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Walker
1824년 5월 8일~ 1860년 9월 12일
1. 개요
윌리엄 워커는 미국 출신의 탐험가, 용병으로, 전대미문의 광기와 폭주의 방탕한 행적을 보인 인간이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필리버스터이기도 하다. 여기서 필리버스터란 정부의 승인 없이 외국을 지원하러 용병 일을 하는 사람들[1] 을 이르는데, 이는 미국 의회에서 소수당이 고의적으로 다수당을 방해하는 필리버스터의 어원이 된다. 의사 출신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워커는 내슈빌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유럽에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였다.2. 나라 세우기
2.1. 로어 캘리포니아 공화국
그래서 자신과 뜻이 맞는 백인들로 이뤄진 민병대를 만들어 1853년 멕시코 바하칼리포르니아수르 주로 가서 로어 캘리포니아 공화국을 선포했다.로어 캘리포니아 공화국 국기 |
2.2. 소노라 공화국
워커는 1854년에는 멕시코의 소노라 주로 가서 소노라 공화국을 선포한다.소노라 공화국 국기 |
2.3. 니카라과 공화국
자세한 내용은 필리버스터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10월 13일 워커의 군대는 보수주의 세력의 중심지인 서부의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나라를 사실상 제패했다. 워커는 꼭두각시 대통령으로 파트리시오 리바스를 앉히고 자신은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사실상 모든 권력을 수중에 넣었다.[2] 워커는 니카라과에 노예제를 재도입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만들며 리바스로 하여금 미국으로부터 정착민을 유입하기 위한 법령을 발표하게 했다. 그리고 다른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정복욕도 숨기지 않아 주변국들의 지대한 어그로를 끌었다. 나중에 다른 중앙아메리카 국가의 반격을 받아 수세에 몰리자 꼭두각시 대통령도 필요없다는 것인지 1856년 7월 12일 니카라과 대통령을 자칭하기에 이르렀다.[3]
윌리엄 워커 치하 니카라과 공화국 국기 |
2.4. 온두라스
워커는 온두라스로 눈을 돌렸다. 그는 온두라스의 내정에 개입하여 온두라스를 지배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로아탄 섬의 영국인 정착민들이 도움을 요청했다. 영국은 미국의 압력으로 로아탄이 포함된 이슬라스데라바이아 전체를 온두라스에 양도하기로 했는데,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영국인 정착민들이 워커에게 개입을 요청한 것이다. 워커는 1860년 8월 5일 90명의 다른 필리버스터와 함께 온두라스 북해안 트루히요에 상륙, 온두라스군 요새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트루히요를 자유항구로 선언했다. 온두라스와 인접한 지역에서 상당한 이해관계를 가진 영국은 온두라스와 괜히 척지고 싶지 않았으므로 필리버스터를 토벌하고 워커를 사로잡았다. 워커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무사히 미국으로 송환될 것으로 믿었지만, 영국은 그를 미국으로 송환하는 대신 온두라스 정부에 넘겨버렸다. 어차피 이때 미국은 남북 전쟁 직전이어서 워커에게 관심을 기울여 줄 처지도 아니었다.워커는 1860년 9월 12일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그는 온두라스인들의 거센 야유와 멸시를 받으며 끌려가면서도 표정 한번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3. 평가
몽골에서 온갖 학살과 기행을 일삼은 것으로 알려진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에 빗대어진 적도 있지만, 운게른의 악행이라고 알려진 이야기들의 상당수가 과장이나 날조였던데다, 당대에도 현지인인 몽골인들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고 당시 몽골의 군주였던 복드 칸을 우대하는 등으로 인해 현대에도 호불호가 다소 갈리는 수준이라, 워커와는 명백하게 차이가 있다.비록 몽골인들은 '가급적' 안 건드리고 자기가 데려온 백군 소속의 러시아인 부하들이나 적군 포로들만 죽였다고는 하나, 어쨌든 가뜩이나 인구가 모자란 몽골에서 300명이나 학살한 전적도 있는 데다, 엄연히 외국인이 자국을 불법 점령해서 통치한 것이라서 몽골인들 사이에서도 비판 여론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 사람의 몽골 점령이 외몽골 출병으로 인해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국에 종속되어 강제합병당할 처지였던 자국이 독립국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4], 그와중에 자국의 문화와 역사, 종교를 적극적으로 존중하고 보호해준 것도 있어서,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여론도 매우 많다.
