있겠다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마다 선생님, 말씀 부탁드립니다.
하마다 고사쿠 : 제 견해를 말씀 드리자면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특히 신공황후 49년조 또는 52년조 등 한반도 남부지역, 가야,백제를 중심으로 한 일본 중심의 역사상이라는 것은 그 이야기를 형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를 음미하면서 분해해 가야만하는 그런 사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 무엇이 남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런 관점에서 <일본서기>의 이른바 한반도 관계기사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기본자세입니다. 49년조는 분명히 고구려 백제 신라가 신공황후의 군대에 의해 정복된 이후 조공을 서약했다는 그런 기사였다고 기억합니다만, 그 기사의 액면 그대로는 부정되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후세에 <일본서기>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제까지의 일한, 한반도 지역과 여기서 말하는 일본의 야마토 조정이든 야마토 정권과의 관계를 어떻게 되돌아보면서 구성할 것인가? 그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자의적인 역사상입니다만, 전혀 황당무계한 망상이라고는 저는 보지 않습니다.그러면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과를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리 : 49년조는 가야 7국 평정 아닙니까?
하마다 고사쿠: 가야 7국 평정이었습니까? 조금 전에 369년은 백제 신라 가야 고구려를 평정 했다는 기사라고 말했습니다만, 모리 선생님의 지적으로 가야의 칠국 평정 기사라고 정정합니다. 광개토왕비에 나타나는 왜구 또는 왜적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아니었나, 그것을 비문에서 왜군을 굉장히 크게 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격파한 고구려군의 강력함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래의 왜구 왜적의 존재는 비문에서 과장된 것이라면서 힘을 작게 평가하는 견해가 최근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광개토왕의 군대가 5만의 보,기병이었다고 하는데, 과연 이것이 실제 수치였는지 어땠는지, 광개토왕비문 속에서 최종적으로 백제를 조공국으로 만들지 못했고, 신라는 고구려의 조공국으로 삼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적도 최종적으로는 근절시키지 못했고, 가야도 전멸하지는 않았습니다. 왕은 5만의 군대를 두번 정도 파병했어도, 한반도 전체를 고구려의 지배하에 넣지 못했다. 그리고 또 7세기까지 그토록 대단하던 고구려가 이 반도 전체의 유일한 왕권국가로서는 성립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일까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부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고 외부적인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 고구려의 5만 병사라는 군사가 실제 수치였을까 하는 것에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비문에서는 고구려와 적대하던 왜적에게는 왜적 단독이 아니라 역시 백제군이나 가야병사도 마구 섞여있지는 않았더라도 제휴해서 싸우고 있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과제인 가야는 매우 재미있는 지적으로 역시 '현대의 가야 국왕'이라고 할까, 가야 전문가이신 김선생님께서는 가야를 재평가 해야한다고 하신 지적은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제 신라 고구려에 비해 가야는 지리적으로는 낙동강 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에 걸쳐져 있다고 하는 한정된 자연조건, 그리고 정치적으로 서쪽에 백제,북동에 신라, 그리고 바다 건너에 왜로 세방향이 둘러 싸여있다. 그 세 방향으로부터 긍정적인 영향, 부정적인 영향 등이 있어서 이 가야 소국은 소국연맹체에서 독립된 고대국가로서는 매우 어려운 코스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도 있어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하면 가야는 작은 세력이었다고 하는 인식이 형성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각을 바꾸면 왜국의 문화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평가도 가능한 것이니깐요.
김태식: 우선 신공기 49년조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왜에 조공한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가야 7국 평정에는 뭔가 좀 사실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 되는데요, 그렇습니까?
