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나레스버러의 기사 알메인의 헨리 Henry of Alm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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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메인의 헨리 (Henry of Almain) |
출생 | 1235년 11월 2일 |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헤일스 수도원 | |
사망 | 1271년 3월 13일 (향년 35세) |
이탈리아 비테르보 산 실베스트로 교회 | |
배우자 | 베아른의 콩스탕스 (1269년 결혼) |
아버지 | 콘월의 리처드 |
어머니 | 이사벨라 마셜 |
형제 | 존, 이사벨라, 니콜라스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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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랜태저넷 왕조 왕족. 제2차 남작 전쟁에 참여해 왕당파의 승리에 일조했지만, 시몽 드 몽포르의 두 아들에게 피살되었다. 성인 '알메인(Almain)'은 'Allemagne ("독일의") 의 발음에서 모음이 바뀐 형태로, 아버지가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기에 잉글랜드 귀족들 사이에서 그렇게 불렸다.2. 생애
1235년 11월 2일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헤일스 수도원에서 콘월의 리처드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딸 이사벨라 마셜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 존, 이사벨라, 니콜라스 모두 요절했기에, 그가 사실상 리처드와 이사벨라 부부의 외아들이었다. 어머니 이사벨라는 1240년에 죽었고, 아버지가 그해 6월 십자군에 참여하러 떠났을 때 헨리 3세의 보호를 받았으며, 와돈 수도원과 뷰리외 수도원의 대수도원장 아스티엘의 로버트의 가르침을 받았다. 1240년 12월, 헨리는 헨리 3세의 장남이자 자기 사촌인 에드워드 및 다른 귀족 자녀들과 함께 윈저성에 살았다.1247년과 1250년에 외교 활동을 위해 프랑스로 떠나는 아버지와 함께했으며, 1254년에는 불로뉴에 거주했다. 1257년 요크셔의 나레스버러 영지를 아버지로부터 받았고, 이후 로마 왕이 되기 위해 독일로 향한 아버지를 따라가 1257년 5월 18일 아헨에서 열린 대관식에서 아버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9월 말에 홀로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258년 6월 옥스퍼드 의회에서 왕권을 크게 제약하는 옥스퍼드 조례가 상정되었을 때, 헨리는 이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그는 옥스퍼드 조례에 항의하여 지지자들과 함께 윈체스터에 자리를 잡은 에드워드 왕자와 뤼지냥 가문 인사들과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옥스퍼드 조례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위원회 24인 중 한 사람으로서 국왕에 의해 지명되었다. 그러나 헨리는 옥스퍼드 조례를 준수하겠다고 맹세하라는 요구에 대해, "나는 영주가 아니기에 아버지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거절했다가, 40일 이내에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내라는 통보를 받자 어쩔 수 없이 따랐고, 나중에 옥스퍼드 조례 준수를 서약했다.
1259년 봄, 헨리는 사촌인 윌리엄 드 발랑스의 압수된 재산에서 얻은 수입 중 100파운드를 빌려서 독일에서 재정난에 허덕이는 아버지를 도왔다. 이후 그는 수년간 왕당파와 의회 귀족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1259년 3월, 헨리는 에드워드 왕자와 제5대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동맹은 곧 깨졌고, 헨리와 에드워드 왕자는 1259년 10월 시몽 드 몽포르와 유사한 계약을 체결했다. 의회 귀족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시몽 드 몽포르는 왕과의 싸움에서 왕실의 젊은 구성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1260년 4월, 헨리는 귀족들과 협상하기 위해 왕의 대변인으로서 런던으로 재차 파견되었고, 1260년 6월 헨리 3세로부터 연간 연금 100파운드를 받았다.
