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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1-01 10:16:47

예수(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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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혈통4. 타나크

1. 개요

기독교에 의하면 온 인류의 구세주이자 성부, 성령과 다른 위격(페르소나)이되 본질(essence) 및 본성(nature)은 같은 자로, 그의 실체(substance)는 하느님이다.[1]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삼위일체론[2]

2. 상세

교부(敎父)들을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일치 안에서 한 분이시며 같은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데, 그는 신성(神性)에 완전하시며, 동시에 인성(人性)도 완전한 분이시고, 참으로 하느님이심과 동시에 참으로 인간이시며, 또한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시며, 그의 신성은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고 계시며, 그의 인격은 우리와 같은 본질을 지니고 계시는데, 죄로부터는 떨어져 있으나 모든 측면에서 우리와 같으시고, 그의 신성에 관해서는 역사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출생하셨고, 그러나 그의 인간적 출생에 관해서는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한 분이시고 동일한 그리스도, 성자, 주님,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는 2가지 본성으로 인식되는 바, 혼돈 없이, 변화 없이, 구분 없이, 분리 없이 계신 분이며, 본성들의 차이는 결합으로 인해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 오히려 각 본성의 특징들은 보존되고, 한 위격과 생존을 형성하기 위하여 함께 오며, 두 위격으로 분리되거나 나눠짐 없이 한 분 같은 성자요 독생자이시며, 말씀,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와 같은 사실은 심지어 가장 최초의 예언자도 그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교부들의 신조로도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칼케돈 신조
[3]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聖父)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말씀)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말씀)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말씀)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육신(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 복음서 1장 1-14절.

그분(=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피 서간 2장 6-8절.

기독교적 관점에서 예수의 정체를 유추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은 요한 복음서이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는 한처음에[4] 하느님과 같이 있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 예수는 하느님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5]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말로, 예수가 인간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요한 복음서의 이 구절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100% 인간이면서[6] 또한 100% 하느님이라고 본다. 또한 예수가 하느님이면, 그리스도교가 어째서 유일신교가 되냐는 의문이 나오자 삼위일체론으로 이것을 설명했다. 즉 성부는 하느님이고, 예수도 하느님이며, 성령도 하느님이지만, 성부 = 예수 = 성령은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다.

특히 다음 구절들을 보면 이 뜻은 더 명확해진다.[7]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 '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God replied to Moses: I am who I am. Then he added: This is what you will tell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출애굽기(탈출기) 3장 14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He said to them, “You belong to what is below, I belong to what is above. You belong to this world, but I do not belong to this world. That is why I told you that you will die in your sins. For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you will die in your sins.” So they said to him, “Who are you?” Jesus said to them, “What I told you from the beginning. I have much to say about you in condemnation. But the one who sent me is true, and what I heard from him I tell the world.” They did not realize that he was speaking to them of the Father. So Jesus said (to them), “When you lift up the Son of Man, then you will realize that I AM, and that I do nothing on my own, but I say only what the Father taught me.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because I always do what is pleasing to him.” Because he spoke this way, many came to believe in him.
요한 복음서 8장 23-30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Jesus said to them, “Amen, amen, I say to you, 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
요한 복음서 8장 58절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고백하는 초월자를 뜻하는 말인 야훼는, '나는 있다', '나는 나다' 등의 뜻이며 영어로 하면 'I AM'이 된다. 그런데 인용한 구절들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I AM으로 소개하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자신을 야훼라고 드러냈다.[8]

문제는 이 교리는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점이며, 초기 그리스도교의 분열은 대부분 이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이거 때문에 초대교회에서 아리우스파,[9] 네스토리우스파,[10] 오리엔트 정교회[11] 등이 떨어져 나갔으며, 급기야 초대교회 자체가 가톨릭[12] 정교회[13] 찢어져 버렸다.

한편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유대교 이슬람에서는 바로 이 삼위일체론 때문에, 기독교를 다신교라고 디스한다.[14]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삼위일체론 항목을 참고해 보자.

