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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01:10:20

순자타 케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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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제국 초대 황제
순자타 케이타
Sundiata Keita
파일:Sundiata keita.jpg
<colbgcolor=#D7063A><colcolor=#D7063A> 이름 마리 자타 케이타
(Mari Jata Keita)
출생 1217년
만딩고 왕국 니아니
사망 1255년 (향년 37~38세)
말리 제국 산카라니 강[1]
재위 기간 초대 황제
1235년 ~ 1255년 (20년)
왕가 만사 왕조 / 케이타 왕조
전임자 단카란 투만(Dankaran Touman)[2]
후임자 만사 왈리
부모 아버지 : 마간 콘 파타(Maghan Kon Fatta)
어머니 : 소골론 케주(Sogolon Kedjou)
형제자매 여동생: 콜론칸(Kolonkan)
여동생: 자마루(Djamarou)
이복형: 단카란 투만(Dankaran Touman)
이복동생: 만딩 보리(Manding Bory)
이복여동생: 나나 트리반(Nana Triban)
자식 친아들: 왈리 케이타(Wali Keita)
양아들: 와티 케이타(Ouati Keita)
양아들: 칼리파 케이타(Khalifa Keita)
종교 아프리카 토속신앙 + 이슬람교

1. 개요2. 일대기
2.1. 기이한 탄생2.2. 불운한 유년기2.3. 방황과 재기2.4. 소쏘에 대한 반란과 귀환2.5. 네게보리아 전투2.6. 칸키네 전투2.7. 키리나 전투2.8. 소쏘 제국의 멸망2.9. 귀환, 그리고 말리 제국의 형성
2.9.1. 티라마칸의 서부 원정
2.10. 사망2.11. 순자타 사후
3. 기타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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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나 제국의 몰락 이후 갈라진 여러 왕국들을 통합한 뒤, 가장 큰 숙적인 소쏘(Sosso)인을 물리치고 말리 제국을 세운 인물이다. 그의 일대기는 《순자타 서사시》(Epic of Sundiata)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판본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의 행보 자체는 대체로 일치하는 편이다.

2. 일대기

일대기는 그리오(Griot)[3] 젤리 마마두 쿠야테(Djeli Mamadou Kouyaté)의 기록을 주로 인용하였다. 참고로 젤리 마마두의 전승은 이슬람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1. 기이한 탄생

순자타의 아버지인 마간 콘 파타(Maghan Kon Fatta)[4]는 상당한 미남이자 백성들에게 사랑받던 만딩고 인의 왕[5]으로서, 그의 수도인 니아니(Niani)에서 통치를 했다.[6]

어느 날, 왕이 시종들과 함께 있었는데 상가란(Sangaran)의 사냥꾼 복장을 한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했고, 그는 마간 콘 파타의 왕국의 국경에서 큰 암컷 사냥감을 잡았기 때문에 그 몫의 일부를 왕과 나누고자 왔다. 당시 왕의 그리오였던 그난쿠만 두아(Gnankouman Doua)는 왕이 사냥꾼들의 관습을 존중하기 때문에 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냥꾼은 이윽고 왕궁에 초대를 받아 자신이 한 여행에 대해 이야기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왕은 이 상가란의 사냥꾼들이 뛰어난 점술가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기꺼이 허락했다.

그는 가방에서 점칠 때 사용하는 12개의 개오지 조개의 껍질을 꺼내 이리저리 흔들면서 집중하다가 왕에게 '왕의 후계자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괴물 같은 눈'을 가지고 등이 굽은 흉측하고 못생긴 여자를 데려올 두 사냥꾼의 도움을 통해 올 것이며 그 여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보다도 더 큰 힘을 휘두르게 될 후계자를 낳게 될 것이므로, 왕은 반드시 그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 이것들을 위해서는 붉은 소를 바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는 예언을 하고는 떠났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마간은 이미 사쑤마 베레테(Sassouma Bérété)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았고 그녀와의 사이에 8살 난 아들 단카란 투만(Dankaran Touman)까지 있었다. 즉 유부남이었던 것.

이 일이 있은 후, 왕과 그리오가 큰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사냥꾼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어떤 여자를 호위하고 있는 걸 보았다. 사내들은 왕에게 인사를 올리며 자신들은 도(Do) 지역에 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만당고 인인 울람바(Oulamba)울라니(Oulani)라고 했다. 그들은 왕의 배필감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여자를 데려왔다고 했는데 정작 그 여인은 얼굴을 전부 가린 상태였고 다만 옷에 착 달라 붙을 정도로 어마무시하게 큰 가슴과 근육질의 팔뚝(...)만을 볼 수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아직 못 봤지만 상당히 갭모에스러운 여인의 상태를 보고는 문득 상가란 사냥꾼의 예언을 떠올렸지만 너무 당혹스러워서 그리오 그난쿠만에게 말없이 당혹감을 표현했다. 곤란해 하는 왕을 본 그난쿠만은 일단 궁에 가서 이야기를 들려달라면서 그들을 초대했다.

사냥꾼들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수확이 끝난 뒤 여행을 떠났는데 도 근처의 시골에 괴물 같은 물소가 나타나 매일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도의 왕은 물소를 죽인 자에게 보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이 사냥꾼들은 자신들이 이 물소를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운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 그들은 강가에서 굶주림으로 정신이 혼미한 노파를 만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했지만 이 사냥꾼들은 그녀를 불쌍하게 여겨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고 식사를 마친 뒤 노파는 정신이 온전해지자 사냥꾼들이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안다면서 "내가 바로 그 소문의 괴물 물소다" 라며 자신은 그들의 관대함에 패배했고 그들이 물소를 사냥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자처했다.[7]

노파는 그들에게 지팡이와 달걀을 주면서 자신이 물소로 변하면 지팡이로 세 번 가리키면 물소가 화살에 약해지고 그 때 화살을 쏘면 물소는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 그들을 추적할 것이고 뒤에서 쫓아오는 물소에게 달걀을 던지면 물소가 멈추게 되고 그 때 죽일 수 있다면서 물소가 죽으면 그 물소의 특징인 황금 꼬리를 잘라 왕에게 가져다 주면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사냥꾼들이 기꺼이 동의하자 노파는 한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도의 왕이 그들에게 상을 내리며 여자를 고르라고 하면 반드시 군중 속에서 '가장 못생긴 하녀'를 찾아 고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람 외모가 다양한데 어떻게 찾냐고 하자 노파는 "예감이 말해 줄거다" 라고 했다.

청년들은 마침내 노파의 말처럼 물소를 지팡이와 달걀을 이용해 잡았고 그 꼬리를 잘라 도의 왕에게 가져갔다. 왕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포상금과 함께 여자들 중에 하나를 골라보라고 했는데 그들은 노파와의 약속을 지켜 딱 예감에 적중하는 인물을 찾아냈다. 사람들은 최고의 미녀들을 두고 최고로 못생긴 여자를 고른 그들의 안목을 대놓고 비웃었는데 그녀가 바로 훗날 순자타의 어머니가 되는 소골론 케주(Sogolon Kedjou)[8]였다.