그러나 1260년 10월, 그는 자신을 시몽 드 몽포르의 청지기라고 소개했다. 1262년에 시몽 드 몽포르와 정적들 간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을 때, 그는 시몽 드 몽포르를 지지했다. 1263년 2월 헨리 3세의 초청으로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 국왕 루이 9세 와의 협상에 참여했지만, 그해 5월에 시몽 드 몽포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263년 6월 또는 7월에 시몽 드 몽포르의 지지자로서 프랑스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비상트 또는 불로뉴에서 잉글랜드 왕비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의 친척인 잉그램 드 파인스에게 생포되었다. 헨리 3세는 즉시 사절을 잉그램에게 보내 헨리를 풀어달라고 요구했고, 의회 귀족파도 헨리 3세와 에드워드 왕자가 평화 협정을 위해 이행해야 하는 조건 중 하나로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헨리는 1263년 7월경에 석방되었고, 한 달도 안 되어 다시 편을 바꿔 헨리 3세를 지지했다. 그해 7월 26일, 헨리 3세는 그를 코프와 셔본 성의 관리자로 선임했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에게 사람을 보내 그를 상대로 무기를 드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고,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의 무기가 아니라 안정을 원한다고 대답했다. 그해 8월, 헨리는 웨일스와 평화 협상을 벌이는 헨리 3세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같은 해에 왕과 함께 아미앵으로 가서 옥스퍼드 조례에 대한 루이 9세의 판결을 청했다. 1264년 1월 루이 9세가 옥스퍼드 조례의 무효를 선언하자, 시몽 드 몽포르는 이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켰다.
1264년 봄, 헨리는 글로스터의 반군 포위를 해제하기 위한 에드워드 왕자의 원정에 참여했다. 그 후 그는 왕실군에 가담하여 5월 14일 루이스 전투에 참여했다가 헨리 3세 및 아버지 리처드와 함께 생포되었다. 그 후 역시 체포된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몽포르의 요구가 완전히 충족될 때까지 인질로 지내야 했다. 이후 프랑스로 보내져서 루이 9세가 시몽 드 몽포르가 주도하는 정부를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잉글랜드 주교들은 그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다시 몽포르의 인질로 잡힐 것이라는 보증으로 20,000마르크를 제공했다. 그러나 헨리는 1264년 9월 불로뉴에 도착했다가 구금되어 루이 9세를 접견하지 못했다.
이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헨리는 1264년 11월부터 케닐워스 성으로 보내졌다. 1265년 3월 10일, 그는 시몽 드 몽포르의 아들인 앙리 드 몽포르의 감시에서 풀려나 헨리 3세의 궁정으로 보내지기로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왕자가 5월 28일에 탈출하자, 그는 다시 잡혔다. 1265년 4월, 헨리는 특사로서 다시 프랑스를 여행했다. 5월 중순, 귀족들은 그의 즉각적인 귀환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가 패사하고 헨리 3세가 집권한 뒤, 헨리는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로부터 몰수한 영지 일부를 받았다.
1266년 2월 잉글랜드 북부를 평정하는 임무를 맡은 왕실군 사령관에 부임했으며, 그해 5월 15일 체스터필드 전투에서 제6대 더비 백작 로버트 드 페러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로버트를 생포했다. 1266년 8월, 헨리는 교황 특사 오토부오노 데 피에스키와 함께 반군 귀족들에게 상대적으로 온화한 조건에 평화 협약을 맺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헨리 3세는 두 사람의 주장에 따라 반란에 가담한 자들이 벌금을 납부한 후 이전 영지를 다시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키넬워스 칙령을 반포했다.
