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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08:43:10

양썬

양삼에서 넘어옴
파일:양삼.jpg
중화민국 27집단군 총사령관
정체 楊森
간체 杨森
한국식 독음 양삼
영문 Yang Sen
자혜(子惠)
출생 1884년 2월 20일 청나라 사천성 광안현
사망 1977년 5월 15일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사천육군속성학당
직업 정치가, 군인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국민당 합류2.3. 30년대~말년
3. 가족4. 여담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사천의 토착군벌로 중국국민당에 참가하여 중국공산당과 적대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4년 사천성 광안현에서 태어났다. 사천육군속성학당을 졸업하고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 홍헌제제를 일으키자 이에 대항하는 호국전쟁에 참가했으며 1917년에 호법전쟁에 참여, 탕지야오의 운남군을 따라 사천에 들어와 우광신의 북양군에 맞서 싸웠다. 1920년 운남군과 완전히 결별하고같은 사천성 육군속성학당을 졸업한 속성계 류샹의 휘하에 들어가 사천군 제9사단장 겸 천남도윤, 2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연성자치론을 주장했다. 이후 웅극무는 사천성장에 추천되었고 류샹이 중경호군사에 추천되었는데 사천성은 이때 9개 진수사구, 즉 방구로 개편되었고 양썬은 노주 진수사 겸 천동호군사가 되었는데 노주 지역은 부유하여 세력을 도모할 수 있었다.

1921년 7월 류샹이 사천성 군사장관, 사천군 총사령관 겸 사천성장에 추대되자 충칭에 주둔하게 되었고 충칭의 행정 개혁을 담당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1922년 1군 3사단장 등석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충칭에서 축출되었고 우한까지 밀려났다. 이때 연성자치론을 버리고 자치를 반대하는 우페이푸와 소요남 등 직예군벌 지지를 통전하며 우페이푸의 지원을 받고 류샹과 함께 사천에 재진입했다.

이때 1차 직봉전쟁이 겹치면서 사천의 패권을 놓고 각 세력이 개입하여 사천은 여러 세력들간의 혼전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양썬은 이 싸움에서 웅극무를 패배시키고 사천군무독판 겸 사천성장이 되어 72개 현을 지배하고 16만의 대군을 거느렸다. 1925년 북양정부로부터 참모총장에 임명, 1925년 7월, 귀주군벌들의 지원을 받아 류샹과 패권 싸움을 시작했으나 후원자인 우페이푸 2차 직봉전쟁에서 몰락한 후라 더 이상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1926년 5월 류샹을 중심으로 사천군벌들이 연합하여 패배하였다.

2.2. 국민당 합류

1926년 8월 29일 태고양행 소속의 영국선박 만류호가 사천성 운양강에서 중국 목선 3척과 부딪혀 침몰하여 64명이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양썬이 조사를 맡았는데 양썬은 영국 상선 3척을 억류하였다. 그러자 만현에 정박한 영국 함정이 발포하는 만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영국 공사가 마일스 램프슨[1]으로 교체되었다.

이 상황에서 1926년 7월 장제스가 영도하는 중국국민당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였다. 1926년 9월 28일 중국공산당 충칭지방위원회는 국민당 사천성 임시 지부의 명의로 군사회의를 개최하여 북벌에 호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류보청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해 주더, 천이 등과 함께 사천성을 공략하도록 했는데 양썬은 주더의 국민혁명군과 조우하게 되었다. 만현 사건으로 열강에 분노해 있던 양썬은 사천군벌 들 중에서 제일 먼저 북벌에 호응하여 1926년 11월 21일 중국국민당에 가입, 국민혁명군 20군 군장에 임명되어 장강 하구와 사천 동남부를 장악하고 제5로군 전적 총지휘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거느린 병력이 30만에 달했다.

1927년 장제스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한이 분열되자 초기에는 우한 국민정부에 복종했으나 공산당의 폭동에 불만을 품고 1927년 5월 의창을 점령하고 총공회와 농민협회를 해산, 공산당원을 대대적으로 처형하여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공산당 반대, 우한 국민정부 토벌을 통전하고 14독립사단장 하두인과 연계하여 우한으로 진군했다. 이에 36군 33독립단장 허극상, 35군 군장 허젠 등이 호응하여 마일사변으로 번졌으나 5월 25일 우한 전투에서 우한 경비사령 겸 4독립군장 예팅에게 패하였고 6월 24일 의창을 잃고 파동으로 달아났다. 이후 영한합작이 일어나자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하여 장제스에게 충성했다.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중국이 통일된 이후에는 1928년 류샹과 사천의 패권을 놓고 싸우다 패배하여 모든 기반을 류샹에게 뺏기고 충칭 북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이후 사천성은 류원후이, 류샹, 등석후, 전송요가 나눠가졌고 1931년의 이류지전 이후에는 류샹이 지배하게 되었다. 1931년 시점에서 양썬 병력은 3만에 고작 5개 현을 지배할 뿐이었다. 그나마 더 줄어 1932년에는 병력이 2만명에 불과했다.

2.3. 30년대~말년

1933년 사천초비 제5로군 총지휘에 임명되어 초공작전에 참전했고 공산당을 토벌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27집단군 총사령 겸 21군 군장에 임명되어 쉬저우 전투, 우한 방어전, 창사 방어전에 참전했다. 중일전쟁이 끝난 이후 국민당 중앙감찰위원, 충칭시장을 역임했으며 국부천대 때 장제스를 따라 타이완으로 이주, 총통부 국책고문, 전략고문,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77년 93세까지 장수하다가 사망했다.

3. 가족

아내가 12명, 자녀가 43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다섯째 부인은 배에 탔다가 배가 전복되어 사망했다.

여섯째 부인은 원래 세번째 부인의 하녀였는데 15세 때 양썬에게 강간당했다.

일곱째 부인은 14세 때 양썬에게 강간당했고 21세 때 양썬에게 살해당했다.

여덟째 부인은 15세 때 양썬과 혼인했다. 이후 양썬이 설립한 중학교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

아홉째 부인은 14세 때 양썬과 혼인했다. 대학교 다니다가 남친을 사귄 것을 양썬에게 들켜서 살해당했다.

열번째 부인은 17세 때 양썬과 혼인했다.

열한번째 부인은 양썬의 하인의 딸이다. 14세 때 양썬과 혼인했다.

열두번째 부인은 대만 출신으로 17세 때 80대인 양썬과 혼인했다.

양썬은 군대식으로 부인들을 관리했다고 하며 규칙을 어기면 채찍질을 하거나 살해했다.

4. 여담

아이를 출산한 부인에게는 확실한 금전적 보상을 했다고 한다. 양썬은 부동산, 담배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고 미국, 영국, 일본 등의 해외은행에 막대한 예금을 넣었다라고 알려져 있다.

200살을 넘게 살았다고 전해지는 리칭윈을 만나 사진을 찍은 인물이 바로 이 인물이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여담으로 마일스 램프슨의 외손자가 나인 인치 네일스의 멤버이자 아카데미 영화음악상 수상자인 애티커스 로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