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전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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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전쟁 중 리볼리 전투를 다룬 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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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96년~1797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 벌어진 프랑스 제1공화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부이다.나폴레옹이 전역 하나의 지휘권을 처음으로 잡고 성공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는 점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최초 국면이라 할 수 있지만,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도 아니었고 절대적인 권력을 잡은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전체 전쟁의 지휘권은 파리의 총재정부가 잡고 있었고, 나폴레옹은 당시 일개 전역 야전군 사령관에 불과했다.
2. 전개
2.1. 나폴레옹의 부임
프랑스 혁명 4년차인 1793년 툴롱 공략의 승리로 명성을 얻은 나폴레옹은 다음해 24세의 나이로 준장으로 고속 승진해 이탈리아 방면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프랑스 혁명 정부는 중부~동부 유럽 뿐만 아니라 북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제국과 전쟁 중이었기에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자 했지만 3년이 넘도록 성과가 없었다.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혁명 정부 내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잠시 해임되기도 했으나 방데미에르 13일 사건 때 파리로 몰려든 왕당파를 강경 진압한 공을 세운 덕에 1796년 3월 이탈리아 방면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나폴레옹에게 주어진 병력은 4만 정도였지만, 이탈리아 방면군에 대한 보급이 무척이나 빈약해 사기가 많이 꺾여 있었다. 병사들 봉급이 많이 밀려있었고, 군복과 군화의 보급이 시원치 않아 장교들마저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있었으며, 식료품마저 부족한 상황이었다. 당시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의 주전장은 라인강 연안의 중부유럽이었기에 이미 재정난에 허덕이던 프랑스 혁명 정부는 이탈리아 방면의 군대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2.2.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원정에 앞서 "정부는 제군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제군들을 가장 비옥한 평원으로 데리고 간다. 제군은 거기서 부와 명예를 얻을 것이다."라는 연설해 사기를 단번에 끌어올렸다. 또한 자신의 연줄을 총동원하여 밀린 봉급 일부를 지급하고 군복도 최대한 마련했다.알려지지 않은 연설에 따르면 "우리는 이제부터 유럽에서 가장 이쁜 여자들이 모여 있는 로마로 들어간다" 라고 군인들을 설득했다고도 한다. 로마는 기원전 로마 제국부터 18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선 이탈리아 원정을 이탈리아 강간이라고 불리는 약탈 전쟁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전략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북이탈리아 점령 후 이를 기반으로 오스트리아 본토로 쳐들어가 전쟁을 종결시키는데 있었기에 로마가 있는 중부 이탈리아는 아예 전략 목표에서 제외되어 있어 실제로 나폴레옹이 이렇게 말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당시 이탈리아 방면 프랑스군의 한심한 상황을 고려할 때[1] 그나마 가까운 이탈리아 북부의 부유한 도시들 중 하나라면 모를까[2] 진군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로마를 점령하자는 선동이 얼마나 병사들에게 먹힐 지도 의문이다.
이 때 나폴레옹이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 북부로 쳐들어 갔다고 얘기하는 이도 있지만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은건 제2차 이탈리아 전쟁로 이때는 해안가로 돌아 산맥을 피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제1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지는 않았지만 산맥 남쪽에 해당하는 이탈리아 북부 내륙 지대를 통과해 오스트리아 본토로 향했다. 오히려 프랑스군이 해안 도로를 따라 진격할 수도 있다는 것은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착각이었다. 오스트리아군 입장에서는 프랑스 혁명 정부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지중해를 자기 앞마당처럼 드나들며 반프랑스 세력을 지원하던 영국 해군이었기에, 프랑스군이 해안가를 따라 진격하고 항구들을 점령해 영국 해군을 이탈리아 방면에서 몰아낸다는 것은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로 보였다. 그래서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을 막기 위해 전원 해안가로 결집한 상황이었고 그 상황에서 내륙지대를 통과해 온 나폴레옹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당시 이탈리아 전역을 살펴보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령 북 이탈리아가 만나는 지중해 해안 국경에서 북쪽 내륙으로 가면 프랑스 혁명 정부에 적대적인 사르데냐 왕국이 있었다. 피에몬테군[3]과 이탈리아 북부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을 합치면 5만 이상으로 4만이 안되는 프랑스군보다 많았으나, 피에몬테군과 오스트리아군 각각만 따지자면 프랑스군보다 열세인 상황이었다.
