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新宿西口バス放火事件
NHK 뉴스 방송사(放送史) 동영상
1980년 8월 19일 신주쿠역 서쪽 출구에 위치한 버스터미널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
2. 사건 경위
1980년 8월 19일 밤 9시경 거주지 불명의 건설노동자 마루야마 히로후미(丸山博文, 사건 당시 38세)가 신주쿠역 서쪽 출구 버스터미널에 정차 중이던 케이오 제도전철 (京王帝都電鉄. 현 케이오 버스) 소속 히노 RE100(日野・RE100) 노선버스 차량[1] 뒷문을 통해 불 붙은 신문지와 휘발유가 든 통(함석 양동이)을 차량 안으로 던져넣으면서 순식간에 화재가 발생했다. 불길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당시 버스는 퇴근하는 직장인들로 거의 만원이었기 때문에 인명피해도 컸다.[2] 승객 30여명 중 뒤쪽에 타고 있던 3명이 그 자리에서 불에 타 숨졌고[3] 이후 3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하면서 희생자는 총 6명으로 늘어났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다른 승객 중 14명이 화상을 입었는데 이 중 일부는 2도 이상의 중화상으로 인해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술을 반복해야 했다.마루야마는 바로 도주하지 않고 버스가 불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고 한다. 현장에는 다수의 목격자가 있었고 지나가던 행인들도 범인으로 마루야마를 지목했기 때문에 현장에 급히 출동한 경찰에 의해 즉시 체포되었다.
3. 범행 동기
마루야마는 사건으로부터 5개월 전인 3월부터 신주쿠역 서쪽 출구 부근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일용직 건설노동자로 각지를 돌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생활을 계속했으나 당시에는 주거비용을 아끼기 위해 일정한 거주지가 없이 노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일이 끝나고 역이나 인근 거리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그가 신주쿠역 지하 계단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지나가던 누군가가 비키라며 크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남성의 목소리라는 것 외에는 누가 호통을 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노한 그는 자신에게 큰 소리를 낸 누군지도 모를 상대에게 복수할 마음을 먹고 기회를 노렸다.
사건 당일 경정장에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1만엔을 탕진한[4] 그는 술로 울분을 달래던 중 점차 자신의 처지와 사회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 때 나한테 큰소리친 놈이 분명 저 버스에 타고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결국 술기운과 충동에 이끌려 버스에 휘발유를 투척하고 불을 지르기에 이르렀다.
4. 범인의 생애
마루야마는 1942년 기타큐슈시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그가 3살이었을 때 사망했고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증자로 변변한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가족은 매우 빈곤하게 살고 있었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농작업과 목수 일을 거들면서 생계를 꾸렸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에도 일반인들이라면 누구나 읽을 줄 아는 한자도 제대로 읽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도 어찌어찌 의무교육 과정을 마친 후에는 건설노동자로 일하면서 일본 각지를 전전하면서 지냈다. 함께 일했던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매우 성실했다고 한다.1972년에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으나 아내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불과 1년만에 이혼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이혼한 전처가 얼마 가지 않아서 정신질환을 일으켜 입원하자 도저히 아이를 키울 형편이 되지 않았던 그는 결국 아이를 시설에 맡기고 다시 전국의 공사현장을 돌면서 일했다.[5]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수입과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의 부재, 도시 생활에서 오는 외로움 등으로 인해 그의 정신은 서서히 황폐해지고 있었다.
1973년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한 여성을 이혼한 전처로 착각하고 쫓아가서 집에 침입했다가 체포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정신감정 결과 조현병[6]으로 판정되어 기소되지는 않았다.
5. 재판과 이후
도쿄지검은 마루야마를 건조물 등 외 방화죄[7]와 살인죄로 기소했다. 검찰측은 사형을 구형했으나 1심에서 도쿄지법은 심신미약을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에 변호인과 검찰 양측이 상고했으나 2심에서 도쿄고법도 1심 판결을 지지했다.재판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의식했는데 ' 사형을 당해서 모든 분들께 사죄해야 한다'고 발언했으며 실제로 본인도 사형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이를 무죄로 착각했는지 '죄가 되지 않느냐'고 말한 뒤 방청석을 향해 도게자를 하면서 사죄했다고 한다.