3. 혈통

성경에 따르면, 즉 마태오 복음서 1장에서 기록된 예수의 계보에 따르면 예수가 아브라함 다윗의 후손이라고 나온다.[15] 루카 복음서 마찬가지로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계보를 서술했지만,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 족보의 차이는 신학계에서 자주 다뤄진 떡밥.

마태오 복음서 루카 복음서의 해당 서술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관념인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온다는 생각과 메시아 탄생 때에는 특별한 하느님의 표징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서술로 추측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하며 나자렛의 요셉에게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알리는데, 해당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은 동정녀가 아닌 '(결혼하지 않았을 정도로) 젊은 여인'이다. 그런데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역 성경에서는 그것을 동정녀로 옮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느님의 특별한 표징' 중에는 처녀 잉태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현대 신학계에서는 족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두 복음서가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서술되었지만 서로를 참고하지 않고 서술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는 족보를 아브라함까지 거슬러가고, 루카 복음서는 아담과 하느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태오 복음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서술한 것이며, 루카 복음서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쓰인 복음서여서 모든 인류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4. 타나크

흔히 예수가 타나크(구약)의 율법을 폐지하였다고 표현되지만, 이 표현에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예수 자신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 복음서 5장 17절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가 보는 타나크의 율법은, 예수가 폐지한 것이 아니라 완성한 것이다. 또한 같은 원리로, 신약은 타나크를 폐지하지 않는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신약은 타나크의 후속작이 아닌 확장 팩에 해당하는 것이며, 따라서 타나크가 부정된다면 신약은 의미를 상실한다고 그리스도교는 해석한다.[16]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는 상술했다시피 타나크에서는 예수에 관한 복선이 들어있다고 보고 있으며,[17] 심지어 예수 자신도 타나크의 복선 및 떡밥을 회수하고 자신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이사야서의 다음 구절을 보자.
가톨릭 성경 개신교 개역한글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사야서 52장 13절-53장 12절[18]

이 구절은 이른바 ' 야훼의 종'으로 불리는 이에 대한 구절로, 타인의 악행과 죄악을 짊어지고는 재판을 통하여 죽는다. 그러면서도 이 종은 초월자에게 벌 받은 자로 여겨지며,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다. 예수는 바로 이 '야훼의 종'의 행적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하였고, 그렇기에 스스로가 구약에 이미 예고되어있는 자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나자렛에서는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복음서 4장 18-19절

라며 이사야 61장 1-2절을 칠십인역에 따라 자유롭게 인용하여, 자신이 구약에 예고되어 있는 예언자임을 강조했다.[19] 그 밖에도 자신이 요나의 기적을[20]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빵으로 장정 5천명 이상을 먹인 기적에서는 출애굽기의 만나 및 예언자 엘리사의 기적을 자신에게 연관시킨다. 또한 신명기에는 모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구절이 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신명기 18장 15절

그런데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가 수명을 마치고 난 후, 후일담 격으로 나오는 구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이 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 신명기 34장 10절

모세는 하느님이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보내줄 것이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였는데, 정작 신명기의 저자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시대까지 모세 급 예언자는 알려진 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명기는 이 떡밥이 회수되지 않은 상태로 끝난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과 (부자(父子) 관계로 표현되는) 매우 특별하고 각별한 관계를 이루며, 자신을 보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며, 자신이 아버지와 어떤 동일함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 야훼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사귀는 사람'이라는 모세 급 예언자의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동시에 그 조건을 뛰어넘는 예언자임을 표현한다. 그 밖에도, 예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자신이 타나크에 예고되어 있고, 복선이 뿌려져 있는 자라는 점을 계속 강조한다. 그렇기에 타나크를 예수에 대한 복선과 떡밥을 찾으며 읽는 것은, 그리스도교에서 매우 권장하는 독서법이다.