1267년 2월, 여전히 로마 왕의 칭호를 사용하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로마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그 해 6월, 그는 반란을 일으킨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를 설득해 런던에서 물러나고 헨리 3세와 화해하도록 했다. 이후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내전으로 인해 수년간 시행되지 않았던 마상창시합을 개최하자고 제안했지만, 헨리 3세가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1268년 6월 24일, 노샘프턴에서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몇 달간 에드워드 왕자의 전권 대사로 선임되어 아일랜드로 파견되어 왕실 영지를 관리했다. 이후 에드워드와 함께 의회를 설득해 유대인 대금업자가 매기는 이자율을 제한하는 법령을 통과했다. 1269년 5월 21일, 헨리는 베아른 자작 가스통 7세와 마르상의 여성 자작 마르타의 딸이며, 아라곤 국왕 차이메 1세의 아들이자 상속인이었던 알폰소의 미망인[1] 콩스탕스와 윈저성에서 결혼했다. 이 결혼은 가스코뉴에 대한 잉글랜드 왕실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콩스탕스가 비고르에 대한 유전적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시몽 드 몽포르의 살아남은 아들들이 비고르에 대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1269년 5월, 헨리는 코페 성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에 대한 보상으로 로킹엄 성과 옥스퍼드와 스탬퍼드 사이의 왕실 숲 관리권을 받았다. 1269년, 그는 1266년부터 포로로 잡혀 있던 로버트 드 페러스를 석방하는 대가로 헨리 3세의 차남 에드먼드 왕자에게 로버트의 재산 대부분을 양도하는 거래에 참여했다. 로퍼드 드 페러스는 자기 영지를 되찾으려면 50,000파운드에 달하는 돈을 지불해야 했지만, 도저히 그럴 형편이 안 됐기에 포기해야 했다.
1269년 5~8월, 헨리는 십자군에 에드워드가 참여하는 것에 관하여 파리에서 루이 9세와 협상했다. 이후 에드워드와 십자군에 제공할 기사와 군인에 관해 합의한 뒤 1270년 8월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떠났다. 1271년 초 시칠리아에 도착했을 때, 에드워드는 그를 프랑스로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튀니스에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가 사망한 루이 9세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루이 9세의 형제 앙주의 샤를과 접견해 잉글랜드 십자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도록 했다.
1271년 3월 초, 헨리는 당시 교황 선거 비밀회의가 열리고 있던 비테르보에 도착해 앙주의 샤를과 접견했다. 그해 3월 12일, 시몽 드 몽포르의 두 아들이며 당시 앙주의 샤를 휘하에서 요직을 맡았던 시몽 드 몽포르 주니어와 기 드 몽포르가 비테르보에 도착했다. 그들은 헨리가 도시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3월 13일 아침에 헨리가 산 실베스트로 교회의 미사에 참여했을 때 습격해 교회 정문으로 끌고 간 뒤 칼로 찔러 죽였다. 일설에 따르면, 헨리가 자비를 간청하자, 기 드 몽포르는 "너희는 이브샴에서 쓰러진 우리의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 후 기 드 몽포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시몽 드 몽포르의 시신이 절단된 것처럼 헨리의 시신을 절단했다. 헨리의 유해는 나중에 수습되었고, 내장은 비테르보 대성당에 묻혔고 시신은 잉글랜드로 옮겨져 1271년 5월 21일 아버지가 헤일스 수도원의 중앙 제단 앞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헨리를 죽인 시몽 드 몽포르 주니어와 기 드 몽포르는 교회에 의해 파문을 선고받고 도주했는데, 시몽은 1271년 말에 시에나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고, 기 드 몽포르는 오랫동안 숨어 지내다가 시칠리아 국왕이 된 앙주의 샤를에게 가담했지만, 시칠리아의 만종 전쟁 중인 1287년 나폴리 인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라우리아의 루지에로가 이끄는 아라곤 해군과 맞서 싸웠으나 참패하고 생포된 뒤 시칠리아로 끌려가서 옥고를 치르다가 1291년에 옥사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 지옥 편 제12장에서 기 드 드 몽포르가 1271년에 암살을 자행한 행위를 묘사한 벽화로 둘러싸인 끓는 피의 강에 다른 살인자들과 함께 허우적거리는 장면을 묘사했다.
헨리의 아내였던 베아른의 콩스탕스는 헨리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고, 콘월의 리처드의 작위와 영지는 헨리의 이복형제인 에드먼드에게 돌아갔다. 콩스탕스는 1279년 제네바 백작 아이몬 2세와 3번째로 결혼했지만, 이 결혼 역시 아이몬 2세가 1년 만에 사망하면서 조기에 끝나 버렸다. 콩스탕스는 1310년에 사망했다.
[1]
1260년 3월 23일에 알폰소와 결혼했지만, 불과 사흘 만인 3월 26일에 알폰소가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