프랑스군이 해안가를 따라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는 것을 염려하던 오스트리아군은 1796년 3월 먼저 지중해 연안에 전진 배치되어 있던 프랑스군 전초부대를 공격해 격파했다. 그런데 이를 보고 오스트리아군이 지중해 연안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폴레옹은 전군을 즉시 북진시켜 사르데냐 왕국과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의 핵심지 밀라노 공국을 연결하는 산악지대를 점령해 두 나라의 연결을 끊어버린 후 사르데냐 왕국의 수도인 토리노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허를 찔린 오스트리아가 사르데냐 왕국을 돕기 위해 더 북쪽으로 멀리 돌아오는 사이 사보이아, 피에몬테를 빠르게 점령한 후 즉시 군대를 돌려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해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2.3. 북 이탈리아 진입
상술하였듯이 보급 상황이 불량했던 프랑스군이 민가를 약탈하느라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사르데냐 왕국군이 반격해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일이 몇차례 반복되긴 했지만, 워냑 약체[4]였던데다가 나폴레옹의 저돌적 진격에 허를 찔린 사르데냐 군은 빠르게 무너졌고, 오스트리아의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 항복한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는 사보이아와 니차를 할양하는 케라스코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사르데냐 왕국이 한달도 못 버티고 항복하자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반도 북부 본진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는데,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이 재배치되기 전 즉시 전군을 최단거리로 이탈리아 북부에 투입했다.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의 예상보다 빠르게 이탈리아 반도 북부 내륙 지역의 여러 거점을 점령하자 오스트리아는 북쪽으로 후퇴 가능한 병력은 티롤로 움직이는 한편, 남은 1만5천 가량은 2달치 이상의 식량을 비롯한 물자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의 최대 거점인 요새도시 만토바로 이동시켰다. 합스부르크 제국령 밀라노 공국의 정중앙에 위치한 만토바는 그 지정학적 위치만으로도 전략적 중요성이 엄청났고 주변 지형도 공격은 어렵지만 방어는 쉬운 도시였다. 굽이치는 강을 끼고 도시가 위치하여 삼면이 강으로 보호받고 주변은 늪지대라 공격군이 막사를 설치하기가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 외곽은 요새화되어 있었고 방어용 대포가 충실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이 허둥대며 물러나자 나폴레옹이 이끄는 원정대는 1796년 5월 밀라노를 손쉽게 점령하고 만토바를 포위했다. 프랑스군이 보유한 요새 공격용 중포의 수가 부족하여 만토바 공성은 지지부진했으나, 남은 프랑스군은 이탈리아 북부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또한 이때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그나마 강력한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이 프랑스 혁명 정부와 화친을 맺자 경제력만 뛰어나지 군사력은 빈약했던 파르마 공국, 모데나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등 군소국가들은 프랑스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되었고,[5] 나폴레옹은 이들 국가를 돌며 엄청난 액수의 강제로 압수한 돈'을 수금했고 이 돈을 프랑스로 보내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혁명 정부의 신임을 사는데 성공했다.