당연히 유대교에서는 이런 해석을 부정한다. 유대교는 신약을 타나크의 확장팩이 아닌 동인 작품(…)으로 여기며,[21] 비록 타나크에서는 메시아의 도래와 같은 많은 떡밥들이 맥거핀 상태이기는 하지만, 하느님께서 왜 떡밥 회수를 하지 않았느냐고 묵상할 일이지, 거짓 예언자가 떡밥을 회수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 떡밥이 풀리는 건 결코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래도 현대에는 예수를 구세주나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까진 인정 안하더라도[22] 개혁자나 선지자 정도론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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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에서 묘사하는 예수는 100% 거짓 없는 하느님이면서 또한 거짓 없는 인간이며, 창조되지 않은 자,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한 자이다. 그는 창조주임에도 피조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었다고 한다. [2] 물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종파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일찍이 사라졌다.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서방의 가톨릭이든, 동방의 정교회이든, 이집트의 콥트교회이든, 에티오피아 정교회이든, 네스토리우스파의 후예인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든 간에 구체적인 해석은 갈릴지언정, 삼위일체의 기본 개념, 즉 세 페르소나가 한 실체를 이룬다는 교리는 공유한다. 또한 이 기본 개념에 대한 정의도 콘스탄티누스 1세때 나온 것이라 늦은 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엄밀한 정의가 늦게 나왔다는 뜻이지, 삼위일체 개념 자체가 갑툭튀한 것은 아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성부와 동질성을 가진다고 해석될 구절이 많았고, 반대로 구분을 암시하는 듯한 구절도 많았다. 여기서 양극단[23]을 우선 쳐내고, 그리스 철학을 통해 복음서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고 한 결과물이 지금의 삼위일체 정의이다. [3] 영어 번역본을 중역하되, 이 항목에서는 person(페르소나)은 위격으로, nature는 본성으로, essence는 본질로 번역했다. [4] '한처음'은 라틴어로 In principio. 창세기에서도 사용된 말로, 단순히 시간상으로 처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단순한 시간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근원적으로' 정도의 의미이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인 '한처음'이라는 요상한 말로 번역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 타입문 세계관의 근원이라는 말이 떠오를 수도 있는데, 사실 진짜로 그것과 비슷한 의미이다. [5] 라틴어로 caro. 번역에 따라 이를 육신이 아니라 사람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한국 가톨릭 번역판 성경. 그런데 라틴어에서 사람을 뜻하는 말은 homo이고, 그렇기에 요한 복음서에서 굳이 homo 대신 caro를 택한 것은 꽤 주목할 만하다. 굳이 이 구절에서 복음서가 caro라는 말을 쓴 것은, 예수가 단순히 인간의 형상을 취한 것이 아니라, 나약한 육신을 지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었다는 뜻으로 적은 것이다. 디아블로 시리즈에서 티리엘 필멸자가 된 것이 연상될 수 있는데 실제로 티리엘의 모델이 예수이고, 이 구절에서 caro는 '필멸자'에 가까운 뉘앙스로 쓰인 말이다. [6] 원죄가 없다는 점 때문에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람은 원래 원죄가 없는데 아담 하와의 죄 때문에 원죄에 시달리는 것이다. 즉 예수가 원죄가 없다고 해서 그가 사람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애초에 사람은 세례만 받아도 원죄를 용서받는다. [7] 인용한 국역 성경 영어 성경은 각각 가톨릭 성경과 New American Bible Revised Edition(새 미국) 성경 개정판, NABRE)이다. I AM의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이 역본들을 인용했다. 또한 NABRE에서 I AM을 대문자로 강조한 것도 그대로 인용했다. [8] 참고로 흔히 성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알려진 야훼는, 성부만을 뜻하는게 아니라 삼위 전체를 모두 지칭한다. 그렇기에 가톨릭 성경 등에서 야훼를 성부가 아니라 주님(Dominus)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애초에 야훼는 엄밀히 말하자면 제우스, 오딘 같은 이름이라기보다는 존재방식의 표현에 가까운 어휘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말 그대로 I AM이다. 