소골론은 자신의 외모가 얼마나 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궁에 온 뒤에도 마간 왕의 늙은 고모의 처소에서 숨다시피 하며 지냈다. 반면에 마간 왕은 점술가 사냥꾼의 예언이 들어맞는 것을 보고는 빨리 소골론과 결혼해 아들을 낳고자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했다. 한편 왕의 첫째 부인인 사쑤마 베레테는 자신과 큰아들을 두고 결혼식 준비를 하는 남편의 모습에 질투를 느낀 나머지 소골론에 대한 추악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성대한 결혼식이 끝나고 왕은 동침을 하려 했으나 소골론은 완강히 거부했다. 이에 마간 왕은 강제로라도 동침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소골론의 의지에 당해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냥꾼들이 죽였던 물소의 혼이 소골론에게 달라 붙어 소골론의 정신력을 강하게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동침을 둔 실랑이(...)는 무려 일주일이나 지속되었고 대중들은 왕이 일주일이나 신혼방에서 나오지 않자 우려했다.

결국 소골론의 엄청나게 긴 머리카락에 식겁하고 또 동침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기운이 다 빠진 왕은 왕궁 안에 있는 '신성한 모래'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 모래에서도 답이 나오지 않았고 결국 왕은 모래 위에서 명상을 하다가 '소골론이 예언 속에 등장하는 아이를 낳아줄 여자가 아니라 혹시 제물로 바쳐야 하는 여자(예언의 붉은 소)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왕은 자신의 검을 들고 침실에 있는 소골론을 찾아가 "당신은 희생해야 할 처녀요!" 라고 소리쳤고 너무나도 겁에 질린 소골론은 기절해 버렸다. 그녀가 정신을 잃자 물소의 혼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 나갔고 그 때 마간 왕은 소골론과 동침할 수 있었다. 소골론은 그 날 밤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한편 왕의 첫째 부인인 사쑤마는 왕이 새 아내에게만 관심을 보여 나오지도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왕의 장남인 자신의 아들이 소외될까봐 소골론을 저주로 죽이려고 했지만, 그녀가 불러들인 모든 주술사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은 대단한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소골론을 이길 수 없다'며 포기해 버리는 바람에 다음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출산일이 되자 소골론은 진통을 시작했고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 강한 번개 폭풍이 일어났다가 아이가 태어나자 멈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간 왕은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고 자신의 성씨인 '자타(Djata)'과 더불어 아직 만딩고의 왕자들 중에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는 이름인 '마리 자타(Mari Djata)'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9]

2.2. 불운한 유년기

순자타의 어린 시절은 고난 그 자체였다. 그는 3살이 다 되도록 걷지 못해 기어다녔고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컸으며 크고 괴상한 눈을 가지고 있었고 너무 과묵했다. 또한 선천적으로 불구였던 탓에 여자들에게 인기도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의 이름을 쓰는 탓에 또래에게도 놀림의 대상이 되었는데, 과거 비상한 힘을 지녔던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았는지 힘이 상당히 세서 어머니 소골론이 친구들과 잘 지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가 자신과 어머니를 조롱하자 그 '강한 팔뚝'으로 그 친구를 혼절하도록 때려눕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왕의 첫째 부인인 사쑤마는 자신의 11살 아들인 단카란이 순자타와 비교해서 건강하고 품위가 있었기 때문에 "내 아들은 진(정령)에게서 약속 받은 건 없지만 적어도 두 발로는 걸을 수 있지!" 라면서 순자타와 소골론을 조롱했다. 마간 왕도 영웅이 될 운명이랍시고 태어난 아들의 상태가 저 모양이다 보니 내심 불쾌했지만 그리오인 그난쿠만이 인내심을 가지시라고 조언해 겨우 참아냈다. 하지만 소골론과의 사이에서 딸인 콜론칸(Kolonkan)이 태어나자 결국은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실망감이 폭발해 소골론과 순자타를 자신의 궁에서 쫓아냈고 곧장 '전설적인 아름다움'으로 이름 높았던 미녀 나만제(Namandjé)를 세 번째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만딩 보리(Manding Bory)를 낳았다.

왕의 그리오 그난쿠만 두아는 소골론과 순자타를 쫓아낸 왕의 행동에 제발 인내심을 좀 가지라며 말렸다. 그러던 중 왕은 니아니에 사는 장님에 늙은 대장장이[10] 선견자 눈파이리(Nounfairi)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가 "이미 위대한 씨앗은 심어졌다"고 왕에게 이야기 하자 그제서야 마간 왕은 안심하며 소골론을 찾아가 원하는 곳에 머무르라고 했고 둘 사이에서 또 하나의 딸인 자마루(Djamarou)가 태어나게 되었다.

순자타는 자신의 이복형 단카란과는 달리 7살이 되도록 일어서지를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마간 왕은 아무래도 장애를 가진 탓에 헤쳐나가야 할 길이 먼 순자타가 걱정이 되었는지 그를 궁으로 데려왔고 순자타는 거기서 자기 또래의 소년을 보게 되었다. 그 소년은 바로 왕의 그리오였던 그난쿠만의 아들인 발라 파세케(Balla Fasséké)였고 왕은 두 아이를 보며 "이 아이(발라)를 너(순자타)에게 넘기겠다. 너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친한 친구가 되라"는 지시를 내렸다. 두 아이가 동의하며 맹세하자 왕은 흐뭇해하며 그날 밤 세상을 떠났고 그의 그리오였던 그난쿠만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소골론의 태(胎)를 통해 위대한 왕이 태어난다는 예언은 당시 만딩고의 원로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마간 왕의 사망으로 원로회가 소집되었고 태후가 된 사쑤마 베레테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인해 그녀의 아들 단카란 투만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단카란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섭정이 된 태후는 새로운 권력을 이용해 소골론과 아들을 궁전의 뒤뜰로 추방했고 더불어 순자타를 찾아가 비웃고 싶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궁으로 초대하는 악랄한 모습을 보였다. 소골론의 딸 콜론칸은 어머니의 비참한 심정을 이해하며 집안 일을 도왔고 먹는 것의 대부분을 태후의 식탁에서 나오는 찌꺼기로 해결하던 소골론을 위해 작은 텃밭을 가꾸기도 했다.

어느 날, 향료로도 사용되는 바오바브나무의 이파리가 부족해지자 소골론은 태후 사쑤마에게 몇 장 구걸하러 갔다. 처음엔 이런 작은 부탁마저 거절하던 사쑤마는 이것이 소골론을 조롱할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몇 개 던져 주면서 '네 아들은 내 아들만도 못하다'는 조롱을 가했다. 결국 이런 굴욕을 겨우 참아내고 온 소골론은 집에서 순자타가 붙임성 좋게도 밥을 쳐묵쳐묵 하고 있는(...) 꼴을 보고는 결국 폭발해 순자타를 마구 때렸다. 어머니의 폭행에 놀란 순자타는 왜 때리냐고 물었고 소골론은 자신이 당한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러자 순자타는 어머니를 위로하며 오늘부터 걸어 보이겠다는 말로 소골론을 안심시켰다.

순자타의 그리오를 자처한 발라 파세케는 선대왕의 점술가 대장장이의 아들인 파라쿠루(Farakourou)에게서 가장 단단한 쇠지팡이를 가져왔다. 순자타는 쇠지팡이를 이용해 몸을 일으키는 연습을 했고 결국 파라쿠루가 만든 절대 휘어지지 않을 것 같던 쇠지팡이가 활처럼 구부러질 정도로 노력해 마침내 일어서서 걷는데 성공했다. 발라는 이 기적 같은 일을 기념하기 위해 '활에 대한 찬가'를 지어 불렀다.