한편 북쪽의 티롤로 후퇴했던 오스트리아 본군은 증원군을 보충받아 4차례나 만토바 구원에 나서 프랑스군과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아르콜 다리 전투, 리볼리 전투 등). 당시 나폴레옹군은 상당히 불리한 처지에 있었는데, 만토바를 포위할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지역에서 넓은 영토를 지배하는 동시에 프랑스 본국과 연결되는 교통망을 유지하느라 넓게 흩어져 배치되었고, 오스트리아의 만토바 구원군은 항상 나폴레옹군 전체보다 많았다. 또한 프랑스 본국은 전력을 쥐어짜서 독일 방면의 전선에 집중하느라 나폴레옹에게 아무런 지원을 못하고 있었기에 나폴레옹은 매번 절박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2.4. 아르콜 다리 전투와 이탈리아 북부 장악
이 당시 전투들 중에 전투의 승패와 관계없이 이후 나폴레옹의 유명세에 큰 영향을 끼친 전투가 있는데 바로 아르콜 다리 전투이다. 거세게 압박하며 진격해오던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의 이탈리아 북부 지배 거점이었던 베로나 근처까지 밀고 들어오자, 나폴레옹은 수중의 병력 거의 전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을 우회해 적의 후방 보급 기지를 급습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아르콜(Arcole)이란 지역 통과 중 2,000여 명의 오스트리아군이 지키는 다리를 지나야 했지만, 프랑스군은 이미 방열되어 있던 대포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다리를 사수하던 오스트리아군을 쉽게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삼색기를 들고 최일선에서 병사들을 독려해 다리를 돌파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이후 나폴레옹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추가한 영웅담으로 실제로는 강둑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다 오스트리아군의 총격으로 죽을 뻔했다. 이때 부상투혼을 발휘한 장 란이 위기에 처한 나폴레옹을 구원했다. 이후 나폴레옹에게 천만다행으로 오스트리아군이 그대로 베로나로 전진하여 프랑스군의 본진을 털고 돌아들어와서 아르콜에 고립된 나폴레옹을 포위하는 대신에, 베로나로 향하던 병력을 돌려 아르콜로 증원하여 여기서 프랑스군과 이후 3일 동안 투닥투닥 하다가 후퇴해 전투가 종료되었다.나폴레옹은 불리한 와중에도 매번 줄 건 주는 전략을 시전하며 전력을 집중시켜 오스트리아군 취약점을 들이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했고,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구원군을 1797년 2월 리볼리 전투에서 완파했다. 만토바에서 농성하던 오스트리아군도 식량이 떨어지는 와중에 리볼리 전투의 결과를 전해듣고는 더 이상의 저항을 멈추고 항복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 북부는 온전히 프랑스군 손에 떨어졌다.
그러는 사이 프랑스 혁명 정부도 그동안 공을 들이던 독일 전역에서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에 패배해 라인강 서안으로 밀리자, 독일 전역에 대한 희망을 접고 그동안 눈부신 전공을 세운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방면군에 증원군을 보내준 덕에 나폴레옹의 운신 폭은 더욱 넓어졌다.
나폴레옹은 지원군이 도착하자마자 즉시 오스트리아 본국으로 진격을 시작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160km 거리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나폴레옹군을 요격하기 위해 독일 전역으로부터 천천히 남하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진격로의 측면과 후방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할애해야만 했고, 결국 빈을 눈앞에 두고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사실 이 상황은 나폴레옹이 자초한 바도 큰데, 원래는 라인강 서안의 독일 방면 프랑스군과 합을 맞추어 오스트리아 서쪽과 남쪽에서 양면 공격을 하기로 했으나, 오스트리아가 대비할 시간을 주면 안된다는 이유로 독일 전역의 프랑스군의 재편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움직였던 것이다.
한편 오스트리아도 사정이 안 좋았는데, 프로이센 왕국이 폴란드 분할 문제로 1795년 제1차 대 프랑스 전쟁에서 조기 이탈했고, 사르데냐 왕국도 사보이아와 니차를 할양하고 본토인 피에몬테가 황폐화되어 마비되었으며, 나폴레옹군이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바람에 빈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파국을 맞고 싶지 않았던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양쪽 모두 평화 조약을 맺는 것을 원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4월 18일 레오벤에서 정전을 제의하여 레오벤 강화가 체결되었고 1797년 10월 17일 프랑스와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가 이탈하면서 제1차 대 프랑스 동맹은 와해되었다.
2.5. 베네치아 공화국의 멸망
강화 논의가 진행될 동안 프랑스군은 가만히 있지 않고 베네치아 공화국을 공격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마지막 도제인 루도비코 마닌은 의회에서 항복을 결정하고 5월 12일 의회에서는 사실상의 항복 비준인 권한 이양 안건을 통과시켰고 1797년 10월 18일에 파사리아노에 있는 저택에서 항복 서명을 하며 베네치아 공화국은 멸망했다.이탈리아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는 사르데냐 왕국으로부터 사보이아 지역과 니차를, 옛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중 이오니아 제도를,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라인강 서안 대부분과 오늘날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차지했으며 롬바르디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프랑스 제1공화국과 같은 공화제를 도입한 치살피나 공화국(Repubblica Cisalpina)을 수립했다. 오스트리아는 밀라노 공국을 포기하는 대신 옛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를 획득했다. 이렇게 한때 동 지중해를 내해로 만들 정도의 해양 강국이었던 베네치아는 멸망 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게 분할되었다.
