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옥관빈 玉觀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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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00001><colcolor=#fff> 이명 | 옥혜관 |
출생 | 1891년 1월 18일 |
평안도 | |
사망 | 1933년 8월 1일 (향년 4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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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하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2. 생애
2.1. 독립 운동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1917년 11월 24일 석방되었다.이후 옥관빈은 상해 임시 정부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관여했지만 깊이 발 담그지는 않았고, 안창호 계열과 결을 같이 했지만 흥사단에 깊이 발 담그지는 않았다. 옥관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단체인 상해대한교민단을 위주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그는 임시정부 의정원을 역임하고 상해 임시정부 창립에 가담했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독립신문사의 총무를 역임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안창호 계열로 분류하였다. 1926년 10월 8일 안창호가 길림성에서 군사단체를 조직하다가 체포되는 일이 있어서 안창호 지지자들이 성토문을 제출한 적이 있다. 이 성토문에도 옥관빈은 안창호 계열로 나타난다.[1]
임정과 인성학교 등에 자금을 지원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갑자기 독립운동가들을 비웃는 말을 하게 된다. "인성학교에 돈을 준 옥관빈은 우리나라 신문을 이용하여 자기를 과대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를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자금난에 쪼들리자 그는 김구에게 아편같은 마약 밀매로 돈을 벌어보는 것은 어떤지를 물었다. 아편장사를 하던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를 불쾌하게 여겼던 김구는 그의 제안에 분노하였다. 그는 이승만에게도 임정에서 미국에 마약밀매를 해보면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이승만은 대답도 하지 않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1922년경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를 논하기 위해 시사책진회를 조직했다. 이때 옥관빈은 안창호, 신익희, 원세훈, 오영선, 이탁, 여운형, 이동녕,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조직에 참여했다.
옥관빈은 대한청년대회에게 '잠시 혁명단체가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기를 구할 것'을 요구하면서 구체적으로 '임시 의정원 의원을 전부 사직시킬 것', '각지에 통고하여 의원과 명사를 선출하여 임시 의정원을 완전 충실케 할 것', '헌법제도를 수정하여 시의에 맞게 할 것', '대통령의 임기를 정하고 개선할 것'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조를 건의했다.
2.2. 친일 행적
1933년 7월경, 이때부터 그는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일본 군대에게 약 2만원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 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밀정행위를 했다.[2] 그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를 친일파로 보고 있었다.2.3. 옥관빈 피살사건
김구는 옥관빈을 총살시키려는 계획하고 1933년 8월 1일 작전을 실행했다. 옥관빈은 결국 엄순봉의 총에 맞아 즉사했다.3. 여담
3.1. 친일 행적에 관한 의문
자세한 내용은 옥관빈 피살사건의 5번 문단 참조이러한 논란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들지 못했으며 서훈도 받지 못했다. 황옥과 비슷하다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