순자타는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니아니 외곽의 거대한 바오바브 나무를 통째로 땅에서 뽑아낸 뒤 그것을 어머니의 오두막 근처에 심었다. 순자타는 걷게 된 이후 사냥에도 익숙해져서 어느 새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졌다. 덩달아 어머니 소골론 역시 '태후의 억압 속에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순자타를 길러낸 대단한 여인'으로 칭송 받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런 전개는 ' 엄마 치마폭에서 헤어나올 줄 모르는 꼭두각시'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늘어가던 현왕 단카란 투만과는 비교되었다.

이 시기에 순자타는 특히 중요한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타본(Tabon) 왕의 아들 프란 카마라(Fran Kamara), 시비(Sibi) 왕의 아들 카만잔(Kamandjan), 그리고 그의 이복 동생인 만딩 보리였으며[11] 총명했던 발라 파세케가 이 소년들을 적극적으로 교육시켰다.

한편, 어머니 소골론은 태후 사쑤마가 자신들을 해칠 음모를 꾸밀 거라는 것을 알았고, 순자타에게 니아니를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사쑤마가 사악한 마법으로 공격할 경우 이복 동생인 만딩 보리나 여동생 자마루의 경우는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자타는 이에 동의했고 발라와 함께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자 했는데 공교롭게도 단카란 왕은 소쏘(Sosso)의 왕인 마법사 왕 수마오로 칸테(Soumaoro Kanté)[12]에게 보내는 사신으로 발라 파세케를 임명해 버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친구이자 동맹이었던 순자타와 발라를 떨어뜨리려는 태후의 속셈이었다.

순자타는 분노했지만 어머니가 만류해 겨우 참았고 순자타와 만딩 보리는 궁중에서 사소한 일로 단카란 왕과 대립각을 세워 스스로 추방되는 방식을 택해 궁을 빠져 나왔다. 이 계획은 성공해 소골론과 순자타, 이복동생 만딩 보리와 소골론의 딸들은 니아니를 떠나게 되었다. 한편 태후 사쑤마는 이들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이를 대대적으로 알렸고 그로 인해 많은 마을들이 니아니의 통치자를 화나게 할까봐 두려워 추방된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2.3. 방황과 재기

수도 니아니에서 탈출한 이후 일행은 제데바(Djedeba)의 마법사 왕 만사 콘콘(Mansa Konkon)과 함께 지냈는데 특히 그의 딸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어느 날 콘콘은 순자타를 무기가 가득 늘어선 방으로 불러 자신과 '우오리(Wori)[13]를 할 건데 만약 순자타가 지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순자타는 자신이 이기면 칼을 달라고 하며 응했다. 왕이 시를 지은 뒤 순자타의 차례가 되었는데 순자타는 「 하지만 금은 어제가 되어서야 왔노라 」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넣었고 콘콘 왕은 크게 분노했다. 순자타는 이미 콘콘의 딸을 통해 콘콘이 자신을 죽이는 대가로 사쑤마 태후에게서 금을 받았다는 걸 알았고 그 부분을 비꼬려고 도발적인 문구를 넣었던 것이다. 결국 일행은 추방되었다.

제데바를 나온 일행은 순자타의 전 놀이친구였던 프란 카마라(Fran Kamara)가 왕자로 지내는 왕국이 있는 서쪽의 타본(Tabon)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곳의 왕은 나이가 많았고 니아니의 노여움을 사는 것을 걱정했다. 그는 일행을 잠시 동안만 수용하는 한편, 그들이 순회하는 상인들을 통해 가나로 여행하게 할 계획을 세웠다. 왕은 일행을 잠시라도 쉬게 하기 위해 상인들의 출발을 며칠 늦췄는데, 그 기간 동안에 순자타와 만딩 보리, 그리고 프란 카마라는 다시금 우정을 재확인했다.

순자타와 친구들은 떠나기 전에 순자타가 자신의 왕좌를 되찾기 위해 말리(만딩고)로 귀환하는 길에 타본을 방문하여 프란 카마라를 그의 군대의 대장군으로 삼고 프란 카마라는 그의 친구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한다는 맹세를 했다. 상인들이 출발하자 일행은 그들을 따라 이동하면서 상인들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중에는 소쏘의 지배자이자 다른 왕국에서 조공을 무자비하게 뽑아내는 잔인함으로 알려진 수마오로 칸테의 이야기도 있었다.[14]

일행과 상인들은 옛 가나의 도시인 와가두(Wagadou)에 도착했다. 거대한 숲에 둘러쌓인 대도시 와가두는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융성했고 상인들은 거기에 자리를 잡고 이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당시 와가두의 왕은 에게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딩고의 언어를 쓸 줄 아는 그의 형이 일행을 환영했다.[15] 이윽고 왕이 도착하자 소골론은 죽은 남편이 과거 친선을 위해 사신을 보낸 적이 있다면서 망명을 받아달라고 간청했고 받아들여졌다. 일행은 간만에 편히 쉬었으나 풍토가 맞지 않았는지 1년 후 소골론은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고 와가두의 왕은 공기가 깨끗한 '메마(Mema)'로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안내했다.

당시 메마는 왕이 부재중이었지만 와가두에서 먼저 전령을 보낸 탓에 그의 누이가 일행을 맞이했다. 소골론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고 왕의 누이와 친하게 지냈다.[16]

얼마 지나지 않아 메마의 왕 무사 툰카라(Moussa Tounkara)가 산악부족을 제압한 뒤 돌아왔고 그 사이 자신을 방문한 일행을 환영했다. 무사 왕은 순자타의 재능을 남다르게 보았고 그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순자타를 자신의 군사 작전에 데려갈 정도였다. 순자타는 예상대로 전공(戰功)을 세웠다.[17]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무사 툰카라는 순자타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하지만 소골론은 너의 운명이 곧 만딩고의 운명이니만큼 더 인내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이는 그의 진짜 운명은 메마가 아닌 자신이 되찾아야 할 땅에 있다는 얘기였다.

한편, 순자타와 일행이 여러 도시들을 지나며 방황하는 동안 만딩고의 왕 단카란 투만은 발라 파세케를 사신으로 파견해 수마오로를 달래려고 자신의 여동생인 나나 트리반(Nana Triban)까지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수마오로에 의해 몰락했다. 수마오로는 사신으로 왔던 발라 파세케와 나나 트리반을 사로잡아 포로로 끌고 갔다.

수마오로에게 끌려간 발라 파세케는 왕이 장기간 자리를 비우자 몰래 왕만이 아는 비밀의 방으로 가는 길을 찾아냈고 그 곳에서 수마오로의 우상들을 발견했다. 우상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충격적이었는데 사람의 가죽으로 덮인 벽, 피부로 만든 옥좌, 수마오로가 죽인 아홉 왕들의 머리와 발라 파세케가 들어오기 위해 잠들게 했던 거대한 뱀 등이었다. 그 중에서 최고의 물건은 바라만 봐도 연주해보고 싶게 만드는 '발라폰(Balafon)'[18]이 있었는데 발라 역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것을 연주해 보았다.