판결 이후 치바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97년 10월 7일 형무소 내 작업장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 향년 55세.
6. 기타
희생자 중 사건 당일 고라쿠엔 스타디움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시합을 관전하고 귀가하던 아버지와 8세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고라쿠엔 스타디움의 관리 회사와 자이언츠가 부자의 고별식에 화환을 보내는가 하면 오 사다하루가 제단에 사인볼을 올린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이 사건으로 전신의 80%에 달하는 큰 화상을 입었던 스기하라 미츠코(杉原美津子)[8]라는 여성은 이후 《살아보고 싶어, 다시 한 번(生きてみたい、もう一度)》라는 제목의 수기를 출판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1985년에는 이 수기를 원작으로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거의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하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녀는 도쿄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마루야마를 찾아가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원칙적으로는 피해자가 사건 피고인을 접견할 수 없었으나 이 때만은 예외적으로 접견이 허용되었다.
한편 사진기자였던 스기하라의 오빠인 이시이 요시지(石井義治)가 우연히 터미널 인근을 지나가다가 버스 방화 현장을 사진에 담았는데 이 사진은 다음날 요미우리 신문 1면에 특종으로 보도되었지만 여동생이 방화에 휘말려 큰 화상을 입은 와중에 동생을 구하지 않고 현장 사진을 찍는 데만 몰두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크게 충격을 받아 언론사진계에서 은퇴해 필명을 바꾸고 풍경사진가로 전향했다.
1980년 8월은 일본 사회에서 유난히 다사다난한 해이고 달이었다. 이 사건 이전에 "후지산 대규모 낙석사고(富士山大規模落石事故 1980년 8월 14일)"[9], " 시즈오카역 지하상가 가스 폭발사고(静岡駅前地下街爆発事故 1980년 8월 16일)", 그리고 '신주쿠 버스 방화 사건(新宿西口バス放火 (ヒ) 事件)'이었다. 일련 사건사고를 '일등 후지산 이등 매 삼등 가지(一富士二鷹三茄子)'[10]을 빗대 일등 후지산 이등 지하 삼등 버스불 (一富士、二地下、三バスビ)라는 일본의 안전불감증을 풍자하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였다.
7. 관련 문서
[1]
노선 번호: 슈쿠 41계통 • 6호 노선 경유 나카노 차고지행(宿41系統・6号通り経由中野車庫行き).
[2]
일본 버스에는
비상문이 있기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불이 순식간에 번졌기 때문에 승객들이 제대로 탈출하지 못했다.
[3]
전신에 휘발유를 뒤집어쓰는 바람에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불이 옮겨붙어 앉은 채로 사망했다.
[4]
이전에 낚시 금지 구역인 인근 강가에서 낚시를 하다가 인근 주민에게 주의를 듣고 나서 겨우 낚은 한 마리를 가지고 신주쿠로 돌아왔으나 역 물품보관함에 있던 자신의 물건이 보관기간 만료로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전 재산을 잃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다고 한다.
[5]
각지를 전전하면서 힘들게 일하는 와중에도 아이를 맡긴 시설에 돈을 보내는 일만은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비록 어렵게 살던 형편이었지만 자식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6]
구 정신분열증, 현재의 명칭은 통합실조증.
[7]
일본 형법 108조의 현주건조물방화죄 조문에는 '버스'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 영업용 버스는 다수의 인원이 승차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버스를 철도차량에 준하는 취급으로 현주건조물방화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으나 이에 대해 법학자들 사이의 견해도 엇갈렸고 해당 판례도 없었기 때문에 대신 110조에 해당하는 건조물 등 외 방화죄를 적용했다.
[8]
혼전 성씨는 "이시이(石井)".
[9]
야마나시현 쪽
후지산 요시다 루트(吉田ルート)에서 무수히 많은 돌들이 굴러떨어지면서 등산객들을 덮쳐 사망자 12명, 부상자 29명이 발생하는 사상 최악의 낙석사고.
[10]
새해 첫꿈에 이런 것들이 나오면 그 해에는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는 일본의 속설이며 속담이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런 사건사고에 엮이는 자체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