하마다 고사쿠: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견해를 도출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그 안에서 어떤 사실을 반영한 기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야 7국을 평정 했다고 하는 것은 정확한 의미에서 평정이 아니겠지만, 이 369년의 반도와 열도의 국제관계를 생각해 볼때,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고 있는 가운데 그때에 왜인 병사들도 백제군에 참가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학설이 일본에는 있습니다. 그런 학설을 논하는 사람들은 그 왜인 병사들은 가야지역에서도 어떻든 공동행동을 취했을 것이라고, 그런 공동 행동을 후대에 어떻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역사상으로 기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에서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 49년조가 나온것이 아닌가하는 견해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런 입장인가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 역사서는 완전한 공상, 자신에게 유리한 공상이라고 부정하는 자세가 아니라, 이것이 역사의 어떤 부분을 반영하고 잇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문헌사학자인 제가 해석하는 자세입니다. 단 가야 7국을 평정 했다는 것은 그것은 부정되겠지요. 평정이라는 오늘날 시각에서 보는 해석으로 말하는 군사적으로 제압하여 점거 했다는 의미의 '평정'이라면 그것은 그렇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이 49년조는 완전히 싹 지워버려도 되냐 하면, 그럴수는 없습니다. 무언가 그 핵이 되는 것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이 저의 기본적인 자세 입니다.
김태식: 우선 4세기의 한일관계는 문헌이 아직은 불충분한 것이 많은 시기이기 때문에 일단 한일관계의 추세는 고고학적인 발굴성과를 토대로 설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제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4세기에는 가야지역에 김해라는 중심이 분명해지고 거기에 가야국이 다른지역의 전체 가야지역에 비해서 10배 이상의 규모, 또 10배 이상의 부장품을 내는 고분이 형성 되어서 가야지역에 분명히 중심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일본열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열도도 3세기 후반부터는 긴키 지방에 세력의 중심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야 중심지의 고분 규모라든가 부장품의 수준은 신라에 비해서 전혀 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한일관계는 일본 열도에서 출토되는 또는 제작된 철의 소재가 가야의 것으로 추측되는 관계, 이러한 것이 기본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로서는 일본지역이나 가야지역에서 백졔계통의 유물은 거의 안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4세기의 한일관계는 일단 가야지역과 일본 긴키 지역과의 긴밀한 교역이 기본이 되는 것을 토대로 해석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49년조는 왜군과 백제군이 혼합이 된 왜군이 가야 7국을 평정했다고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일본서기에 다른 기록이 있습니다. 흠명기에는 근초고왕대의 사실을 언급을 하면서 백제 성왕이, 그 당시에 근초고왕때에 가야와 백제는 형제관계를 맺었고, 그 때부터 친하게 교류하기 시작했다는 정도의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더 사실성이 높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두개를 연결 지어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그러니깐 4세기 후반의 백제가 김해의 가야와 연결이 되기 시작했고, 그 때 백제는 간접적으로 왜와 연결 되었을 뿐이며, 거기에는 어떤 군사관계라든가 군사적인 복속 이런것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생각 되고 있씁니다. 그러한 것이 제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마다 선생님의 견해를 보니, 7국 평정이 아주 공상은 아니고 뭔가 있을 것이고 사실성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고 372년의 칠지돌르 백제가 보낸 것이라고 보시고 그것은 아마 369년조의 왜군의 공헌에 대한 백제의 보답이 아닌가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게 되면 49년조의 사실성을 굉장히 인정하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8. 관련 문서
[1]
석탈해도 일본 열도 출신일 가능성이 거론되나, 삼국사기의 석탈해 출신지 비정을 보면,
왜국은 아니다. 울릉도 등 여러 설이 제기되고 일본 열도가 맞다면 왜국보단 더 떨어진 현 일본 동북부나 홋카이도 어디 즈음으로 파악할 여지도 있는데, 당연히 이 지역은 당시만 해도 아이누같은 이민족들의 조상이 살던, 즉 왜국과는 관련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2]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이다.
[3]
혹자들은 일본서기의 이러한 노골적인 년도 조작인
이주갑인상의 증거를 없애려고 백제삼서를 고의적으로 실전 시킨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일본서기가 당대에 외국기사를 인용할만한 문헌이 백제삼서 외에는 전무했다. 중국사서를 인용하자니 5세기 중반까지는 중국과의 교류도 활발하지 못했고, 지방 호족의 구승과 구전만 취합하자니 당대에 문자가 없었던 일본으로써는 한계가 있었다. (일본서기가 일본 국내의 기록이 적고 그에 비해 한반도 관련 기록이 방대한 것을 보면 일본이 당대에 문자가 없었기 때문 절대적으로 기록의 양이 부족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백제유민들이 갖고 있는 백제삼서를 가져와 인용하되 귀화한 백제인들에게 의해 1차 윤색이 생겨나고 또 이 1차 윤색이 거쳐진 자료들을 일본의 사관들이 인용하면서 2차 윤색이 생겼다는 게 중론이다. 다만 백제삼서는
정창원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
음모론적 관점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3대 사론서 중 하나인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키타바타케 치카후사, 14세기)에서는 ‘옛날 일본은 삼한(三韓)과 동종(同種, 같은 동족)의 나라였다.’고 적힌 책이 전해내려 왔는데, 이를 8세기 간무 덴노의 어대에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5]
당대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귀화라는 뜻은 타국의 문물을 흠모해 정착하는 것을 뜻하므로, 천황의 신격화가 되고 나서 창작한 단어다.