하지만 마법사 왕 수마오로는 누군가가 자신만이 연주해 오던 악기를 연주하자 그걸 바로 알아챘다. 그는 급히 궁으로 돌아왔고 발라폰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던 발라를 식겁하게 했다. 그러나 똑똑했던 발라는 갖은 말발을 동원해 수마오로를 설득해 납득시켰고(!) 그의 총명함에 반한 수마오로는 발라를 죽이는 대신 자신을 섬기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2.4. 소쏘에 대한 반란과 귀환

수마오로는 잔혹한 성격 말고도 성적인 면에서도 괴팍했다. 그는 자신의 최고 사령관이자 조카였던 파콜리 코로마(Fakoli Koroma)의 아내를 빼앗아 범하는 몰상식한 짓을 벌였다. 아내를 삼촌에게 뺏기는 수모를 당한 파콜리 코로마는 분노했고 마법사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두고 타파해야 한다는 의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게 마치 신호라도 된 것 마냥 단카란 투만을 비롯해 수마오로에게 탈탈 털렸던 전국 각지의 지도자들이 반란 소집에 응하게 되고 조카의 배신으로 당황한 수마오로는 점령한 지 얼마 안 된 니아니를 불태우고 도주했다.

당시 만딩고는 수마오로 칸테의 횡포 아래서 숨죽이고 있었고, 점술가들은 대왕이자 정당한 후계자인 인물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계속 예언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예언 속 인물인 순자타에 대해서는 7년 동안이나 아무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순자타의 아버지인 마간 왕의 궁정에서 온 옛 그리오인 쿤툰 마니안(Kountoun Manian)과 사쑤마 태후의 동생이었던 만잔 베레테(Mandjan Bérété)는 니아니 밖으로 나가 순자타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로 결심했다.[19]

메마에 있던 순자타는 초조해했는데 수마오로 손에 니아니가 불타면서 만딩고가 결국 몰락했고 파콜리 코로마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며 거기에 더해 순자타의 어머니 소골론까지 오랜 여정으로 인해 몸이 약해져 병마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한편, 순자타를 따라 함께 왔던 여동생 콜론칸은 시장에서 니아니의 바오바브 나무 잎사귀를 파는 상인들을 보게 되었고 어머니를 생각해[20] 그들을 데려갔다. 소골론은 이들과 대화하면서 이들이 그냥 상인이 아닌 남편의 궁정에 있었던 저명한 인물들이라는 걸 알아챘다. 이 상인들의 정체는 바로 앞서 순자타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던 쿤툰 마니안과 만잔 베레테가 보낸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순자타를 만나 만딩고의 소식을 전하고 만딩고에서만 자라는 채소까지 바치면서 그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애썼고 순자타는 마침내 돌아갈 생각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메마의 왕 무사 툰카라가 여행을 갔다가 밤 늦게서나 돌아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당장 떠나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소골론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는데 순자타는 어머니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는 함께 저녁을 보내며 신에게 지금 어머니의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다.[21] 소골론은 결국 다음 날 아침에 잠자듯이 세상을 떠났고, 순자타는 왕에게 어머니를 애도하는 동안만이라도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무사 왕은 그 요구를 달갑지 않게 여겼고 순자타를 배은망덕하다며 비난했다.[22] 그는 마지못해 순자타의 청을 들어주는 대신, 소골론이 안식을 취할 땅의 값을 배로 지불하지 않으면 매장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악의적인 제안을 했다. 놀란 순자타는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으니 나중에 값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왕은 고집을 부렸다.

순자타는 무사 툰카라가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짐작하고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깨진 도자기, 새의 깃털, 짚으로 만든 가시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고 그걸 왕에게 바쳤다. 왕은 그런 모욕적인 선물을 받고는 당장 그를 빈손으로 내쫓아내려 했지만, 그 바구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은 아랍인 출신의 조언가는 왕을 말리면서 "왕께 바쳐진 이 바구니는 어머니를 매장해 달라는 자신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훗날 다시 돌아와 메마에 전쟁을 일으켜 폐허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알려주었다. 결국 간담이 서늘해진 왕은 소골론의 매장을 허가하고 메마를 떠나는 순자타에게 병력의 반을 내줬다.

하지만 그 병력만으로 수마오로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순자타는 군대의 절반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먼저 와가두로 향했고 거기에서 어느 정도 병력을 얻었다. 이후 타본으로 갔고 이제는 어엿한 왕으로서 '타본 와나(Tabon Wana)'라고 불리는 친구 프란 카마라를 만났다. 프란은 왕이 된 후 파콜리의 반란에 동참해 소쏘에 저항했고 때문에 소쏘의 왕 수마오로는 소문만 무성하던 순자타보다는 타본을 더 경계하고 있었다.

수마오로는 자신의 아들인 소쏘 발라(Sosso Balla)[23]를 병력과 함께 보내 타본에서 외부로 나가는 골짜기의 진입로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때 마침 병력을 모은 순자타가 타본이 내려다 보이는 산에 도착했다. 순자타 군의 지휘관들은 먼 길을 재촉해서 온 탓에 병사들이 지쳤으니 전투를 다음 날로 연기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순자타는 그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즉각적인 전투를 지시했다.

순자타는 만딩 보리에게 후위의 기병을 맡겨 배치하게 한 뒤 자신은 선두를 이끌고 전투에 나섰다. 순자타가 이끄는 군대는 빠르게 소쏘군을 기습해 소쏘군의 가장 강한 대장장이들을 많이 죽였고, 이후 지휘관인 소쏘 발라를 추격했지만 결국 놓쳤다. 만딩 보리는 언덕 위에서 그의 기병대를 이용, 적을 뒤에서 포위해 많은 인원을 포로로 잡았다.

프란 카마라와 그의 타본 군은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전투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를 맞이하고는 밤새도록 승전 잔치를 벌였다. 다음 날 그들은 함께 타본으로 이동했다.

2.5. 네게보리아 전투

수마오로는 소쏘의 대군 및 소쏘의 동맹이었던 졸로프(Jolof)의 왕인 만사 졸로핑(Mansa Jolofing)이 이끄는 군대와 함께 네게보리아(Negueboria)로 이동했다. 두 군대는 서로 마주치자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수마오로는 원래 숫적인 우세를 이용해 점진적으로 넓은 평야를 점령한 뒤 순자타와 그 군대를 평야로 끌어들여 격파하려고 했으나, 순자타가 너무나도 빠르게 진격하면서 장기적인 계획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수마오로는 어쩔 수 없이 계곡으로 이동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순자타는 배후에 궁수들을 배치하고 기병으로 사각형의 방진(方陣)을 형성하게 하는 독특한 전술을 사용하였다.

계곡 건너편에 있던 순자타는 유달리 큰 키와 뿔로 장식된 투구를 쓴 수마오로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순자타의 군대는 곧바로 돌격했지만 뜻밖에도 소쏘의 대장장이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수마오로는 전투 자체는 아들인 소쏘 발라에게 맡기고 자신은 높은 곳에서 전투의 교착 상태를 지켜보았는데 순자타가 지휘하는 돌격대의 돌진으로 인해 중앙에서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마법사 왕은 더 많은 대장장이들에게 그들을 둘러싸라고 지시했지만, 순자타의 배치는 이미 준비된 상태였고 기병의 방진은 사방에서 더 잘 싸우기 위해 직사각형으로 뻗어 있었다. 순자타가 지휘하는 돌격대는 재빠르게 움직여 소쏘 군을 기습했고 우왕좌왕 하던 소쏘의 병사들은 돌격대의 후방에 있던 궁수들이 날리는 불화살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의 열기에 미친 듯한 순자타는 다시금 적의 지휘관 소쏘 발라를 추격했지만 또 놓치고 말았다.

