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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4-12 20:04:01

왕야차오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王亞樵

중화민국의 정치인. 공작의 대가로 다이리에 맞먹는 자객으로 암살대왕, 부두방주, 인간마귀로 악명을 떨쳤다. 하지만 장제스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친 다이리와 달리 반장파의 일원으로 서남파를 지원하여 수차례 장제스, 왕징웨이 암살을 시도하였다.

2. 생애

1889년 안휘성 합비에서 관을 파는 동네 의원의 아들로 출생했다. 1908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으며 1911년 무창봉기가 일어나자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중화민국 건국 후 1912년 사회당에 입당, 안휘성 지부장을 담당했다. 1913년 안휘독군 니쓰충의 독재가 강화되자 상하이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안휘방이라 불리는 안휘성 출신 청방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왕야차오는 1921년 비밀결사인 상하이 영공회를 조직, 노동조합과 상하이 암흑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 왕야차오를 눈여겨본 절강독군 겸 상하이의 지배자였던 루융샹은 1923년, 왕야차오를 절강종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이미 왕야차오는 암살대왕으로 불리고 있었다. 상하이 암흑가를 떠돌던 다이리도 왕야차오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통치기술을 배웠다.

1923년 봄에서 가을, 장강 하류의 통제권을 둘러싼 군벌들간의 다툼에서 왕야차오는 용병단을 조직해서 군벌들에게 제공했으며 이 때문에 상하이 경찰국의 요주시 인물로 등록되었다. 그러던 왕야차오는 갑자기 볼셰비즘 혁명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이 때문에 상하이 경찰은 1923년 11월, 공산주의자들이 왕야차오의 청방 조직원들과 힘을 합쳐 상하이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왕야차오에 대한 집중감시를 시작하였다. 1924년 강절전쟁이 벌어지자 상하이의 지배자였던 절강독군 루융샹으로부터 사령관에 임명하여 싸웠으나 쑨촨팡, 치셰위안의 공격에 중과부적으로 패하였으나 직예군벌이 파견한 상하이 경찰대장 서국량을 암살하는데는 성공했다. 1926년 안휘선위부사에 임명되었으며 상하이의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국민혁명군에 호응하여 북양군벌과 싸웠으나 반장파가 되어 이후 장제스와 쑹쯔원 암살을 계속해서 시도했다.

동방무정부주의연맹의 간부로 활동했으나 동방무정부주의연맹의 무력함에 실망하여 다른 간부인 화균실과 함께 1931년 11월, 중순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회영, 백정기, 정화암 등과 힘을 합쳐 기존의 동방무정부주의연맹을 대체할 새로운 조직인 항일구국연맹을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수립하고 산하의 흑색공포단의 활동 경비와 무기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흑색공포단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고 항일구국연맹은 자연스럽게 와해되었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이때 김구와 힘을 합쳐 한인애국단에게 무기, 자동차,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만주사변을 획책했던 일본군의 이타가키 세이시로를 암살하려고 했으며 이봉창 의사의 사쿠라다몬 의거를 지원했다고 하는데 글쎄...?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왕야차오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장제스 계열의 한인애국당이 아니라 남화한인청년연맹 등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1931년 7월 국민정부 재정부장 쑹쯔원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나 그의 비서만 죽이고 실패로 돌아갔다. 1931년 12월부터 1932년 10월까지 남화한인청년연맹에 1200불의 자금을 지원했으며 한국 독립운동가 원심창에게도 1931년 9월부터 1년 동안 생활비를 제공했다. 또한 백정기를 도와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에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만주사변 발발 후 장쉐량이 사직을 통전하자 그에게 폭탄을 보내기도 했다.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에 대항하는 의용군을 조직했다. 그리고 중국무역기선회사 전무이사 조철교를 비롯하여 일본에 협력하는 걸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암살했으며 상하이의 국제연맹 대표들에 대한 암살도 기도했다.

1932년 4월, 국민정부 행정원장 대리 천밍수, 19로군 총지휘 장광나이, 19로군 군장 차이팅카이의 사주를 받고 제1차 상하이 사변에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일본군의 경축대회장에 테러를 자행하려 했는데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천밍수가 왕야차오와 김구, 안창호를 연결시켜주어 왕야차오가 김구에게 자신이 만든 폭탄과 활동비 4만원을 제공하는 등 훙커우 공원 의거의 중요 참여자라고 주장하지만 장제스와 친밀했던 김구와 왕야차오가 연계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한 편이며 둘이 힘을 합쳤다는 그 어떠한 문서적 증거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백정기의 별개의 거사를 돕기 위해 그에게 권총을 구해준 것 등은 확인되는데 중국 학계에서 주장하는 것도 백정기와 왕야차오의 관계를 두고 김구와의 관계로 침소봉대하는 것일지도?

오히려 독립운동가 정현섭의 회고에 따르면, 왕야차오는 후한민, 바이충시, 리쭝런, 천밍수, 차이팅카이 등 서남의 정객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장제스의 선안내후양외 정책을 비판하며 그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는데 이를 위해 장제스의 지원을 받던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장제스 암살에 이용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제스도 왕야차오를 몹시 두려워했으며 그의 이름이 들리면 틀니까지 떨면서 창문이 잘 잠겼는지부터 확인했다고 한다. 상하이 타임즈는 왕야차오를 공공의 적 1호로 보도했으며 왕야차오의 악명이 이 정도에 이르자 다이리가 왕야차오를 제거하기 위해 수차례 공작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다이리의 추격을 피해 1차 양광사변 이후로 서남정무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치를 실시하고 있던 광동성 오주로 피신한 왕야차오는 1935년 11월, 광동파 정객 리지선 천밍수의 사주를 받고 정부에 불만이 많던 전직 군인인 기자 손봉명을 이용하여 왕징웨이 저격 사건을 일으켰다. 이때 왕징웨이의 척추에 박힌 총알은 끝내 제거되지 않아 골수암으로 이어졌고 왕징웨이는 이 때문에 일본 나고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외교부 차장 탕유런도 왕야차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결국 다이리는 왕아초의 부하인 여립규를 체포, 그의 첩인 여완균을 매수하여 왕야차오에게 접근, 1936년 9월에 그를 사살하였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