당시 베네치아는 전성기 때의 국력을 모두 상실해서, 멸망 당시 베네치아 해군의 전력은 갤리선 십여척이 전부로 쓸 만한 게 없었던지라 나폴레옹은 조선소에서 만들고 있던 프리깃 2척만 강탈해 갔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의 S자 운하와 산마르코 광장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이 때 강탈한 프리깃 2척은 이후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탈출할 때 유용하게 써먹었다. 나폴레옹은 이 전쟁의 승리로 국민적인 영웅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으며 베네치아에 남은 해군 인프라는 구 베네치아 공화국령을 접수한 오스트리아가 써먹게 된다.
3. 결과
이 시기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할 때 나폴레옹이 보여준 군재는 상당한 것이었는데 아르콜 다리 전투 같은 프로파간다성이 짙은 전투를 제외하더라도 질적으로 정말 아무것도 없던 프랑스군을 이끌고 병력을 집결시켜서 적의 의표를 찌르며 빠르게 공격해 들어가 항상 국지적 병력 우위를 유지하는 전략전술을 보여주었다. 이전에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맡은 군대의 상태가 정말 안좋았으며,[6] 본국의 지원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오히려 적군을 연파하고 본국에 막대한 지원금을 보내주면서 결국 적국의 수도 근처까지 밀고 들어가 전쟁을 종결시킨 나폴레옹의 군재가 동시대 다른 장군들과는 궤를 달리했음을 보여주는 예시로 군사사에서 연구되고 있다.나폴레옹군은 부유한 이탈리아 북부를 제대로 약탈했는데 당시 이탈리아 원정을 왔던 프랑스군 병사들은 보급이 제대로 안 돼 군화조차 없어 맨발로 다닐 정도로 거지 꼴이라 물불가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지휘로 잇따라 승리를 거두자, 부유했던 이탈리아 도시에서 마구잡이 약탈을 벌였다. 나폴레옹 역시 이탈리아에서 약탈한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과 귀금속을 프랑스로 보냈고, 이 때문에 정부로부터 큰 신임을 얻었다. 다만 이 대규모 약탈로 이탈리아인의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진 탓에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제 성냥 불매운동이 일어나는 부작용이 벌어지기도 했다.
[1]
군화도 없어
병사들이 맨발로 다니는 형편이었다(...).
[2]
북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이후부터 중세와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부유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3]
사르데냐 왕국의 기원이
토리노를 중심으로 하는 사보이아 공국이니 만큼 왕국의 중심지는
사르데냐가 아닌
피에몬테였다.
프로이센 왕국의 중심지가
동프로이센이 아닌
브란덴부르크였던 것과 같다.
[4]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 밈까지 있을 정도로
사르데냐 왕국은 전신
사보이아 공국, 후신
이탈리아 왕국을 통틀어 잘 싸워본 적이 거의 없다.
[5]
지난 수 세기 동안 이탈리아 반도의 평화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사보이아-
사르데냐,
나폴리-
시칠리아 4국의 힘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 중 둘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부유한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수 차례 격돌했지만 한쪽을 완패로 몰아넣고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꿀꺽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특정 진영이 큰 승리를 거둔 때가 있어도 이미 전력의 상당 부분을 손실한 터라 제법 강성한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이 남부에서 버티는 한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차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쫒겨나고 나폴리-시칠리아 왕국도 프랑스와 싸울 의사가 없음을 드러내자 이제 이탈리아 반도는 프랑스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6]
당시 혁명군은 혁명 당시 장교진들이 대거 숙청당한 데다 규모를 불리기 위해 일단 징집부터 하고 보느라 보급도 개판이었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