보다 못한 수마오로가 직접 대열에 합류해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켰고, 순자타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숙적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마법사 왕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그는 말을 타고 곧장 가까이 다가가 무기를 던졌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그가 던진 무기는 마법사 왕의 가슴에 맞고는 튕겨나갔다. 순자타는 마음을 진정시킨 뒤 이번에는 화살을 쏘았지만, 수마오로는 놀랍게도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채는(!) 묘기를 선보였다. 화가 난 순자타는 이번엔 창을 들고 돌진했지만 마법사 왕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순자타는 수마오로가 자신이 있었던 언덕으로 갔는지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황당하게도 수마오로는 순자타의 시야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사라져 버렸다. 순자타가 당황한 사이 소쏘의 군대는 얼른 퇴각했다.[24]

전투는 분명히 순자타가 승리했지만 적의 지휘관을 모두 놓친데다 수마오로에게 마법으로 농락까지 당했던지라 순자타는 심히 당황했다.

2.6. 칸키네 전투

다음날 순자타는 수마오로의 병사들이 강행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뒤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동등한 기세로 추격할 것을 결심했다. 순자타의 군대는 소쏘 병사들을 쫓으며 하루 종일 행진했고, 겨우 밤이 되어서야 숨을 돌리기 위해 멈춘 뒤 현재 위치인 칸키네(Kankigne)에 야영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소쏘의 지휘관들 역시 순자타가 무리한 강행군을 실시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기회로 야습을 계획했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순자타의 병사들은 혹독한 강행군에 너무 지쳐서 야영지가 꾸려지자마자 진중에 늘어져 있었고 군대 자체가 휴식을 위해 일정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소대는 적의 기습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만 했다.

밤이라 주변은 어두웠고 적의 난입으로 병사들이 혼란스러워하며 우왕좌왕 하는 와중에도 순자타는 서둘러 자기 주변의 병사들을 모아 자신의 최대 동맹인 프란 카마라의 타본 군대를 습격으로부터 구해냈다. 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순자타 군의 궁수들이 소쏘 군을 향해 불화살은 날려 지원했다. 소쏘의 병사들은 순자타가 엄청난 기세로 타본의 병사들을 구출하는 것을 본데다가 궁수들의 불화살이 쏟아지자 전의를 상실하고는 퇴각했다.

이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많은 손실을 입혔지만 어찌됐건 순자타의 또 다른 승전 중 하나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순자타의 병사들은 소쏘의 기습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되려 경각심이 되살아났고 반대로 소쏘의 병사들은 야습을 가했음에도 오히려 반격을 당함으로서 사기가 더욱 저하되고 말았다.

칸키네 전투 이후 시비(Sibi)의 왕이자 프란 카마라의 사촌, 그리고 순자타의 옛 친구였던 '카만잔(Kamandjan)'이 순자타의 군대에 합류하겠다는 세력을 이끌고 찾아왔다. 순자타는 그런 카만잔과 군대를 맞이하고는 함께 시비로 이동해 머물렀다.

2.7. 키리나 전투

순자타는 시비에 머무는 동안 어떻게 하면 수마오로의 마법의 힘을 깰 수 있는지 고민했고 그 곳의 점술가들과 상의해 그들의 조언에 따라 흰 황소 100마리, 숫양 100마리, 수탉 100마리를 제물로 바쳤다. 그 와중에 놀랍게도 수마오로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이복 여동생인 나나 트리반과 발라 파세케가 진중에 도착했다.

우선 나나는 자신의 어머니가 순자타를 미워했지만 자신은 그런 적 없다고 호소했고, 순자타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나나는 수마오로에게 바쳐진 뒤 그의 많은 아내들 중 하나가 되었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순자타를 미워하는 척을 하면서 지내다가 발라 파세케와 연락이 닿아 은밀히 뜻을 주고 받았다. 둘은 계략을 꾸며 나나는 남편 수마오로의 힘을 찬양하면서 은근슬쩍 그에게 마법의 근원을 밝히게 했고, 자신만만 했던 수마오로는 그녀에게 자신이 가진 많은 우상들을 보여주며 그것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한편 발라는 과거 수마오로의 우상들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눈으로 확인한 것과 나나가 알려준 정보를 취합해 마침내 수마오로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되었고 수마오로가 순자타를 치기 위해 출정하자(네게보리아 전투), 곧바로 함께 탈출했으며 순자타의 승전 소식을 통해 진영을 찾아올 수 있었다. 다시금 순자타의 그리오로 돌아온 발라는 순자타를 따르는 각 왕들과 지휘관들에게 다시 한 번 충성 맹세를 받아내었다.

다음날 순자타는 수마오로의 진입을 막기 위해 다얄라(Dayala)에 진을 쳤다. 재밌는 건 여태껏 수차례 싸워왔지만 공식적으로는 순자타나 수마오로나 지금까지 서로에게 전쟁을 선포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순자타와 수마오로는 마법으로 올빼미를 부려 대화(를 가장한 머리 싸움을) 했다고 전해진다. 순자타는 자신의 운명 속 역할을 다시금 탈환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수마오로는 그것을 부정하며 말리는 식의 대화가 오갔다. 이 둘은 최고의 지혜를 가진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머리 싸움에 많은 비유와 상징들이 사용되었다.[25]

둘 사이에 치열한 머리 싸움이 전개되는 동안, 만딩고의 반란에 불을 질렀던 파콜리 코로마가 도착했다. 그는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저항에 명분을 주기 위해 순자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를 좋은 징조라고 판단한 발라 파세케는 파콜리를 다른 지휘자들 사이에 앉도록 권했지만 순자타는 모든 지휘관들이 동의할 때까지는 합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26] 얼추 마음이 정해지자 순자타는 곧 마법사 왕을 공격할 뜻을 밝혔고, 다음 날 수마오로가 주둔한 키리나(Kirina) 근처의 언덕으로 나아가 전투를 준비했다. 그날 밤 순자타는 임박한 싸움을 위해 군대의 사기를 진취시키고자 큰 연회를 열었다.

다음 날 아침, 파콜리는 수마오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순자타는 사냥꾼으로 분장한 뒤 만딩 보리에게 자신의 큰 활과 수마오로를 물리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마법 깃든 "치명적인 화살"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화살 끝에는 마법사들이 금기시 하는 주술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한편, 나나 트리반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 순자타에게 '수마오로가 자신과 발라의 탈출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투 중에는 순자타를 피해 있겠다'고 알려왔다. 나나의 이런 말은 순자타를 순간적으로 불안하게 했지만 발라가 곧바로 '자신이 마법사 왕의 종말에 대한 꿈을 꿨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겨우 진정했다.
파일:Sundiata's charge.png
돌격하는 순자타의 기병대와 그 뒤를 따르는 보병들

여러 차례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마오로의 군대는 여전히 순자타의 군대보다 수가 많았다. 그래서 순자타는 병력을 아끼기 위해 모든 병력을 전방에 배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궁수들은 후방에 남겨뒀다. 순자타가 전장의 함성을 크게 외치자 군대는 돌격했고 접전을 시작했다. 전투의 규모는 점점 커져 평야 전체로 확대되었고 순자타가 지휘하는 부대가 다시 돌진해 적의 중심부를 격파했다.

