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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04 02:07:02

리볼리 전투


파일:external/www.military-art.com/dhm045.jpg
1. 개요2. 배경
2.1. 알빈치의 공세2.2. 나폴레옹의 대응
3. 전투 직전4. 전투 경과
4.1. 연이은 위기4.2. 대반전
5. 결과 및 영향

1. 개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에서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

이전까지 이탈리아 원정의 양상은 만토바를 포위한 나폴레옹을 격퇴하고 만토바의 포위를 풀기 위해 오스트리아군이 알프스나 베네치아 방면에서 내려오고, 병력의 열세를 가졌던 나폴레옹이 그걸 매번 간신히 격퇴하는 형태였는데, 이 전투 이후로 이탈리아 방면의 오스트리아 군이 거진 박살이 나고 총재정부가 이탈리아 방면군에 지원을 해주기 시작하자 전쟁의 양상이 나폴레옹 쪽으로 확 기울었다.

2. 배경

1797년 나폴레옹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비록 1796년 11월 아르콜 다리 전투에서 알빈치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어 오스트리아군의 만토바 해방시도를 좌절시키긴 했으나 아직 오스트리아군은 건재했고, 총재정부로부터의 지원도 여전히 제대로 오지 않고 있었다.

물론 오스트리아 군의 사정도 좋지 않긴 매한가지였다. 비록 프랑스군이 난공불락인 만토바 요새를 쉽사리 건들진 못하고 있었으나, 만토바 요새의 오스트리아 군도 프랑스군의 포위에 보급이 거의 바닥났고, 여기에 요새를 강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 합쳐져 전염병까지 돌아 제대로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전체의 약 1/3인 9,8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비록 만토바 요새의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뷔름제르가 실날의 희망을 붙잡고 계속 버티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할 상황이었고, 만토바를 내주면 이탈리아를 포기해야 했다.

따라서 알프스와 베네치아 방면의 오스트리아 군은 최대한 조속히 만토바 요새를 해방시키기 위해 라인 전선에서 이탈리아 방면으로 병력을 차출해 이탈리아 방면의 병력을 증원시킨 후 만토바로 진격해 포위를 풀고자 했다.

2.1. 알빈치의 공세

이때 나폴레옹의 휘하에는 총 46,000명의 병력이, 알빈치의 휘하에는 총 47,000명의 병력이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만토바 포위를 위해 약 10,000명의 병력을 할당해야했고, 알빈치가 북쪽 쥐트티롤 방면으로 올지, 아니면 동쪽 베네치아 방면으로 올지 몰랐기에 나머지 병력도 각 방면에 분산시킬 수 밖에 없었다.

알빈치는 1797년 1월 동쪽 베네치아 방면을 조공으로 하고 주력 28,000명은 쥐트티롤의 아디제 계곡으로 남하시킨다. 알빈치는 병력을 나누어 아디제 계곡을 지키던 주베르의 병력을 포위섬멸하고 그대로 아디제 계곡을 나와 만토바를 해방시키려 했으나,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을 넘나드는 무리한 작전으로 병력들이 서로 손이 맞지 않고 헤매는 모습을 보여 주베르의 병력이 리볼리로 후퇴해 방어태새를 갖추는 것을 막는데에 실패한다.

2.2. 나폴레옹의 대응

3. 전투 직전

4. 전투 경과

4.1. 연이은 위기

4.2. 대반전

5. 결과 및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