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Я повторяю десять раз и снова, никто не знает как же мне хуёво.
나는 열 번이고 다시금 반복해, 아무도 내가 얼마나 좆같은 기분인지 모른다고.
И телевизор с потолка свисает, и как хуёво мне никто не знает
텔레비전은 천장에 매달려 있고, 얼마나 내가 좆같은 기분인지 아무도 몰라.
Всё это до того подзаебало что хочется опять начать сначала
이 모든 것에 질릴 대로 질러버려서 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Мой стих печальный, он такой, что снова я повторяю - как же мне хуёво.
나의 시는 구슬퍼, 그러니 나는 또다시 반복해, 내 기분은 좆같다고.
얀카 댜길레바, "나의 슬픔은 밝게 빛난다"(Печаль моя светла)
야나 스타니슬라보브나 "얀카" 댜길레바(Яна Станиславовна "Янка" Дягилева)는
소련의 가수이자 시인이다.[1] 1980년대 후반
시베리아 지역의 여러 크바르티르니크[2] 및 타 음악가들과 협업을 통해[3]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에서 이름을 알렸으나 생전 공식 인터뷰나 대중매체 출연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에 이름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나는 열 번이고 다시금 반복해, 아무도 내가 얼마나 좆같은 기분인지 모른다고.
И телевизор с потолка свисает, и как хуёво мне никто не знает
텔레비전은 천장에 매달려 있고, 얼마나 내가 좆같은 기분인지 아무도 몰라.
Всё это до того подзаебало что хочется опять начать сначала
이 모든 것에 질릴 대로 질러버려서 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Мой стих печальный, он такой, что снова я повторяю - как же мне хуёво.
나의 시는 구슬퍼, 그러니 나는 또다시 반복해, 내 기분은 좆같다고.
얀카 댜길레바, "나의 슬픔은 밝게 빛난다"(Печаль моя светла)
1991년에 사망하였는데 날짜는 5월 9일로 추정되지만 현재까지 사망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그녀의 사망은 시베리아 언더그라운드 신의 종막을 상징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생애
1966년 9월 4일 소련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기사(инженер) 부부였던 스타니슬라프 이바노비치 댜길레프 및 갈리나 데멘티예브나 댜길레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에 잠시 피아노 교육을 받기도 하였으나 도중에 포기하였다. 이후 동호회에서 기타 연주를 배웠으며 학교 내 아마추어 공연도 몇 번 참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학창 시절에 과학 등 이공계 과목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인문학, 특히 문학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었다. 학창 시절부터 수많은 작가들의 책을 읽었으며 많은 에세이 및 시를 썼다.[4]
1984년 노보시비르스크 수력 공학 전문학교(НИИВТ)[5]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였다. 당시 그녀는 정치적 노래 동아리였던 "아미고(АМИГО)"의 일원이었다.
1985-86년경 그녀는 노보시비르스크의 크바르티르니크에 참가한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와 첫 만남을 가졌다. 바실라초프는 시인이자 바르드 음악가였으나 그의 가사와 음악은 러시아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그녀는 자신보다 한 살 더 많았던 바실라초프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둘은 연락을 이어나갔다.
1987년 4월 그녀는 시베리아의 펑크락 밴드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예고르 레토프와 첫 만남을 가졌으며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베이시스트로도 활동하게 돠었다. 레토프는 당시 시베리아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의 대표 인사 중 하나였으며 바실라초프와 함께 그녀의 음악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레토프는 아돌프 기틀레르 사건으로 인해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주 중이었는데[6] 그녀도 레토프와 함께 1년에 가까운 기나긴 도주길에 올랐다.[7]
1988년 1월 그녀는 비공개 공연을 가졌는데 이 녹음본은 훗날 "허가받지 않음(Не положено)"이라는 제목의 앨범으로 발매된다. 7월 그녀는 튜멘에서 첫 대규모 공연을 가졌다.[8]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그녀는 그라즈단스카야 오보로나 혹은 기타 밴드의 멤버로, 혹은 솔로로 전국을 돌면서 공연을 열었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기록으로는 그라즈단스카야 오보로나 멤버로 제5회 레닌그라드 락 페스티벌[9] 참가했던 것이 있다. 당시 이들의 디렉터는 세르게이 피르소프[10]였으며 피르소프의 디렉팅 하에 이들은 탈린, 레닌그라드, 크림 등을 돌면서 공연을 펼쳤다.