그 때, 만딩 보리가 순자타에게 '수마오로가 이끄는 본대가 반란을 일으킨 일에 대한 복수로 파콜리가 이끄는 병력의 측면을 격파하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후방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순자타는 소쏘의 병력들을 쉴 새 없이 죽였지만 그들의 압도적인 수를 뒤집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결국 그의 기병대를 파콜리가 이끄는 병력 쪽으로 이동시켰다. 수마오로는 순자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몸을 숨기려 했지만 순자타는 미리 준비한 치명적인 화살을 쏘아 마법사 왕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 순간, 마법사 왕은 자신의 힘이 떠나가는 것을 느꼈으며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자 불운의 징조인 검은 새들이 보였다. 결국 두려움을 느낀 수마오로가 전장을 이탈하는 바람에 소쏘의 군대는 다시 패배해 흩어졌다.

이제는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한 순자타는 파콜리와 함께 며칠 동안이나 말을 타고 마법사 왕과 그의 아들을 뒤쫓았다. 파콜리는 이번에도 놓치면 안되니까 험하고 위험하더라도 거리를 단축할 수 있는 지름길로 갈 것을 제안했다. 순자타도 그 말에 동의해 지름길로 진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마오로와 소쏘 발라가 시야에 들어왔고 순자타와 파콜리는 이들을 생포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되 섣불리 공격하지는 않았다.

파콜리는 소쏘 발라를, 순자타는 수마오로를 추격했다. 순자타는 창을 던져 수마오로의 말을 죽였고 말에서 떨어진 수마오로는 겁에 질린 채 무작정 달려 산에 올랐다. 순자타도 말에서 내려 도보로 추격했고 수마오로는 순자타를 피해 검고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자타는 수마오로가 숨어든 동굴 앞에서 멈춰 파콜리와 합류했는데, 파콜리는 자신이 노렸던 소쏘 발라를 인질로 잡고 있었다. 파콜리는 분노한 순자타에게 동굴이 강과 연결되어 있어 마법사 왕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고 알려주며 그를 진정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마의 기병들이 그들의 지휘관을 따라잡았고 순자타는 그들을 남겨 동굴의 출구와 입구를 감시하게 하고는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돌아갔다.[27]

2.8. 소쏘 제국의 멸망

키리나에서 승리를 거둔 후, 각지에서 온 왕들이 순자타에게 항복 문서를 보내왔고, 순자타는 소쏘 시(市)[28]를 마주하게 되었다. 수마오로가 수비대장으로 남겨 둔 부족장 누문케바(Noumunkeba)가 방어를 담당했는데 누문케바는 이미 도시 내에 식량을 비축한 상태였고 이 정도 병력이면 순자타의 인내심을 바닥낼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포위를 견뎌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순자타는 장기간으로 포위할 생각이 없었고 단번에 도시를 점령하겠다고 다짐한 상태였다.

다음 날 순자타의 군대는 성벽에 사다리를 걸친 채 올랐고, 본대는 소쏘의 성문을 공격했다. 순자타 주력 궁병들이 쏘는 불화살은 도시를 불태웠고, 다른 궁수들은 군대가 무사히 들이닥칠 수 있도록 성벽의 방어 병력을 향해 화살을 쏴 서서히 수를 줄이고 있었다. 일단 성 안에 진입한 뒤 문이 열리자 그들은 거침없이 학살을 자행했고 성 안의 여자와 아이들은 자비를 구걸해야 했다. 누문케바는 순자타를 장기전으로 몰아 넣어 죽이려 했지만 결국 순자타의 쾌속전으로 쉽게 승리했다.

발라 파세케는 순자타를 수마오로의 우상이 보관되어 있던 비밀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마법사 왕이 순자타의 화살에 마법의 힘을 잃은 것처럼 그 방 또한 마법의 힘을 잃은 것을 발견했다.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죽어가고 있었고 그걸 본 순자타는 방에 있는 모든 걸 무너뜨리라고 지시했다. 이후 밖으로 나온 순자타는 사로잡힌 수마오로의 부인들을 풀어주었고, 도시의 많은 이들을 포로로 잡은 뒤, 도시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서사시에서는 소쏘의 비극을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텅 빈 들판과 겨우 기억나는 곳 외에는 더 이상 소쏘에 존재하는 것은 없었다"

2.9. 귀환, 그리고 말리 제국의 형성

순자타의 다음 목표물은 '디아한(Diahan)'으로, 수마오로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고 뒤이어 수마오로가 키리나에서 대패한 뒤에도 수마오로에 대한 충성을 지킨 왕국이었다. 이 도시는 순자타에 의해 빠르게 점령되었지만, 다행히도 학살은 벌어지지 않았다. 순자타는 성읍에 남은 백성들을 용서했고, 결국 그들은 동맹이 되었다. 이후 순자타는 자신의 군대를 3개의 부대로 나눴는데, 그 중 하나는 자신이, 나머지 2개는 파콜리와 프란 카마라가 각각 담당했다. 순자타가 진군하는 동안 그들은 별도의 목표를 받아 움직인 것이다.

'키타(Kita)'의 왕 '키타 만사(Kita Mansa)'는 큰 산에 머무르는 '진(정령)'과 마법의 웅덩이로 보호되고 있어서, 자신의 권력과 도시를 내놓고 항복하라는 순자타의 요구를 무시했다. 순자타는 그를 따르는 점술가들의 권유로 진들에게 많은 동물을 제물로 바쳤고, 진들은 그의 제물을 받아들였다. 병사들은 발라 파세케의 '활에 대한 찬가'를 부르다가 다음 날 진격하여 키타를 쉽게 점령했고 키타 만사는 이들 손에 살해당했다. 순자타는 키타의 사람들을 용서했기 때문에 디아한과 마찬가지로 키타는 순자타의 동맹이 되었다.

다음 날, 순자타는 키타를 지켜주던 마법의 웅덩이를 관장하는 진과 맞섰다. 그는 진에게 자신이 어떻게 도시를 파괴하지 않기로 선택했는지를 이야기한 뒤, 웅덩이의 물을 세 번 마셨다. 그러자 그는 진의 힘으로 인해 변화되어 두 눈이 별처럼 빛을 내뿜게 되었고 '주체할 수 없는 총명함'을 갖게 되었다. 그는 키타에 머물면서 사냥으로 소일하며 다른 지휘관들의 귀환을 기다렸다.

병력이 도착하자 순자타는 어머니 소골론의 나라인 도(Do)로 향했다. 순자타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발라와 함께 오래 전에 괴물 물소가 죽었던 장소를 방문했다. 그는 감사의 뜻으로 그 장소에 수탉을 제물로 바쳤는데, 갑자기 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니아니 방향으로 향했다. 순자타는 이를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는 징조로 해석하고는 전군에 명을 내려 '카-바(Ka-ba)'에서 합류한 뒤 니제르의 시비(Sibi) 땅에서 함께 니아니로 진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순자타는 도착을 앞두고 전령에게서 전갈을 받았는데 이미 카-바에 그의 군대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소식이었다. 근처 평야에는 군대를 수용하기 위해 오두막이 지어졌고 성대한 회의가 준비되고 있었다.

순자타는 위대한 무슬림 왕처럼 옷을 입었고, 곧 모두가 모였다. 발라 파세케는 좌중을 집중시킨 뒤 순자타가 가져온 평화를 축하하고, 이름 별로 그에게 도움을 준 각 통치자들에게 감사하는 말을 전했다. 그는 수마오로 휘하에 있었던 억압에 대한 이야기를 되짚어보고, 순자타를 칭찬하며 모든 사람들을 싸움터로 이끈 그 용맹함을 칭송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순자타가 그들의 구세주임을 선언하자, 모두가 합심해서 환호했다. 통치자들은 그들의 창을 순자타에게 바치며 복종을 맹세했고, 발라는 '니아미아(Niamia)'라는 신곡을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이후 축제가 시작되었다.