하지만, 윌리엄 워커는 가는 곳마다 침략과 더불어 약탈같은 쓰레기짓의 연속을 벌이는 통에 악평만 가득하다. 가톨릭이 대세인 중앙아메리카에서 개신교 신앙을 강제하였으며, 현지인들의 지지를 받는 현지의 유력 정치인이나 종교인들에 대한 우대는 엿바꿔 먹었으니, 긍정적인 평가가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한국어 위키백과의 윌리엄 워커 문서에서는 미국의 해적(...)이라는 분류도 달려있는데, 그의 용병단이 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노략질했으니 빼도박도 못할 해적 맞다.
4. 기타
니카라과의 사실상 지배자에서 몰락하기까지 1~2년이 채 걸리지 않았으며,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죽었다. 이 때 미국은 외면했다. 당시 미국은 남부가 독립한다고 시비를 걸던 때라서, 제임스 뷰캐넌 정권으로선 자국 문제도 급한 와중에 니카라과 일을 신경쓸 수 없었다.할리우드에서 워커의 일생을 다룬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에드 해리스 주연의 영화 워커(한국 비디오 및 DVD제목은 불사신 워커/Walker.1987)이다. 하지만 흥행이나 평은 그리 좋지 않았는데 리포 맨, 시드와 낸시로 호평을 받던 알렉스 콕스 감독의 범작 내지는 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후 워커가 쫓겨나고 니카라과에선 결과적으로 보수주의자가 집권했다. 니카라과 점령 당시 워커는 의외로 중도좌파 리버럴 성향의 니카라과 자유당 소속이였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정치 성향에 따라서 그리로 붙은 게 아니라 용병으로서 고용되어서 간 것이므로, 그의 실제 정치적 입장이 자유주의라서 간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다시 말하지만, 이 인간은 노예 제도를 지지하고 국수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에 찌들은 보수주의자다.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2019년 베네수엘라 정치 위기에 빗대어 그의 일생을 다룬 바 있다. #
1844년~1855년 정확하겐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를 점령하기 직전까지의 윌리엄 워커의 생애를 모티브로 한 번!(Burn!)(1969)이란 영화가 있다. 말론 브란도가 주연을 맡았고 엔니오 모리코네가 음악을 맡았다.[5][6]
[1]
미국 이전에도 용병 역사가 길다보니 흔히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군에도 백인, 색목인, 흑인까지도 용병으로 참전했으며 태국이나 버마에도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용병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는 스파이도 있어 아시아 각지 정보를 보고하기도 했다.
[2]
현지인 병력까지 모두 합쳐도 330명밖에 안되는 군대가 나라를 제패한 이유는,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처럼 워커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로 분열된 니카라과의 상황을 잘 활용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니카라과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소국들의 인구가 워낙 적었기 때문이다.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 시절인 1823년 니카라과 인구는 17만 4,213명이었고 1865년 인구도 25만 명밖에 안 되었으며 1860년대 마나과 인구도 1만 명 밖에 안 되었다. 이 정도면 상황에 따라 330명도 무시 못 할 전력이 된다. 심지어 니카라과 옆나라 코스타리카는 1823년 인구가 6만, 1856년 인구가 11만 명으로 추산된다.
[3]
리바스는 굴복하지 않고 워커를 반역자라고 공개 디스하는 패기를 보여줬다. 그는 서부에 남아있으면서 다른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의 지원군을 받았다.
[4]
절대로 농담이 아니다.
외몽골 출병으로 인해
몽골이 강제로
중화민국에 정복당하고
복드 칸이
쉬스창의 사진에
절까지 올리면서 중국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한 데다, 전쟁 배상금을 명목으로 막대한 재화를 중국에 강탈당하기도 했다. 이 상태로 21세기 현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면 제2의
티베트 꼴이 났을 판인데, 난데없이 나타난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몽골 점령으로 인해 중화민국군이 몽골에서 쫓겨나면서 상황이 180도로 뒤바뀐 것이다.
[5]
다만 영화 속 그의 행적은 실제 역사와 많이 다르다고 한다.
[6]
일단 배경이
케이마다 그란지 섬에서 이름을 따온 듯한 포르투갈령(
領) Queimada란 가상의 섬으로 바뀌었고 윌리엄 워커가 영국인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