1990년 11월 그녀의 마지막 공개 공연이 있었고[11] 1991년 2월 말 노보시비르스크 전기공학 전문학교(НЭТИ) 기숙사에서 마지막 앨범 녹음이 있었다.
3. 사망 그리고 미스터리
Пускай у тебя всё будет хорошо. Я тебя очень люблю. Дай Бог избежать тебе всех неприятностей.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바래. 정말 사랑해. 신께서 모든 문젯거리들을 해결해 주시기를)
얀카가 친구 몇몇에게 보낸 편지. 1991년 5월 10일 도착했다고 한다.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바래. 정말 사랑해. 신께서 모든 문젯거리들을 해결해 주시기를)
얀카가 친구 몇몇에게 보낸 편지. 1991년 5월 10일 도착했다고 한다.
1991년 5월 9일 그녀는 가족의 장례식[12] 이후 가족과 함께 이냐(Иня) 강 근처에 있던 다차[13]에 갔다. 그날 저녁 그녀는 담배 한 대 피우며 산책하고 오겠다며 다차를 나섰고 그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가족들은 그녀를 찾아나섰으나 실패하였고 경찰은 수색에 나섰다. 실종 8일 뒤인 5월 17일 한 낚시꾼이 이냐 강에 떠올라 있던 그녀의 시체를 발견하면서 수색이 종료되었다. 향년 24세였다. 그녀의 시신은 자옐초프스코예(Заельцовское) 공동묘지에 묻혔으며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14]
그 뒤로 이어진 조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망은 여전히 시베리아 언더그라운드 신의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당장 그녀가 사망한 날짜와 장소조차 확실하지 않으며[15] 명확한 사망 원인도 불명이다. 공식 사인은 실족사지만 사망 원인에 대해 자살설, 사고설, 타살설 등이 대립하고 있다.
-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녀가 1991년 전후로 심각한 우울증 증상을 보였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든다. 1986년 모친이 암으로 사망했고 1988년 멘토였던 바실라초프가 자살했다.[16] 한때 연인이기까지 했던 그녀와 레토프는 당시 사이가 매우 소원한 상태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그녀의 멘탈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 수 없으며 후기 곡들인 "무쾌락증"(Ангедония)[17]이나 "물이 오리라"(Придет вода)[18]는 명확히 우울과 죽음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19]
- 타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녀의 지인들의 증언을 근거로 삼는다. 많은 증언에 따르면 당시 그녀의 기분은 확실히 우울해 보이긴 했으나 동시에 잘 웃고 장난을 치는 모습도 보였으며 자살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고 말한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는 차가운 물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설렁 자살을 하더라도 차가운 강물에 몸을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레토프와 쿠지민[20]은 적극적으로 그녀의 타살설을 주장하였으며 범인은 술취한 동네 불량배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바 있다.[21] 공식 부검 보고서에서는 눈에 띄는 외상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적혀 있으나 많은 지인들은 그녀의 시체에는 후두부에 깨진 상처가 있었으며 폐에서 물이 발견되지 않았다(즉, 강에 빠지기 전 사망하였다)고 증언했다.[22]
- 사고설도 유력한 가설 중 하나로 지목된다. 실제로 그녀의 공식 사인은 실족사다.