[6]
조례에 참석하다라는 뜻으로 와서 섬겼다는 뜻이다
[7]
일각에서는 관개시설과 저수지를 만들고 정비하는 기술을 도래인이 가져왔기 때문에 이런 윤색이 나왔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논을 개간 하는 방법은 보통 한반도 남부 삼한에서 유래 했으며 상대적으로 토지가 척박한 밭을 개간하는 방법은 고구려인들에 의해 전승 되었다고 한다. 후술한 궁월군 후손들이 일본에서 맡은 일이 이런 토목공사 산업에서 중역을 맡았다.
[8]
일본의 秦氏 (하타씨)의 조상이다. 궁월군의 후손은 응신천황에게 술을 만들어 바쳤다고 고사기에 기록 되어 있다.
[9]
일본사학계에서는 고구려의 남하에 의해 대피해온 울산 부근의 도래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의 하마다고사쿠의 논문 316쪽 참조.
[10]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중국황실 후손의 중국계 백제인이라고 한다.
진시황의 후손이라고 자칭했고, 또 일본학계에서는 이 설을 밀기도 했으나 진시황은 진씨가 아니다. 일각에에서는 울진 근처에서 도래인 집단으로 보고 있다. 왜 하필 이전의 기사에는 백제라고 했다가 지금은 신라나 진한의 강역인 울주군이냐 라고 질문을 할 수 있겠지만,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진(秦) =
진한(辰韓)과 연관짓고 있는 모양이다. 후한서에는 진한(辰韓) 사람들은 진(秦)에서 노역을 피해 망명한 사람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 그대로 백제인이라고 본다면 고구려 광개토왕 치세기에 전쟁을 피해 망명한 집단일 가능성도 있다
[11]
하타씨는 도래계 성씨중에 가장 큰 성씨이다. 하타씨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는 일본에서 제일 많다고 한다. 볍씨를 한반도로부터 가져왔고 관개시설을 만들고 저수지와 수로를 정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호류지(廣隆寺)라는 사찰 또한 이들이 건축한 것이다.
[12]
인교 천황을 위한 의사를 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성년이 되어서 거동이 불편 했다고 기록 되어있다.
[13]
신라의 기록에서는 이주갑인상이 없는건지, 아니면 이것을 대외기록으로 치부하지 않아서 윤색하지 않았는 것인지, 전후의 백제 기록을 보면 이주갑인상이된 기록으로 나와있어 의아하다.
[14]
삼국사기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 이주갑인상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15]
이주갑인상을 고려하지 않아도 인교청황은 당대의 인물이므로 년도를 조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6]
310년 기사에 봉공녀를 구하러 갔던 사신이 돌아와 오나라가 봉공녀를 바쳤다고 적혀있다 (...)
[17]
후에 등장하는 지전원과 동일인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18]
일본의 대외관계에서 이주갑인상이 끝나고 정상적인 년도로 돌아오는 첫 기사이다.
[19]
유랴쿠 천황
[20]
백제 관련 기록중에는 이주갑인상이 끝나고 정상적인 년도로 돌아오고 나서 첫 기사이다
[21]
일본서기에서 인용하는 일본부의 첫 용례이다
[22]
삼국사기와 2년 격절이 생긴다. 삼국사기에 이르면 463년에 신라의 두 장수 벌지(伐智)와 덕지(德智) 두 장군이 왜군을 매복해서 격퇴 시킨다.
[23]
삼국사기와 1년 차이가 난다. 삼국사기에서는 475년 9월에 개로왕이 전사한다.
[24]
삼국사기와 2년 차이 난다. 삼국사기에서는 475년 9월 개로왕이 전사하고 같은 해에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고 한다.
