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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2 18:37:42

세르 드 퀸시

성명 세르 드 퀸시
Saer de Quincy
생몰년도 1165년 또는 1170년 ~ 1219년 11월 3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셔
사망지 이집트 다미에타
아버지 로버트 드 퀸시
어머니 오라빌리스
아내 마거릿 드 보몬트
자녀 로버트, 로저, 게비사, 로버트, 하와이즈
직위 초대 윈체스터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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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귀족, 군인. 제1차 남작 전쟁에서 존 왕에 대항하는 귀족 반란군의 일원이었다.

2. 생애

그의 가문은 잉글랜드 왕국 노샘프턴셔 출신의 기사 집안이었다. 조부 세르 드 퀸시는 롱 버클리 일대에 토지를 보유했고,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와 헌팅던의 마틸다의 딸인 마틸다 드 생리스와 결혼하여 영지를 확장하고 스코틀랜드 왕가와 가까운 친척이 되었다. 세르 드 퀸시의 장남 세르는 헨리 2세의 측근이었지만 1173년 헨리 2세의 아들들이 헨리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담한 전적이 있었다. 1192년 세르가 자녀를 두지 못하고 사망한 뒤, 잉글랜드 6개 주에 이르는 퀸시 가문의 영지는 그의 동생인 로버트 드 퀸시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1165년 또는 1170년경에 로버트 드 퀸시와 스코틀랜드 파이프주 남동부 해안가 도시 루차스의 여성 영주인 오라빌리스의 외동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1180년대 ~ 1190년대에 여러 스코틀랜드 수도원에 기부했는데, 특히 에든버러 인근의 뉴배틀 수도원에 서약한 부모의 기부를 확인했으며, 던펌린과 캠버스켄넷 수도원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다. 1190년경, 그는 제4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몬트의 누이인 마거릿 드 보몬트와 결혼했으며, 아버지가 1190년대 중반에 사망한 뒤 영지를 물려받았다.

1197~1198년 리처드 1세의 지휘 아래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싸웠고, 1199년 4월 리처드 1세가 사망한 뒤 존 왕자를 이글랜드 국왕으로 받들었다. 1200년 10월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방문할 때 국경지대에서 링컨까지 동행했으며, 잉글랜드 왕국 내 영지에 대해 존 왕에게 봉신으로서 충성을 서약하는 일리엄 1세의 서약식에 참석했다. 1202년 노르망디에서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1세 드 브르타뉴의 군대에 맞서 싸우는 존 왕의 기사로 활약했으며, 존 왕은 그의 공을 인정해 1202년 ~ 1203년에 유대인 대금업자에게 빌린 돈을 탕감했다.

1203년 봄, 로버트 피츠월터와 함께 외르강 어귀의 르 보드뢰유 성의 공동 성주가 되었다. 그러나 필리프 2세의 침공을 받자, 요새화되고 보급품도 잘 갖춰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프 2세에게 투항했다. 필리프 2세는 그들을 콩피에뉴 감옥에 가뒀다가 5천 마르크에 달하는 막대한 벌금을 받아낸 뒤 풀어줬다. 이에 대해 당대 연대기들은 보드뢰유의 항복은 로버트 피츠월터와 세르가 비겁했기 때문이라고 맹비난했다.

1204년, 처남인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몬트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보몬트 가문의 광대한 영지의 상속권은 세르의 아내이자 로버트 드 보몬트의 누이인 마거릿과 몽포르 영주인 시몽 3세 드 몽포르[1]의 아내이며 역시 로버트의 누이인 아미시아에게 있었다. 세르는 상속 재산이 최종 분할될 때까지 보몬트 영지를 관리했다. 1207년, 레스터 백작령은 롭러트의 처남들에게 균등하게 분할되었다. 아미시아의 나이가 좀더 많았기에, 시몽 3세 드 몽포르가 새로운 레스터 백작이자 수석 청지기로 발탁되었지만, 존 왕은 세르에게 윈체스터 백작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수여했다.

1209년 여름, 세르는 스코틀랜드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1210년 존 왕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1211년 스코틀랜드 왕실이 로스에서 거스레드 맥윌리엄의 반란을 진압하는 걸 돕기 위해 파견된 잉글랜드군의 지휘를 맡았다. 1211년에서 1214년 사이에 잉글랜드 대법원장을 맡았고, 1212년 존 왕의 조카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에게 파견되어 잉글랜드와 신성 로마 제국의 반 필리프 2세 연합을 성사했다. 1213년 5월 5일 존 왕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잉글랜드 왕국 전체를 봉헌하겠다는 서약서의 증인이 되었으며, 1215년 3월 4일 존 왕과 함께 십자군에 가담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존 왕이 프랑스 원정을 치르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뜯어가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레스터셔의 마운트소렐 성 등 일부 영지가 자신이 아닌 몽포르 가문에 넘어간 걸 부당하다고 여겼기에, 존 왕에 대항하는 귀족들의 반란에 가담하기로 마음먹었다. 1215년 4월 초, 그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2세에게 잉글랜드 문제에 개입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마그나 카르타가 체결된 뒤 계약 조항의 시행을 감독하는 위원회에 소속된 25인 중 한 명이었다.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를 거부하면서 1215년 10월 제1차 남작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초대 헤리퍼드 백작 헨리 드 보훈과 함께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왕자 루이에게 잉글랜드 왕위에 올라달라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세르는 루이 왕자의 잉글랜드 원정에 가담했다. 1216년 10월 존 왕이 사망하고 9세의 아들 헨리 3세가 왕위에 오른 뒤 많은 귀족이 헨리 3세 편에 섰지만, 그는 루이의 편에 머물렀다. 하지만 1217년 5월 20일 링컨 전투에서 윌리엄 마셜이 이끄는 왕실군에 패배해 생포되었고, 루이 왕자가 그해 9월에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하고 철수한 뒤 헨리 3세를 왕으로 인정하고 풀려났다.

1219년 봄, 제5차 십자군 원정에 가담해 아들 로저, 로버트 피츠월터, 제3대 아룬델 백작 윌리엄 도비니와 함께 잉글랜드에서 이집트로 항해했다. 1219년 11월 3일 다미에타 공방전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본국으로 돌아가 에이커에 묻혔고, 내장은 잉글랜드의 가렌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헨리 3세에 대적한 시몽 드 몽포르의 조부