4. 음악 세계
그녀의 음악 세계는 절망과 우울, 죽음 등 어두운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그르렁거리는 목소리 + 소련 민속 주제 + 소비에트 일상 생활에서 유래한 서글픈 이미지 + 부패하고 경직된 소련 체제에 대한 환멸과 실망, 풍자를 섞은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고유의 싯구 + 서구권 락의 멜로디가 합쳐진 특유의 음악 세계는 당시 러시아 언더그라운드 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으며 고유의 펑크 스타일로 해석된 허무주의와 포크 스타일로 해석된 비애는 현재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5. 디스코그래피
생전 그녀의 작업물은 공식 앨범으로 발매된 적이 없으며 그녀의 녹음본은 전부 예고르 레토프의 손을 거쳐 스튜디오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레토프가 없었다면 그녀의 작업물은 소실되거나 질 낮은 부틀랙으로만 존재했겠지만 이 과정에서 레토프의 의도가 너무 깊게 들어갔다는 평가도 받는다.[23]- 허가받지 않음 (Не положено, 1987/2021)
- 체제의 낙오자들에게 (Деклассированным элементам, 1988)
- 팔렸구나! (Продано!, 1989)
- 무쾌락증 (Ангедония, 1989)
- 집으로! (Домой!, 1989)
- 수치와 모욕 (Стыд и срам, 1991)
- 십자가의 영 (Крестовый ноль, 1988-89/2022)
이 외 부틀렉 및 기타 정보는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
6. 여담
- 그녀의 공식 팬사이트가 있다. #
- 예고르 레토프의 곡 "오펠리아(Офелия)"는 그녀의 죽음에 바치는 곡이다.[24][25] 예고르와 좆병신들(Егор и Опизденевшие)의 이름으로 발매되었으며 이후 공연 레퍼토리에서도 종종 등장한 바 있다. 레토프와 그녀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했으며 현재도 완전히 알려지거나 공개되지 않은 내용들이 많다.
- 여기나 여기서 몇몇 곡들의 한국어 번역본을 찾아볼 수 있다. 영어 실력이 된다면 여기서 영어 번역본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선 그녀의 시 번역본도 찾아볼 수 있다.[26]
-
생전 공식 앨범 취입이나[27] 인터뷰, TV를 위시한 각종 매체 출연에 부정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생전 메인스트림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다. 수많은 인터뷰 및 매체 출연에 앞장선 레토프와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오죽하면 그녀의 사망에 대해 신문에서 보도할 때 생전 사진을 찾을 수 없었을 정도다.[28]
— Просто поговорить — пожалуйста. Но в газете не должно быть ни строчки.
— Но почему? Может быть, это не нужно вам, но нужно другим?
— Те, кому это нужно, и так разберутся, кто я и зачем.
- 그냥 대화하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신문에는 한 줄도 실려선 안 돼요.
- 어째서입니까? 본인은 불필요하다 느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지 않습니까?
- 그게 필요한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어째서인지 알 거니까요.
(1990년, 어느 기자와 나눈 대화) -
그녀의 묘비명은 "Будешь светлым лучом, рождённым в тени, или тенью, родившей луч?"인데 이는 그녀가 1987년 케메로보에서 쓴 시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Будешь светлым лучом, рождённым в тени,
Или тенью, родившей луч?
그대는 그림자 속에서 태어난 한 줄기 밝은 빛살이 될 것인가,
아니면 빛살 속에서 태어난 그림자가 될 것인가?
Будешь синим дождём, упавшим на снег,
Или одной из туч?
그대는 눈 위로 떨어지는 파란빛 비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구름들 중 하나가 될 것인가?
Будешь твёрдым звеном золотой цепи,
Или молотом, что куёт?
그대는 황금빛 사슬의 단단한 고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이를 단련하는 망치가 될 것인가?
Будешь землёй далёкой тропы,
Или тем, кто по ней идёт?
그대는 머나먼 길의 대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이를 따라가는 이들 중 하나가 될 것인가?
Будешь пером в крыле у орла или самим орлом?
Будешь каплей в кувшине вина, или кувшина дном?
그대는 독수리에 달린 날개의 깃털이 될 것인가 독수리의 깃털이 될 것인가?
그대는 항아리 속 포도주 한 방울이 될 것인가 항아리의 밑바닥이 될 것인가?