[25]
정황상 바로 앞 기사의 5백명의 호위병을 이끄는 장군으로 추정한다
[26]
정황상 한반도의 국가들로 추정한다
[27]
당시에 평원왕의 고구려와 백제는 치열하게 공방전을 하고 있었다. 도왜한 백제 출신의 귀족이나 용병으로 참가한 왜국의 호족의 망상 구승으로 추정한다.
[28]
노중국 교수 또한 김태식 교수와 의견을 같이하여,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고구려가 왜의 변방(백제의 영토)의 속한 곳을 약탈하려고 한다가 아닌 왜가 황실에 보낸 遣使船으로 해석했다. 노중국 교수의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5세기 논문 207쪽을 참고.
[29]
혹은 조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칭하는 명칭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노중국 교수의 견해이다.
[30]
노중국 교수는
춘추좌씨전과
연남생묘지명의 용례를 들어 주장했다. 확실히 조예를 구글에 기입해서 중국측의 정의를 찾아보면 고대에 사용된 사망한 부친을 일컫는 말이다.
[31]
정황상 백제로 의미가 통한다. 백제를 자신의 변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백제사 전공 노중국 교수는 같은 상표문에서 백제를 백제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것은 백제가 아닌 왜의 지방를 뜻한다고 해석했다.
[32]
고구려의 정복을 꾀했으나 실패했다라는 뜻이다.
[33]
넓게 잡아 50~60년 정도 되겠다.
[34]
소아만치(蘇我滿智)의 아들 소가노 카라코(蘇我韓子)이며 소가노 카라코(蘇我韓子) 아들은 소아고려(蘇我高麗)이다.
[35]
고구려 출신 스님인
도림에게 속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림에게 깜빡 속은 개로왕은 나라를 망국의 지경으로 만들었다.
[36]
고구려는 그 당시 중국 남조와 북조에 동시에 통교하며 양다리 외교를 하고 있었다. 우스갯 소리로 항간에서는 장수왕은 조공왕이라고 부르는데 남조와 북조에 엄청나게 조공을 했다.
[37]
노중국 교수의 발언이 유효한 점이 실제로 비근한 예로 신라를 보면 6세기 초까지 제대로된 문장을 한자로 기록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자를 쓰긴 썼는데, 어순을 고대 신라어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신라는 왜국보다 훨씬 오래전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5-6세기에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5세기의 일본의 문서행정이나 문장력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8]
변방의 번국들을 계속 점령하는 사업을 계승해서 추진하고 있다
[39]
삼년상은 만 3년 동안 상을 치르는 게 아니다. 24~27개월 동안 상을 치른 것을 햇수로 따져서 3년이라고 하는 것이다
[40]
백제왕은 당시에 진동장군의 작위를 받고 있는데 왜왕은 백제를 자신이 관할하는 나라라고 떠들면서 자신은 정작 백제왕보다 낮은 관직을 요구 했다.(...?) 이를 근거로 아무런 실효성 없는 허울뿐인 작위를 원했고 백제보다 상위나 백제에 영향력을 행사 했다는 증거가 될수 없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다수다.
[41]
물론 가야 연맹체의 다른 국가들도 존재했으나 김태식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광개토왕에게 의해 정복 당하기전의 임나가라의 국력은 다른 가야 연맹보다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이는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연구한 결과다
[42]
다만 이것에 대해 반론의 여지도 있다. 가라=가야는 당대에 가장 강성했던 나라를 일컫는 고유명사이며 전기에는 금관가야 후기에는 대가야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학계 견해가 있다. 그래서 임나를 금관가야, 가야를 대가야라고 상정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43]
아래 첨부된 노중국 교수의 논문에 수록된 내용이다.
[44]
이 학설은 일본사학자들 중에서는 지지를 얻는 학설로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하마다 고사쿠가 투고한 내용이다. 하단에 첨부된 페이지 311 참조.
[45]
물론 일본만 잘못된 용례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후대에 와서는 용례가 혼용되어 용례가 매우 복잡하다.
[46]
유구
[47]
해표 : 해외를 뜻한다. 어느곳에서는 한반도를 특정하는 단어로도 사용되고 있다
[48]
번국 내지는 속국
[49]
官家: 천황의 직할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