축제가 계속되는 와중에 행군하면서 순자타는 자신이 점령한 왕국들을 원래의 주인들에게 돌려 주었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동맹이 공고해지기를 원했다. 또한 순자타는 자신의 부족을 위해 마법의 도시인 키타를 가졌지만, 이미 그 곳에 거주하고 있던 자신의 동맹국 주민들의 토지는 빼앗지 않고 그대로 가지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나서 순자타는 부족의 관계를 정하는 법을 공표했다. 이 법에는 어떤 부족과 결혼해야 하는지, 어떤 부족이 큰 제사 의식을 감당할 것인지, 또 어떤 땅을 지배할 건지 등을 포함하는 매우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법을 제정한 가장 큰 의도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순자타는 발라 파세케를 '벨렌-티구이(Belen-tigui / 의식의 달인)'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차후 만딩고의 그리오는 모두 그의 가문에서 선택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소쏘의 재물들은 마법사 왕의 횡포 때문에 더 이상 남은 게 없었던 부족들에게 골고루 분배했다.

드디어 순자타와 그 행렬이 니제르 강을 건넜고 불에 타 폐허가 된 니아니에 도착했다. 순자타는 많은 비용을 들여 더 높은 지대에 니아니를 복구했다. 순자타는 제국의 평화를 위해 정기적으로 모든 휘하 부족의 대표를 모아 잔치를 벌이며 회의를 하는 그바라(Gbara)라는 대회의를 통해 동맹을 결속시켰다.

2.9.1. 티라마칸의 서부 원정

순자타는 직접 키타 등의 대도시들을 정복하는 동안 자신의 장군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하나인 티라마칸 트라오레(Tiramakhan Traore)를 보내 가나 제국의 옛 지역들을 정복했다. 그 와중에, 소쏘의 동맹으로 참여했던 졸로프의 왕 '만사 졸로핑' 역시 티라마칸에게 처참히 패해 결국 살해당했고 그의 나라는 속주로 전락했다.[29]

티라마칸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전진해 오늘날의 세네갈, 감비아, 기니비사우 일대까지 진출해 정복했으며 책임지고 세네감비아 일대까지 정복했다. 마침내 카부(Kaabu) 왕국까지 진격한 티라마칸은 바이누크(Bainuk)[30] 인의 마지막 왕이었던 키키코르(Kikikor)를 죽이고 그 왕국을 점령했다.

2.10. 사망

순자타는 일반적으로 1255년에 죽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얘기가 있지만 오늘날까지도 만딩카 인의 전통에서는 위대한 왕들의 무덤을 공개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명확한 확인이 불가능하다.

프랑스의 민속학자인 '모히스 들라포스(Maurice Delafosse)'는 순자타가 의례를 치르던 중에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얘기하고, 대중들이 시위하는 와중에 암살되었다는 얘기도 있으며 니아니 근처의 산카라니(Sankarani) 강을 건너려다가 익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익사설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산카라니 강에는 '순자타의 깊은 물' 이라는 의미를 지닌 순디아타 둔(Sundiata dun)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성지가 위치해 있다.

2.11. 순자타 사후

순자타가 죽은 이후 그의 세 아들 중 유일한 친아들이었던 왈리 케이타(Wali Keita)[31]가 말리 제국의 2번째 만사가 되었다. 원래는 나이가 어려서 순자타의 이복 동생이었던 만딩 보리가 섭정이 되려고 했으나 욕심 많고 나름 능력도 있었던 왈리 케이타는 삼촌이 섭정에 오르기 전에 먼저 손을 써서 만사의 자리에 올랐다. 만사로서 왈리는 서아프리카로 원정군도 보냈고 말리의 농업 생산량을 높이는 등 나름 업적을 세우기도 했다.

만사 왈리가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은 탓에 이후 순자타의 양아들끼리 왕위 다툼을 벌였고[32] 마침내 승리해 칼리파를 추방한 와티 케이타(Ouati Keita)가 3번째 만사가 되었다. 하지만 와티 역시 자신의 삼촌을 무시하며 통치했으나 본인이 일찍 죽는 바람에 제위 기간이 고작해야 4년 밖에 되지 않았고, 전쟁 수준으로 심하게 벌인 왕위 다툼으로 인해 순자타가 세운 제국은 폐허가 되었다.

만사 와티가 사망하자마자 칼리파 케이타(Khalifa Keita)는 니아니로 돌아와 4번째 만사가 되었지만 통치 능력도 형편 없었고, 인성은 개차반이었다. 한 예로 지나가는 행인에게 장난으로 화살을 쏘기 위해 자신의 궁전 지붕에 올라갔다는 얘기가 있다. 통치하는 능력이 어찌나 형편 없었는지 양아버지 대에 정복했던 도시 가오(Gao)가 칼리파 시기에 분리해 버리기까지 했다.[33] 결국 그는 무능력함으로 인해 즉위 1년 만에 그바라 대회의에 의해 퇴위 당했다. 이후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후계를 이을 순자타의 아들이 없자, 그때서야 다 늙은 만딩 보리가 만사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아부바카리 1세(Abubakari Keita I)[34]였으며 활동 사항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복형의 양아들들이 어지럽혀 놓은 국내 질서를 안정화 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순자타가 해방시킨 궁정 노예 출신인 만사 사쿠라(Mansa Sakoura)가 즉위해 정복 활동을 펼치고 만사 칼리파 시기에 분리되었던 가오를 다시 합병했으나 메카 순례를 다녀오던 길에 다나킬(Danakil) 전사의 손에 살해당했다.

만사 사쿠라 사후, 그바라 대회의의 합의로 순자타의 누이인 콜론칸(Kolonkan)의 혈통이 만사가 되면서 만사 가오(Mansa Gao), 아부바카리 2세(Abubakari Keita Ⅱ)가 차례로 즉위했다고 알려졌으나 만사 무사의 아버지 아부바카리가 통치자였다는건 오역이라고 한다.
만사 가오의 경우 알려진 게 별로 없지만 큰 사건사고 없이 평화롭게 잘 통치했는데 그 다음 만사의 경우는 통치 도중에 대서양의 가장자리를 찾을 수 있다면서 2차례의 탐험을 떠났다가 2번째 탐험에서 실종되어 돌아오질 못했다[35]. 즉 아부바카리 2세가 아니라 만사 가오의 아들 무함마드 이븐 가오가 실종된 다음 만사일거라 한다.

만사가 실종된 최악의 사태로 인해 그바라 대회의에서는 아부바카리[36]의 손자이자 파가 라예 케이타(Faga Laye Keita)의 아들을 새로운 만사로 추대해 새로운 파가 라예 왕조(Faga Laye dynasty)[37]가 성립되었는데 그가 바로 메카로 성지순례를 가면서 여기저기 황금을 뿌려 대항해시대를 열게 만든 무사 1세(만사 무사)다.