[1]
"야나"가 본명이고 "얀카"는 애칭이지만 "얀카 댜길레바"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
квартирник. 당시 소련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던 비밀 소규모 콘서트를 가리키는 단어로, 주로 아파트(квартир) 방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3]
특히
예고르 레토프와의 관계로 유명하며 이들은 한때 동거하기도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헤어졌다.
[4]
학창 시절의 시가 몇 개 남아 있으나 그녀의 후기 작품과 판이한 부분이 여럿 보이며 실제 댜길레바의 작품인지, 아니면 타인의 퇴고가 들어간 것인지는 불명이다. 현재 댜길레바의 작품 중 가장 초기의 것은 1985년 작품이지만 실제 그녀의 작품인지는 이견이 있다.
[5]
Новосибирский институт инженеров водного транспорта. 2015년 시베리아 정부 수력 공학 대학(Сибир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водного транспорта)로 명칭을 변경했다.
[6]
예고르 레토프 항목 참조.
[7]
1987년 발매된 그라즈단스카야 오보로나의 앨범(사실상 레토프의 솔로 앨범이지만) "네크로필리아(Некрофилия)"에 그녀의 곡인 "어떻게 살 것인가(Как жить)"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는 댜길레바의 스튜디오 앨범 데뷔곡이다. 정확히 말해 멜로디가 붙지 않은 시 낭송에 가까운 녹음이긴 하지만.
[8]
이 공연은 이후 앨범 "체제의 낙오자들에게(Деклассированным элементам)"으로 출간되었다. 당시 그녀는 "얀카와 위대한 10월(Янка и Великие Октябри)"이라는 이름으로 공연하였는데 이 이름은 급조된 이름이었으며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댜길레바는 훗날 회고했다.
[9]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당시 소련 락 음악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며 루빈시테인 13번가에 위치한 레닌그라드 락 클럽은 모스크바 및 스베들로프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 락 클럽과 함께 당시 소련에서 (정부의 감독 하에나마)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대규모 청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10]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Фирсов. 음악 프로듀서이자 레닌그라드 락 클럽의 감독으로,
아크바리움,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
키노 등등 소련 락 음악의 거물들을 소개하고 음악 프로듀서로 활약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빅토르 초이가 일한 것으로 유명한 캄차트카 보일러실의 소유주였으며 초이, 스뱌토슬라프 자데리(락밴드 알리사의 초대 리더), 바실라초프 등등 음악가들이 무직을 이유로(당시 소련 형법 209조에 의거해 무직은 형사 처벌의 대상이었다) 소련 당국의 처벌을 받지 않도록 캄차트카의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고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그라즈단스카야 오보로나 및 얀카 댜길레바의 디렉터로 일했다. 댜길레바의 앨범 중 "팔렸다!(Продано!)"는 피르소프 소유 건물에서 녹음하였다.
[11]
1990년 11월 10월 이르쿠츠크 정치과학대학에서 있었던 어쿠스틱 공연이 현재 남아있는 녹음 중에서는 가장 마지막 녹음이다. 1991년 2월 몇몇 소규모 공연이 있었다고 하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12]
1986년 댜길레바의 친모는 암으로 병사하고 댜길레바의 부친은 재혼했다. 댜길레바의 계모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1991년 5월 사망하여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13]
дача. 소련 시절 주민들에게 무료로 배부되던 시골의 별장.
[14]
장례식 이후
예고르 레토프는 그녀의 집을 찾아가 주고받은 편지 및 시 습작, 관련 서류 등을 모조리 가져갔는대 현재 그의 아내인 나탈리야 추마코바의 소유로 되어 있다. 당시 레토프는 댜길레바와 사귀다 헤어진 상태였으나 레토프의 형 세르게이 레토프의 증언에 따르면 장례식 날 밤 손에 크게 자해하는 등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세르게이 레토프는 예고르 레토프의 곡 중 "오펠리아(Офелия)"가 댜길레바에게 바치는 곡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곡은 앨범 "백 년 간의 고독(Сто Лет Одиночества)"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후 라이브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다.