예수가 야훼라고 하는 게 양태론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양태론은 예수가 성부라고 하는 것이지 야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9]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며, 하느님이 창조한 반신급 피조물이다'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파가 세력을 얻은 곳은 중동지역인데, 훗날 이슬람에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이슬람이 이해하는 예수는 아리우스파의 관점과 비슷하다. [10] '예수 안에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분리되어 있다'고 보았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여 보지 않는다. 위의 칼케돈 신조에서 보듯이, 정통 신학에서는 예수에게 인성과 신성이 혼돈 없이, 변화 없이, 구분 없이, 분리 없이 있다고 본다. [11] 예수에게는 신성만이 존재하거나, 인성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12] 성령은 성부와 예수에게서 발한다고 보았다. [13]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발한다고 보았다. [14] 다만 호칭으로써 기독교가 다신교라는 건 사실 굉장히 질떨어지는 유치한 디스인게, 유대교 경전에서 유일신이라면서 호칭은 장엄복수형(엘로힘,하나님들)으로 부르고 이슬람은 경전에 이방여신들이 버젓이 언급되어있으며, 무엇보다 알-라라는 이름 자체가 어원적으로 고유명사가 아니라 정관사+일반신(즉, 그 신) 조합이라 어원적으로 신이 많다는 것을 전제하는 단어이다. 같은 기준으로 따지면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다신교다. 누가 누굴 디스하나? [15] 그러므로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가 14대이고, 다윗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가 14대이며, 바빌론으로 끌려간 다음 그리스도까지가 또한 14대이다. 마태오 복음서 1:17(공동번역성서) [16] 일찍이 마르치온 같은 경우 "타나크 폐지하고 신약으로만 가시죠?"라고 주장하였으나, 교회에서는 "오리지널 없이 확장 팩을 어떻게 돌리라는 것이오?"라며 파문했다. [17] 때문에 유대교 그리스도교는 토라 즉, 모세오경을 해석하는 경향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유대교는 토라를 율법에 대한 근거로 여기며, 심지어 흔히들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쯤으로 해석하는 창세기에서도 할례의 유례 등을 찾아내며, 그렇기에 엄연히 율법서로 친다. 반대로 그리스도교에서는 토라인 모세오경에서 복선을 찾아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으며, 출애굽기는 복음서의 복선으로 본다. [18] 왼쪽은 가톨릭 성경, 오른쪽은 개신교 개역한글 성경. 화자가 야훼인지 이스라엘 사람인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묘사되어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주는 운문이다. 워낙 중요한 구절이다 보니, 번역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맛깔 나는 번역을 한다. 굳이 양쪽 번역을 다 인용한 것도 이 때문. [19] 칠십인역의 이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구약 본문은 다음과 같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20] 예언자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나왔고, 이후에 이민족인 아시리아에 유대교 신앙이 전파된다. 이에 대비되어 예수는 죽은 지 셋째 날에 부활하고, 이후에 민족신앙적 요소를 완전히 탈피한 그리스도교가 세계로 퍼진다. 여기서 눈썰미가 빠른 사람은,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이었고 "예수는 셋째 날에" 부활이므로 날짜가 하루 차이 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시대에 따른 어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복음서는 이 어휘 변화의 과도기로 학계에서 추정되고 있다. 이를테면 루카 복음서에는 예수의 부활이 '사흘 만에'로 표현되고, 마태오 복음서에는 '사흗날에'라고 표현된다. 그러나 공관복음은 모두 예수가 금요일에 사망하여 주일(일요일)에 부활했음을 고백한다. [21] 비슷한 이유로 강성 유대교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 성경을 운운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데, '유대교가 보기엔 '동인 작품'인 신약과 꾸란을 가지고 본편을 해석하려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원론적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유대인을 원작자도 못알아본 팬들이라 본다. [22] 이를 인정하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닉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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