3. 기타

4. 대중매체



[1] 수도 니아니 근처의 강. 유력한 사망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익사설을 제외한다면 수도 니아니에서 숨을 거뒀을 가능성이 높다. [2] 만딩고 인 국가의 계승으로 보면 전임자지만, 말리 제국 개국으로 보면 전임자는 아니다. [3] 서아프리카의 음유시인을 일컫는데, 이들은 학자이자 철학가이기도 했고, 때로는 왕의 조언가 노릇을 하기도 했다. [4] 다른 기록에서는 '나레 마간 코나테(Naré Maghann Konaté)'라고도 불린다. [5] 파마(Faama)라고 부른다. [6] 한 나라의 통치자치고는 워낙 소탈한 성격이라 종종 큰 판야나무(Silk-cotton tree)의 기슭에 앉아 사색을 하기도 했다. [7] 이 노파가 물소로 변해 난리를 친데는 이유가 있었다. 노파는 도의 왕의 여동생이었는데 전왕이 죽고 자신의 오라비가 자신에게 주어진 유산을 강탈한 뒤 왕이 되어 그녀를 추방했기 때문에 도에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8] 이름의 다른 표기로는 수쿨룽 콘테(Sukulung Conté)가 있다. [9] 유년기의 순자타는 아버지에게 내쳐진 이후 주로 어머니의 이름과 아버지의 성을 딴 '소골론 자타(Sogolon Djata)' 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0] 순자타 서사시에는 대장장이들이 자주 언급된다. [11] 당시엔 다른 왕국과 부족의 왕자들이 평화를 보장받고 미래의 동맹을 위한 씨앗을 뿌리기 위해 다른 궁정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12] 다른 문헌에서는 '수만구루(Sumanguru)'라고도 불린다. 집안 내력이 좀 대단한데 수마오로의 할아버지인 카니아가(Kaniaga)는 소쏘의 귀족들을 이끌고 망해버린 가나 제국의 남은 것들을 전부 강탈했고, 수마오로의 아버지 디아라 칸테(Diara Kanté)는 소쏘 족을 이끌고 가나 제국의 수도인 '쿰비 살레(Koubmi Saleh)'를 점령했다. [13] 조약돌이 사용되는 마법적인 놀이라고 하는데, 서사시에 나오는 내용으로 볼 때 순서대로 시를 읇으며 조약돌을 옮기는 일종의 보드게임으로 보인다. [14] 니아니를 다스리던 단카란 투만은 수마오로를 두려워 해 순자타의 친구이자 차세대 그리오였던 발라 파세케를 사신으로 보냈던 것이다. [15] 와가두에서는 만딩고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16] 이 때 왕의 누이는 자신의 오빠가 후계를 이을 자식이 없다는 것과 지금 도시를 비운 건 시골을 습격한 산악 부족들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는 중요한 이야기까지 해줬다. [17] 이 때 순자타의 전투 능력이 드러났는데 특히 왕이 순자타의 목숨을 걱정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진행하는 돌진이 유명했다. [18] 그리오가 시를 읇을 때 연주하는 나무로 만든 실로폰. [19] 일설에는 파콜리의 반란에 동참한 '단카란 투만'이 지금 상황에서 백성들에게 필요한 건 무능한 자신이 아니라 예언 속의 인물인 순자타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만잔 베레테에게 명을 내려 순자타를 찾게 했다고도 한다. [20] 바오바브 나무의 잎은 향신료로도 사용되었는데 소골론이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21] 물론 어머니를 빨리 죽게 해달라는 폐륜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미 병으로 쇠약해진 어머니가 자신을 따라 다시금 힘든 여정에 오르지 않고 차라리 평화로운 메마에서 숨을 거둔 뒤, 거기에 묻힐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22] 무사 툰카라는 순자타가 이미 풍요로운 메마의 후계자 자리를 얻었는데 왜 굳이 폐허가 된 니아니로 돌아가려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23] 공교롭게도 순자타와 동갑이었다. [24] 현실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수마오로는 임진왜란 당시의 곽재우처럼 자신과 똑같이 꾸민 장수들을 여러 곳으로 보내 적을 혼란시키는 전술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25] 이 머리 싸움의 경우는 마법적인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미 2차례의 전투로 양쪽 모두 지치고 피해가 컸기 때문에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외교적인 영역에서 해결을 보려는 시도로 생각된다. 물론 양쪽 다 팽팽했기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었다. [26] 순자타의 이런 모습이 냉정해 보일수도 있으나 군대의 지휘관으로서는 적절한 행동이었다. 소쏘를 당황하게 만든 반란의 주역이고 스스로 찾아와 충성을 맹세했다 하더라도 그와 함께 싸우며 공을 세운 장군들 사이에 앉혀버리면 자칫 분열과 갈등을 조장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 찾아온 그를 환대해 더 많은 세력들을 안심시키고 끌어들이려던 발라 파세케의 생각도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었다. [27] 이후 니아니로 돌아가는 길에 순자타가 마법사 왕을 자기 손으로 끝장내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하자 발라가 그를 위로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황으로 보아 수마오로는 동굴로 들어간 뒤 자결이든 아사든 간에 그 안에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동굴을 포위 했던 메마의 기병들이 그의 시체를 가져가지 못한 것을 보면 동굴과 연결된 강을 통해 도망가 은신했거나 혹은 강에 뻐져 익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28] 문헌에 따라서는 소쏘가 정복했던 옛 가나의 수도인 '쿰비 살레'로 등장하기도 한다. AOE 2의 캠페인에서도 쿰비 살레로 등장한다. [29] 사실 만사 졸로핑은 과거 순자타를 열받게 만든 적이 있었는데 전쟁이 본격화 되기 전, 순자타는 졸로프에 머물던 상단을 통해 많은 금을 지불하고 말을 사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만사 졸로핑이 말 도둑으로 가장한 병력를 보내 일행이 끌고 가던 말과 금을 몽땅 강탈해 간 적이 있었다. [30] 오늘날의 감비아와 기니비사우 일부, 그리고 세네갈에 주로 살고 있는 민족이다. [31] 일반적으로는 울리 1세(Uli Ⅰ)로도 불린다. 어린 시절 이름은 예렐린콘(Yérélinkon)이었다. [32] 순자타 휘하 장군들의 자식들 중에서 입양한 경우다. [33] 이 지역은 후에 6대 만사인 '만사 사쿠라(Mansa Sakoura)' 시기에 다시 병합되었다. [34] 아랍어로 발음할 경우 아부 바크르(Abu Bakr)가 된다. [35] 여기서 무함마드 이븐 가오의 탐험대가 남아메리카 브라질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는 떡밥이 있다. [36] 과거에는 아부바카리 1세(만딩 보리)와 동명이라 논란이 있긴 했지만 현재에는 다른 인물이라고 보고 있다. [37] 위에 나온 콜론칸 왕조나 파가 라예 왕조는 모두 케이타 왕조로 들어가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보통 'mini-dynasty(소왕조)로 표기된다. [38] 특히 마법사라고도 불렸던 순자타의 숙적이던 수마오로나 만사 톤톤과 같이 고유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인물들은 모두 어리석은 인물로 등장한다. [39] 여인들이 머리카락을 가리지 않았고 그들의 건축물이나 문화에는 여전히 토속 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제국 백성들 사이에서 토속 신들에 대한 제사가 이어졌다. [40] 사족으로 순자타의 의미가 '사자왕'이다. 물론 디즈니 측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으로 사용한 스와힐리어로는 음팔메 심바(Mfalme Simba)라고 부른다. [41] 말리 출신의 싱어송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