[15]
그녀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부터 불확실하다. 이냐 강 근처 이즈드레바야(Издревая) 역 근처였다는 설과 인스카야(Инская) 역 근처였다는 설이 있다.
[16]
아파트 부엌 창문에서 투신자살했는데 일단 자살이란 것은 사실상 확정이지만 이에 대해서도 말이 좀 있다.
[17]
삶에서 즐거움이나 쾌락을 느끼지 못하는 증상.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얀카는 어느 의사로부터 이 단어를 전해들었고 "지금 나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8]
햄릿의 5막 1장에 나오는 오펠리아의 장례식에서 모티브를 따 온 곡으로 추정되는데 오펠리아는 물에 빠져 죽었다. 많은 팬들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 즉 죽음이라는 테마가 가사 전반에 깔려 있다고 본다.
[19]
동시에 레토프는 자신이 댜길레바의 유서를 가지고 있다고 몇 차례 말한 바 있으나 최종적으로 해당 언급을 번복하였다. 사실 레토프라는 인물로 말할 것 같으면 천재와 광인을 넘나드는 인물이었고, 레토프의 인터뷰는 아주 많이 남아 있으나 좀 걸러들어야 할 부분이 없잖아 있다.
[20]
시베리아의 밴드였던 초르니 루키치(Черный Лукич)의 리더 바딤 쿠지민(Вадим Кузьмин). 레토프와 얀카, 쿠지민은 서로 친한 사이였다.
[21]
소련에서 술취한
고프닉이 동네를 배회하는 것은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일이었으며 특히 사건 당일은 5월 9일로 소련에서 큰 휴일이었던
승리의 날 바로 다음날이었다.
[22]
덤으로 몇몇 지인들은 아예 특정 인물을 살해범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23]
예를 들어 얀카는 포크 락이나 바르드 락에 가까운 음악을 했고 그녀의 음악 대다수는 보컬+어쿠스틱 기타 반주로 이루어져 있지만 레토프는 스튜디오 앨범을 내면서 여기에 당시 자신이 심취해 있던 로파이 그런지 반주 혹은 사이키델릭 반주를 삽입하였다. 다만 보너스 트랙을 통해 녹음 원본도 공개되었다.
[24]
레토프 본인이 밝히지는 않았으나 형 세르게이 레토프는 예고르가 얀카의 장례식 날 자해하면서 크게 슬퍼했다는 증언과 함께 이 곡이 얀카의 죽음에 대한 곡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 다른 힌트는 제목에 있다. 댜길레바의 곡 중 "물이 오리라(Придет вода)"라는 곡이 있는데 이 곡은 연극
햄릿에 등장하는 오펠리아의 장례식 신(햄릿 5장 1-2막)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된다. 결정적으로 댜길레바와 오펠리아는 둘 다 물에 빠져 죽었다.
[25]
"곰인형에 대하여(Про мишутку)"라는 곡도 있는데 이는 예고르가 얀카에게 바친 곡이라고 밝힌 바 있으나(곡 제목 뒤에 "얀카를 위한 노래(песенка для Янки)"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댜길레바 생전에 작곡된 곡이다.
[26]
그녀의 시 습작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지만 활동 기간이 5년도 되지 않다 보니 멜로디를 붙인 곡은 29개밖에 되지 않는다.
[27]
당시 정식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녹음하고 작업한 앨범을 공식적으로 판매하기 위해서는 소련 유일 국영 음반사였던 멜로디야(Мелодия)와 계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는데 댜길레바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도 이를 거부했다. 실제로 그녀의 앨범은 마그니티즈다트(Магнитиздат. 해적판 카세트테이프를 일컫는 말로, 공식적으로 유통할 수 없던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의 음악은 사실상 마그니티즈다트로 전파되었다)로 유통되었으며 음악 녹음은 정식 스튜디오가 아닌 가정집, 대학 기숙사, 클럽 등에서 이루어졌다.
[28]
물론 그녀의 사진 자체는 많이 존재한다. 다만 공식 석상에서 찍힌 사진이 없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